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이렌이 울렸다.
위이잉-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불협화음의 사이렌 소리가 병동 전체를 울렸다. -격리 해제, B-2 구역 통제 불가, 전 구역 경계 수치 하락. 차가운 금속성의 경보음이 울리자 시현은 망설임없이 문고리를 밀고 나갔다. 폭주가 시작됐다. 쾅, 쾅- 시현은 순간 뒤돌아보지도 않고 빠르게 걸었다.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흰 가운이 강한 바람에 흔들리고 시현의 손이 보안카드를 꾹 쥐었다. 고막을 찌르는 경보, 뛰어다니는 병동 보안 요원들, 유리 깨지는 소리와 도저히 사람의 것이 아닌 비명. 그 혼돈 속에서 그는 마치 유령처럼 걸었다. 누구보다 조용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고, 아무것도 그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 광기 어린 붉은빛이, 깊은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오늘은 내가 가.’ *** ‘뭐야, 보안 요원들이 왜 하나도 없어?’ 당황한 도희가 숨을 들이마셨다. 몇 명 죽일 각오를 하고 왔는데, 막상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했다. 더욱 더 경계를 하게 만드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경보 사이렌 소리만이 들려올 뿐. ‘뭐지?’ 연신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으나 도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현이 있는 병동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잘 됐지. 뒤도 안 돌아보고 뛰는 거야. 도희는 병동 건물에 들어갈 때까지 정말 단 한 명의 보안 요원도 마주치지 않고 너무나도 손쉽게, 허망할 정도로 쉽게 들어왔다. 도희는 직감했다. 병동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다행이다. 운 좋았어.’ 이젠 그를 찾으러 갈 시간. 병동 입구에서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동시에 시현을 만났던 그곳이 어디였는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계가 좌표를 만들듯 그녀의 머리도 똑같이 병동 위치를 그려냈다. ‘맞아, 거기였어. 당직실 쪽.’ 지금은 새벽 3시 23분. 도희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턱- 누군가가 도희의 팔을 거세게 낚아챘다. 도희가 놀라 그 그림자를 올려다보는 순간. “당신이 왜 여기…….” 백시현이었다. 놀란 가슴이 가라앉고, 도희는 그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고 싶어서 여기로 왔는데. 신의 부름처럼 시현을 만났다. 그것도 병동 1층 로비에서. “이리로 오세요.” 병동 전체가 봉쇄될 것이다. 사이렌은 미친 듯이 울려대고, 보안 요원들의 인력이 대부분 여기로 올 것이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단 생각이 들어, 시현은 그녀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향했다. 병동 바깥으로 나간 뒤 통제구역 쪽으로 오자 시현은 도희의 팔을 놓아 주었다. 제법 강한 힘으로 움켜쥐고 있었던 터라, 왼팔이 욱신거렸다. 그러나 좋았다. 시현을 다시 만난 것도, 그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을 꽉 잡은 것도 다 좋았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문 부수고 들어왔죠.” “……부수고……?” “네.” 당당한 도희의 말에 시현은 말을 잃었다. 이 여자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알아서 나타나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시현의 심장이 뛰었다. 완벽하게 규율을 어긴 도희를 보자마자, 시현의 가슴 속에서 불이 일었다. 그리고 불길은 점점 커져가는 중이다. “이상하게 경비가 허술하더라고요. 여기까지 대놓고 뛰어오는데 아무도 못 봤어요. 근데 보니까 병동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 개판이던데.” 도희의 말에 시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를, 시현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이니까 당연한 소리였다. 문득 시현이 웃었다. 도희와 시현의 생각이 잘 맞물려 돌아가는 게, 신기했다. 시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내가 했어요.” “뭘요?” “보안 요원들 눈 돌리려고. 일부러 실험체 하나를 폭주시켰어요.” “……혹시 나 오는 거 알았어요?” “아니요. 몰랐습니다.” 그저 시현은 자기가 먼저 M구역을 빠져나가 도희에게로 가고 싶었을 뿐이다. 도희를 위해서라거나, 그녀가 쉽게 여기에 오도록 도와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시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용한 수단일 뿐이었다. “……와.” 도희가 낮게 웃었다. 그러니까, 날 위해 한 일도 아니라는 거잖아. 시현은 도희를 도와주려는 게 아니었지만, 의도치 않게 도희는 그의 도움을 받았다. 둘 다 직감했다. 이 우연은 우연이 아니었다. 