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이현은 풀어놓은 단추를 다시 잠갔다. 조금 전까지 데워진 물이 반가웠는데, 혼자 남고 나니 욕조의 가장자리부터 높아 보였다. 남자라고 말한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그는 가림막을 당겼다. 젖은 옷을 벗고 수건을 어깨에 걸친 뒤, 성한 발부터 조심스럽게 옮겼다. 다친 발목에 무게가 실리자 통증이 치밀었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나가는 무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이현은 욕조를 짚었다. 물 묻은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쿵. 문이 열렸다. “이현 씨.” 발소리가 다가오다 가림막 앞에서 멈췄다. “넘어졌어요?” “아니요. 바가지가…….” 바가지는 선반 위에 있었다. 이현은 거짓말을 끝내지 못했다. 욕조 모서리에 부딪힌 무릎이 아렸다. 무진은 가림막을 열지 않았다. “들어가도 됩니까.” “잠깐만요.” 큰 수건을 몸에 두르고 대답했다. 그제야 천이 옆으로 밀렸다. 무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이현을 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발부터 봅시다.” “혼자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부르라고 했잖아요.” 말이 날카로웠다. 이현이 고개를 숙이자 무진의 손도 멈췄다. 빗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내가 급하게 나갔습니다.” 무진은 낮게 덧붙였다. “그건 미안해요.” 그는 작은 의자를 욕조 옆에 붙이고 젖은 바닥을 닦았다. 이현이 일어날 수 있도록 팔을 내밀었다. 이현은 그 팔을 잡았다. 제 손으로는 절반도 감싸지지 않았다. “제가 남자라서 불편해요?” 팔 아래의 근육이 굳었다. 무진은 이현을 의자에 앉힌 뒤 수건을 다시 여며주었다. 손끝이 어깨에 잠깐 닿았다. “다친 사람 혼자 두면 안 됐는데.” 질문과 다른 대답이었다.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자신에게 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집에서도 불편한 질문에는 늘 다른 말이 돌아왔다. 무진은 욕조 안에 낮은 받침을 놓았다. 다친 발을 물 밖에 올릴 수 있게 위치를 바꾼 뒤, 이현이 안전하게 앉는 것까지 도왔다. 물에 몸을 담그자 굳었던 등이 풀렸다. 무진은 등을 돌렸다. “끝나면 불러요. 이번에는.” 이현은 그 넓은 등을 보다가 말했다. “멀리 가지 마세요.” “문 앞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혼자 남은 무진은 처마 기둥에 이마를 댔다. 찬 나무가 피부를 눌렀다. 방 안에서 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듣지 않으려 할수록 선명해졌다. 그는 마당에 놓인 장작을 세었다. 아무 소용 없었다. 조금 전 손에 남은 가벼운 무게가 지워지지 않았다. 여자가 아니었다. 이제 알았으니 달라져야 했다. 예전의 자신과는 다르다고, 십 년이면 충분히 달라졌다고 생각해왔다. 안쪽에서 작은 기침이 났다. 무진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무진 씨.” 그는 문을 밀었다. 이현은 이미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깨선이 팔 아래까지 내려오고, 소매가 손끝을 덮었다. 바지 밑단은 여러 번 접혀 있었다. 이현이 양팔을 조금 들었다. “이게 제일 작은 거예요?” 무진은 대답 대신 바짓단을 한 번 더 접었다. “걸을 때 밟습니다.” “옷 안에서 길 잃겠어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무진은 입 안쪽을 깨물었다. 그러자 이현도 웃음을 거뒀다. 그 표정을 본 뒤에야 자신이 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그는 이현을 침상까지 부축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마른 수건을 건네자 이현은 두 손으로 받아 머리 위에 올렸다. 팔을 들다가 다친 어깨 때문에 짧게 숨을 삼켰다. 무진이 수건 끝을 잡았다. “해도 돼요?” 