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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화 - 그 밤도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23 22:54:45

배열이 거의 같았다.

지안은 한동안 마우스도 못 움직였다.

모니터 불빛만 화면 위에 하얗게 떠 있었고, 빈 사무실은 조용했다. 이런 시간까지 남아서 일한 적은 수도 없는데, 지금처럼 숨이 얕아진 적은 별로 없었다. 이건 누가 설명해 주는 진실이 아니었다. 자기 손으로 열어 보고, 맞춰 보고, 끝내 부정 못 하게 된 쪽이었다.

지안은 창을 닫지 않았다. 파일명을 다시 확인했다. 대학 때 발표본. 예비 슬라이드. 이정환 포트폴리오. 셋 다 눈앞에 떠 있는데도, 머리는 자꾸 다른 쪽으로 갔다.

재하.

그 인간은 이걸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언제부터, 왜 말 안 했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속이 다시 뒤틀렸다. 포트폴리오보다 재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게 더 기분 나빴다. 회의실에서 대답 못 하던 표정. 시선 흔들리던 순간. "있어요." 하고 짧게 인정하던 목소리.

지안은 결국 노트북을 닫았다. 더 보면 토할 것 같았다.

***

다음 날 아침, 재하는 평소보다 더 일찍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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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5화 - 차이

    "걔, 네 앞에서만 조용한 거 아니야."서연 말이 탕비실 안에 오래 남았다.지안은 종이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가 놓았다. 눌린 자국이 금방 펴졌고, 그 별것 아닌 모양이 괜히 눈에 들어왔다.네 앞에서만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침묵도, 무표정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도 전부 자기 앞에서만 만들어 낸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그래서."지안이 겨우 입을 열었다."그게 뭐."서연은 바로 답하는 대신, 지안을 한 번 쭉 봤다. 지금 이 인간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는 얼굴."뭐긴 뭐야."결국 서연이 말했다."네가 자꾸 같은 패턴으로 생각하고 있단 거지.""무슨 패턴?""이용하고 빠지는 쪽."지안은 너무 정확해서 웃지도 못했다. 반박할 문장이 떠오르기 전에 먼저 열이 올랐다. 자기 속을 싫은 방식으로 짚히면 늘 그랬다."야.""왜. 틀렸어?""지금 쟤 편 드는 거야?""아니."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나는 네 편 드는 거지. 네가 자꾸 이미 끝난 상처 방식으로 지금 걸 읽는 게 답답해서."지안은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탕비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얇게 들렸다. 밖에선 누가 프린터를 쓰는지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전부 평범한 회사 소리인데, 지금은 전부 다 거슬렸다."같은 게 아니라고."서연이 낮게 덧붙였다."이용만 하고 빠지는 사람이 자기 쪽 일 먼저 잘리게 놔둬?"그 말이 그대로 꽂혔다.프리랜서 연결 하나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고, 대외 설명 자리에서 빠졌지만, 이유는 다들 돌려 말했다.그걸 다 듣고도 지안은 아직 마음 한쪽에서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결국 너도 네 필요 때문에 움직인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문장이 갑자기 예전만큼 단단하지 않았다."필요가 없진 않았겠지."지안이 툭 내뱉었다."나한테."말을 뱉고 나서도 기분이 더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자꾸 문장이 가서.서연은 한숨도 안 쉬고 받았다."그래. 필요했을 수도 있지. 좋아했고, 미안했고, 그래서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4화 - 세 마디

    지안은 순간 재하 쪽을 봤다. 재하는 이미 화면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손은 마우스를 잡고 있었고, 표정은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대신 들어간 오후 미팅 설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시안 흐름도 알고, 클라이언트 포인트도 알고, 원래 자기 일에 가까웠으니까.다만 설명하면서도 자꾸 한쪽에 찝찝함이 남았다. 원래 여기 재하가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자기만 있는 느낌. 클라이언트가 별말 없이 넘어갈수록 더 그랬다. 다들 그냥 자연스럽게 교체된 것처럼 받아들였다. 회사는 늘 그런 식으로 조용히 사람을 옮겼다.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하를 마주쳤다. 재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지안이 다가오자 바로 화면을 잠갔다."끝나셨어요?""네.""문제 없었죠?""네."짧았다. 딱 일만 확인하는 말. 그런데 지안은 그 말 안에 어딘가 피로가 낀 걸 느꼈다."윤재하 씨."이름을 부르고 나서 지안은 바로 뒷말을 못 이었다. 왜 그랬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자기한테도 애매했다.재하가 먼저 기다렸다."네."결국 다른 말을 골랐다."시안 파일, 최종본 폴더에만 다시 넣어 주세요. 버전 겹쳐서 헷갈려요.""네. 정리해 둘게요."그 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은 같이 탔고, 같이 서 있었지만, 끝까지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좁은 공간인데도 서로 너무 멀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의식 안 하는 척하느라 더 피곤한 쪽.사무실로 돌아오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열리는 그 짧은 시간 안에서 하나가 자꾸 걸렸다.재하의 목소리. 끝나셨어요, 문제 없었죠, 네. 세 마디. 전부 일 얘기뿐.해명도, 변명도, 자기 사정 한마디도 없었다. 대외 자리에서 빠지고, 설명 미팅에서도 밀리고, 그걸 다 알 텐데 지안한테 와서 한 말이 시안 파일 정리 확인뿐이었다.이용하는 사람은 저런 식으로 안 한다.그 생각이 복도를 걸으면서 불쑥 올라왔다. 자기한테 필요한 게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3화 - 대외 빼고

