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만 남은 아궁이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고 부엌 문틈으로 아침 볕이 가늘게 들어올 때까지 앉아 있던 단이는, 봉수가 지팡이 끝으로 부뚜막을 두 번 두드리고서야 일어났다.모아 쥐었던 손을 펴자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물 길어 오너라.”봉수는 그 말만 했다. 아까 한 말을 다시 하지는 않았다. 단이는 빈 물동이를 안고 마당으로 나섰다.마루 끝에 여울이 앉아 있었다. 세수를 마친 얼굴이 볕을 받아 희었다.“단이야, 어디 가느냐.”“물 길러요.”“어제 길어 둔 게 아직 있을 텐데.”“……모자라요.”단이는 여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쪽문으로 갔다. 얼굴을 보면 입이 먼저 열릴 것 같았다. 문 하나 너머로 들은 그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담 밖 우물가에는 세답방 아이들이 먼저 와 있었고, 두레박 줄이 쉬지 않고 삐걱거렸고, 돌 위에 줄지어 놓인 함지들 사이로 물 튀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단이야, 여기.”분이가 두레박을 넘겨주었다. 세답방에서 한 함지에 손을 담그고 같이 빨래하던, 단이보다 두 살 위의 궁녀였다. 볼이 늘 붉었다.“그래서, 알아냈어?”“뭘?”“그 글자. 그저께 그렇게 묻고 다녔잖아. 그거 모르면 잠도 못 잔다며.”단이의 손에서 두레박 줄이 미끄러졌다. 두레박이 우물 벽에 부딪는 소리가 컸다.“몰라. 이제 안 궁금해.”분이는 웃다가 단이의 손을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줄을 다시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너 어디 아파?”“아니.”분이가 함지를 끌어다 단이 곁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근데 단이야. 자경전에서 너를 찾더라.”물동이에 붓던 물이 넘쳐 치맛자락을 적셨다.“……자경전에서?”“어제 자경전 나인이 세답방에 왔었어. 명부를 펴 놓고, 서별당에 간 단이가 어떤 애냐고, 요새 어찌 지내냐고. 그래서 그랬지. 요새 전하 함자를 묻고 다닌다고.”“그걸 왜 말했어.”“왜? 다들 묻던 건데.”단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분이가 단이의 젖은 손등을 제 앞치
내일이라고 한 사람보다 강진이 먼저 깨어 있었다.창호가 희어지고 볕이 들창 턱을 넘어올 때까지 도홍의 발소리는 오지 않았다. 조회가 없는 날이었다. 강진은 일어나지 않았다.여울이 눈을 떴을 때 갈색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밝은 데서였다.“내일이다.”여울은 이불을 끌어 올리려다 그만두었다. 끌어 올려 봐야 눈 아래까지였다.강진은 팔을 베고 누운 채, 볕이 이불 위로 한 뼘 더 들어오도록 기다렸다.여울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밤에는 숨을 수 있던 얼굴이 아침에는 숨을 데가 없었다.“……진.”강진이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낮고 짧은 소리였는데, 웃음 끝이 여울의 이마에 닿았다.“또.”“……한 번이라 하셨습니다.”“그랬지.”강진은 그러고도 비켜 눕지 않았다. 여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눈 아래에서 멈추지 않았다.—단이는 세숫물을 받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방 안에 아직 사람이 둘이었다. 들어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어 대야를 든 팔이 저렸다. 그때 안에서 여울의 목소리가 났다. 작았지만 문 하나 사이라 다 들렸다.진, 하고 부르는 소리였다.뒤이어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단이가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누구의 웃음인지 알고 나서 단이는 대야를 떨어뜨릴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는데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 했다. 여울이 웃게 만든 웃음이었다.문이 열렸다. 단이는 대야를 내려놓고 엎드렸다. 강진은 그 앞을 지나가다 걸음을 멈췄다.“물이 식겠다. 들여가라.”덤덤한 목소리였다. 강진은 쪽문 밖에서 기다리던 도홍에게로 갔다.단이는 세숫물을 들여놓고 부엌으로 갔다. 가는 동안 우물가에서 들은 말이 자꾸 떠올랐다. 전하 함자랑 같은 글자. 무슨 글자인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던 그 글자.부엌에는 봉수가 지팡이를 세워 두고 아궁이 앞에 앉아 부지깽이로 불을 고르고 있었다.단이는 어깨를 올리고 봉수 곁에 쪼그려 앉았다.“어른.”“왜.”“전하 함자가…… 진이세요?”봉수의 손에서 부지깽이가 떨어졌다.“누구한테
