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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S그룹 부회장 권제하와 그의 수석 비서 한이설이 비밀 결혼을 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이 맺었던 비밀 결혼 계약과 근무 계약이 만료되는 날이기도 했다.
권제하는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내려다봤다.
10분 전, 송유진 변호사가 직원을 보내 서류 봉투 하나를 전달했다.
한이설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도 없이 변호사를 통해 물건만 보내왔다.
봉투 안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는 데 필요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3년 동안 목에 걸었던 S그룹 부회장실 수석 비서 사원증과 사직서, 직접 서명하고 지장까지 찍은 협의이혼 관련 서류.
마지막으로, 권씨 일가의 안주인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200억 원 상당의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벨벳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반지 안쪽에는 오래전에 말라 검붉게 변한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권제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서류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았다.
한이설.
지난 3년간 한이설은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는 순종적인 그림자였다.
반년 전 유세아가 미국에서 돌아오고 두 집안의 3000억 원대 정략결혼설이 재계에 퍼졌을 때도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집에서 조용히 지내며 해외 인수합병 업무까지 도왔다.
권제하는 그런 그녀가 이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설마 자신을 떠날 리 없었다.
그런데 계약이 끝나자마자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변호사를 보내 사원증과 사직서, 이혼 서류에 결혼반지까지 돌려보내다니!
그는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담긴 케이스를 탁 닫았다.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제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수작이겠지.
한진국은 아직 구치소 지정 병원에 머물며 재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음파 연구실도 이제 막 인계 절차를 마친 참이었다.
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발붙이기도 어려운 여자가 대체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겠는가?
사흘도 지나지 않아 제 발로 돌아와 고개를 숙일 게 뻔했다.
바로 그때였다.
똑, 똑.
부회장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침착한 수석 보좌관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권제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며칠이면 제 발로 돌아올 테니 신경 쓰지 마.”
“대표님.”
보좌관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청담동 집에도, 예전 저택에도 없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도 확인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권제하의 손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여권도 신분증도 전부 내 서재 금고에 있는데. 대체 어떻게 나갔다는 거지?”
“사모님은 두 달 전부터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 측과 접촉해 특별 연구원 초청 절차를 밟았습니다. 기존 여권은 분실 신고 후 새로 발급받았고, 어젯밤 11시 40분 유럽행 항공편으로 출국했습니다. 현재 정확한 행선지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부회장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권제하가 쥔 만년필에 힘이 들어갔다.
두 달 전에 이미 출국 준비를 마쳤다고?
그렇다면 지난 두 달 동안 자신을 도와 인수합병 업무를 마무리하고, 밤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하면서도 줄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건가!
권제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가 더 남았어? 있으면 빨리 말해.”
보좌관은 결국 의료 기록 복구 보고서를 이혼 서류 옆에 내려놓았다.
“대표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모님이 서울성모병원에 다니던 이유를 조사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병원 기록에는 위궤양 진료 기록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특진센터 윤재이 센터장이 별도로 보관해 둔 자료를 복구했습니다.”
보좌관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모님은…… 임신하셨습니다. 출국 당시 이미 8주 차였습니다.”
“……”
부회장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권제하의 시선이 임신 검사 결과지에 꽂혔다. 평생 어떤 위기에도 흔들린 적 없던 그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과지에 적힌 검사 날짜는 2주 전이었다. 한이설이 서초동에서 노바 바이오 관련 공증을 마친 뒤 윤재이를 만나러 성모병원에 갔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밤 청담동 집으로 돌아온 그녀를 그는 현관문에 몰아세웠다. 손목을 움켜쥔 채 옛 애인을 만나고 온 거냐고 추궁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는 그저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위장약을 받으러 갔을 뿐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날 이미 그녀의 배 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이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숨긴 채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아이까지 데리고 자신에게서 도망친 것이다.
권제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한이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콰직!
