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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Author: 고요가을

제1화

Author: 고요가을
주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자, 진천준은 놀란 얼굴로 뒤따랐다.

“주원영 씨, 제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부 대표님이 주원영 씨 안전만큼은 반드시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원영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 건너편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광고판으로 향했다.

맞춤 정장을 입은 부경민은 반듯하고 오만할 만큼 빛났고, 곁에는 성호그룹 외동딸 성청아가 서 있었다.

세상은 두 사람을 두고 재벌가에 어울리는 완벽한 한 쌍이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부경민의 숨겨진 아내인 주원영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진천준은 창밖에 보이는 광고판을 힐끗 보고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주원영 씨, 부 대표님과의 이혼은 형식적인 겁니다. 서류만 정리하는 거라서, 이혼 뒤에도 주원영 씨에 대한 대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청아 씨와의 일은 전부 회사 상장을 위한 절차입니다. 부 대표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서명만 해 주시면 보유 지분의 50%를 주원영 씨께 이전하겠다고요.”

주원영은 그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이제는 한 단어도 더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명할게요.”

주원영이 진천준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물러설 틈이 없었다.

진천준은 이번에는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각오하고 온 듯했다. 뜻밖의 대답에 눈이 커졌고, 곧 안도의 기색이 얼굴에 번졌다.

“주원영 씨,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네요.”

주원영은 펜을 들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펜 하나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름 세 글자를 쓰는 동안, 가슴 위를 무딘 칼로 천천히 베어내는 느낌이 이어졌다. 짧은 서명 하나 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지막 획이 끝나자 진천준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가져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문이 묵직하게 닫혔다. 주원영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실시간 경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강시 대표 기업인 부경민 대표가 설립한 지한그룹이 상장 예비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외부 회계감사가 끝나는 대로 한 달 뒤 정식 상장이 예정돼 있으며, 상장 후 기업가치는 약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지한그룹의 부경민 대표는 서강시 최고 자산가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이 부경민을 비췄다. 선이 뚜렷한 얼굴, 카메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 누가 봐도 정상에 선 남자다운 태도였다.

진행자가 물었다.

“부 대표님, 이번 상장을 앞두고 가장 감사한 분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부경민의 눈가에 따뜻한 감정이 번졌다. 부경민은 몸을 살짝 돌려 성청아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저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 성청아 씨에게 감사해야죠. 청아 씨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습니다.”

성청아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세간에서는 두 분을 두고 운명적인 커플이라고 합니다. 혹시 성청아 씨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계신가요?”

부경민은 입가에 웃음을 걸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 질문에는 아직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청아 씨가 저에게 기회를 줄지, 제가 아직 확신하지 못하니까요.”

방청석에서 뜨거운 환호가 터졌다.

“역시 재벌 대표는 다르네. 고백도 저렇게 당당하잖아.”

“드라마 아니야? 자수성가한 남자와 재벌가 딸이라니, 이 커플 너무 잘 어울려.”

“소문만 무성했는데 진짜였구나. 오늘 제대로 설렜다.”

“...”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음에 담근 칼처럼 주원영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통증은 손끝과 발끝까지 퍼졌다.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0년 전, 부경민과 주원영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았다.

가장 가난하던 때에는 김치볶음밥 한 그릇을 사서 둘이 네 끼로 나누어 먹었다.

부경민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주원영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학비를 하루라도 빨리 마련하려고 병원에서 헌혈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몸이 원래 약했던 주원영은 피를 뽑고 나오자마자 길바닥에 쓰러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경민은 주원영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주원영은 부경민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손에 든 돈을 들어 보였다.

“이제 너도 등록금 낼 수 있어.”

풋풋했던 청년은 성공하면 온갖 희생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주원영을 반드시 세상 모든 여자가 부러워할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했다.

부경민이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구한 날, 두 사람은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자기야, 이제 우리 고생 끝이야. 앞으로는 네가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 없어. 내가 돈 많이 벌면, 네가 꿈꾸던 가장 큰 결혼식부터 올려 줄게.”

그날 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감정처럼 서로에게 기대었다.

놓치면 무너질 사람처럼, 서로를 오래도록 끌어안았다.

훗날 부경민의 사업은 거침없이 커졌다.

주원영은 더 이상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큰 집에서 살았고, 차가 준비됐고, 집안일을 맡는 사람도 생겼다.

단 하나의 결핍이 있었다. 부경민은 끝내 주원영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주원영은 기다렸다. 언젠가 부경민이 약속을 지킬 날을...

하지만 꿈꾸던 결혼식 대신 부경민이 직접 준비한 이혼합의서만 반복해서 받았다.

