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엄마가 가족 단톡방에 평면도 한 장을 올렸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집이었다. 각 방 옆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방은 부모님, 작은 방은 오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남향 방에는 ‘서연의 방’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서연의 아버지는 예전에 물에 빠진 오빠를 구하려다 익사하셨다. 고아가 된 이서연은 우리 집에 와서 10년 동안 친딸처럼 자랐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축소하며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에게 묻자 잠시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말했다. [너 나중에 다른 지역으로 대학원 가고 싶다며? 합격하면 이사 갈 텐데, 그때 방을 비워두면 아깝잖아.] [서연이는 다르지. 서연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돌아가신 거잖아. 이 세상에 서연이에게 남은 가족은 우리밖에 없어. 이 큰 방은 꼭 서연이에게 남겨줘야 해.] 오빠는 이미 이서연과 함께 커튼을 고르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 이서연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나와 3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배임호는, 방금 조립한 책장을 이서연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피규어를 놓을 칸을 하나 더 만들 건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서. 나는 거실에 놓인 이삿짐 상자 위에 앉아서,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를 잊은 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내 남자친구마저 이서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이 집에 내 자리가 없다면, 그럼 이 모든 걸 저 사람들에게 완전히 내주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열고, 서북연구센터로 가서 5년 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의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정말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view more엄마는 이서연에게서 고예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예은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엄마의 목소리는 고예은의 기억 속 목소리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예은아... 엄마가 데리러 갈게.][지금 어디야?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데리러 오지 마세요.”고예은은 호텔 창가에 기대고 있었다.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내일 내가 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고예은은 창가에 앉아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슬퍼서도, 긴장돼서도 아니었다.그저 어떤 표정으로 그 문을 들어서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다음 날, 고예은은 파란색 코트를 입었다.연구기지 근처의 유일한 작은 상점에서 샀던 옷이었다.파란색은 고예은이 원래부터 좋아했던 색이었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엄마는 현관 안에 서 있었다.20킬로그램은 족히 빠진 듯,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이었다.머리카락도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허리에는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고, 손에는 아직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엄마의 뒤쪽 부엌에서는 고추와 파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고예은이 현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엄마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무릎이 타일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예은아, 엄마가 미안해.”아빠도 거실에서 걸어 나왔다.고예은은 아빠의 머리를 바라봤다.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5년 전에는 귀밑머리에 회색빛이 조금 섞여 있었을 뿐인데, 이제는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얬다.아빠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한참 뒤에야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돌아왔으면 됐어.”그때 방에서 고현우가 뛰어나왔다.급하게 나오다 문턱에 발이 걸리면서, 휘청거리다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오빠는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광대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예은아...”오빠는 고예은의 이름을 불렀다.‘너’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더 이상
5년째, 서북연구센터의 프로젝트는 예정보다 1년 반을 앞당겨서 최종 검수를 통과했다.고예은은 연구센터 정문 앞에 서 있었다.손에는 처음 이곳에 올 때 들고 왔던 그 배낭을 들고 있었다.5년 전에는 갈아입을 옷과 신분증만 들어 있었다.5년이 지난 지금은 노트북 한 대와 수상 증서 세 장이 더 들어 있었다.송기범이 옆에 차를 대고 창문을 내렸다.“정말 결정했어? 계약 연장 안 할 거야?”“응. 이제 한번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그럼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차는 황량한 사막의 도로를 따라서 2시간 동안 달렸다.도로 양옆에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멀리 높이 솟아 있는 산들이 이어졌다.송기범은 가는 내내 말이 많았다.식당 아주머니가 고예은을 그리워할 거라는 얘기부터, 실험실에서 고예은이 키우던 선인장을 유 선배가 죽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얘기도. 고예은이 떠나면 핵심 알고리즘은 누가 관리할지까지 온갖 얘기를 다 꺼냈다.그러다 어느 순간, 송기범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한참 뒤 송기범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예은아.”