광기가 광기를 알아보듯, 도망치려 해도 이미 늦었다. ‘운명이야.’ 도희는 그렇게 믿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이 남자가, 이젠 도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이제 시현은 도희에게 단순히 ‘같은 부류’ 사람 같은 게 아니었다. “시간은 꽤 벌었을 겁니다. 그 실험체가 저렇게 각성한 적이 없어서.” “큰 사고 친 거 아니에요?” 시현이 웃었다. 그 미소엔 역시나, 광기가 보인다. “내가 했다는 걸 누가 아는데요.” 도희가 하, 웃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그쪽도 미친놈이죠?” 목소리가 맑다. 혀 끝에 기묘한 애정이 달린 목소리다. “네, 미친놈이에요.” 시현은 그 말에 아주 천천히 미소를 그렸다. 그 안에는 설명도, 부인도 없었다. 작게 남은 불씨에 기름이 부어지고, 이제는 거대한 불이 되어가고 있었다. “실험체에 뭘 한 거예요?” “각성제 투입했어요. 조금만 과열되면 터지는 약이에요.” “……의사 맞아요?” “외과 전공입니다.” “미친 사람 같네요.” “맞다니까요.” 도희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시현의 눈동자가 그녀를 정확히 겨누었다. 하지만 그 안엔 탐닉이 있다. 그 시선에 도희는 웃지 못했다. 온몸이 서늘하게 전율했다. 아플 정도로 짜릿한 감각이 그를 받아들이는 눈에서부터 시작해 몸 전체로 퍼졌다. “왜 그랬어요?” 도희의 이어지는 질문. 시현은 담백하게,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보고 싶어서.” “그 정도로?” “그 이상으로.” 정상 범주의 대화가 아니었다. “알아봤죠?” 도희의 그 말뜻을 시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둘 다 알고 있다. 그 질문의 본질이 뭔지. “네.” 도희는 기뻤다. 나만 알아본 게 아니구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었구나. 마주한 시현의 눈. 하얗게 변해버린 백발, 창백한 얼굴, 그 속에 어렴풋이 스며든……. ‘분홍색?’ 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꿰뚫던 시현의 눈에서 미묘한 분홍색이 보인다. 검정색 사이로 숨어다니는 연한 분홍색을. “눈동자에서 분홍색이 보여요.” “그쪽은 강화인간이라 보일 겁니다. 어두운데도 잘 보이나 보네요.” “당신도 강화인간이에요?” “2단계.” 방사선과 약물 때문에 색소가 파괴되어 머리는 희게 변했고 검은 홍채는 약한 분홍빛이 돈다는 설명과 함께. 그 분홍색을 알아본 사람은 도희가 처음이었다. 강화인간이라 해도 잘 모를 정도로 약한 색인데. “언제부터…… 알아봤어요?” 도희가 다시 물었다. 어느새 대화는 도희의 질문과 시현의 대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둘은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부터요.”“놀이공원 가고 싶어.”“놀이공원? 갑자기?”거처에서 조용히 총기를 분해하다 다시 조립하기를 반복하던 도희였다.철컥, 철컥, 탁.다시 탁, 탁.절그럭.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도희가 만지는 총열과 그 부품들의 소리만 침묵을 채웠다.그녀는 혼자 있거나 심란할 때 강박처럼 총기 분해를 하곤 했다.모든 걸 풀어헤쳤다가 하나 둘 역순으로 조립하는 게, 마음을 정리해 나가는 것만 같아서였다.그런 도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맥락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놀이공원.옆에서 메스를 닦던 시현도 어리둥절해 소독약을 묻힌 거즈를 툭 떨어트렸다.“응, 놀이공원. 가서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도.”말이 안 된다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남은 총기 부품을 탁 쑤셔넣었다.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희의 작은 목소리가 묻혔다.“못 타는 건 나도 알아.”하지만 강화인간인 시현의 귀에 그게 안 들리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그날 밤, 시현이 앉은 모니터에는 좌표와 화살표가 빼곡했다.마냥 떠돌아다니던 시현에게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다.‘남쪽에 하나, 이 근처에 하나.’그가 찾는 것은 오늘 도희가 무심코 던졌던 그곳이었다.꿈과 환상의 나라.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다 죽어버려 콘크리트 황무지가 된 이곳에서 꿈과 환상이라니.그러나 시현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찾아낸 건 두 군데.은신처 바로 옆에 놀이공원이 하나 있었지만, 혁명군의 기지로 쓰이고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소리가 펑펑 터지던 곳이었다.거긴 패스.다른 곳은…….바쁘게 돌아다니던 시현의 눈동자가 한 점에서 멈췄다.점선과 파란 위치 아이콘이 가리키는 곳, 그 아래 숫자는 17min.한강을 건너면 보이는 곳이었다.‘여기다.’근처에는 호수와 강이 있고 복합쇼핑몰과 병원들까지.새로 거처를 잡을 후보지도 차고 넘치는 곳.‘군부대는 없지만…… 폐벙커와 기지가 많아. 여기서는 의약품을 챙길 수 있고 여기서는 생필품