그가 손에 쥔 순금 만년필이 강한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검은 잉크가 튀고, 펜촉에 찔린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피가 하얀 이혼 서류와 임신 검사 결과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권제하는 피로 물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낮고 서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했어…… 한이설. 정말 대단해.”
“내 아이를 임신하고도 도망을 가?”
다음 순간 권제하는 임신 검사 결과지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트를 낚아채며 보좌관을 향해 명령했다.
“유럽에 있는 그룹의 모든 비밀 연락망을 가동해. 전용기도 준비하고!”
“취리히에 숨었든 세상 끝에 있든 상관없어. 유럽 전역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 단, 한 치의 상처도 없이 데려와!”
다음 날 오전 8시.전날 밤 권제하가 결혼 3년 차 아내를 공개한 소식은 주요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졌다.‘S그룹 권제하 부회장, 창립 50주년 포럼서 아내 공개! 200억 원짜리 핑크 다이아몬드의 주인은?’기사에는 무대 위에서 한이설의 손을 잡은 권제하와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10캐럿 핑크 다이아몬드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같은 시각, 권제하가 보낸 경호원들이 한이설의 짐을 청담동 펜트하우스로 옮겼다. 이설은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전용 차량을 타고 S그룹 본사로 향했다.그런데 본사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소란이 눈에 들어왔다.수십 명의 기자와 파파라치가 로비 앞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재벌가 사모님 한이설, 배은망덕한 딸! 200억 다이아몬드를 끼고 호의호식하면서 중병에 걸린 아버지와 동생은 외면!]현수막 아래에는 금붙이를 잔뜩 걸친 중년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다.“기자 양반들, 제발 우리 집안 사정 좀 들어 보세요! 남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딸이라는 애는 재벌가에 시집가서 3년 동안 사모님 노릇만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 안중에도 없고, 친정에는 돈 한 푼 보내지 않았다니까요!”한이설의 계모 김미란이었다.그 옆에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금목걸이를 걸친 스물네 살 청년이 앉아 있었다. 김미란이 데리고 온 아들 한준우였다.준우는 전날 뉴스에서 이설의 손에 끼워진 핑크 다이아몬드를 본 뒤 밤새 어머니와 일을 꾸몄다. 불법 도박장에서 빌린 사채 8억 원을 갚을 길이 막막하던 참이었다.그에게 누나의 200억 원짜리 반지는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었다.“왔다! 한이설 나왔다!”준우가 이설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짓이겨 끄고 출입 게이트 앞을 가로막았다.“어이쿠, 우리 누나 오셨네! 재벌가 사모님 되더니 이제야 얼굴을 비추시는구만?”김미란도 서둘러 다가와 이설의 바짓단을 붙잡으려 했다.“이설아! 네 아버지가 병원에서
새벽 1시 30분.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권제하는 검은 셔츠 차림으로 거실에 들어섰다.밤늦은 시간인데도 한이설은 잠들지 않고 소파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제하는 곧장 소파 앞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한이설, 설명해 봐. 오늘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내 아내라고 공식 발표했는데, 돌아서자마자 반지를 빼놓고 호텔을 나와? 무슨 뜻이야?”이설은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두 묶음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한쪽은 수석 비서 업무 인수인계 서류, 다른 한쪽은 3년 전 선대 회장 입회하에 체결한 비밀 결혼 및 직무 수행 계약서였다.“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절차를 밟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계약도 이제 반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유럽 의료 인수합병에 필요한 연구소 기술 사용권도 확보했고, 오늘 포럼에서 부회장님과 부부 행세까지 했으니 외부에 보여 줄 건 다 보여 줬다고 생각합니다.”이설의 시선이 반지에 머물렀다.“더는 이런 보여 주기식 행동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반지도 원래 제 것이 아니니 돌려드리는 게 맞고요.”권제하는 눈앞의 계약서를 내려다봤다.그녀가 오늘 밤 전략실 앞에서 자신과 당숙의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식 석상에서 아내로 인정했고, 권씨 가문의 상징인 가보까지 손에 끼워 주었다.그런데 이설은 아무런 감동도 없는 얼굴로 계약 종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더는 필요 없다고?”제하가 짧게 웃더니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이 이설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한이설, 똑똑히 들어. 이 결혼이 언제 시작되고 끝날지는 처음부터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어. 내 허락 없이는 반년이 지나든 3년이 지나든 이혼 못 해.”턱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설은 그의