    사진 속 자기 얼굴을 한참 보고 나서야 지안은 노트북을 덮었다.잠은 깊게 못 잤다. 새벽에 두 번 깼고, 한 번은 저도 모르게 운영사무국 메일을 다시 열 뻔했다. 지안은 끝내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좀 정리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더 어색해졌다. 재하를 미워하는 쪽도, 덜 미워하는 쪽도 아닌 상태. 둘 다 아닌데 계속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상태.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지안은 그 어색함이 자기 것만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재하는 자리에 없었다.평소보다 십 분쯤 늦은 시간인데도 노트북이 닫혀 있었고, 의자도 반듯하게 들어가 있었다. 늦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유독 오늘은 그 빈자리가 눈에 밟혔다. 어제까진 그냥 시야 끝에 걸리던 자리였는데, 오늘은 비어 있는 방식까지 읽히는 기분이었다."윤재하 씨 아직 안 왔어?"지안이 별생각 없는 척 묻자 소율이 고개를 들었다."아까 잠깐 왔다가 다시 내려간 거 같던데요? 통화하는 것 같았어요.""그래."답은 짧게 했는데, 시선은 다시 빈자리로 갔다. 통화. 별거 아닌 말인데 공연히 걸렸다. 그 인간이 요즘 바깥 전화 받는 얼굴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건 이미 몇 번 봤다.오전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재하가 들어왔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넥타이 없는 셔츠 깃이 평소보다 조금 더 눌려 있었다.재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켰고, 팀장이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오늘 외부 공유본은 오 대리랑 서연 씨가 먼저 정리해요."팀장이 말하자 지안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재하 씨는 내부 수정본 쪽 더 잡아주세요. 대외 쪽은 잠깐만 빼고."말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업무 조정처럼. 이유도 길게 붙이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티가 났다. 원래 이번 공유본은 재하가 시안 설명까지 같이 붙기로 돼 있었다.사무국 확인 메일이 외부로 돌기 시작한 뒤부터 분위기가 달라진 거였다. 지금 와서 대외 쪽만 잠깐 빼는 건, 굳이 말하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2화 - 확인

    폴더가 열리자 발표본이 버전별로 쭉 떴다.파일명부터 한숨이 나왔다. 최종본이 세 개였다.전부 급하니까 '최종'이라고 붙였던 흔적. 졸업 직전이었고, 발표만 끝나면 다 끝날 줄 알았으니까. 지금 보니 전부 도망치듯 저장한 흔적 같았다.지안은 제일 마지막 버전을 열었다.슬라이드가 천천히 넘어갔다. 첫 장 카피, 서브 문안, 발표 구조, 결론 페이지. 하나씩 보는데 딱히 새롭진 않았다.자기가 만든 거니까 당연했다. 운영사무국 메일 한쪽에 적혀 있던 제출 항목이 자꾸 시야 구석에서 걸렸다.발표 자료 원본. 작업 파일 이력. 팀 메일. 현장 사진. 재하가 낸 순서까지 떠오르는 게 짜증 났다."진짜 순서도 똑같네."지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다음 폴더를 열었다.작업 파일 이력 캡처는 예전 노트북에서 뽑아 둔 이미지들이었다. 생성 날짜, 수정 시각, 파일 경로.평소 같으면 숫자만 봐도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그게 덜했다. 그런 차가운 정보가 나았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적어서.첫 캡처와 발표본 수정 시각을 맞춰 봤다.두 번째 캡처와 메일 발신 시간을 대조했다.세 번째 캡처에서 문안 수정된 흔적을 보고 다시 발표본 페이지를 열었다.한 번, 두 번, 세 번.같은 슬라이드를 계속 오가다 보니 처음엔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카피가 바뀐 지점, 순서가 밀린 페이지, 최종 발표본에만 남아 있는 문장.그리고 그 흐름이 메일 시간과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누가 먼저 정리했고, 누가 그걸 받아 취합했고, 누가 발표했는지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읽히는 구조.지안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계를 보니 폴더를 연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 있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줄줄이 켜져 있었다.여기까진 솔직히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예상과 확인은 다르다.머릿속으로 아는 거랑, 자기 손으로 클릭해서 같은 시간과 같은 문장을 대조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지안은 팀 메일 캡처 폴더를 열었다.제목에 자기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1화 - 거리

