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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희화
주태영이 도착했을 때, 그의 손에는 누렇게 바랜 크라프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주태영은 소파에 앉아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둘러봤다.

눈가가 퉁퉁 부은 엄마,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의 아빠, 복도에 맨발로 서 있는 오빠, 그리고 구석에 웅크린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서연이 있었다.

“이 일은... 제가 10년 동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주태영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거칠어진 손가락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꾹 눌렀다.

“이건호 씨가 돌아가신 날, 저도 그 강가에 있었습니다.”

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주태영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마치 한마디 한마디를 목구멍에서 몇 번이고 굴려야 겨우 꺼낼 수 있는 것처럼.

“그날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건호 씨가 아니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를 하던 젊은 남자가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젊은이가 아이를 물 밖으로 떠받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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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제10화

    엄마는 이서연에게서 고예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예은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엄마의 목소리는 고예은의 기억 속 목소리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예은아... 엄마가 데리러 갈게.][지금 어디야?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데리러 오지 마세요.”고예은은 호텔 창가에 기대고 있었다.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내일 내가 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고예은은 창가에 앉아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슬퍼서도, 긴장돼서도 아니었다.그저 어떤 표정으로 그 문을 들어서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다음 날, 고예은은 파란색 코트를 입었다.연구기지 근처의 유일한 작은 상점에서 샀던 옷이었다.파란색은 고예은이 원래부터 좋아했던 색이었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엄마는 현관 안에 서 있었다.20킬로그램은 족히 빠진 듯,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이었다.머리카락도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허리에는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고, 손에는 아직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엄마의 뒤쪽 부엌에서는 고추와 파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고예은이 현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엄마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무릎이 타일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예은아, 엄마가 미안해.”아빠도 거실에서 걸어 나왔다.고예은은 아빠의 머리를 바라봤다.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5년 전에는 귀밑머리에 회색빛이 조금 섞여 있었을 뿐인데, 이제는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얬다.아빠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한참 뒤에야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돌아왔으면 됐어.”그때 방에서 고현우가 뛰어나왔다.급하게 나오다 문턱에 발이 걸리면서, 휘청거리다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오빠는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광대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예은아...”오빠는 고예은의 이름을 불렀다.‘너’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더 이상

  •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제9화

    5년째, 서북연구센터의 프로젝트는 예정보다 1년 반을 앞당겨서 최종 검수를 통과했다.고예은은 연구센터 정문 앞에 서 있었다.손에는 처음 이곳에 올 때 들고 왔던 그 배낭을 들고 있었다.5년 전에는 갈아입을 옷과 신분증만 들어 있었다.5년이 지난 지금은 노트북 한 대와 수상 증서 세 장이 더 들어 있었다.송기범이 옆에 차를 대고 창문을 내렸다.“정말 결정했어? 계약 연장 안 할 거야?”“응. 이제 한번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그럼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차는 황량한 사막의 도로를 따라서 2시간 동안 달렸다.도로 양옆에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멀리 높이 솟아 있는 산들이 이어졌다.송기범은 가는 내내 말이 많았다.식당 아주머니가 고예은을 그리워할 거라는 얘기부터, 실험실에서 고예은이 키우던 선인장을 유 선배가 죽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얘기도. 고예은이 떠나면 핵심 알고리즘은 누가 관리할지까지 온갖 얘기를 다 꺼냈다.그러다 어느 순간, 송기범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한참 뒤 송기범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예은아.”“왜?”“너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일단 돌아가서 정리할 건 정리하려고.”고예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 뒤에는 계속 연구를 하고 싶어. 몇 군데 연구소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아직 고민 중이야.”송기범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야?”고예은이 고개를 돌렸다.운전대를 쥔 송기범의 손가락 관절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창문 틈으로 모래바람이 스며들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고예은은 잠시 송기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응, 돌아올 거야.”“여기는 내 두 번째 집이잖아.”송기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백미러 속으로 송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집에 도착한 날은 늦가을이었다.오동나무 잎이 길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고, 공기에는 달콤한 계화 향이 감돌았다.5년 만에 돌아왔지만, 도시는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제8화

    고예은이 없는 시간은 무딘 칼날처럼 하루하루 사람들을 베어냈다.첫 달에 고예은의 엄마는 여전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고예은을 찾았다.석달 째가 되자 더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그 연구센터에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반년이 되자, 잠을 이루지 못하기 시작했다.병원에서는 불안으로 인한 신경성 불면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엄마는 안정제를 처방받았다.매일 밤 약을 한 알씩 삼킨 뒤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봤다.가끔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방의 문 앞까지 걸어가기도 했다.그리고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창고방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엄마는 누구에게도 그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문만 열려 있으면, 딸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아빠도 눈에 띄게 늙었다.머리카락은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변했고, 꼿꼿했던 등도 조금씩 굽어갔다.아빠 고지문의 말수는 적었지만, 어느 날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내가... 예은이 어릴 때 사진을 전부 찾아봤어.”“서연이 걔가 우리 집에 온 그해부터... 가족사진 속에서 예은이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더라.”“예은이는 계속 거기에 있었어. 다만 카메라가 한 번도 걔를 향하지 않았던 거야.”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눈물이 그대로 밥그릇 안으로 떨어졌다.오빠 고현우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그리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고예은을 찾기 시작했다.군수업계, 연구 기관, 보안 관련 기관에 있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표준화된 답변뿐이었다.[기밀 업무 종사자의 정보라 조회해 드릴 수 없습니다.]그러던 중 고현우는 고예은이 다니던 대학교 동문 단톡방에서 학부 동기 한 명의 연락처를 찾아냈다.그리고 한 명씩 연락하기 시작했다.혹시 고예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그러자 한 여학생이 답장을 보내왔다.[예은 씨 오빠세요?]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예은이 졸업할 때 어떻게 이사했는지

