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한도희는 피에 젖은 군복을 질질 끌며 문을 걷어찼다.
그 문은 철판이었고, 도희의 발도 군용 부츠였는데 이상하게 문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
안에서는 피 냄새가 뜨겁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냄새 위에, 달콤하게 미친 웃음이 가볍게 얹혀 있었다.
백시현은 조용히 피 튀긴 얼굴을 들었다.
불 꺼진 방에서 그의 눈만 유난히 맑았다.
마치 좋은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너 왔네.”
도희는 방바닥의 시체들을 스치듯 보았다.
심장이 뜯긴 놈, 척수가 잘린 놈,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헉헉거리며 살려달라 기어오는 놈.
“혼자 다 했어?”
“응. 지루해서.”
도희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총을 발끝으로 밀어 올려 잡았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놈의 머리통을 겨눴다.
“살려줘…….”
“살려달래.”
“죽일까?”
시현은 메스를 닦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도희야. 그건 네 몫이 아니지. 오늘은 내가 하고 싶어.”
도희는 총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더니 시현의 턱을 엄지로 툭 밀었다.
피가 튀어 손톱에 고였다.
“오늘 너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들어오는 소리 들리니까 더 미쳤지.”
둘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포개졌다.
시체 위에서.
피 웅덩이 위에서.
군 병동 지하의 썩은 공기 속에서.
시현은 다시 메스를 들었다.
이번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우리 어디로 갈까?”
도희가 웃었다.
“몰라. 근데 너랑 있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아.”
“내가 데려갈까?”
“응. 날 좀 망가뜨려봐. 이 지옥을 먼저 때려부수기 전에.”
시현은 도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도희는 건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시현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아주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지옥에서 기다릴게.”
***“에러코드 442. 감정 통제 이상 감지됩니다. 반응 임계치 초과. 세부 경로, 섹터 2.”화면에 뜬 글자들과 숫자들, 그리고 붉게 울리는 'Warning' 이라는 신호.
경고 사인을 읽은 연구원이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었다, 백시현.
금속성 기계음이 일정한 음으로 메아리치고, 곧 길거리에는 드론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익숙하게 메스와 주사기를 정리하던 시현의 이마에 붉은 레이저가 쏘였다.
수틀리면 그 레이저가 찍힌 이마에 안정제가 박힐 것이다.
그러나 백시현은, 웃었다.
“또 에러가 났다 이건가…….”
드론에서 경고음이 터져나왔다.
감정도, 높낮이도 없는 차가운 음색.
-경고. 감정 과다. 제어 바랍니다. 경고, 감정 과다. 제어 바랍…….
“……시끄럽게…….”
시현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놓인 흰 약을 아무렇게나 입에 털어 넣었다.
-전파 감지. 안정 수치 돌아옵니다.
드론에서 안정 수치가 돌아온다는 기계음과 함께 그의 이마를 겨누던 레이저가 사라졌다.
드론은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복귀했다.
드론이 돌아가고 나자 시현은 마지막 남은 은빛 메스를 가슴 쪽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는 아주 작게 웃었다.
“에러라…….”
감정을 억제하는 약은 그에게 필수였다.
이번에도 그는 약을 먹어야 했다.
칩조차 그의 광기 서린 감정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쾌감이겠지.”
다시 오류를, 에러를 낸 자신의 감정이다.
정교하고 견고하게 설계된 칩조차 뚫고 나오는 자신의 광기.
그 순간에 그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 2118년, 대한민국.통일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된 한국은,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지배하려 들었다.
더 이상 감정은 없다.
민족은 만났으나 자유는 없다.
남쪽이 북쪽을 흡수한 결과치고는, 꽤나 어두운 현실이었다.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다.
감정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2118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파격적인 제도를 내놓았고 반발 속에서 하나 둘씩 감정을 잃어갔다.
뉴스는 매일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다.
“오늘도 안정 지수를 초과한 감정 표출자 5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지속적 안정 지수 초과한 표출자 중 4명의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정서 안정 칩 미이식자 추적 중, 국민 제보 협조 바랍니다. 또한 감정 로그 미제출 시 통행제한이 강화될 예정입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하다.
