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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

By:  희화Kumpleto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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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엄마가 가족 단톡방에 평면도 한 장을 올렸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집이었다. 각 방 옆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방은 부모님, 작은 방은 오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남향 방에는 ‘서연의 방’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서연의 아버지는 예전에 물에 빠진 오빠를 구하려다 익사하셨다. 고아가 된 이서연은 우리 집에 와서 10년 동안 친딸처럼 자랐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축소하며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에게 묻자 잠시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말했다. [너 나중에 다른 지역으로 대학원 가고 싶다며? 합격하면 이사 갈 텐데, 그때 방을 비워두면 아깝잖아.] [서연이는 다르지. 서연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돌아가신 거잖아. 이 세상에 서연이에게 남은 가족은 우리밖에 없어. 이 큰 방은 꼭 서연이에게 남겨줘야 해.] 오빠는 이미 이서연과 함께 커튼을 고르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 이서연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나와 3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배임호는, 방금 조립한 책장을 이서연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피규어를 놓을 칸을 하나 더 만들 건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서. 나는 거실에 놓인 이삿짐 상자 위에 앉아서,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를 잊은 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내 남자친구마저 이서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이 집에 내 자리가 없다면, 그럼 이 모든 걸 저 사람들에게 완전히 내주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열고, 서북연구센터로 가서 5년 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의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정말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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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순간에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실의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때 배임호가 이서연의 방에서 나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배임호는 자연스럽게 탁자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이켰다.

내가 배임호를 불러 세웠다.

“임호야, 오후 내내 바빴잖아. 좀 쉬어.”

배임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면서도, 시선은 이미 이서연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이따가 쉴게. 서연이 방의 커튼 봉이 좀 기울었더라. 다시 가서 맞춰야겠어.”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배임호는 다시 이서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3년 동안, 배임호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 기숙사로 이사하던 날, 박스 5개를 나 혼자 하나씩 6층까지 날랐다.

배임호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서연의 SNS를 보니, 그날 배임호는 이서연과 놀이공원에 가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앞치마도 미처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예은아, 거기 앉아서 뭐 해? 가서 서연이 침대 시트 좀 갈아줘. 새 침구 세트는 현관 앞 봉지에 있어.”

나는 복도 모퉁이에 쌓여 있는 내 짐 상자들을 바라봤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복도를 절반이나 막고 있었다.

아무도 옮겨주지 않았고, 어디에 둘 건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엄마, 내 짐은 어느 방에 둬요?”

엄마는 턱짓으로 베란다 옆의 작은 문을 가리켰다.

“창고 방부터 정리하고 그냥 지내.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어릴 때도 한동안 거기서 잤었잖아.”

어릴 때 그랬던 건 이서연이 막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

그해 오빠가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오빠가 발을 헛디디며 물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던 이서연의 아버지가 오빠를 물 밖으로 밀어 올렸지만, 자신은 그대로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아저씨를 강가로 불러서 아이를 좀 구해달라고 한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평생 그 빚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서연이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엄마는 그녀를 끌어안고 오후 내내 울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누구도 네가 서럽게 지내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서연이가 막 아버지를 잃었으니, 네 방을 좀 비워줘. 며칠만 버티면 돼.”

그 며칠이 꼬박 일 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나는 베개와 얇은 이불을 안고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4제곱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는 걸레통과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고, 눅눅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창문도 없고, 필라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백열전구 하나가 겨우 어두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다 요가 매트를 깔았다.

그게 침대였다.

저녁이 되자, 엄마는 이사 축하라며 배달 음식을 한 상 가득 시켰다.

생선구이, 치킨, 망고 크레이프...

거실 탁자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은 전부 다 이서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오빠는 이서연의 그릇에 닭 날개를 집어주고, 배임호는 생선 가시를 발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나는 그저 흰밥만 조용히 먹었다.