시현과 도희는 산책 중이었다. 날씨가 좋았다. 잿빛이 된 거리와 달리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빛은 적당히 따뜻했다. 도시가 망가지든 말든, 나무와 풀은 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엽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단풍은 이파리를 따라 제 영역을 넓혔다. “단풍 봐, 벌써 날씨가 시원해졌나 봐.” “예쁘다.” “그치? 진짜…….” “단풍이겠냐.” 시현이 픽 웃으며 도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 도희의 얼굴이 단풍을 닮아갔다. “가, 갑자기 뭐래…….” “싫어?” 그리고 언제나 시현이 한 수 위였다. “싫으면…… 안 하고.” “누가 싫대?” “그럼, 좋아?” “……응.” 도희의 대답이 시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돌아왔다. “방금은 당황했을 뿐이야. 네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도도한 고양이가 오늘은 삐끗, 헛발질을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그의 팔에 팔을 걸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 폐허는 말없이 둘을 외면했다. “근데 여기 호수, 괜찮다. 벚꽃 피면 진짜 예쁠 것 같아.” 도희가 말했다. “다음 봄에도 오면 되지.” 다음 봄이라는 그 말에 도희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시현의 그 무거운 말 앞에 모두 삼켰다. 도희는 그저 시현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도희…….” 시현이 도희를 부르려다 멈췄다. 불길하면서도 기괴한 소리에 시현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드론이야.” 시현의 목소리에 경계가 서렸다. 작게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아직 저놈은 우릴 발견하지
“아으, 여기면 되겠지? 거리도 나쁘지 않고, 인터넷 되고.”버려진 한 기지.민기는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콜록거렸다.몇 시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인터넷이 되는 기지를 찾았다.근무 대기 신청을 해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무기들을 챙겨 그는 정보국을 몰래 탈출했다.삼엄한 경비와 두꺼운 장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민기는 어찌저찌 그 장애물들을 전부 통과했다.사실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뭔가 부서졌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고함을 쳤던 것 같기도 한데.결국 남은 건 팔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들.“아, 이거 귀한 건데 기스 났네. 이게 얼마짜린데, 하…….”탈출하면서 비싼 기기에 흠집도 났다.투덜거리던 민기가 대충 말아둔 모포 더미에 풀썩 주저앉았다.사사로운 정의감이나, 목숨을 건 탈출 따위의 같잖은 헛소리는 민기의 것이 아니었다.죽기를 각오한 건 맞지만, 그런 진지함을 가지고 이 낡아빠진 폐기지로 온 거라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어디 보자…… 전원 버튼이…….”수석 해커를 괜히 단 그가 아니었다.기계라면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굴릴 수 있는 민기였다.OFF에서 멈춰 있던 글자가 ON으로 바뀌는 순간.-환영합니다. 재부팅을 시작합니다.이것저것 전선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깔아놓자 그제야 민기는 거울을 보았다.거울에 쌓인 두껍던 먼지가 민기의 손길에 후두둑 떨어지자 그는 천천히 금속탐지기를 들었다.직접 해킹하고 개조한 탐지기였다.탐지기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자 탐지기가 곧 울렸다.목덜미에서 징징대던 탐지기는 귀 뒤로 올라가자 미친 듯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정보국 요원이었던 민기조차도 몰랐던 칩의 위치.‘거기구나. 귀 뒤에.’거울 속 민기가 씩 웃었다.곧 그는 칼을 들었다.라이터로 칼을 소독한 후, 그는 고른 한숨을 내쉬었다.무겁지 않은 한숨이었다.“괜찮아.”내 궁극의 반항은 내 몸을 해킹하는 것.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그걸 잘 아는 민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거침없이 칼로 피부를 도
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소연의 사무실.손이 초조하게 바빴다.키보드를 두드렸다가도 패드를 들었다가, 손톱을 딱딱 물었다.-1중대 2소대 전멸. 확인 생존자 없음. 수배자 시신 확인 실패.군부대들이 가져온 건 두 연놈의 시신이 아닌 차가운 실패의 데이터.그 둘의 허튼 총질에 엘리트 부대원들이 죄다 사냥당한 것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피해는 입힐 줄 알았는데.’시신은커녕 피해를 입혔다는 보고조차 없었다.소연은 더 이상 무식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손톱을 찢던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본부가 적막에 뒤덮였다.‘안 되겠다. 무력으로는 감당 안 돼.’소연의 결론에서는 되찾은 평정이 짙게 깔렸다.보고서에서는 단순히 실패만 적혀 있던 게 아니었다.