  •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제7화

    고예은이 서북연구센터에 도착한 날, 모래바람이 너무 거세게 몰아쳐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고예은을 마중 나온 사람은 연구팀의 선배였다.성이 송 씨인 남자는 강풍에 검은 뿔테 안경이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고예은?”“교수님이 매일 네 얘기를 하시더라. 지금까지 가르친 학생 중 네 데이터 모델링 능력이 제일 뛰어나다고.”고예은은 배낭을 멘 채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교수님이 과장하신 거예요.”모래알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따끔거릴 정도였다.“여기 생활 환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와야 할 텐데...”“괜찮아요.”고예은은 저 멀리 낮고 회색빛 건물들과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봤다.창고보다는 훨씬 넓었다.창문도 있고, 하늘도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입소처에서 핸드폰을 일괄 제출했다.전원을 끄기 전, 고예은은 마지막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부재중 전화도, 읽지 않은 메시지도 없었다.그 순간 자신이 느낀 감정이 실망인지, 아니면 홀가분함인지 알 수 없었다.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연구센터에서의 생활은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단조로웠다.아침 7시에 기상하고, 7시 30분에 구내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8시가 되면 연구실로 가서 컴퓨터 앞에서 데이터를 돌리며 모델을 분석했다.한 번 자리에 앉으면 십여 시간씩 꼼짝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을 때는 압축 비스킷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고예은이 맡은 분야는 고정밀 기상 데이터 모델링이었다.연구기지의 핵심 실험에 필요한 환경 변수를 예측하는 일이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지루하고 숫자뿐인 일이었다.하지만 데이터 하나하나의 뒤에는 수백 명의 안전과 수천억 원에 달하는 연구비가 걸려 있었다.지도교수가 전혀 과장한 것이 아니었다.23명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에서, 실제로 핵심 알고리즘을 독자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고예은뿐이었다.첫해에 고예은은 연구기지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기존 모델을 전면적으로

  •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제6화

    엄마는 미친 듯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학교에 전화했지만, 상담교사는 고예은이 이미 졸업하고 학교를 떠났다고 했다.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고예은 학생은 새로운 근무지로 갔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엄마는 안내 번호에도 전화하고, 민원 센터에도 전화를 걸었다.급기야 경찰서에 가서 실종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하지만 아빠가 엄마를 붙잡았다.“예은이가 기밀 유지 계약을 하고 간 거잖아. 납치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경찰이 어떻게 하겠어.”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아빠를 끌고 경찰서까지 갔다.경찰은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했다.“따님은 성인이고, 온전한 의사 결정 능력이 있습니다. 본인의 의사로 취업한 경우라면 실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하지만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성인이 된 자녀가 취업 장소를 반드시 부모에게 알려야 한다는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경찰서가 있는 거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엄마는 몇 걸음 걷다가 자꾸 주저앉곤 했다.아빠는 그런 엄마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창고방의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4제곱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 창문 하나 없었다.머리 위에는 전등갓도 없는 전구 하나만 매달려 있었고, 전구 안의 필라멘트는 검게 타들어 가 있었다.시멘트 바닥은 축축했다.벽 구석에는 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그제서야 엄마는 곰팡이 냄새를 맡았다.왜 이제야 이 냄새가 느껴졌을까?답은 간단했다.그전까지 엄마는 단 한 번도 이 안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었으니까.오빠는 며칠 동안 회사에도 나가지 않았다.오빠는 ‘서연이의 가족들’이라는 단톡방을 몇 번이고 다시 훑어봤다.메시지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엄마의 음성 메시지.[임호야, 너는 예은이보다 서연이를 더 잘 챙기는구나.]그리고 자신이 직접 보낸 메시지.[앞으로 누가 내 여동생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둔다.]자신의

  •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제5화

    주태영이 도착했을 때, 그의 손에는 누렇게 바랜 크라프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주태영은 소파에 앉아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둘러봤다.눈가가 퉁퉁 부은 엄마,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의 아빠, 복도에 맨발로 서 있는 오빠, 그리고 구석에 웅크린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서연이 있었다.“이 일은... 제가 10년 동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주태영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거칠어진 손가락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꾹 눌렀다.“이건호 씨가 돌아가신 날, 저도 그 강가에 있었습니다.”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주태영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마치 한마디 한마디를 목구멍에서 몇 번이고 굴려야 겨우 꺼낼 수 있는 것처럼.“그날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건호 씨가 아니었습니다.”“강가에서 낚시를 하던 젊은 남자가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그 젊은이가 아이를 물 밖으로 떠받쳐서 올렸을 때, 이건호 씨는 막 강가에 도착했습니다.”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에어컨에서 바람이 흘러나오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이건호 씨는 수영을 못 했습니다.”짧디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은 커다란 못처럼 내리꽂혀 모두를 그 자리에 붙박아 버렸다.“이건호 씨는 아이가 이미 구조된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아직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다급해진 이건호 씨는 강가의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뻗어서 그 사람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그러다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그 젊은이는 결국 스스로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하지만 이건호 씨는... 끝내 올라오지 못했습니다.”주태영은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당시 경찰서에서 작성된 진술서 사본이었다.증인란에는 아이를 구조한 사람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이건호가 아니었다.“이건호 씨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주태영이 조용히 말했다.“분명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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