죽음을 앞세워 버텨도 부경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보, 형식적인 이혼일 뿐이야.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야. 회사 상장에는 성호그룹의 도움이 꼭 필요해.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성청아가 알면 안 돼. 네 존재도 알려지면 안 되고.”

부경민은 매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주원영의 몸부림, 반항, 절망은 부경민에게 더 큰 성공을 막는 철없는 고집일 뿐이었다.

화면 속 카메라가 성청아를 비췄다.

성청아는 애정 어린 눈으로 부경민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고, 그 순간에 성청아의 약지에 걸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드러났다.

“저와 경민 씨의 일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소식이 생기면 꼭 전할게요.”

다시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주원영은 손에 낀 얇은 실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쓰디쓴 감정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을, 부경민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주고 있었다.

부경민이 원하는 것은 주원영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다른 길 위에 서 있었다.

가짜 이혼 같은 것은 없었다.

이혼했다면, 깨끗하고 완전하게 물러나면 된다.

주원영은 핸드폰을 들고 해외로 전화를 걸었다.

“고모, 저 생각 끝났어요. 해외로 가서 고모랑 살래요.”

수화기 너머 주희애는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원영아, 정말 마음 정한 거야? 전에는 성공한 남편 옆에 남겠다고 했잖아.]

주원영은 오래 침묵한 뒤 말했다.

“저... 이혼했어요.”

[사실 그런 남편은 없는 편이 낫지. 몇 년씩 너를 숨겨 두고 공식적으로 아내 자리 하나 못 주는 남자라면 마음이 진즉 딴 데 있었겠지. 헤어진 건 잘한 일이야.]

[고모가 너 하나는 충분히 책임져. 마침 다음 달에 국내 상장 예정 기업 감사를 하러 들어가. 일이 끝나면 같이 떠나자.]

“네, 고모.”

주원영의 고모인 주희애는 글로벌 회계법인의 책임 파트너였다. 세계 여러 기업의 상장 감사를 맡는 사람이라 늘 바빴다.

몇 년 전 잃어버린 조카 주원영을 찾았지만, 주희애는 바쁜 일정 탓에 조카사위인 부경민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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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제17화

    고정호. 명문대 출신의 유명 심리상담의. 젊고 유능했다. 외모와 직업, 어느 쪽으로 보아도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남자였다.부경민은 고정호의 병원을 찾아갔다.고정호는 초췌한 몰골의 남자를 보자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예약하고 오셨습니까?”“고정호, 맞지?”부경민의 말투에는 대놓고 시비를 거는 기색이 실려 있었다.“네, 제가 고정호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고정호는 눈앞의 남자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지 몰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부경민은 이미 속의 분노를 누르지 못했다.“원영이에게서 떨어져. 원영이는 내 여자야. 눈치가 있다면 지금 당장 원영이 곁에서 사라져.”고정호의 온화한 얼굴에 잠깐 놀람이 스쳤다. 곧 평정을 되찾았다. 눈앞 남자의 정체를 대충 짐작한 듯했다.“원영 씨의 전남편이시군요. 원영 씨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내가 원영이와 어떤 관계였는지 안다면, 우리 사이에 외부인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지.”고정호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한 부경민을 위아래로 훑더니 낮게 웃었다.“두 분의 관계요? 회사 상장을 위해 아내에게 형식적 이혼을 강요하고, 돌아서서는 재벌가 딸을 좇던 그 관계를 말하는 겁니까? 그런 감정이라면 너무 하찮네요.”부경민은 아픈 곳을 찔리자 고정호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다.“네가 뭘 알아? 나와 원영이 사이는 네가 함부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고정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웃으며 주먹을 휘둘러 부경민의 얼굴을 때렸다.“당신 같은 인간이 아직도 원영 씨 앞에 나타날 낯이 있습니까? 원영 씨가 당신 여자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당신을 선택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원영 씨 몫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앞세우고, 한 여자를 상처 입힌 당신 같은 사람은 여기 서 있을 자격도 없습니다.”부경민은 통증에 비틀거렸다. 코피가 흘러내렸다. 분노가 이성을 집어삼켰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고, 두 사람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제16화