문고리가 움직이는 소리를 여울은 등잔 앞에서 들었다.봉수가 채워 준 기름으로 불은 넉넉하게 밝았다. 문이 열리고, 밤의 찬 기운과 함께 강진이 들어왔다.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젯밤에는 종이 뭉치가 들려 있던 손이었다.강진은 문을 닫고 곧장 이부자리로 와 앉았다.“봉수가 마루에 나와 있더군.”“오늘부터 걸으셨습니다. 기름도 어른이 채우셨습니다.”“그래서 밝군.”강진은 그 말뿐이었다. 묻지 않았다. 망건을 풀어 머리맡에 놓는 손이 느렸다.그 물음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울은 그제야 알았다.강진이 먼저 누웠다. 여울이 곁에 눕자 강진의 손이 이불 위로 여울의 손등을 덮었다.여울은 강진 쪽으로 돌아누웠다. 벽 쪽이 아니었다.등잔불이 강진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썹 끝까지 불빛이 닿았다. 낮이면 늘 올려다보던 얼굴이 지금은 여울의 눈앞에 있었다.여울은 입을 열었다. 소리가 되지 않았다. 그 한 글자가 목에 걸려 넘어오지 않았다.두 번째로 열었을 때도 그랬다. 그사이 심지가 한 번 튀었고, 여울은 그 소리에 놀라 입을 도로 다물었다.목에 걸린 글자를 붙들고 있자니 손바닥 한가운데가 간지러웠다. 열 살 무렵 시강원 뒤뜰에서 세자의 손가락이 그 글자를 그어 주던 자리였다. 그날 여울은 끝내 손을 펴지 않았다. 아버지가 읽지 말라 한 글자였다.여울은 이불 속에서 쥐고 있던 손을 폈다.강진의 숨이 길어졌다. 잠이 드는 숨이었다.자는 사람에게라면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듣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 아무도 모르게.여울은 숨을 한 번 들이켰다.“진…….”소리는 작았다. 심지가 타는 소리보다 조금 컸을 뿐이었다.강진의 숨이 멎었다.손등을 덮은 손이 굳었다.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등잔불 아래서 강진은 그대로 있었다.여울의 심장이 저 혼자 뛰었다. 들은 것일까. 듣고도 자는 척하는 것일까.그러다 팔이 여울을 끌어당겼다. 강진의 얼굴이 여울의 어깨에 묻혔다. 어깨에 닿
서별당에서 봉수가 등잔에 기름을 붓던 그 저녁, 선정당 들창 밖으로는 해가 담을 넘어갔고, 한겸은 하루치 기록을 강진 앞에 펼쳐 놓고 마지막 한 장을 넘기지 않고 있었다.“덮지 않은 장이 있군.”“……자경전에서 내명부 궁녀 명부를 들여 갔다 합니다. 해마다 하는 일은 아닙니다.”강진은 기록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서별당 아이는 내 명으로 둔 아이다. 두어라.”“예.”한겸이 마지막 장을 덮었다. 덮고도 잠깐 머뭇거렸다가 물러갔다.강진은 그 머뭇거림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상 위에는 서도에서 온 두 번째 종이 뭉치가 놓여 있었다. 객주에 드나든 자의 이름들이었다. 관찰사 댁 청지기가 두 번, 서관 상인이 셋, 이름을 대지 않은 사내가 하나.이문의 이름은 종이 어디에도 없었다. 청지기가 두 번 다녀갔으면 그것으로 넉넉했다. 아들은 아비보다 조심스러웠다.이름을 대지 않은 사내 옆에 강진은 붓으로 작은 점을 찍었다.—해시 순찰의 발소리가 선정당 담 모퉁이를 돌아 나가고, 도홍이 등롱에 불을 옮겨 붙이자, 강진은 종이 뭉치를 상 위에 그대로 둔 채 일어섰다.“가져가지 않으십니까.”“두고 간다.”어젯밤 종이를 넘기는 동안 여울은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종이 너머로 보이던 그 등이 오늘 낮 내내 눈앞에 있었다.다시 묻지 않기로 정한 것은 강진 자신이었다. 정해 놓고도 서별당으로 가는 걸음은 자꾸 빨라졌다.담 셋을 지나는 동안 순찰이 한 번 비켜섰다. 서별당 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마루 끝 어둠 속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팡이가 먼저 보였다.봉수였다. 강진을 알아보고 지팡이를 짚어 일어서려 했다.“앉아 있어라.”봉수는 일어서다 만 자세로 고개만 숙였다.“걷는군.”“예. 오늘부터 걷습니다.”봉수는 그러고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는지, 지팡이 머리를 쥔 손이 몇 번 고쳐 쥐어졌다. 그러다 창호 쪽을 한 번 보았다.“……방에서 기다리십니다.”그 말만 남기고 봉수는 지팡이를 짚어 뒷방으로 건너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도홍이 곤룡포를 펼치는 동안에도 강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여울은 이불 속에서 일어나 앉아 그 등을 보았다. 문을 나서는 걸음에도 물음은 실려 있지 않았다.