아무도 내가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장을 뒤져서 남아 있던 라면 한 봉지를 꺼내고 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다들 밥 먹고 있는데 너 혼자 부엌엔 왜 갔어?”

“라면 좀 끓이려고요.”

“밥상에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굳이 혼자 따로 해 먹겠다고? 서연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기가 잘못한 줄 알잖아.”

나는 불을 끄고, 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거실에서 이서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혹시 이런 음식 안 좋아해? 다음에는 내가 아줌마한테 언니 좋아하는 걸로 해달라고 말해볼게...”

오빠가 짜증스럽게 손을 저었다.

“밥 한 끼 먹는 것까지 꼭 일을 만들어. 그냥 내버려둬.”

배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숙인 채 이서연의 새우 껍질을 계속 까주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게 어떤 비난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다.

배임호는 일부러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이 일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창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요가 매트에 누워 있자니, 휴대폰 화면에는 아까 사인한 비밀 유지 계약서가 그대로 떠 있었다.

하얀 백지에 검은 글씨로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5년간 근무, 무단이탈 금지.]

이 계약서는 지도교수가 직접 추천해 준 것이었다.

내 논문과 데이터 분석 능력이라면, 연구팀 전체에서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이 집에서는 내 전공도, 내 성적도, 내가 기울인 어떤 노력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

근무 시작일은 8월 15일이었다.

앞으로 23일이 남았다.