이현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머리카락을 비비지 않고 수건으로 눌렀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이현의 고개가 조금씩 기울었다. 방 안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만 났다. 한참 뒤 이현이 물었다. “계속 그렇게 부를 거예요?” 무진의 손이 멎었다. “다친 사람이라고.” 수건 아래에서 이현이 그를 올려다봤다. “이름 알려드렸는데.” 무진은 수건을 내려놓았다. 말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피하고 있는 건 이름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끝내 입을 열었다. “이현 씨.” “네.” 대답이 너무 빨랐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해서, 무진은 다음 말을 잊었다.떠날 준비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이현의 물건은 젖었다 마른 옷 한 벌과 휴대전화, 빈 약통뿐이었다. 무진이 신발의 흙을 털어 문 옆에 놓자 정리가 끝났다.식탁에는 여전히 컵이 두 개였다.이현은 그중 하나를 들어 씻었다. 할 일이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컵은 금세 깨끗해졌다.“놔둬요.”무진이 손을 내밀었다.“이것까지 해주면 저는 뭐 해요?”대답이 없었다.이현은 컵을 닦고 찬장에 넣었다. 손이 멈췄다. 원래 어디에 있던 것인지 몰랐다. 자신이 온 뒤로는 늘 식탁 위에 있었다.무진이 옆 칸을 가리켰다.***저녁에는 밥을 조금 남겼다.무진은 이현의 이마를 살폈다.“다시 안 좋아요?”“배가 안 고파서요.”그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이현은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한 입을 더 먹자 무진이 물을 밀어줬다.아무 말 없이 받았다.처음에는 그 큰 몸과 굳은 얼굴이 무서웠다.이제는 물컵이 식탁 어느 쪽으로 놓일지도 알았다. 뜨거운 것은 오른쪽에 두지 않았다. 이현의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였다.이현
전화가 울린 것은 엿새째 아침이었다.무진은 능선의 바위 위에서 멈췄다. 전날 잠깐 잡혔다 끊긴 신호가 오늘은 한 칸 남아 있었다.화면에 같은 이름이 떴다.서도윤.그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숨 가쁜 목소리가 들렸다.“이현 전화 맞습니까?”“맞습니다. 지금 같이—”“이현은요? 이현 어디 있습니까?”무진은 나무에 가린 오두막 쪽을 봤다.“살아 있습니다. 발목을 다쳐서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부딪혔다.누군가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이 다시 물었다.“의식은 있습니까. 숨은요?”“말하고 밥도 먹습니다. 기침은 하는데.”“위치부터 알려주세요.”무진은 지도의 좌표를 읽었다. 한 번, 다시 한 번. 도윤은 숫자를 복창했다. 이어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아 무진의 설명을 들었다.구조대였다.그들은 무너진 길과 계곡 상태를 확인했다. 반대편 접근로를 검토하겠다며 전화를 켜두라고 했다.&l
“스물네 살이에요.”무진은 찻잔을 내려놨다.“왜 갑자기.”“저한테 자꾸 애처럼 굴어서요.”이현은 식탁 아래에서 다리를 뻗었다. 부기가 빠져 어제보다 발목이 덜 뻣뻣했다. 오늘 아침에는 벽을 짚고 몇 걸음을 혼자 걸었다.“애한테 이렇게 쓰디쓴 차를 먹입니까.”“그럼 몇 살인데요?”“스물여덟.”“겨우 네 살 많네요.”무진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현은 웃으며 컵을 들었다. 꿀이 더 들어 있었다.닷새째였다.공책에는 이현의 이름이 이틀 연속 적혔다. 창가에는 그가 고른 약초가 말라갔고, 의자에는 무진의 옷이 제 것처럼 걸려 있었다.잠깐 빌린 자리라고 생각하려 해도, 자꾸 자신의 흔적이 늘었다.점심 뒤 무진은 오두막 옆의 빈 터로 이현을 데려갔다.바람을 쐬기에는 충분했다. 낡은 나무 벤치에 앉자 햇빛이 무릎 위로 쏟아졌다.이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렇게 따뜻한데 밤에는 춥네요.”“겨울에는 더합니다.”“눈 많이 와요?”“문이 안 열릴 때도 있어요.”이현은 오두막을 돌아봤다. 지붕이 하얗게 덮이고 문 앞에 발자국이 나는 모습을 상상했다.그 안에서 무진은 혼자 밥을 먹을 것이다.