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화. 겨울을 묻는 사람“스물네 살이에요.”무진은 찻잔을 내려놨다.“왜 갑자기.”“저한테 자꾸 애처럼 굴어서요.”이현은 식탁 아래에서 다리를 뻗었다. 부기가 빠져 어제보다 발목이 덜 뻣뻣했다. 오늘 아침에는 벽을 짚고 몇 걸음을 혼자 걸었다.“애한테 이렇게 쓰디쓴 차를 먹입니까.”“그럼 몇 살인데요?”“스물여덟.”“겨우 네 살 많네요.”무진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현은 웃으며 컵을 들었다. 꿀이 더 들어 있었다.닷새째였다.공책에는 이현의 이름이 이틀 연속 적혔다. 창가에는 그가 고른 약초가 말라갔고, 의자에는 무진의 옷이 제 것처럼 걸려 있었다.잠깐 빌린 자리라고 생각하려 해도, 자꾸 자신의 흔적이 늘었다.점심 뒤 무진은 오두막 옆의 빈 터로 이현을 데려갔다.바람을 쐬기에는 충분했다. 낡은 나무 벤치에 앉자 햇빛이 무릎 위로 쏟아졌다.이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렇게 따뜻한데 밤에는 춥네요.”“겨울에는 더합니다.”“눈 많이 와요?”“문이 안 열릴 때도 있어요.”이현은 오두막을 돌아봤다. 지붕이 하얗게 덮이고 문 앞에 발자국이 나는 모습을 상상했다.그 안에서 무진은 혼자 밥을 먹을 것이다.난로에 장작을 넣고, 창문에 낀 성에를 손으로 닦고.“눈 오면 여기는 어떻게 돼요?”무진은 건너편 숲을 가리켰다.“저 나뭇가지가 다 내려앉습니다. 계곡 소리도 작아지고.”“예쁘겠네요.”“와서 보면 되죠.”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무진이 그를 봤다. 이현은 햇빛이 눈부신 척 웃었다.겨울이라는 말은 멀었다.고작 몇 달인데, 이곳에서 집까지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그는 무릎 위의 손을 펴고 접었다.“사진은 안 찍어요?”“찍어줄 사람도 없고.”“풍경이요.”무진이 헛기침을 했다. 이현은 이번에는 제대로 웃었다.“그럼 제가 찍어드릴게요. 나중에.”말을 뱉고 나서 손끝이 차가워졌다.나중에.생각보다 쉽게 나온 말이었다.돌아오는 길, 이현의 발이 돌에 걸렸다.무진은 바로 팔을 잡았다. 이현이 균형을 되찾았는데도 놓지 않았다. 오두막까지 남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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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화. 손을 빌려드립니다“저도 할래요.” 무진은 도끼를 내려놨다. 이현의 시선이 도끼로 갔다가, 그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거 말고요. 약초.” 나흘째 아침에도 계곡 아래의 길은 끊겨 있었다. 무진은 아침마다 능선에 다녀왔고, 오늘도 구조대를 만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손이 자꾸 이불 끝을 뜯었다. 무진은 바구니를 식탁에 놓았다. “잎이 찢어진 건 이쪽. 검게 변한 건 버리고.” “멀쩡한 건요?” “이쪽.” 바구니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이현은 첫 잎을 집었다. 뒷면이 은빛인, 차에서 봤던 잎이었다. 줄기는 보랏빛이 돌았다. 무진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잎을 치웠다. “이건 섞으면 안 됩니다.” “똑같이 생겼는데요.” “뒤집으면 달라요.” 이현은 잎을 뒤집고 두 장을 비교했다. 이제야 차이가 보였다. “사람도 뒤집어보면 잘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무진은 고개를 들었다. “왜요.” “겉만 보고 자꾸 틀리니까요.” 말하고 나서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무진도 아무 말이 없었다. 목욕하던 날의 일이 식탁 사이로 돌아왔다. 괜한 말을 했다 싶었을 때, 무진이 잎 하나를 내려놨다. “그건 내가 틀렸습니다.” 이현은 그를 봤다. 무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물어볼게요.”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번에는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무진이 잎을 다시 확인해 천 위에 펼쳤다. 무진은 그늘과 바람이 중요하다며 선반의 위치를 바꿨다. 이현은 공책에 날짜를 적었다. “날씨는 맑음?” “오후에 안개 끼면 그것도 적어요.” “제 이름도 써도 돼요?” 무진의 손이 멎었다. “왜.” “제가 했다는 표시요.” 이현은 허락을 기다렸다. 