—휘정전 앞마당에는 아침 바람이 차게 돌았고, 전각 안은 아뢸 것이 많은 날이라 웅성거림이 길게 이어졌고, 여울은 그 소리 한쪽 끝에서 문턱 안쪽 제자리에 섰다.아뢰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무릎이 당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사간원 정언 하나가 앞으로 나와 홀을 들었다.“전하. 죄인의 처분을 오래 비워 두시니 조정의 뜻이 하나로 모이지 않사옵니다. 처분을 정하시기를 청하옵니다.”전각 안이 조용해졌다. 고개들이 이번에는 여울에게로 왔다. 처분이라는 말이 그 고개들을 오래 붙잡아 두었다.“처분은 내가 정한다.”어좌에서 내려온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적어라.”정언이 물러났다. 고개들도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여울은 돌바닥에 눈을 두었다. 처분. 죽이거나 내치거나 절로 보내거나. 국상 중에 상선이 장부를 펼쳐 일러 주던 세 가지가 그대로 떠올랐다.처분이 내리는 날은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지 않는다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여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뒷목이 서늘했다. 여울은 흰 옷의 늘린 소매 안에서 손을 맞잡았다.—서별당에 돌아오니 봉수가 마루를 걷고 있었다. 지팡이 끝이 마룻바닥을 한 번씩 짚었다.단이가 부엌에서 뛰어나와 팔을 잡으려다 지팡이에 막혔다.“놔라. 걸을 수 있다.”“넘어지시면 허운 나리가 또 화내세요.”“허운이 화내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다.”단이가 할 말을 찾는 사이 봉수는 마루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야 여울을 보고 멈췄다.“여울님.”“걸으십니까.”“허운이 오늘부터는 걸으라 했습니다.”봉수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여울은 그것을 보고도 앉으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걷는 것을 보고 싶었다.—해가 기울자 봉수는 지팡이를 짚고 방으로 왔다. 단이가 들여놓은 기름 항아리 뚜껑을 성한 손으로 열었다.“오늘부터 이건 다
같은 시각 서별당 부엌에서는 단이가 저녁 죽을 젓고 있었고, 솥 긁는 소리 사이로 콧노래가 새어 나왔고, 여울은 마루에 앉아 소매를 걷은 팔을 무릎에 얹은 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손목의 자국은 아침보다 옅어져 있었다. 여울은 걷은 소매를 내리지 않았다.“오라버니, 오늘은 달걀 풀었어요.”단이가 상을 들고 나와 마루에 내려놓았다. 봉수 앞에는 따로 묽게 쑨 그릇을 놓았다. 상을 놓던 단이의 눈이 여울의 손목에서 잠깐 머물렀다. 여울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단이도 묻지 않았다.그러고는 제 숟가락으로 여울의 그릇에서 먼저 한 술을 떠 맛보았다. 날마다 하는 일이었다. 단이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했다.여울은 그 숟가락을 볼 때마다 손끝이 식었다. 오늘도 그랬다.“짜요?”“아니.”“그럼 왜 그런 얼굴이세요.”“맛있어서.”단이가 코웃음을 치고 봉수를 보았다. 봉수는 못 들은 척 죽을 불었다.“참, 우물가에서 들었는데요. 어제 휘정전에서 고을 이름을 고쳤대요. 전하 함자랑 같은 글자를 쓴다고요.”여울은 숟가락을 든 채 단이를 보았다.“무슨 글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른대요. 알아도 말하는 게 아니래요.”“그런 건 묻는 게 아니다.”봉수가 죽 그릇에 대고 말했다. 단이는 입을 삐죽였다가, 여울의 그릇에 물김치를 밀어 놓았다.“어젯밤엔 불도 늦게까지 켜 두셨던데요. 그러다 기름 금방 떨어져요.”“떨어지면 들이라 하셨다.”“누가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죽을 떴다. 단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강진은 해시 순찰이 지나간 뒤에 왔다. 손에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서도에서 온 글이다. 금방 읽는다.”“예.”강진은 등잔 곁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여울이 켜 둔 불이 종이 위로 쏟아졌다. 불빛이 종이를 넘어 강진의 손등과 이마에 닿았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이름이 줄줄이 적힌 종이였다. 누구의 이름인지 여울은 묻지 않았다. 강진도 말하지 않았다.여울은 그 불빛이 종이를 넘어가는 것을 보다가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