23일 후면 나는 이 집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창고 방이 비었다는 걸 알아차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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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순간에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하지만 거실의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그때 배임호가 이서연의 방에서 나왔다.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배임호는 자연스럽게 탁자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이켰다.내가 배임호를 불러 세웠다.“임호야, 오후 내내 바빴잖아. 좀 쉬어.”배임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면서도, 시선은 이미 이서연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이따가 쉴게. 서연이 방의 커튼 봉이 좀 기울었더라. 다시 가서 맞춰야겠어.”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배임호는 다시 이서연의 방으로 들어갔다.내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3년 동안, 배임호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대학 기숙사로 이사하던 날, 박스 5개를 나 혼자 하나씩 6층까지 날랐다.배임호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그런데 나중에 이서연의 SNS를 보니, 그날 배임호는 이서연과 놀이공원에 가 있었다.엄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앞치마도 미처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예은아, 거기 앉아서 뭐 해? 가서 서연이 침대 시트 좀 갈아줘. 새 침구 세트는 현관 앞 봉지에 있어.”나는 복도 모퉁이에 쌓여 있는 내 짐 상자들을 바라봤다.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복도를 절반이나 막고 있었다.아무도 옮겨주지 않았고, 어디에 둘 건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엄마, 내 짐은 어느 방에 둬요?”엄마는 턱짓으로 베란다 옆의 작은 문을 가리켰다.“창고 방부터 정리하고 그냥 지내.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어릴 때도 한동안 거기서 잤었잖아.”어릴 때 그랬던 건 이서연이 막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그해 오빠가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오빠가 발을 헛디디며 물에 빠지고 말았다.마침 지나가던 이서연의 아버지가 오빠를 물 밖으로 밀어 올렸지만, 자신은 그대로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아저씨를 강가로 불러서 아이를 좀 구해달라고 한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엄마는 평생 그 빚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그래서 이
Magbasa pa
제2화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창고조차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아침 식사를 하던 엄마가 아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예은이 나가면 창고 벽을 허물어서 서연이 옷방으로 넓혀줄까 해.”“여자애들은 짐이 많잖아. 옷장 하나로는 부족하지.”아빠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때 사람 불러서 치수부터 재보자.”이서연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줌마, 진짜 괜찮아요. 옷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그러자 오빠가 웃으면서 이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지금은 적어도 앞으로는 오빠가 사주면 되지.”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죽을 떠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구도 내가 정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건지, 이 집을 떠나고 싶은 건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가족들이 원하는 건 그저 내가 떠나는 것뿐이었다.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는 내가 머물렀던 흔적마저 지워버릴 생각이었다.그날 오후, 배임호가 집에 왔다.배임호의 손에는 크기가 다른 쇼핑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큰 쇼핑백 안에는 전문가용 마커 세트가 들어 있었다.128색에 가죽 필통까지 들어 있는 제품이었다.아직 떼지 못한 가격표에는 6만 원이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배임호는 두 손으로 이서연에게 건넸다.“현우 형한테 들었는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며. 색깔도 많으니까 한번 써봐.”이서연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마커 케이스를 품에 안은 이서연은 마치 아이처럼 좋아했다.그리고 배임호는 작은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열어보니 마트 할인 코너에서 파는 우유 사탕이었다.노란 할인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1,200원이었다.“가는 김에 네 것도 하나 샀어. 너 단 거 좋아하잖아.”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았다.그 얘기를 배임호에게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나는 매운 걸 좋아했다.겨울이면 뜨끈한 국수에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서 먹는 걸 가장 좋아했다.코끝에 땀이 맺힐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하지만 배임호가 기억
Magbasa pa
제3화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열흘째 되는 날은 배임호와 내가 사귄 지 3년이 되는 날이었다.나는 이틀 전부터 배임호에게 약속 시간을 확인했다.배임호는 곧바로 대답했다.[토요일 오후지? 기억하고 있어.]토요일 아침, 나는 종이 상자를 모조리 뒤져서 유일하게 보풀이 일지 않은 가디건 하나를 찾아냈다.물티슈로 흰 운동화에 묻은 얼룩을 몇 번이고 닦았다.창고에 있는 손바닥만 한 둥근 거울 앞에서 30분 동안 옅은 화장을 했다.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창가 자리를 골랐다.그리고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한 잔은 아메리카노, 한 잔은 배임호가 좋아하는 아이스 라떼였다.얼음이 녹으면 다시 얼음을 채우고, 또 녹으면 다시 채웠다.두 시간 반 동안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메시지에도 전혀 응답이 없었다.저녁 6시가 되어서야 배임호에게 메시지가 왔다.[정말 미안해. 오늘 서연이 걔가 갑자기 자기 아빠가 예전에 자주 가던 강가에 가고 싶다고 했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혼자 뒀다가 무슨 일 생길까 봐 같이 있었어. 