새벽 12시 30분.권제하는 당숙 권태성을 돌려보내고 전략실을 나섰다.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에 미간을 누르며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복도 한쪽 장식대에는 식어 버린 홍삼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객실 문을 열자 어둠과 적막이 그를 맞았다.평소라면 이설이 늦게 돌아오는 그를 위해 작은 조명 하나쯤은 켜 두었을 시간이었다.게다가 오늘은 달랐다.그는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수많은 사람 앞에 이설을 자신의 아내라고 선언했다. 권씨 가문의 안주인에게만 허락된 200억 원짜리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도 직접 끼워 주었다.그녀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한이설?”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욕실과 드레스룸까지 확인했지만 이설의 흔적은 없었다. 오늘 입었던 드레스와 주얼리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제하는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그 순간,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열린 검은색 벨벳 케이스 안에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놓여 있었다.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였다.제하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백금 밴드 안쪽과 다이아몬드 받침대에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그는 낮에 이설의 오른손등에 드레싱이 감겨 있던 걸 떠올렸다. 반지를 빼다가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반지를 빼는 데 그만큼 애를 썼다는 뜻이었다.제하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지난 3년간 이설은 한 번도 그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회사에서도 차갑게 굴더니, 사람들 앞에서 아내로 인정받고도 반지를 빼놓고 떠났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이설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통화가 연결됐다.“한이설, 너 지금 어디야?”제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누가 마음대로 호텔을 나가도 된다고 했어? 반지는 왜 빼놓은 거야? 무슨 뜻이지?”잠시 침묵이 흘렀다.이내 이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호텔 방이 답답해서 몸이 좀 안 좋았어요. 먼저 한강 아파트로 돌아와
순간, 연회장이 술렁였다.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고, 하객들 사이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이설은 그 자리에 선 채 제하를 바라봤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자신을 잡은 그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오랫동안 자신을 외면하고, 다른 여자를 위해 자신의 노력을 빼앗고, 상처를 입어도 모른 척했던 남자.그런 그가 지금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아내라고 선언했다.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만찬이 끝나기도 전에 서울의 경제계와 사교계는 발칵 뒤집혔다.‘S그룹 권제하 부회장,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결혼 3년 차 아내 최초 공개! 200억 원 상당의 핑크 다이아몬드로 아내의 정체 밝혀!’기사는 순식간에 포털 사이트와 SNS를 장악했다.박영숙 이사장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그룹 원로들까지 그날 밤 권제하에게 해명을 요구했다.만찬이 끝나자 제하는 이설을 데리고 호텔 최고층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방에 들어선 그는 보타이를 풀며 이설을 돌아봤다.“오늘 오래 서 있었잖아. 먼저 씻고 쉬어. 아까 술도 두 잔이나 마셨으니 속이 불편할 거야. 북엇국도 준비해 뒀어.”“네.”“나는 복도 끝 전략실에서 당숙 어른들과 인수합병 문제를 논의하고 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이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왼손 약지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봤다.밤 11시 30분쯤, 직원이 북엇국과 따뜻한 홍삼차를 가져왔다. 홍삼차는 제하가 마실 것이었다.이설은 잠시 망설이다 쟁반을 들었다.그에게 직접 전해 주고 싶었다. 오늘 무대에서 자신을 아내라고 선언한 이유를, 짧게라도 듣고 싶었다.그녀는 복도 끝 전략실로 향했다.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좁은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노크하려던 순간,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제하야, 솔직히 말해 봐라. 오늘 그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까지 한이설 손에 끼워 준 게 설마 진심이냐? 한진국 그 범죄자의 딸에게 마음이라도