난로에 장작을 넣고, 창문에 낀 성에를 손으로 닦고.“눈 오면 여기는 어떻게 돼요?”무진은 건너편 숲을 가리켰다.“저 나뭇가지가 다 내려앉습니다. 계곡 소리도 작아지고.”“예쁘겠네요.”“와서 보면 되죠.”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무진이 그를 봤다. 이현은 햇빛이 눈부신 척 웃었다.겨울이라는 말은 멀었다.고작 몇 달인데, 이곳에서 집까지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그는 무릎 위의 손을 펴고 접었다.“사진은 안 찍어요?”“찍어줄 사람도 없고.”“풍경이요.”무진이 헛기침을 했다. 이현은 이번에는 제대로 웃었다.“그럼 제가 찍어드릴게요. 나중에.”말을 뱉고 나서 손끝이 차가워졌다.나중에.생각보다 쉽게 나온 말이었다.돌아오는 길, 이현의 발이 돌에 걸렸다.무진은 바로 팔을 잡았다. 이현이 균형을 되찾았는데도 놓지 않았다. 오두막까지 남은 거
“저도 할래요.” 무진은 도끼를 내려놨다. 이현의 시선이 도끼로 갔다가, 그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거 말고요. 약초.” 나흘째 아침에도 계곡 아래의 길은 끊겨 있었다. 무진은 아침마다 능선에 다녀왔고, 오늘도 구조대를 만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손이 자꾸 이불 끝을 뜯었다. 무진은 바구니를 식탁에 놓았다. “잎이 찢어진 건 이쪽. 검게 변한 건 버리고.” “멀쩡한 건요?” “이쪽.” 바구니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이현은 첫 잎을 집었다. 뒷면이 은빛인, 차에서 봤던 잎이었다. 줄기는 보랏빛이 돌았다. 무진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잎을 치웠다. “이건 섞으면 안 됩니다.” “똑같이 생겼는데요.” “뒤집으면 달라요.” 이현은 잎을 뒤집고 두 장을 비교했다. 이제야 차이가 보였다. “사람도 뒤집어보면 잘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무진은 고개를 들었다. “왜요.” “겉만 보고 자꾸 틀리니까요.” 말하고 나서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무진도 아무 말이 없었다. 목욕하던 날의 일이 식탁 사이로 돌아왔다. 괜한 말을 했다 싶었을 때, 무진이 잎 하나를 내려놨다. “그건 내가 틀렸습니다.” 이현은 그를 봤다. 무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물어볼게요.”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번에는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무진이 잎을 다시 확인해 천 위에 펼쳤다. 무진은 그늘과 바람이 중요하다며 선반의 위치를 바꿨다. 이현은 공책에 날짜를 적었다. “날씨는 맑음?” “오후에 안개 끼면 그것도 적어요.” “제 이름도 써도 돼요?” 무진의 손이 멎었다. “왜.” “제가 했다는 표시요.” 이현은 허락을 기다렸다. 무진은 잠깐 공책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취자는 무진. 선별은 무진, 이현. 자신의 이름이 그의 이름 옆에 놓였다. 이현은 펜 끝을 한 번 더 눌렀다. 오후에는 무진이 지붕의 빗물받이를 고쳤다. 이현은 처마 아래서 나무 조각을
아침에 눈을 뜬 이현은 먼저 손을 봤다. 비어 있었다. 의자에는 무진의 겉옷만 남았다. 지난밤의 기억이 꿈처럼 희미했다. 그러나 이마 위에는 미지근해진 천이 있었다. 문이 열렸다. 무진이 들어오자 이현은 괜히 손을 이불 속에 넣었다. “좀 어때요?” “괜찮아요.” “일어나면 어지럽고?” 이현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평소보다 가슴이 덜 답답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곧장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낯설어서 한 번 더 해봤다. 무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식탁에 그릇을 내려놨다. “죽 말고 밥도 있습니까?”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있죠.” “그걸 먹고 싶어요.” 무진은 아무 말 없이 찬장을 열었다. 이번에는 웃는 입가를 숨기지 못했다. *** 비가 멎은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무진은 지도를 펼쳤다. 