다음에 내가 제대로 챙겨줄게.]그리고 사진 한 장이 함께 도착했다.강가 난간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연, 그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배임호였다.저물어 가는 석양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서 하나로 겹쳐 있었다.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사진만 봤다면, 누구라도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나는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러고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켰다.너무 써서 혓바닥 전체가 텁텁하고 떫었다.나는 두 사람 몫의 식사비를 혼자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다음 날 아침, 배임호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손에는 빨간 장미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포장지는 꽃집에서 나는 향초 향이 느껴질 만큼 고급스러웠다.순간, 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거세게 뛰었다.하지만 배임호는 현관에서 곧장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그리고 이서연의 방문을 열었다.“어제 많이 힘들었지?
Magbasa pa
제4화
나를 완전히 무너뜨린 마지막 한 방은 바로 오빠의 휴대폰이었다.그날 오후, 오빠가 샤워하러 간 사이에 휴대폰을 소파 위에 두고 갔다.그때 화면이 잠깐 켜지더니, 단톡방 메시지 하나가 떴다.단톡방 이름은 ‘서연이의 가족들’이었다.5명이 있는 방이었다.아빠, 엄마, 오빠, 배임호, 그리고 이서연이 있었다.내 친부모와 친오빠, 그리고 3년 동안 사귄 내 남자친구가 성도 다른 여자아이와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의 단톡방을 만든 것이다.그 사람들 사이에 나만 없었다.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단톡방을 눌렀다.대화 내용은 끝도 없이 길었다.이사한 날 만들어진 단톡방이었다.엄마가 이서연의 방 사진을 올려놓고 말했다.[우리 서연이, 드디어 자기만의 보금자리가 생겼네.]오빠는 폭죽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화답했다.[앞으로 누가 내 여동생을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둔다.]위로 더 올려봤다.엄마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음성 메시지를 보낸 기록이 있었다.[임호야, 너는 예은이보다 서연이를 더 잘 챙기는구나. 걔가 워낙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네가 곁에서 계속 돌봐주면 아주머니는 마음이 놓여.]배임호의 답장이 이어졌다.[걱정 마세요. 서연이는 제가 계속 챙길게요.]오빠가 바로 답했다.[역시 의리가 있네.]그리고 단톡방 위쪽에 배임호가 고정해 둔 이서연과의 개인 채팅창이 눈에 들어왔다.이서연이 먼저 물었다.[언니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배임호가 답했다.[괜찮아. 예은이는 이 단톡방 있는지도 몰라.][그럼 다행이야. 난 언니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그 뒤에는 신나게 뛰는 이모티콘 하나가 붙어 있었다.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안심했다.아니, 안심한 것을 넘어 기뻐했다.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나는 말없이 휴대폰을 다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내 손끝은 얼음장처럼 싸늘해져 있었다.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판결문을 다 읽은 것 같았다.재판은 이미 끝났고, 피고인인 나는 마지막에서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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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주태영이 도착했을 때, 그의 손에는 누렇게 바랜 크라프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주태영은 소파에 앉아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둘러봤다.눈가가 퉁퉁 부은 엄마,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의 아빠, 복도에 맨발로 서 있는 오빠, 그리고 구석에 웅크린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서연이 있었다.“이 일은... 제가 10년 동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주태영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거칠어진 손가락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꾹 눌렀다.“이건호 씨가 돌아가신 날, 저도 그 강가에 있었습니다.”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주태영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마치 한마디 한마디를 목구멍에서 몇 번이고 굴려야 겨우 꺼낼 수 있는 것처럼.“그날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건호 씨가 아니었습니다.”“강가에서 낚시를 하던 젊은 남자가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그 젊은이가 아이를 물 밖으로 떠받쳐서 올렸을 때, 이건호 씨는 막 강가에 도착했습니다.”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에어컨에서 바람이 흘러나오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이건호 씨는 수영을 못 했습니다.”짧디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은 커다란 못처럼 내리꽂혀 모두를 그 자리에 붙박아 버렸다.“이건호 씨는 아이가 이미 구조된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이 아직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다급해진 이건호 씨는 강가의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뻗어서 그 사람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그러다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그 젊은이는 결국 스스로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하지만 이건호 씨는... 끝내 올라오지 못했습니다.”주태영은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당시 경찰서에서 작성된 진술서 사본이었다.증인란에는 아이를 구조한 사람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이건호가 아니었다.“이건호 씨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주태영이 조용히 말했다.“분명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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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엄마는 미친 듯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학교에 전화했지만, 상담교사는 고예은이 이미 졸업하고 학교를 떠났다고 했다.