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실 사자는 군사보다 먼저 칙서를 펼쳤다.“삭월 왕가가 월하 그릇을 처음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황실의 열여덟 관은 북방 사술을 막기 위한 구휼이었다.”백련제에 모인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사자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삭월의 약패와 아홉째 피리, 생존자 야란을 황실에 넘기라고 했다. 고윤은 삭월 술법에 속아 그릇을 재현한 의원이므로 수도에서 다시 심문하겠다고 했다.“죄를 베꼈으면 죄가 아니게 됩니까?” 명주가 떠난 빈자리에서 연화가 물었다.“황실은 사람을 살리려 했다.”“삭월도 같은 말을 썼을 겁니다.” 운설이 답했다.사자는 삭월 옛 왕가의 붉은 인장이 찍힌 약패를 들어 보였다.“그대들 스스로 증거를 내놓았다. 역적의 처방을 감추면 무한도 같은 죄를 진다.”혈비의 신하들이 칼을 뽑으려 했다. 혈비는 손을 들어 멈췄다. 삭월이 먼저였다는 사실을 부정해 왕국을 지킬 수는 없었다.“우리는 겨울 궁으로 가서 나머지 기록을 열 것이다.”“황실이 먼저 봉할 것이오.”“그대들 봉인이 무엇을 했는지는 열여덟 관이 보여 줬다.”사자 뒤로 궁수들이 늘어섰다.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활시위가 사람들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사자는 백련제에 곡식을 들이는 남쪽 나루를 봉하겠다고 했다. 기록을 내놓지 않으면 사흘 안에 약재와 소금도 끊길 터였다. 물난리를 막 벗어난 사람들에게 칼보다 빠른 협박이었다.연화는 남은 창고 양을 셌다. 약재는 닷새, 곡식은 이레였다. 수레꾼들은 황실 깃발 아래 물건을 옮기면 길을 열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늙은 수레꾼이 깃발을 받아 들더니 수레 덮개로 찢어 썼다.“우리 길은 우리가 고칩니다.”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아이 셋을 먹여야 하는 마부 하나가 황실 쪽으로 갔다. 누구도 돌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져가는 약재와 남은 식솔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 두려움에 고른 길까지 배신 한마디로 지우지 않았다.한겸이 새 장부 사본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한 권을 빼앗아도 다른 손에서 읽을 수 있게
묵할멈이 화로를 엎었다.검은 재가 새 장부와 약패 사이로 쏟아졌다. 사람들이 놀라 물러났지만 그녀는 재 속에 두 손을 넣었다. 불씨가 남아 손바닥을 태워도 멈추지 않았다.“할멈!” 운설이 손목을 잡았다.묵할멈은 뿌리치고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했다.그녀는 빈 종이를 펼쳐 재 묻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겨울 궁, 우물 아홉 개, 그 앞에 쌓인 명부. 젊은 묵할멈이 등잔을 넘어뜨리는 모습. 불길 속에서 어린 혈비와 강보에 싸인 운설을 안고 달아나는 달무리 부인.혈비가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 명부를 태운 사람이 너였느냐?”묵할멈이 고개를 끄덕였다.“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노파의 손이 왕관 모양을 그렸다가 손가락으로 짓밟았다. 왕가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공주에게 말하면 아이도 기록과 함께 사라질 터였다. 왕가가 무너진 뒤에는 혈비가 그 왕좌를 되찾으려 했다. 죄를 말하면 멸문당한 삭월의 억울함까지 더럽힌다며 신하들이 입을 막았다.묵할멈은 그때마다 침묵을 골랐다. 처음에는 아이 둘을 살리기 위해, 다음에는 달무리 부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끝에는 혈비의 왕좌가 무너질까 두려워서였다. 같은 침묵이 해마다 다른 까닭을 입었다.그녀는 목의 오래된 화상 자국을 내보였다. 명부를 태운 밤 붙잡혀 뜨거운 재를 삼켰고, 그 뒤 말을 잃었다. 혈비는 자신을 지키다 다친 충성의 상처로만 알고 있었다.“내가 네 상처를 훈장으로 만들었구나.”묵할멈이 혈비 손을 밀어냈다. 지금도 자기 죄를 왕의 슬픔으로 바꾸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를 지키려고?”묵할멈은 혈비와 운설을 번갈아 가리켰다. 두 공주를 지키고 싶었다. 달무리 부인이 맡긴 아이들을 또 우물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야란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래서 우리 이름도 태웠습니까?”묵할멈의 어깨가 무너졌다.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려 했다. 야란이 마른 발로 그 앞을 막았다.“절하지 마세요. 이름을 돌려주세요.”묵할멈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 목에서 공기만 빠졌다