다음 날 오전, 한이설의 아파트.거실 한쪽에는 전날 부티크에서 가져온 샴페인 골드 드레스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이설은 포장조차 뜯지 않았다.오전 10시, 초인종이 울렸다.권제하의 수석 보좌관이 스타일리스트 두 명과 함께 찾아왔다. 손에는 드레스가 든 상자와 흉터 연고가 들려 있었다.“한 비서님, 부회장님께서 어젯밤 유럽 계좌 문제를 처리하신 뒤 파리에서 급히 공수하신 드레스입니다. 오늘 저녁 포럼 만찬에 입으라고 하셨습니다.”이설은 상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안으로 들였다.***저녁 6시.이설은 은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아파트를 나섰다.오른손등의 상처에는 피부색과 비슷한 의료용 드레싱이 붙어 있었다.아파트 앞에는 마이바흐가 대기하고 있었다.뒷좌석에 오르자 권제하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이설에게 잠시 머물렀다.차가 호텔을 향해 출발한 뒤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먼저 입을 연 것은 제하였다.“어제는 미안해.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 급하게 나가느라 계산을 맡기는 걸 깜빡했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어제 널 도와준 남자 말이야. 심태주라고, 월가에서 돌아온 놈이야. 수단이 좋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 가까이하지 마. 가능하면 접촉도 피하고.”어젯밤 보좌관에게 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뒤였다.심태주가 이설의 드레스까지 사 줬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이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예의 바른 대답이었지만, 그뿐이었다.제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감싸 쥐었다.이설은 손을 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호텔에 도착했다.***밤 8시.신라호텔 대연회장은 창립 5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한 재계 인사와 언론사 기자들로 붐볐다.박영숙은 유세아와 함께 원로 이사진에게 둘러싸여 있었다.제하가 입장하자 그녀는 곧장 세아의 팔을 끼고 다가왔다.“제하야, 이제 왔구나. 아까
서울성모병원 VIP 복도.권제하의 시선은 한이설의 허리에 얹힌 윤재이의 손에 고정돼 있었다. 표정은 싸늘했다.이설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재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선생님, 감사합니다. 약도 받았으니 먼저 가 볼게요.”그녀는 곧장 제하와 일행에게 사무적으로 인사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30분 뒤, 서울성모병원 지하 VIP 주차장.수석 보좌관의 연락을 받고 나온 이설은 검은색 마이바흐 뒷좌석에 올라탔다.차 안에는 짙은 시더우드 향이 감돌았다. 권제하는 재킷 단추를 풀고 좌석에 기대어 있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윤재이가 이설의 허리를 감싸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역시 유세아와 함께 있었으니, 그녀에게 무슨 관계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손은 어떻게 됐어?”“소독하고 다시 붕대를 감았습니다. 약만 제때 바르면 된다고 했어요.”이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제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청담동 부티크로 가.”“부회장님, 지금은 퇴근 시간이…….”“내일 저녁 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아시아·태평양 의료 전략 포럼 만찬이 있어. 수석 비서인 너도 참석해야 해.”그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드레스부터 고르자.”***20분 뒤, 두 사람은 청담동의 한 고급 부티크에 도착했다.2층 VIP 살롱에는 뜻밖에도 유세아가 먼저 와 있었다. 새하얀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 주변으로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매장 점장인 박 씨는 유씨 집안과 친척 관계였다. 제하를 발견하자 곧장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권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세아 아가씨도 내일 만찬에 입으실 드레스를 고르고 계셨습니다.”“제하 오빠, 왔어요?”세아가 반갑게 다가왔다. 그러다 이설을 발견하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이설 언니도 드레스 고르러 왔어요?”제하는 대꾸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매장에 진열된 드레스들을 가리켰다.“저쪽에 있는 드레스 전부 한 비서에게 가져다줘. 입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