무진은 잠깐 공책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취자는 무진. 선별은 무진, 이현. 자신의 이름이 그의 이름 옆에 놓였다. 이현은 펜 끝을 한 번 더 눌렀다. 오후에는 무진이 지붕의 빗물받이를 고쳤다. 이현은 처마 아래서 나무 조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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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화. 돌아올 자리아침에 눈을 뜬 이현은 먼저 손을 봤다. 비어 있었다. 의자에는 무진의 겉옷만 남았다. 지난밤의 기억이 꿈처럼 희미했다. 그러나 이마 위에는 미지근해진 천이 있었다. 문이 열렸다. 무진이 들어오자 이현은 괜히 손을 이불 속에 넣었다. “좀 어때요?” “괜찮아요.” “일어나면 어지럽고?” 이현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평소보다 가슴이 덜 답답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곧장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낯설어서 한 번 더 해봤다. 무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식탁에 그릇을 내려놨다. “죽 말고 밥도 있습니까?”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있죠.” “그걸 먹고 싶어요.” 무진은 아무 말 없이 찬장을 열었다. 이번에는 웃는 입가를 숨기지 못했다. *** 비가 멎은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무진은 지도를 펼쳤다. 종이 끝이 닳아 있었고, 군데군데 연필로 선을 더 그어놓았다. “이 길은 무너졌고, 이쪽 다리는 물에 잠겼습니다.” 굵은 손가락이 계곡을 따라 움직였다. 이현은 자신이 걸었던 길을 찾았다. 도윤과 헤어진 지점은 기억났지만 그 뒤로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위쪽에서는 연락이 될까요?” “예전에는 됐는데. 확인해보죠.” 무진은 이현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배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전원을 껐다. “만약 연결되면 도윤에게요. 최근 통화에 있어요.” 무진의 손이 멈췄다. “가족입니까.” “친구요. 같이 왔어요.” “……걱정하겠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신발 끈을 당겼다. 단단히 묶인 매듭을 한 번 더 당겼다. “혼자 밖에 나가지 마요.” “처마까지만요.” “발이 아직—” “계속 누워 있으면 등이 먼저 굳겠어요.” 무진은 문턱과 마당을 번갈아 봤다. 결국 의자를 밖으로 옮기고 발을 올릴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이현은 웃음을 참았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붉은 끈이 보였다. 무진은 걸음을 멈췄다. 흙에 박힌 말뚝 옆으로 낯선 숫자가 적혀 있었다. 지난달 서린이 말했던 측량 표식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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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화. 쓴맛을 나누는 법“독은 아니죠?” 짙은 갈색 물 위로 김이 올라왔다. 냄새만으로도 혀가 오그라들었다. 무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독이면 먼저 말을 하겠습니까.” 이현은 웃다가 기침했다. 무진은 이현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목욕 뒤로 기침이 잦아졌다. “평소에도 이럽니까.” “좀 오래됐어요.” “먹는 약은.” 이현은 젖은 겉옷 주머니에서 빈 약통을 꺼냈다. 무진은 이름이 적힌 면을 읽었지만 아는 약이 아니었다. “없으면 위험해요?” “빨리 집에 가는 게 좋기는 해요.” 더 캐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이건 여기서 차로 먹는 잎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말은 못 해요.” “왜 저만 먹어요?” 무진은 일어나 빈 컵을 가져왔다. 같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고 먼저 마셨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현도 한 모금을 삼켰다. 