“나도 여덟 살이었다.”혈비가 끝내 그 말을 꺼냈다.야란은 운설이 감아 준 베를 가슴에 대고 있었다. 약패를 꺼낸 상처에서 피가 천천히 배었다.“알고 있습니다.”“어머니가 죽는다고 했다. 다시 내려가면 너도, 나도, 내 아우도 죽는다고.”“그 말을 믿었겠지요.”“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러셨겠지요.”야란은 한 번도 비웃지 않았다. 그래서 혈비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그럼 무엇을 어쩌라는 거냐. 여덟 살 아이에게 왕가를 거슬렀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냐?”“아닙니다.”야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쇠침상에서 발이 떨어지는 데만 스무 숨이 걸렸다.“지금의 당신이 그 아이 뒤에 숨지 말라는 겁니다. 아이였다는 말은 당신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물에 남은 아이를 돌려주지는 않습니다.”혈비는 벽의 푸른 새를 돌아보았다. 그 새를 그린 손이 너무 작았다는 것을 이제야 보았다. 작아서 죄를 다 질 수 없었고, 작다고 해서 본 일이 사라지지도 않았다.“나는 무엇부터 해야 하지?”“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또 우물 아래 사람에게 왕이 할 일을 골라 달라는 셈이 됩니다.”야란은 단호했으나 곧 숨이 끊겼다. 운설이 등을 받쳤다. 혈비도 손을 뻗다가 아직은이라는 거절을 떠올리고 멈췄다.운설은 언니를 감싸지 않았다.“우선 위로 나가요. 야란 님 몸이 이곳 공기를 더 견디지 못해요.”“너도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하느냐?”“지금은 의원에게 묻는 말이 아니에요.”“아우에게 묻는 거다.”운설의 시선이 약패에 떨어졌다. 어머니의 수결을 쥔 손이 식어 있었다.“아우도 지금 어머니가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어요. 언니 죄를 덜어 줄 여유가 없습니다.”혈비가 처음으로 운설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사람들은 야란을 천에 눕혀 우물 밖으로 올렸다. 왕실 들것을 가져오자 그녀가 거절했다. 백련제 수레꾼들이 빈 창고 문짝을 떼어 들것으로 썼다. 혈비는 맨 뒤에서 밧줄을 잡았다. 손바닥 굳은살이 터져도 놓지 않았다.바깥에는 황실 판관과 삭월 신하들이 기다리
혈비는 떨어진 왕패를 줍지 못했다.야란의 희고 검은 두 눈이 그녀 손을 따라갔다. 왕패를 쥐던 굳은살, 여덟 살 아이가 우물 벽에 푸른 새를 그리던 손이었다.“보았다는 말부터 하십시오.”야란의 목소리는 오래 쓰지 않은 문짝처럼 갈라졌다.“무엇을?”“저를.”혈비의 입에서 숨이 거칠게 빠졌다.“보았다.”“그리고 갔지요.”“끌려갔다.”“저도 끌려왔습니다.”짧은 두 마디가 우물 안에서 부딪쳤다. 혈비는 자신도 아이였다고 말하려다 삼켰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야란이 겪은 세월을 자기 여덟 살로 덮게 될 터였다.운설은 야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맥은 한 방울씩 왔으나 깨어난 몸은 빠르게 늙기 시작했다. 손등의 살이 마르고, 검었던 머리카락 끝이 눈앞에서 희어졌다.“계속 말하면 몸이 더 아플 수 있어요.”“입을 닫으면 또 몇 해입니까?”“이번에는 당신이 정해요.”야란은 열두 숨을 기다렸다. 한 번 온 맥이 지나가자 다시 입을 열었다.그날 우물 아래에는 아이가 둘 있었다. 왕가 의원들은 둘 가운데 한 사람만 새벽까지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어린 혈비가 문틈으로 들어왔고, 울고 있는 야란에게 푸른 돌가루로 새를 그려 주었다. 그 뒤 어른들이 들이닥쳐 공주를 데려갔다.“다른 아이는 누구였습니까?” 한겸이 물었다.야란의 눈이 혈비에게 머물렀다.“그 이름은 공주님이 먼저 찾아야 합니다.”혈비가 주먹을 쥐었다.“기억나지 않는다.”“왕은 기억나지 않으면 없는 사람으로 만듭니까?”“왕이 되기 전 일이야.”“그래서 효월 공주님이라 불렀습니다.”혈비는 더 맞서지 못했다. 왕이라는 자리도, 아이였다는 나이도 야란 앞에서는 숨을 문 하나씩 더 세울 뿐이었다.묵할멈이 야란 발목 쇠를 풀려고 했다. 녹슨 고리가 살과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선우현이 칼을 찾듯 허리춤에 손을 댔다가 빈 곳에서 멈췄다.“톱을 가져오지.”“쇠부터 자르면 피가 터져요.” 운설이 말했다. “살을 먼저 불려야 해요.”선우현은 즉시 위로 올라갔다. 칼로 한 번에 끝내던