    부경민은 주희애의 집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매일 아침 주희애의 집 앞에 나타났다. 손에는 이슬방울이 맺힌 꽃이 들려 있었다. 주원영이 좋아하던 음식을 직접 만들어 포장해 보냈고, 몇 통의 편지도 써서 도우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일주일 뒤, 주원영은 결국 부경민과 대화하기로 했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주원영의 목소리에는 거리감과 혐오가 분명했다.“원영아, 내가 잘못했어. 너에게 사과하러 왔어. 한 번만 내가 잘못을 보상할 기회를 줄 수 없을까?”부경민의 목소리는 떨렸다.“나는 당신에게 이미 충분히 명확하게 말했다고 생각해.”주원영의 말투는 온기 하나 느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우리 사이는 끝났어. 의미 없는 짓은 그만해.”“끝난 적 없어. 나는 한 번도 끝낸 적 없어.”부경민은 급하게 반박했다. 눈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네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거 알아. 전부 내가 받아야 해. 내가 쓰레기였어. 성공에 눈이 멀었어. 하지만 난 진짜로 너를 떠나려던 게 아니야.”“우리 이혼은 형식적인 거였어. 회사가 상장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내 마음에는 언제나 너 하나뿐이었어.”주원영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말을 들은 것 같았다.“지금에 와서도 거짓말을 하네?”부경민은 굳었다.“거짓말 아니야. 그때는 정말...”주원영은 말을 끊었다. 시선은 곧장 부경민의 눈을 파고들었다. 감춰 둔 거짓을 모두 꿰뚫는 듯했다.“내가 이혼에 동의한 그날 밤, 네가 서재에서 하는 말을 직접 들었어. 상장에 성공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성청아에게 청혼하겠다고, 성청아에게 ‘부경민의 아내’라는 자리를 주겠다고 했잖아.”부경민의 마음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주원영이 그 계획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주원영의 말은 계속됐다.“네가 그랬지. 나와 함께 보낸 힘든 시절이 당신 인생의 오점이었다고. 내가 네 인생의 오점이라고 했잖아.”부경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이 떨렸지만 소리

  •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제15화

    부경민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회사를 상장시키겠다는 욕심 때문에 원영이를 아프게 했고, 원영이 마음을 배신했습니다. 이제야 제가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원영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제가 보상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감사 문제는 고모님이 뒤에서 손쓰신 거라는 걸 압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받아야 할 벌입니다.”흥분 탓에 목소리가 떨렸다.“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회사에 기회를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을 고치고 사람답게 살 기회를 달라는 뜻입니다.”“원영이와 저에게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자격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원영이 없이는 안 됩니다.”사무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부경민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주희애는 조용히 부경민을 바라보았다.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마음속을 갈라 사과가 진심인지 계산인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오랜 침묵 뒤, 주희애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부 대표,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야. 원영이를 숨기기로 결정했을 때, 성호그룹의 힘을 얻기 위해 이혼을 요구했을 때, 매번 이익을 비교하며 원영이를 후순위에 놓았을 때, 매 순간이 전부 기회였잖아. 하지만 부 대표는 매번 그 기회를 버린 거지.”높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부경민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이제 회사 상장이 어려워지니 후회한다며 찾아온 것이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만약 지금 상장이 성공했고, 원하는 자리까지 올랐다면, 원영이가 부 대표를 위해 했던 희생을 떠올리기나 했을까?”“아닌 것 같아. 아마 그때 원영이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겠지. 지금 나를 찾아와 빌고 있는 것도, 회사가 상장하려면 나를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인데... 그런 마음이라면 돌아가게.”부경민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주희애의 말은 칼처럼 가슴을 찔렀다.부경민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섰다. 급히 부정했다.

  •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제14화

    “정말 그렇게 생각해?”성청아는 충격을 받은 부경민을 보며 더 짙게 비웃었다.“우리 쪽에서 부경민 씨를 포기하는 게 뭐가 이상해? 이미 썩고 냄새나는 말 하나를 붙들고 있다가 우리까지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가서 웃음거리가 되라는 건가?”말 한마디가 심장에 박혔다.한 글자 한 글자가 부경민의 마지막 자존심을 깨부쉈다.부경민은 치밀하게 계산했고, 한 걸음씩 움직였고, 이익을 따져 가며 선택했다.하지만 지금에야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았다.부경민이 목적을 가지고 성청아에게 접근했듯, 성청아 역시 부경민의 가능성만 보았을 뿐이었다.가능성이 사라지자 성청아는 주식을 처분하듯 부경민을 정리했다.부경민 하나가 성씨 집안 앞에서 진짜 오래된 재벌가 네트웍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신흥 부자와 오래된 명문가 집안의 게임에서 부경민은 처참하게 패배했다.그제야 부경민은 자신이 매달렸던 혼담이 처음부터 차가운 거래였다는 걸 알았다. 목적을 가지고 다가간 사람에게 상대도 가치를 따졌을 뿐이었다. 가치가 사라지면 거래는 끝난다. 단순하고, 잔인했다.성청아의 말은 마지막 가림막을 벗겨 냈다. 부경민은 차가운 바람 속에 벌거벗은 채 서 있는 기분이었다. 추악한 속내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실이 그대로 보였다.계산 끝에 얻은 것은 짧고 허망한 이익뿐이었다. 진심은 어디에도 없었다.정말로 부경민을 사랑했던 사람은 이미 부경민이 자기 손으로 밀어내고 내버렸다.부경민은 입을 벌렸지만 목이 메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성청아의 화려한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깊은 피로가 몰려왔다.분노와 억울함, 따져 묻고 싶은 말이 모두 사라졌다.부경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청아를 오래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한 걸음씩 비틀거리며 차로 향하는 등이, 모든 힘을 잃은 사람처럼 굽어 있었다.밤바람이 차갑게 불었다.차는 움직였지만 부경민의 마음은 절망 같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머릿속에 주원영의 얼굴이 떠올랐고, 심장이 세게 오그라들었다.아무것도 없던 자신