곧장 얼굴이 구겨졌다. “사람이 마시는 거 맞아요?” 무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이현은 그 얼굴을 쳐다봤다. 무진은 곧 평소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늦었다. “웃었죠?” “안 웃었습니다.” “거짓말 못하시네요.” 무진은 찬장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꿀이었다. 이현의 컵에 조금 넣고 저었다. “처음부터 넣어주시지.” “먼저 먹어보라면서요.” 그제야 이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잠깐 잦아들었다. 무진은 구조 신호를 확인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이현에게 물과 음식을 손 닿는 곳에 놓아주고, 난로 앞에 장작을 쌓았다. “해 지기 전에 옵니다.” “저 때문에 자꾸 위험한 데 가는 건 아니죠?” 무진은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봤다. “원래 다니는 길입니다.” 문이 닫힌 뒤 이현은 컵 바닥에 남은 잎 조각을 살폈다. 잎 뒷면이 은빛이었다. 옆에는 무진이 펼쳐놓은 낡은 공책이 있었다. 날짜와 날씨, 채취 장소 옆에 잎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이현은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다만 펼쳐진 면 아래쪽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봄잎과 가을잎을 섞지 말 것. 끝에는 누군가 다른 필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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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화. 문 하나의 거리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이현은 풀어놓은 단추를 다시 잠갔다. 조금 전까지 데워진 물이 반가웠는데, 혼자 남고 나니 욕조의 가장자리부터 높아 보였다. 남자라고 말한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그는 가림막을 당겼다. 젖은 옷을 벗고 수건을 어깨에 걸친 뒤, 성한 발부터 조심스럽게 옮겼다. 다친 발목에 무게가 실리자 통증이 치밀었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나가는 무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이현은 욕조를 짚었다. 물 묻은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쿵. 문이 열렸다. “이현 씨.” 발소리가 다가오다 가림막 앞에서 멈췄다. “넘어졌어요?” “아니요. 바가지가…….” 바가지는 선반 위에 있었다. 이현은 거짓말을 끝내지 못했다. 욕조 모서리에 부딪힌 무릎이 아렸다. 무진은 가림막을 열지 않았다. “들어가도 됩니까.” “잠깐만요.” 큰 수건을 몸에 두르고 대답했다. 그제야 천이 옆으로 밀렸다. 무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이현을 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발부터 봅시다.” “혼자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부르라고 했잖아요.” 말이 날카로웠다. 이현이 고개를 숙이자 무진의 손도 멈췄다. 빗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내가 급하게 나갔습니다.” 무진은 낮게 덧붙였다. “그건 미안해요.” 그는 작은 의자를 욕조 옆에 붙이고 젖은 바닥을 닦았다. 이현이 일어날 수 있도록 팔을 내밀었다. 이현은 그 팔을 잡았다. 제 손으로는 절반도 감싸지지 않았다. “제가 남자라서 불편해요?” 팔 아래의 근육이 굳었다. 무진은 이현을 의자에 앉힌 뒤 수건을 다시 여며주었다. 손끝이 어깨에 잠깐 닿았다. “다친 사람 혼자 두면 안 됐는데.” 질문과 다른 대답이었다.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자신에게 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집에서도 불편한 질문에는 늘 다른 말이 돌아왔다. 무진은 욕조 안에 낮은 받침을 놓았다. 다친 발을 물 밖에 올릴 수 있게 위치를 바꾼 뒤, 이현이 안전하게 앉는 것까지 도왔다.