웃음은 가짜였으며 눈물은 범죄다.
한때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던 것이라 했었다.
지금은 통제의 대상이며, 감시의 이유가 되었다.
“국가는 지금껏 분단되어 왔던 국민을 전적으로 보호하고 빠른 단일화를 진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가 허락한 감정만이 ‘건강한 시민’의 조건이다.
불안, 분노, 슬픔, 증오는 반역이다.
웃음, 행복, 기쁨은 질병이다.
누구도 몰랐다.
자유 대한민국이, 통일을 하면 더욱 강해질 줄 알았던 시기가 벌써 수십 년 전이었다.
“흡수 통일은 우리 정부가 이뤄낸 가장 큰 업적입니다.”
“이번 시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이니, 꼼꼼히 필기하도록 하세요.”
학교에서는 정부가 검열하고, 정제한 것들만을 가르친다.
정부에게 반하는 사상은 불온 사상으로 간주되었고, 조금이라도 다른 가치관을 드러낸다면 가차 없이 사살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면 사이렌이 울리고, 억제제를 먹어야 했으며 반항하는 이에게는 드론이 날아왔다.
이 디스토피아 속 사람들은 색을 잃고 희미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있는 괴물이 있었다.
*** “오늘 사살 명단입니까?”“그래, 이쪽 세 명은 주요 인물이니 이 세 명을 중심으로 타격해라.”
“알겠습니다.”
한도희.
언제부터 괴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녀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재밌겠네.”
도희에게 내려온 사살자 명단.
반국가단체로 간주된 잠재적 반역자들, 이란다.
정부는 그렇게 말하고 도희에게 총을 건넸다.
명단을 보던 도희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순간 붉은 색으로 물들며 치솟는 감정 게이지.
“이리부대, 작전 개시.”
특수부대 요원이었고, 정부 소속의 극비 요원이다.
더더욱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타격 지점 전송 완료. 침투하라.”
무전기로 들려오는 본부의 명령에 도희는 검은 마스크 아래 또다시 섬뜩하게 웃었다.
미소조차 금지된 곳이었다.
분명 그녀는 사살 대상에 올랐어야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정부는 그녀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
“침투 완료. 2시 방향 타깃 두 명.”
“이브, 천천히 침투해. 급할 것 없어.”
무전기로 들려오는 상사의 목소리에 도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해서 감정 게이지는 붉은 색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아니, 내 임무야.’
도희는 망설임없이 침투한다.
정부가 죽이라고 한 국민에게, 총을 겨눈다.
“타깃 발견.”
짧은 목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탕-
격발되는 총탄은 깔끔하고 아름답게 날아가 정확히 조준했던 머리를 맞추었다.
피가 튄다.
도희의 얼굴에도 튄 피가, 꽃잎처럼 물들었다.
하지만 잔혹한 이리부대의 요원은 개의치 않았다.
“타깃 다섯 명 남았습니다. 주요 인물은 전원 사살 완료.”
본부에서는 탄성을 내뱉었다.
“저게 진짜 사람인가…….”
“사살 인원 전원 헤드샷 명중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침투하고 타격하며 퇴각한다.
눈에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신속 정확하다.
흑복의 이브는 언제나 그렇게 처리를 해 왔다.
“전원 사살 완료. 임무 성공. 이브, 복귀합니다.”
본부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한 중년의 여성.
짧은 머리칼은 날렵한 외형을 부각시켜 주었고 날카로운 눈빛은 바쁘게 스크린을 꿰뚫고 있었다.
늘씬한 팔다리에 마른 체구.
건조한 표정.
국가정보국의 고위 간부 중 하나인 박소연이었다.
“본부장님, 이리부대 복귀합니다. 한도희 요원 전원 사살 성공입니다.”
“역시 이브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이브, 도희는 골이 아픈 존재였다.
“이브, 오늘 감정 수치 최대 몇이었지?”
“최대 81%, 최소 33%입니다.”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위험한 존재다.
최대가 81%인 것도 문제였지만 최소가 33%인 건 더 문제였다.
도희는 유독 감정 제어가 안 되는 요원이었다.