  •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제13화

    부경민은 믿지 않았다. 성청아가 이렇게 잔인하고 발빠르게 움직일 리 없다고 믿고 싶었고, 자신이 힘든 때에 떠날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는 성청아는 자신을 그렇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한다고 믿었다.지금 모든 걸 잃은 부경민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여자까지 잃을 수 없었다.반드시 가서 확인해야 했다.대충 옷을 걸쳐 입은 부경민은 차를 몰고 성씨 저택으로 향했다. 서강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와 권력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하지만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았다.성씨 저택은 눈부시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찬란한 궁전 같았다.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철문 밖에는 고급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제복 차림의 직원들이 손님들을 정중히 맞이하고 있었다.누가 봐도 성대한 파티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부경민이 차를 세우자 경비가 막아섰다.“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부경민입니다.”부경민은 이름을 말했다.경비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죄송합니다, 부경민 씨.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며칠 전만 해도 성씨 집안의 귀한 손님이던 부경민은 이제 길 잃은 개처럼 문밖에 세워졌다.그때 한정판 스포츠카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왔다. 차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내렸다.부경민은 알아보았다. 해외에서 막 돌아온 진씨 집안 후계자 진남훈이었다. 진남훈은 젊고 화려한 외모에, 오래된 집안의 자제에게서 보이는 오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경비는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진남훈을 안으로 들였다.밤이 깊어갈 무렵, 파티가 시작됐다. 부경민은 떠나지 않았다. 철문 틈으로 성청아를 보았다.성청아는 고가의 은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완벽했고 웃음은 환했다. 진남훈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성청아의 허리를 감쌌다. 음악이 흐르자 두 사람은 홀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었다. 주변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정말 잘 어울린다. 그림 같아.”“성씨 집안과 진씨 집안 혼담이 괜한 소문은 아니었

  •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제12화

    A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경민은 회사 상장 전까지 출국이 제한된다는 통보를 받았다.하지만 당장 주희애와 주원영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지 못하면, 지한그룹의 현재 상태로는 상장이 불가능했다.주원영은 부경민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고, 부경민의 위치에서는 그들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부경민은 어렵게 주희애의 개인 연락처를 구해 연달아 전화를 걸었다.전화받지 않자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에도 답이 없자 이메일을 보냈다.하지만 주희애는 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절망이 조금씩 부경민을 갉아먹었다. 이대로 앉아서 회사의 상장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걸 볼 수는 없었다.재무총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이제는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지난 감사가 통과되지 않았다면 다른 회계법인을 통해 재감사를 추진해야 합니다. 상장 전까지 최대한 빨리 두 번째 감사보고서를 받아야 합니다.”부경민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 모든 인맥을 동원해 자격 있는 감사기관을 찾았다.곧 효율적이고 ‘융통성 있다’라고 알려진 유명 회계법인, 세림회계법인을 찾았다.“왕 대표님, 부경민입니다. 급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부경민은 목소리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유지했다.전화 너머 왕현배 대표는 웃음으로 말을 돌렸다.[부 대표님, 참 공교롭네요. 요즘 저희 프로젝트가 너무 꽉 차서 인력을 뺄 수가 없습니다.]부경민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곧장 본론을 말했다.“보수는 충분히 맞춰 드리겠습니다. 두 배로 드리죠.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감사보고서가 나와야 합니다. 문제 될 부분 없이요.”왕현배 대표의 웃음이 어색해졌다.[부 대표님, 돈 문제가 아닙니다. 업계에는 업계의 원칙이 있지요. 부 대표님 회사 사정이 조금 특수해서, 저희가 개입하기 쉽지 않습니다.]통화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끊어졌다.부경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국내외 최고 회계법인 네다섯 곳에 잇달아 연락했다. 제시한 금액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이상할 정도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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