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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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화. 여자 옷은 없습니다“여자 옷은 없습니다.”이현은 단추에 올렸던 손을 멈췄다.앞에 서 있던 남자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목덜미는 햇볕에 그을렸는데 귀 끝만 붉었다.이현은 잠깐 그 등을 바라봤다.여자 옷?눈을 뜬 것은 새벽이었다.낯선 천장과 장작 냄새.침상 옆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커다란 몸을 좁은 의자에 구겨 넣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비탈에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도끼와 뒤집히던 숲이 떠올랐다.아직도 자신이 남자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손을 떼자 남자가 눈을 떴다.“어디 아픕니까.”잠에서 깬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발목이 조금…….”남자는 다리를 살피고 물컵을 내밀었다. 이현이 상체를 일으키자 등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큰 손이 다가오자 이현은 움찔했다.남자가 곧 손을 거뒀다.“놀랐겠네.”“아까는 곰인 줄 알았어요.”말하고 나서 이현이 입술을 다물었다.남자는 자신을 내려다봤다.“곰은 도끼 안 듭니다.”이현의 입에서 웃음이 샜다. 웃다가 기침이 나자 남자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천천히.”물컵을 받친 손은 놀랄 만큼 조심스러웠다.이현은 이름을 말했다.“이현이에요.”남자의 시선이 잠깐 얼굴에 머물렀다.“무진.”“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무진 씨.”무진은 대답 대신 난로에 장작을 넣었다.날이 밝아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무진은 길을 확인하고 돌아와 계곡물이 불었다고 말했다. 위쪽 능선에 구조 신호를 남겼으며, 물이 빠지는 동안 오두막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도윤은 지금쯤 자신을 찾느라 산을 헤맬 것이다.미안했다.그런데 이곳에서 아침을 먹는 일이 조금 기뻤다. 식탁에는 따뜻한 죽이, 창밖에는 숲이 있었다.무진은 식탁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이현이 고개를 들 때마다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저 무서워요?”“아니.”“그럼 왜 자꾸 피하세요?”무진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놨다.“안 피합니다.”귀가 다시 붉어졌다.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무진은 젖은 옷이 불편할 거라며 씻을 물을 준비했다.방 한쪽의 나무 욕조를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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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화. 같이 나갈 사람“미안하면 열어요.”시현이 문을 두드렸다. 도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태윤이 문틀과 경첩을 살폈다. 시현은 그를 뒤로 밀었다.“부수지 마. 내 말 아직 안 끝났어.”문밖에서 도훈이 말했다.“민서준 군이 안정을 찾았습니다.” “누나가 왔으니까.” “그런데 누나도 물린 뒤에 회복했고요. 두 사람을 직접 도운 분이 윤시현 씨죠.”시현은 손의 거즈를 봤다. 그걸 볼 때마다 이제는 누가 옆에 서 있었는지부터 떠올랐다.도훈이 말을 이었다.“전 알아야 합니다. 저 안에 같은 상태인 사람이 넷 더 있어요.” “그래서 사람을 잠가?” “나가 버리면 다 끝나니까.”태윤이 문에 가까이 섰다.“형이 아는 방법이 그거밖에 없습니까.”도훈은 태윤에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이 다시 손잡이를 당겼다. 여전히 잠겨 있었다.복도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제가 같이 봤어요. 문 열어요.”발소리가 늘었다. 서영도 왔다. 그녀는 동생을 먼저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서준의 끈은 풀었지만 혼자 걷기는 어려웠다.“그 사람이 저희 살려 줬어요. 그런데 왜 가둬요?”