종이 끝이 닳아 있었고, 군데군데 연필로 선을 더 그어놓았다. “이 길은 무너졌고, 이쪽 다리는 물에 잠겼습니다.” 굵은 손가락이 계곡을 따라 움직였다. 이현은 자신이 걸었던 길을 찾았다. 도윤과 헤어진 지점은 기억났지만 그 뒤로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위쪽에서는 연락이 될까요?” “예전에는 됐는데. 확인해보죠.” 무진은 이현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배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전원을 껐다. “만약 연결되면 도윤에게요. 최근 통화에 있어요.” 무진의 손이 멈췄다. “가족입니까.” “친구요. 같이 왔어요.” “……걱정하겠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신발 끈을 당겼다. 단단히 묶인 매듭을 한 번 더 당겼다. “혼자 밖에 나가지 마요.” “처마까지만요.” “발이 아직—” “계속 누워 있으면 등이 먼저 굳겠어요.” 무진은 문턱과 마당을 번갈아 봤다. 결국 의자를 밖으로 옮기고 발을 올릴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이현은 웃음을 참았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붉은 끈이 보였다. 무진은 걸음을 멈췄다. 흙에 박힌 말뚝 옆으로 낯선 숫자가 적혀 있었다. 지난달 서린이 말했던 측량 표식이었다. 그
“독은 아니죠?” 짙은 갈색 물 위로 김이 올라왔다. 냄새만으로도 혀가 오그라들었다. 무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독이면 먼저 말을 하겠습니까.” 이현은 웃다가 기침했다. 무진은 이현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목욕 뒤로 기침이 잦아졌다. “평소에도 이럽니까.” “좀 오래됐어요.” “먹는 약은.” 이현은 젖은 겉옷 주머니에서 빈 약통을 꺼냈다. 무진은 이름이 적힌 면을 읽었지만 아는 약이 아니었다. “없으면 위험해요?” “빨리 집에 가는 게 좋기는 해요.” 더 캐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이건 여기서 차로 먹는 잎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말은 못 해요.” “왜 저만 먹어요?” 무진은 일어나 빈 컵을 가져왔다. 같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고 먼저 마셨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현도 한 모금을 삼켰다. 곧장 얼굴이 구겨졌다. “사람이 마시는 거 맞아요?” 무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이현은 그 얼굴을 쳐다봤다. 무진은 곧 평소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늦었다. “웃었죠?” “안 웃었습니다.” “거짓말 못하시네요.” 무진은 찬장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꿀이었다. 이현의 컵에 조금 넣고 저었다. “처음부터 넣어주시지.” “먼저 먹어보라면서요.” 그제야 이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잠깐 잦아들었다. 무진은 구조 신호를 확인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이현에게 물과 음식을 손 닿는 곳에 놓아주고, 난로 앞에 장작을 쌓았다. “해 지기 전에 옵니다.” “저 때문에 자꾸 위험한 데 가는 건 아니죠?” 무진은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봤다. “원래 다니는 길입니다.” 문이 닫힌 뒤 이현은 컵 바닥에 남은 잎 조각을 살폈다. 잎 뒷면이 은빛이었다. 옆에는 무진이 펼쳐놓은 낡은 공책이 있었다. 날짜와 날씨, 채취 장소 옆에 잎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이현은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다만 펼쳐진 면 아래쪽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봄잎과 가을잎을 섞지 말 것. 끝에는 누군가 다른 필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