비뚤어진 미소를 짓고, 적을 향해 짜증을 내고, 후임에게 화를 냈다.
“감정 억제제 더 처방시켜. 오늘 안정화 교육 다시 들어가고.”
“알겠습니다.”
무거운 표정으로 스크린을 돌려보는 그녀에게, 옆에 앉아있던 팀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박소연 본부장님, 저…… 이브 말입니다. 그냥 사살하면 안 됩니까? 저 정도 수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거면 진작 사살됐어야 하는데…….”
“나도 알아.”
“그럼 왜…….”
“이걸 봐.”
소연은 도희의 프로필과 실적 문서를 띄웠다.
화면에 꽉 들어찬 화려한 이력과 실적들.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웠다.
“임무 성공률 보여? 무려 97%야.”
“97%라고요?”
“저게 사람으로 보여? 저건 괴물이야.”
소연이 피식 웃으며 무표정한 얼굴의 프로필을 확대시켰다.
한도희, 이리부대 소속 중사. 코드네임 EVe.
임무 성공률, 97.2%.
“저번에도 민방연 고위 간부 7명을 혼자 다 사살했어. 전부, 헤드샷. 말이 되나, 이게? 저런 괴물을, 내가 써먹지 않는다고?”
소연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끈적한 욕심이 가득한 빛이었다.
“저런 괴물이 우리 정부 소속에서 움직인다는 건…… 특수부대 하나를 추가 운용하는 것과 같은 거야.”
“……무시무시하군요.”
하지만 소연은 도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도희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역시…….
“본부장님, 이브 복귀 완료했습니다.”
“그래, 2병동으로 데려가서 안정화 교육 수료하라고 해. 수료 마치면 로그 데이터 전송하고.”
“알겠습니다.”
저 스스로도 통제 못하는 광기와 감정이 문제였다.
도희도 분명히 억제제를 먹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빈번히 안정화 교육을 받는다.
감정 제어 칩도 문제 없다.
그러나 그걸 뚫고 나오는 저 기이한 감정이 문제였다.
도희는…….
“시한폭탄이지.”
핀이 빠질 듯 말 듯 덜렁거리는 수류탄.
그게 딱 한도희였다.
“교육 수료 이후에는 숙소 제대로 복귀하는지 잘 봐. 위치 불일치하면 바로 추적 뜰 거야.”
“네, 본부장님.”
도희의 시한폭탄 같은 감정은 소연이 24시간 내내 그녀를 감시하고, 추적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위험인물 1순위 한도희.
잠재적 반역자 변질 가능성 매우 높음.
그게 정부가 바라보는 도희의 진짜 모습이었다.
***“백시현 대위, 응답하라. 사형 집행하도록. 응답하라.”“네, 대위 백시현입니다.”
“금일 18시, 수감자 1830번 사형 확정. 수술형 집행하도록.”
“알겠습니다.”
시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과 전문 군의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충직한 정부의 개이기도 했다.
외과의이자 동시에 그는 사형 집행인이 되었다.
“금일 18시 수술 집도합니다.”
시현의 말에 군의관들은 아무 말 없이 수술을 준비한다.
어떤 수술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시현이 동료들에게 ‘사형 집행’임을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누가, 어떤 수술을, 왜 받는지 알려줘야 할 이유조차 없으니까.
“시작합니다.”
“저, 선생님……. 저 진짜 수술 받는 거 맞나요?”
수술대에 누운 환자, 아니, ‘사형수’가 물었다.
시현은 말없이 주사를 손끝으로 톡톡, 튕기며 수술 준비를 했다.
마치 들을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이.
“서, 선생님. 이거 수술 맞아요? 아니죠?”
시현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점점 사형수의 얼굴이 겁에 질려갔다.
하얗게 변한 낯빛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는 오늘, 감정 제어 강화 수술을 받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네, 수술 진행 예정입니다.”
난동을 피우면 피곤하니까.
시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결코 어떤 수술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미 시현의 말조차 신뢰하지 못하게 된 사형수는 패닉에 빠져 어떻게든 수술대를 벗어나려 애썼다.
“서, 선생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 말 좀 들어보…….”
“수술 시작합니다. 마취 주세요.”