“왜?”“너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일단 돌아가서 정리할 건 정리하려고.”고예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 뒤에는 계속 연구를 하고 싶어. 몇 군데 연구소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아직 고민 중이야.”송기범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야?”고예은이 고개를 돌렸다.운전대를 쥔 송기범의 손가락 관절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창문 틈으로 모래바람이 스며들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고예은은 잠시 송기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응, 돌아올 거야.”“여기는 내 두 번째 집이잖아.”송기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백미러 속으로 송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집에 도착한 날은 늦가을이었다.오동나무 잎이 길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고, 공기에는 달콤한 계화 향이 감돌았다.5년 만에 돌아왔지만, 도시는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고예은이 없는 시간은 무딘 칼날처럼 하루하루 사람들을 베어냈다.첫 달에 고예은의 엄마는 여전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고예은을 찾았다.석달 째가 되자 더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그 연구센터에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반년이 되자, 잠을 이루지 못하기 시작했다.병원에서는 불안으로 인한 신경성 불면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엄마는 안정제를 처방받았다.매일 밤 약을 한 알씩 삼킨 뒤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봤다.가끔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방의 문 앞까지 걸어가기도 했다.그리고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창고방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엄마는 누구에게도 그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문만 열려 있으면, 딸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아빠도 눈에 띄게 늙었다.머리카락은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변했고, 꼿꼿했던 등도 조금씩 굽어갔다.아빠 고지문의 말수는 적었지만, 어느 날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내가... 예은이 어릴 때 사진을 전부 찾아봤어.”“서연이 걔가 우리 집에 온 그해부터... 가족사진 속에서 예은이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더라.”“예은이는 계속 거기에 있었어. 다만 카메라가 한 번도 걔를 향하지 않았던 거야.”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눈물이 그대로 밥그릇 안으로 떨어졌다.오빠 고현우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그리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고예은을 찾기 시작했다.군수업계, 연구 기관, 보안 관련 기관에 있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표준화된 답변뿐이었다.[기밀 업무 종사자의 정보라 조회해 드릴 수 없습니다.]그러던 중 고현우는 고예은이 다니던 대학교 동문 단톡방에서 학부 동기 한 명의 연락처를 찾아냈다.그리고 한 명씩 연락하기 시작했다.혹시 고예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그러자 한 여학생이 답장을 보내왔다.[예은 씨 오빠세요?]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예은이 졸업할 때 어떻게 이사했는지
고예은이 서북연구센터에 도착한 날, 모래바람이 너무 거세게 몰아쳐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고예은을 마중 나온 사람은 연구팀의 선배였다.성이 송 씨인 남자는 강풍에 검은 뿔테 안경이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고예은?”“교수님이 매일 네 얘기를 하시더라. 지금까지 가르친 학생 중 네 데이터 모델링 능력이 제일 뛰어나다고.”고예은은 배낭을 멘 채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교수님이 과장하신 거예요.”모래알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따끔거릴 정도였다.“여기 생활 환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와야 할 텐데...”“괜찮아요.”고예은은 저 멀리 낮고 회색빛 건물들과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봤다.창고보다는 훨씬 넓었다.창문도 있고, 하늘도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입소처에서 핸드폰을 일괄 제출했다.전원을 끄기 전, 고예은은 마지막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부재중 전화도, 읽지 않은 메시지도 없었다.그 순간 자신이 느낀 감정이 실망인지, 아니면 홀가분함인지 알 수 없었다.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연구센터에서의 생활은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단조로웠다.아침 7시에 기상하고, 7시 30분에 구내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8시가 되면 연구실로 가서 컴퓨터 앞에서 데이터를 돌리며 모델을 분석했다.한 번 자리에 앉으면 십여 시간씩 꼼짝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을 때는 압축 비스킷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고예은이 맡은 분야는 고정밀 기상 데이터 모델링이었다.연구기지의 핵심 실험에 필요한 환경 변수를 예측하는 일이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지루하고 숫자뿐인 일이었다.하지만 데이터 하나하나의 뒤에는 수백 명의 안전과 수천억 원에 달하는 연구비가 걸려 있었다.지도교수가 전혀 과장한 것이 아니었다.23명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에서, 실제로 핵심 알고리즘을 독자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고예은뿐이었다.첫해에 고예은은 연구기지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기존 모델을 전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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