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고예은 학생은 새로운 근무지로 갔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엄마는 안내 번호에도 전화하고, 민원 센터에도 전화를 걸었다.급기야 경찰서에 가서 실종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하지만 아빠가 엄마를 붙잡았다.“예은이가 기밀 유지 계약을 하고 간 거잖아. 납치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경찰이 어떻게 하겠어.”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아빠를 끌고 경찰서까지 갔다.경찰은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했다.“따님은 성인이고, 온전한 의사 결정 능력이 있습니다. 본인의 의사로 취업한 경우라면 실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하지만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성인이 된 자녀가 취업 장소를 반드시 부모에게 알려야 한다는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경찰서가 있는 거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엄마는 몇 걸음 걷다가 자꾸 주저앉곤 했다.아빠는 그런 엄마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창고방의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4제곱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 창문 하나 없었다.머리 위에는 전등갓도 없는 전구 하나만 매달려 있었고, 전구 안의 필라멘트는 검게 타들어 가 있었다.시멘트 바닥은 축축했다.벽 구석에는 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그제서야 엄마는 곰팡이 냄새를 맡았다.왜 이제야 이 냄새가 느껴졌을까?답은 간단했다.그전까지 엄마는 단 한 번도 이 안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었으니까.오빠는 며칠 동안 회사에도 나가지 않았다.오빠는 ‘서연이의 가족들’이라는 단톡방을 몇 번이고 다시 훑어봤다.메시지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엄마의 음성 메시지.[임호야, 너는 예은이보다 서연이를 더 잘 챙기는구나.]그리고 자신이 직접 보낸 메시지.[앞으로 누가 내 여동생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둔다.]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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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고예은이 서북연구센터에 도착한 날, 모래바람이 너무 거세게 몰아쳐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고예은을 마중 나온 사람은 연구팀의 선배였다.성이 송 씨인 남자는 강풍에 검은 뿔테 안경이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고예은?”“교수님이 매일 네 얘기를 하시더라. 지금까지 가르친 학생 중 네 데이터 모델링 능력이 제일 뛰어나다고.”고예은은 배낭을 멘 채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교수님이 과장하신 거예요.”모래알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따끔거릴 정도였다.“여기 생활 환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와야 할 텐데...”“괜찮아요.”고예은은 저 멀리 낮고 회색빛 건물들과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봤다.창고보다는 훨씬 넓었다.창문도 있고, 하늘도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입소처에서 핸드폰을 일괄 제출했다.전원을 끄기 전, 고예은은 마지막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부재중 전화도, 읽지 않은 메시지도 없었다.그 순간 자신이 느낀 감정이 실망인지, 아니면 홀가분함인지 알 수 없었다.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연구센터에서의 생활은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단조로웠다.아침 7시에 기상하고, 7시 30분에 구내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8시가 되면 연구실로 가서 컴퓨터 앞에서 데이터를 돌리며 모델을 분석했다.한 번 자리에 앉으면 십여 시간씩 꼼짝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을 때는 압축 비스킷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고예은이 맡은 분야는 고정밀 기상 데이터 모델링이었다.연구기지의 핵심 실험에 필요한 환경 변수를 예측하는 일이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지루하고 숫자뿐인 일이었다.하지만 데이터 하나하나의 뒤에는 수백 명의 안전과 수천억 원에 달하는 연구비가 걸려 있었다.지도교수가 전혀 과장한 것이 아니었다.23명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에서, 실제로 핵심 알고리즘을 독자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고예은뿐이었다.첫해에 고예은은 연구기지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기존 모델을 전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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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고예은이 없는 시간은 무딘 칼날처럼 하루하루 사람들을 베어냈다.첫 달에 고예은의 엄마는 여전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고예은을 찾았다.석달 째가 되자 더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그 연구센터에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반년이 되자, 잠을 이루지 못하기 시작했다.병원에서는 불안으로 인한 신경성 불면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엄마는 안정제를 처방받았다.매일 밤 약을 한 알씩 삼킨 뒤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봤다.가끔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방의 문 앞까지 걸어가기도 했다.그리고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창고방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엄마는 누구에게도 그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문만 열려 있으면, 딸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아빠도 눈에 띄게 늙었다.머리카락은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변했고, 꼿꼿했던 등도 조금씩 굽어갔다.아빠 고지문의 말수는 적었지만, 어느 날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내가... 