“선생님! 안 돼! 으아악! 제발, 아아아아악!”
수술 사형은 마취를 하지 않는다.
시현이 요청한 ‘마취’는, 진정제였다
산 채로, 몸이 수술대에 묶인 채로 해체되고 해부된다.
그것이 정부가 백시현에게 명령한 ‘수술형’이었다.
시현은 조용히 스파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물이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말없이 물을 차분하게 헤치며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이 순간에도 도희 생각을 한다는 건 시현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시현아.”“……도희야?”시현이 한쪽 눈을 치켜떴다.분명 여성용 스파와 남성용 스파는 분리되어 있었다.도희가 여성용 스파로 가는 걸 시현은 확실하게 봤다.헷갈린 건 아닐 테고.“여긴 남…….”“알아.”도희는 가볍게 시현의 말을 자르며 그에게 거침없이 다가왔다.투명한 물은 시현의 몸을 전혀 가려주지 못했다.그저 욕탕의 난간만이 온 힘을 다해 그를 숨겨주고 있었다.“빨리 저쪽으로 가.”“같이 씻는 것도 안 돼……?”말투는 시무룩하지.하지만 도희의 발걸음은 여전히 망설임이 없었다.어느새 도희의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시현의 등 뒤까지 들려왔다.시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이상하네, 왜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거지.‘긴장?’시현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퍼졌다.긴장이라는 거, 이게 긴장이라고 인정한 거.정말 오랜만이었다.“안 돼, 얼른 돌아가.”“왜 안 돼. 나랑 씻는 거 싫어?”시현은 생각보다, 당황했다.진짜로 당황했다.그녀 앞에서 이렇게 흔들릴 거라고 본인도 생각하지 못했다.“싫은 게 아니라…….”시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려는 순간, 도희가 물을 헤치고 다가왔다.시현의 말문이 막혔다.도희는 그의 무릎에 조심스럽게 앉았다.따뜻한 찰랑임이 두 사람의 살을 간지럽혔다.도희의 눈에서는 녹진한 유혹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시현아.”“너 이럴래?”“싫어?”당연히 싫지 않다.그래서 문제였다.“백시현.”도희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시현을 불렀다.명백하게, 그를 유혹하겠다는 목소리였다.저렇게 낮아진 목소리로 시현의 이름 세 글자를 정확히 부르는 게, 시현에게 얼마나 큰 자극인지 알기에 하는 소리였다.도희의 손이 물살을 헤쳤다.쭉 뻗은 손가락 사이로 물이 지나가고, 마지막에 닿은 건 시현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드론 하나가 파괴됐어. 실시간 추적이 안 돼. 마지막 위치는…….’화경대학교 근처.소연은 회수한 드론들의 개수를 세어보며, 드론 하나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걸 파악했다.그녀는 직감했다.놈들이다.지금 드론의 위치도 안 잡히고, 연결도 안 된다.분명 파괴됐을 것이다.소연은 바로 마지막으로 추적 위치가 끊긴 곳으로 향했다.폐허가 된 역사, 그 앞에 익숙한 드론 형체가 보였다.가만히 다가간 소연은 발로 드론을 뒤집고 끌어냈다.끼기긱 하는 소리를 내며 드론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었다.소연의 눈과 귀를 대신했던 드론이, 이제는 부서진 채 그저 한낱 고철덩어리가 되어 있었다.‘메모리도 망가졌네.’치명적인 아쉬움이었다.드론의 메모리가 부서져 두 사람을 추적할 수가 없다.그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다 담겼을 텐데.소연은 이제 하찮은 철제 덩어리를 발로 밀쳐내고, 천천히 지하철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그 안에 무슨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평소의 날카로운 힐이 아닌, 투박한 슈트 소리가 역내에 울렸다.‘보나마나 CCTV도 없을 테고.’이번에도 허탕인가.소연이 작게 혀를 차고 돌아가려는 찰나.부스럭-“누구냐!”바로 나노건을 겨눈 소연.“사, 살려주세요!”소연이 눈을 찌푸렸다.별 볼 것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거지꼴에, 더러워진 옷과 얼굴.품에는 인스턴트 음식 봉투가 한가득이었다.혁명군은 아닌 것 같고, 정말 혼자서 살아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것 같은데.무기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아 소연은 천천히 총을 거두었다.소연은 무턱대고 죽이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죽여도 이용하고 죽여야지.그게 소연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뭐하는 놈이지?”“저,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요…….”“소속은?”“그런 거 없어요…….”겁먹었는지 그가 울먹거리며 말했다.온몸을 탄소나노 슈트와 강철로 휘감은 소연과 달리, 그는 허름한 옷조각에 더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소연의 얼굴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슈트보다 안광이 사라진