아홉째 이름은 물을 부을 때마다 달라졌다.연화로 보였다가 연비, 다시 야란으로 번졌다. 혈비는 마지막 두 글자에서 손을 거두었다. 묵할멈이 그 이름을 보자마자 백련제 아래쪽 수뢰를 가리켰다.“그곳은 전부 열었습니다.” 한겸이 말했다.묵할멈은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 아홉 개를 펴고 바닥 밑을 두드렸다. 여덟 수뢰 아래에 하나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사람들은 물이 빠진 중심 고리로 돌아갔다. 연화가 지켜 온 아홉째 피리를 홈에 대자 구멍 하나가 맞지 않았다. 진눈이 자기 피리를 거꾸로 붙였다. 두 피리의 숨구멍이 겹치며 바닥 아래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돌판을 들어 올리자 우물 하나가 드러났다.물은 없었다. 벽을 따라 쇠사슬과 마른 약초가 층층이 걸려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쇠사슬에는 이름패 대신 나이가 매달려 있었다. 여섯, 아홉, 열둘. 가장 큰 수도 열다섯을 넘지 않았다. 혈비가 하나를 만지자 녹슨 패 뒤에서 삭월 왕가의 작은 반달이 나왔다.“죄수 수뢰가 아니었어.”묵할멈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죄수였으면 나았겠느냐는 얼굴이었다.운설은 벽의 약초를 살폈다. 아이의 키를 멈추고 맥만 오래 이어지게 하는 마른 뿌리가 줄마다 섞여 있었다. 황실 월하 약전보다 더 거칠고 오래된 처방이었다.“고윤이 처음 만든 게 아니에요.”한겸이 횃불을 들어 패와 약초를 함께 비췄다. 위에서 기다리던 황실 판관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연화가 돌판 입구를 지켰다.혈비가 먼저 내려가려 했다. 흑요가 앞을 막았다.“왕이기 전에 이곳을 아는 사람입니까?”“모른다.”“그럼 아는 척 앞서지 마십시오.”묵할멈이 첫발을 디뎠다. 운설과 선우현, 한겸이 그 뒤를 따랐다. 혈비는 네 번째로 내려갔다. 누구도 그녀를 위해 길을 비우지 않았다.일곱째 계단에서 혈비의 발이 멎었다. 벽에 어린 손으로 그린 새 한 마리가 있었다. 날개 한쪽이 푸른 돌가루로 칠해져 있었다.“내가 그렸다.”기억이 없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장부에는 첫 줄이 없었다.누구 이름을 위에 놓을지 정하지 못해 여덟 칸을 둥글게 그렸다. 가운데에는 빈자리를 남겼다. 황실과 삭월이 서로 봉인을 찍으려 했던 자리였다.“비워 두면 나중에 힘센 자가 차지합니다.” 한겸이 말했다.여리가 가운데 칸을 통째로 오려 냈다.“그럼 앉을 자리도 없게 만들지.”종이 한복판에 구멍이 뚫렸다. 사람들은 그 둘레에 이동, 치료, 빌려줌, 넘겨줌의 조건을 적기 시작했다.여리는 자기 침을 다른 의원이 쓸 때 사흘 안에 돌려받겠다고 했다. 진눈은 피리를 불 수 없는 날에도 누구도 대신 숨을 넣지 못하게 했다. 타간의 조각은 석잔촌 우물 밖으로 나가려면 환자 셋과 우물지기 둘의 수결이 필요했다.누리는 자기 손목 속 쇠를 빼는 치료를 받을 수 있으나, 빼낸 조각을 의원이 보관하지 못한다고 적었다. 마르간은 서쪽으로 돌아가며 어디에도 위치를 알리지 않을 권리를 요구했다. 사람들이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는 반문했다.“찾아올 수 있는 자가 지키러만 올까?”결국 정확한 곳은 숨기고, 한 달에 한 번 자신이 고른 증인에게 살아 있다는 표식을 보내기로 했다.표식도 한 가지로 정하지 않았다. 첫달에는 검은 돌, 둘째에는 말린 쑥, 셋째에는 빈 종이를 보내기로 했다. 같은 표식을 오래 쓰면 누군가 가로채 대신 보낼 수 있었다. 마르간은 자신을 믿지 못해 만든 조건이 마음에 든다며 세 물건을 품에 넣었다.더운돌의 아내와 누이는 장갑을 공동으로 지녔다.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자동으로 갖는다는 문장을 지웠다. 그때 다시 가족과 화로지기들이 묻기로 했다.묵할멈은 수결 대신 숯 묻은 손바닥을 찍었다. 글을 읽어 주는 증인을 매번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사람이 같은 거짓을 오래 들려주지 못하게 하려는 조건이었다.흑요의 칸만 오래 비었다. 그녀는 조각 반쪽이 명주에게 남았으니 자기 뜻만으로 정할 수 없다고 했다. 배가 흑수촌에서 돌아올 때까지 양도하지 않고, 칼로 쓰지도 않겠다는 한 줄만 썼다.“명주가 돌아오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