‘타깃 1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고, 타깃 2는 그 소리에 유인된 아군들을 후처리한다. 살상보다는 기능 상실 유도. 타깃 1이 간혹 성급하게 행동하나 타깃 2는 강화된 시야로 아군 공격을 차단하고…….’백시현, 한도희 그 둘의 공조는 소대 하나쯤은 전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폭탄은 약물의 독성을 퍼트리고 약물은 화약을 터트리는 이치.‘그러니 내가 뭘 해야겠어. 머리를 써야지. 둘이 다시는 못 만나게. 그게 힘으로 되겠어?’그것이야말로 소연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백시현, 한도희 둘 정보 다 긁어와. 쓸데없는 정보여도 돼. 입대하고 활동 시기까지 전부 다 싹싹 모아서 가져와.”소연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말끝에 차가운 한숨이 뱉어졌다.그녀의 말에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요한 살의는 여전히 눈앞의 실패 보고서를 쏘고 있었다.소연의 입술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터졌다.이런 패배를 안겨준 놈들은 처음인지라 분노와 흥분이 뒤엉켜 난리를 부렸다.“최대한 빨리 드리겠습니다.”“그래.”두 수배자 때문에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해 무장한 군대가 서울과 그 근방을 장악했다.이미 사살 당한 의심 인물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위급한 상황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 팀원들은
“으아악!”퍽-“아악!”“……허.”도희가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그녀가 더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백시현, 그의 살육이 본색을 드러냈다.마취제와 독이 섞인 주사기를 목에 꽂아넣어 적의 신경을 끊었다.허리춤에서 꺼낸 수혈 튜브로 목을 조이며 숨을 틀어막고, 그 순간 뒤에서 기습하려던 다른 적을 가뿐히 피하며 메스로 동맥을 갈랐다.“컥! 여, 여기! 도와줘!”시현의 살인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마음껏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몸부림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그리고 그 시간 속 인간은 천천히 시드는 것이었다.피의 분수 한가운데 이질적인 그의 무표정이 차가운 죽음을 내렸다.손끝마다 둔탁한 총소리를 내는 도희와 사뭇 달랐다.정확하게 어딜 노려야 사람이 죽는지, 어딜 찔러야 사람이 불구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시현의 몸놀림은 최소화되고, 깔끔한 움직임 한 번에 피가 튀었다.관절이 무너지고 근육이 찢기며 피가 역류했다.“뭐야, 내가 할 게 없잖아.”도희가 총을 집어넣었다.총 대신 꺼낸 칼날에 흥미어린 도희의 미소가 비쳤다.시현의 도구는 치료도, 죽음도 구분하지 않았다.“억!”또 한 줄의 동맥이 잘려나갔다.탕-튀어나오려던 마지막 비명은 도희가 가져가 버렸다.시현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면, 도희는 그저 파괴 그 자체였다.둘의 속도가 다르고 리듬도 달랐지만 단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다.원래 그게 그들이 맞물리는 방법이라는 듯이.어느새 사방은 고요해졌다.바닥은 피로 질척거렸고 여기저기 급소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먼지와 땀, 피가 섞여 공기가 불쾌하게 끈적거렸다.그러나 시현과 도희 둘 다 살갗 한 번 베인 흔적조차 없었다.완벽한 승리였다.쓰러진 적들의 시체를 하나, 둘 밟고 도희가 지나왔다.바람에 그녀의 옷이 펄럭였다.찢어진 군복과 옷이 길게 늘어져 휘날리고, 발목을 휘감았다.피와 살 위로 신성한 광기가 걸어왔다.“너 공주 같다.”“뭐?”도희가 귀를 의심했다.하지만 시현은
다음날 아침.도희의 시선이 조용했다.붉게 젖은 붕대로 향한 시선이 점차 확신으로 떠올랐다.“야. 나도 의술 배울래.”“뭐?”시현이 고개를 들었다.“너도 다칠 때가 있을 거 아니야. 너 혼자 치료하는 것도 무리일 거고. 나도 배워서 너 치료할 거야.”시현은 그 속에 숨은 진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그는 알면서도 괜히 물었다.“왜?”“너 다칠 수 있게 하는 것도, 고치는 것도 나 하나여야 되니까.”시현이 천천히 일어났다.시선은 완벽하게 도희를 조준하고 있었다.기괴하게 꺾인 사랑이 대답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폐를 짓눌렀다.시현은 벌떡 일어나 자기 품 안에 도희를 옭아맸다.죽을 만큼 간절하게.“그거야. 그거야, 한도희.”그리고는 자비 없는 키스를 쏟아부었다.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물 때마다 도희가 움찔거렸다.부드러운 입술에 상처를 내면 도희는 시현을 더 꽉 끌어안았다.아픈 키스.도희가 좋아했던 열락.“도희야. 숨 막혀?”“조금.”그러나 시현은 배려해줄 생각이 없었다.“그럼…… 내가 네 숨까지 다 빼앗았다는 거지?”“뭐, 그렇지?”시현의 입꼬리가 솟았다.그 미소가 도희를 마취시킨 순간, 억센 힘이 그녀의 얼굴을 당겼다.도희의 숨이 턱 막혔다.시현 역시도 그녀의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뚝 끊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