도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안에서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태윤은 듣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주먹으로 변했다.시현은 태윤의 손등을 눌렀다.“나한테도 말해.” “당신 피가 필요하답니다.”시현은 목 뒤가 차가워졌다. 태윤이 문에 이마를 거의 댈 만큼 가까이 섰다.“그 말 한 번만 더 해 봐.”시현은 그의 티셔츠를 뒤에서 잡아당겼다.“나 좀 봐.”태윤이 돌아왔다. 시현은 조금 전 둘만 있던 방이 좁아져 버린 것 같았다. 입술을 맞춘 자리에 남았던 감각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저 사람한테 화내다가 네가 이상해지면, 저 사람이 하던 말이 맞아져.”태윤은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시현이 그의 옷에서 손을 뗐다.“다른 넷, 상태를 보러 갈 수는 있어요.”그가 문 쪽으로 말했다. 밖이 조용해졌다.“근데 날 잠가 놓으면 못 가요.” “도와주시겠다는 거죠?” “보겠다고. 뭘로
Dernière mise à jour: 2026-10-15
Chapter: 9화. 치료 핑계는 하지 말고시현은 태윤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내가 어디로 갔어?” “여기.” “그럼 나 봐. 아래 보지 말고.”태윤의 손이 서준의 어깨에서 움직였다. 시현은 자기 무릎으로 서준의 팔을 누르고 태윤의 옷깃을 잡았다.“혼자 둘 테니까 나가라는 말도 하지 마.”태윤이 눈을 감았다. 시현은 옷깃을 놓지 않았다. 태윤이 돌아보지 않는 동안 서영이 동생 이름을 불렀다. 하린은 손목을 댈 다른 끈을 찾았다.서준이 크게 몸을 뒤틀었다.시현의 손바닥이 바닥에 쓸렸다. 거즈가 벗겨졌다. 손을 빼려는데 서준의 얼굴이 돌아왔다. 턱 아래를 막은 손에 이가 닿았다.태윤이 서준의 몸을 돌렸다. 시현이 팔을 잡아 뺐다.아팠다. 이번에는 아까의 상처만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하린이 새 거즈를 눌렀다. 시현은 손 대신 서준을 봤다. 바닥을 치던 발끝이 멈췄다.서영이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봤다.“민서준.”그는 누나를 올려다봤다. 입술 안쪽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시현의 손바닥에서 난 피였다.“누나.”서영이 입을 막았다. 시현은 태윤을 봤다. 남자는 여전히 서준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눈에서 붉은 기운이 조금씩 빠졌다.“손 힘 빼.”시현이 말하자 태윤은 그제야 서준을 놓았다.서준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자기 발목의 끈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린은 서영에게 동생 옆에 앉아 달라고 하고 시현의 손을 데리고 문 쪽으로 갔다.이번에는 시현도 아픈 걸 감추지 않았다.“이가 들어갔어요?” “상처 가장자리가 벌어졌어요. 아까랑 달라요. 씻고 봐야 해요.”태윤이 따라왔다. 하린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세면대가 있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같이 가요. 제가 금방 따라갈게요.”시현은 그 방 앞에서 멈췄다. 태윤이 물병을 열었다. 하린이 와서 손을 확인하는 동안 그는 문 가까이 서 있었다.“물린 자국은 지금 뚜렷하게 안 보여요. 그렇다고 괜찮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하린의 말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윤은 그러지 못했다.“서준 씨는요.”시현
Dernière mise à jour: 2026-10-14
Chapter: 8화. 문을 여는 사람문이 열리자 서영이 가장 먼저 들어갔다.서준은 뒤로 물러나려다가 발목 끈에 걸렸다. 서영이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누나의 목을 보지 않으려고 천장을 올려다봤다.“나랑 붙어 있지 마.” “그러면 네가 가만히 있어.”서영은 물병을 동생에게 쥐여 줬다. 손이 떨려 물이 셔츠 앞에 흘렀다. 그녀가 소매로 닦아 주자 서준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누나 나 진짜 무서워.”시현은 문 옆에 섰다. 태윤은 복도 쪽에 남았다. 하린은 서준의 끈을 조금 늦추고 부은 발목을 살폈다.“끈 풀면 달아날 거라고 생각하겠죠.”서준이 도훈을 봤다. 