예은이 어릴 때 사진을 전부 찾아봤어.”“서연이 걔가 우리 집에 온 그해부터... 가족사진 속에서 예은이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더라.”“예은이는 계속 거기에 있었어. 다만 카메라가 한 번도 걔를 향하지 않았던 거야.”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눈물이 그대로 밥그릇 안으로 떨어졌다.오빠 고현우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그리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고예은을 찾기 시작했다.군수업계, 연구 기관, 보안 관련 기관에 있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표준화된 답변뿐이었다.[기밀 업무 종사자의 정보라 조회해 드릴 수 없습니다.]그러던 중 고현우는 고예은이 다니던 대학교 동문 단톡방에서 학부 동기 한 명의 연락처를 찾아냈다.그리고 한 명씩 연락하기 시작했다.혹시 고예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그러자 한 여학생이 답장을 보내왔다.[예은 씨 오빠세요?]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예은이 졸업할 때 어떻게 이사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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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5년째, 서북연구센터의 프로젝트는 예정보다 1년 반을 앞당겨서 최종 검수를 통과했다.고예은은 연구센터 정문 앞에 서 있었다.손에는 처음 이곳에 올 때 들고 왔던 그 배낭을 들고 있었다.5년 전에는 갈아입을 옷과 신분증만 들어 있었다.5년이 지난 지금은 노트북 한 대와 수상 증서 세 장이 더 들어 있었다.송기범이 옆에 차를 대고 창문을 내렸다.“정말 결정했어? 계약 연장 안 할 거야?”“응. 이제 한번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그럼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줄게.”차는 황량한 사막의 도로를 따라서 2시간 동안 달렸다.도로 양옆에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멀리 높이 솟아 있는 산들이 이어졌다.송기범은 가는 내내 말이 많았다.식당 아주머니가 고예은을 그리워할 거라는 얘기부터, 실험실에서 고예은이 키우던 선인장을 유 선배가 죽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얘기도. 고예은이 떠나면 핵심 알고리즘은 누가 관리할지까지 온갖 얘기를 다 꺼냈다.그러다 어느 순간, 송기범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한참 뒤 송기범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예은아.”“왜?”“너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일단 돌아가서 정리할 건 정리하려고.”고예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 뒤에는 계속 연구를 하고 싶어. 몇 군데 연구소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아직 고민 중이야.”송기범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야?”고예은이 고개를 돌렸다.운전대를 쥔 송기범의 손가락 관절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창문 틈으로 모래바람이 스며들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고예은은 잠시 송기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응, 돌아올 거야.”“여기는 내 두 번째 집이잖아.”송기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백미러 속으로 송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집에 도착한 날은 늦가을이었다.오동나무 잎이 길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고, 공기에는 달콤한 계화 향이 감돌았다.5년 만에 돌아왔지만, 도시는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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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엄마는 이서연에게서 고예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예은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엄마의 목소리는 고예은의 기억 속 목소리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예은아... 엄마가 데리러 갈게.][지금 어디야?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데리러 오지 마세요.”고예은은 호텔 창가에 기대고 있었다.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내일 내가 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고예은은 창가에 앉아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슬퍼서도, 긴장돼서도 아니었다.그저 어떤 표정으로 그 문을 들어서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다음 날, 고예은은 파란색 코트를 입었다.연구기지 근처의 유일한 작은 상점에서 샀던 옷이었다.파란색은 고예은이 원래부터 좋아했던 색이었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엄마는 현관 안에 서 있었다.20킬로그램은 족히 빠진 듯,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이었다.머리카락도 절반 이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허리에는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고, 손에는 아직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엄마의 뒤쪽 부엌에서는 고추와 파기름 냄새가 흘러나왔다.고예은이 현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엄마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무릎이 타일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예은아, 엄마가 미안해.”아빠도 거실에서 걸어 나왔다.고예은은 아빠의 머리를 바라봤다.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5년 전에는 귀밑머리에 회색빛이 조금 섞여 있었을 뿐인데, 이제는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얬다.아빠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한참 뒤에야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돌아왔으면 됐어.”그때 방에서 고현우가 뛰어나왔다.급하게 나오다 문턱에 발이 걸리면서, 휘청거리다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오빠는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광대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예은아...”오빠는 고예은의 이름을 불렀다.‘너’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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