    운영사무국 메일 본문 다시 확인.2018 발표본 원본 대조.정환 선배 메일 흐름 재검토.지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둔 세 줄을 다시 읽었다.딱 필요한 말만 남겨 둔 목록인데, 그것만으로도 숨이 좀 막혔다.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걸리는 건 그걸 시작하는 순간 진짜로 확인이 시작된다는 거였다.지금까진 마음속에서만 굴리던 의심이 파일명과 날짜와 메일 제목으로 바뀌는 순간.외장하드를 노트북에 꽂고 첫 폴더까지 열었다가, 지안은 손을 멈췄다.밤이 너무 조용했다. 화면이 밝아서 더 그랬다. 발표본 하나를 열면 아마 끝까지 보게 될 거고, 그러면 오늘은 잠이 안 올 것 같았다.아니, 잠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 회사에서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았다.지안은 결국 파일을 닫았다.대신 운영사무국 메일만 다시 열었다.윤재하 님. 보충자료. 최근 외부 공개자료 변동. 문장은 그대로였다.조금 전 사무실에선 충격부터 왔는데, 지금 혼자 보니까 다른 게 먼저 들어왔다.재하는 정말로 자기 이름을 넣었고, 회사 이름도 숨기지 않았고, 굳이 최근 캡처까지 붙여서 지금 문제로 만들었다.미워하기엔 너무 번거로운 방식이었다."진짜 귀찮게 하네."혼잣말이 작게 새어 나왔다.메일 창을 닫고 노트북 덮개를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확인은 내일 밤에 하자고, 아주 형편없는 타협을 자기한테 했다.확인부터 하겠다고 나와 놓고 하루도 못 버티는 게 웃겼지만, 지금은 그게 맞았다.내일은 출근해야 했고, 재하를 다시 봐야 했다.그 상태로 밤새 파일까지 들여다봤다간 아침부터 얼굴에 다 써 있을 게 뻔했다.다만, 그렇게 접어도 머리는 안 접혔다.윤재하.이름 석 자가 밤새 자꾸 떠올랐다.원래 알던 이름인데, 어제까진 후배 이름이었고, 오늘부터는 운영사무국 메일 안에 찍힌 이름이었다.같은 이름인데 결이 달랐다. 알고 나니 더 낯설었다.***다음 날 사무실은 너무 평소 같았다.지안은 그게 싫었다.다들 똑같이 움직이는데 자기만 다른 속도로 들어온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0화 - 외장하드

    서연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이번엔 네가 네 손으로 봐."그 말이 의외로 차분하게 들렸다. 화를 더 키우지도 않았고, 반대로 진정시키지도 않았다. 그냥 방향만 줬다.듣는 사람 말로 결론 내리지 말고, 네가 직접 확인하라고.지안은 맞은편 자리를 다시 봤다. 재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작업 중이었다.딱 한 번, 마우스를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는 옆선이 눈에 들어왔다.무슨 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도, 그냥 자기 몫을 버티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더 판단이 안 섰다."쟤는 왜 아무 말 안 하지."거의 혼잣말처럼 흘렀다.서연이 바로 받았다."아무 말 안 하는 게 지금 제일 덜 비겁하다고 생각하나 보지."그럴 수도 있었다.재하답다고 하면 재하답기도 했다.적당히 말하고, 적당히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엔 오히려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밀어붙이는 인간.그게 지금 와서 낭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냥 더 복잡했다.회의실 밖에서 팀장이 누구를 찾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사무실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고,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수정안도 남아 있었다. 지금 당장 감정부터 정리할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닫아."지안이 말했다."뭘?""메일."서연이 바로 창을 닫았다. 화면에서 운영사무국 글씨가 사라지자 되레 더 선명하게 남았다.윤재하 님.그 이름 하나가 오늘 하루 내내 머릿속에서 안 빠질 것 같았다.***오후 내내 지안은 재하를 일부러 안 봤다.필요한 말만 했고, 그마저도 모니터만 보고 했다. 재하도 똑같았다. 먼저 설명하지 않았고, 일부러 살피지도 않았다.세 시쯤 지안은 탕비실에서 물을 따르다가 선반 위 커피 스틱 통에 시선이 걸렸다.설탕 반 스푼. 그 조합이 머릿속에 뜨는 데 일 초도 안 걸렸고, 그게 누구 취향인지 깨닫는 데는 찰나면 충분했다.종이컵을 물로 채우고 한 모금 마셨다. 당연하지만 물맛이었다.창 너머로 건너편 건물 옥상 환풍기가 느리게 돌고 있었다.저 건물에도 사무실이 있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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