도훈은 대답하지 않았다.“못 달아나요. 저 다리 이래서.”하린이 매듭 밑에 접은 거즈를 끼웠다. 끈을 바로 끊지는 않았다.시현은 벽에 기대 물었다.“사진은 어떻게 보냈어?” “처음 왔을 땐 안쪽에 안 있었어요. 어떤 아저씨가 넘어져서 도와드렸는데 손을 물렸어요.”서준이 손등을 들어 보였다. 작은 잇자국이었다.“누나한테 말하면 나 찾으러 올까 봐.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서영이 그의 이마를 손으로 밀었다.“너 멋있는 척 좀 하지 마.” “누나는 맨날 하면서.”시현은 둘이 싸우는 동안 도훈을 봤다. 남자는 문 안을 살피고 있었다. 서영의 얼굴에서 자꾸 시선이 멈췄다.복도 밖에서 비명이 났다.도훈이 돌아섰다. 곧 두 번째 비명이 이어졌다. 태윤이 계단 쪽을 봤다.“정문입니다.”누군가 달려와 도훈의 팔을 붙잡았다. 차로 옮겨 온 감염자가 들것에서 풀려났다고 했다.서영의 얼굴이 하얘졌다.“우리 점장님이에요?”봉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훈이 무전기를 꺼냈다. 지시를 하는 동안 시현은 창문 너머 운동장 바닥을 봤다. 사람들이 흰 칸막이를 밀며 계단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시현은 도훈의 팔을 잡았다.“앞문만 막으면 되는 거예요?” “모르니까 여기 있어요.”태윤이 그의 손을 떼고 대신 섰다.“대답해요. 뒷문 열려 있습니까?”도훈은 지하 출입문을 보라고 했다. 태윤은 하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
Dernière mise à jour: 2026-10-13
Chapter: 7화. 먼저 가지 마시현이 먼저 문을 열었다.밖에 선 남자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였다. 명찰에는 운영 책임자라고 적혀 있었다. 구두에는 체육관 바닥의 흰 먼지가 묻어 있었다.“윤시현 씨?” “이름 어디서 봤어요.” “접수하셨잖아요.”시현은 괜한 질문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물러나지는 않았다.권도훈은 태윤에게 눈길을 돌렸다.“돌아올 줄 알았다.” “동생 만나러 온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부터 하자. 이렇게 남의 문 막고 서 있으면 오해해.”태윤은 의자를 옆으로 밀었다. 시현이 나가자 남자가 바로 뒤에 붙었다. 도훈은 둘의 간격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영과 하린은 창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훈은 서영에게 먼저 사과했다. 접수 명단과 격리 명단을 따로 관리해서 찾는 데 오래 걸렸다고 했다.“그럼 이제 만나게 해 주세요.”서영이 말했다.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보여 드리기 전에 설명을 좀.” “설명은 가면서 들을게요.”서영이 먼저 걸었다. 도훈은 그녀를 앞질러 복도 끝으로 갔다.격리 구역은 무대 뒤 대기실이었다. 원래 문에 달린 손잡이 위로 바깥 걸쇠를 덧댔다. 문 옆에는 눈으로 안쪽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창이 있었다.서영이 창문에 붙었다.안에는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시현은 사진 속 얼굴을 알아봤다. 서준은 누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발목에 달린 끈 때문에 멈췄다.서영이 문을 두드렸다.“민서준.”서준은 웃으려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왜 이제 와.” “너 어디 아파?” “누나 옷 왜 그래.”서영은 세탁소에서 가져온 큰 셔츠를 잡아당겼다. 목 옆의 거즈를 더 가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서준의 얼굴이 굳었다.“누나도 물렸어?”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눈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서둘러 덧붙였다.“근데 지금 괜찮아. 말도 하고. 너도 그러잖아.” “나는 안 괜찮아.”그가 바닥을 봤다. 종이컵 하나가 뒤집혀 있었다. 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가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서영이 문손잡
Dernière mise à jour: 2026-10-12
Chapter: 6화. 갈아입고 나와요“일단 소리 지르지 마요.”하린이 계단 아래 빈 창고로 그들을 데려갔다. 농구공이 담긴 철망 카트 옆에 서영이 앉았다.“저 안 질렀어요.”시현이 말하자 하린은 태윤을 봤다.“이쪽이 먼저 나갈 것 같아서요.”태윤은 문 옆에 서 있었다. 오른손으로 손목의 검은 띠를 가리고 있었다.하린이 설명했다. 서준은 별도 격리실에 있었다. 감염 증상을 보인 지 이틀째지만 아직 말을 한다고 했다. 보호자 확인이 끝나면 담당자가 면회를 결정한다는 대답만 받았다.“그 담당자가 누군데.” “권도훈. 이곳 운영 책임자래요.”태윤이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시현은 그 작은 움직임을 봤다. 서영도 봤다.“아는 분이에요?”태윤은 잠시 서영을 마주 보지 못했다.“전에 같이 일했습니다.” “그럼 말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잠깐만 보면 돼요. 서준이한테 제가 살아 있다고.”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그보다 먼저 하린에게 물었다.“물린 건 확실해요?” “제가 본 건 명단이에요. 아직 아무도 직접 못 봤어요.”서영이 고개를 숙였다. 시현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사진 보냈다고 했죠. 그거 보여 줄 수 있어요?”사진 속 서준은 운동장 바닥에 앉아 손으로 브이를 만들고 있었다. 뒤로 흰 칸막이가 보였다. 칸막이에는 굵은 매직으로 7이라고 써 있었다.사진 아래에는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다.누나 나 기다려. 먼저 가지 마.시현은 휴대전화를 돌려줬다.“우리가 먼저 가는 일은 없어요.”하린이 그를 봤다. 시현은 모르는 척했다.문밖에서 자원봉사자가 수건과 옷을 내밀었다. 깨끗한 걸로 갈아입고 기다리라고 했다. 전기는 제한 중이고 물은 저수탱크에서 내려오니 아껴 써 달라는 말도 붙였다.시현은 옷을 받았다. 태윤의 왼쪽 소매에는 점장이 흘린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아직도 그 옷으로 사람 옆에 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너도 갈아입어.”태윤이 계단 쪽을 보자 시현이 앞을 막았다.“하린 씨가 서영 씨랑 있을 거야. 사람 만나러 가는 거면 그 꼴부터 바꿔.
Dernière mise à jour: 2026-10-09
Chapter: 5화. 두 사람 사이“잡은 손은 놓고 얘기해 주시면 좋겠는데.”회색 조끼의 남자가 태윤을 봤다. 시현은 그제야 손목에 힘이 들어간 걸 느꼈다.“아는 사람이에요?”그가 묻자 태윤은 고개를 저었다.“얼굴은 처음 봅니다.”“조끼는 봤고?”남자의 웃음이 조금 줄었다.“안에서 무슨 일 있었나 본데, 지금 여기서 따질 시간은 없어요. 식수하고 충전 자리 있습니다. 걸을 수 있는 분은 따라오세요.”하린이 말했다.“안 걸을 수 있는 분은요?”“차로 데리러 옵니다.”“주차장에 한 분 있어요. 묶어 놨는데 다친 데부터 봐야 해요.”남자가 차 안을 들여다보고 수첩에 번호를 적었다. 서영이 그의 조끼를 잡았다.“민서준. 스무 살이에요. 이틀 전에 체육관으로 갔는데.”“이름으로 찾을 수 있어요. 저는 정욱이라고 합니다.”태윤은 여전히 시현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시현이 손을 돌려 그의 엄지 밑을 눌렀다. 태윤이 놓았다.“도망가자는 거면 말로 해.”“서영 씨는 갈 겁니다.”“그러니까.”시현은 물병을 가방에 넣었다.“네가 아는 걸 안에서 알려 줘. 모르는 척하다가 끌고 나오지 말고.”태윤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정욱은 먼저 골목으로 들어갔다.체육관으로 가는 길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방향을 표시하는 종이가 등받이에 붙어 있었다. 종이에는 살아 있는 사람은 왼쪽이라고 적혀 있었다.시현은 오른쪽 골목을 봤다. 쓰레기봉투뿐이었다.“누가 저따위로 써 놨어.”정욱이 종이를 떼 주머니에 넣었다.“급하게 만들다 보니.”“급하면 그냥 화살표만 그려요.”하린이 그의 가방을 밀었다. 지금 싸우지 말라는 뜻이었다.체육관 정문 앞에는 사람 열댓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문 한쪽에 발전기 소리가 낮게 깔렸다. 안에서는 탁구대 두 개를 붙여 충전 케이블을 늘어놓았다. 몇몇 사람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잠들어 있었다.서영이 처음으로 걸음을 빨리했다.“서준아.”대답은 없었다. 시현은 팔을 붙잡는 대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Dernière mise à jour: 2026-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