“놀이공원 가고 싶어.”“놀이공원? 갑자기?”거처에서 조용히 총기를 분해하다 다시 조립하기를 반복하던 도희였다.철컥, 철컥, 탁.다시 탁, 탁.절그럭.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도희가 만지는 총열과 그 부품들의 소리만 침묵을 채웠다.그녀는 혼자 있거나 심란할 때 강박처럼 총기 분해를 하곤 했다.모든 걸 풀어헤쳤다가 하나 둘 역순으로 조립하는 게, 마음을 정리해 나가는 것만 같아서였다.그런 도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맥락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놀이공원.옆에서 메스를 닦던 시현도 어리둥절해 소독약을 묻힌 거즈를 툭 떨어트렸다.“응, 놀이공원. 가서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도.”말이 안 된다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남은 총기 부품을 탁 쑤셔넣었다.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희의 작은 목소리가 묻혔다.“못 타는 건 나도 알아.”하지만 강화인간인 시현의 귀에 그게 안 들리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그날 밤, 시현이 앉은 모니터에는 좌표와 화살표가 빼곡했다.마냥 떠돌아다니던 시현에게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다.‘남쪽에 하나, 이 근처에 하나.’그가 찾는 것은 오늘 도희가 무심코 던졌던 그곳이었다.꿈과 환상의 나라.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다 죽어버려 콘크리트 황무지가 된 이곳에서 꿈과 환상이라니.그러나 시현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찾아낸 건 두 군데.은신처 바로 옆에 놀이공원이 하나 있었지만, 혁명군의 기지로 쓰이고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소리가 펑펑 터지던 곳이었다.거긴 패스.다른 곳은…….바쁘게 돌아다니던 시현의 눈동자가 한 점에서 멈췄다.점선과 파란 위치 아이콘이 가리키는 곳, 그 아래 숫자는 17min.한강을 건너면 보이는 곳이었다.‘여기다.’근처에는 호수와 강이 있고 복합쇼핑몰과 병원들까지.새로 거처를 잡을 후보지도 차고 넘치는 곳.‘군부대는 없지만…… 폐벙커와 기지가 많아. 여기서는 의약품을 챙길 수 있고 여기서는 생필품
시현과 도희는 산책 중이었다. 날씨가 좋았다. 잿빛이 된 거리와 달리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빛은 적당히 따뜻했다. 도시가 망가지든 말든, 나무와 풀은 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엽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단풍은 이파리를 따라 제 영역을 넓혔다. “단풍 봐, 벌써 날씨가 시원해졌나 봐.” “예쁘다.” “그치? 진짜…….” “단풍이겠냐.” 시현이 픽 웃으며 도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 도희의 얼굴이 단풍을 닮아갔다. “가, 갑자기 뭐래…….” “싫어?” 그리고 언제나 시현이 한 수 위였다. “싫으면…… 안 하고.” “누가 싫대?” “그럼, 좋아?” “……응.” 도희의 대답이 시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돌아왔다. “방금은 당황했을 뿐이야. 네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도도한 고양이가 오늘은 삐끗, 헛발질을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그의 팔에 팔을 걸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 폐허는 말없이 둘을 외면했다. “근데 여기 호수, 괜찮다. 벚꽃 피면 진짜 예쁠 것 같아.” 도희가 말했다. “다음 봄에도 오면 되지.” 다음 봄이라는 그 말에 도희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시현의 그 무거운 말 앞에 모두 삼켰다. 도희는 그저 시현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도희…….” 시현이 도희를 부르려다 멈췄다. 불길하면서도 기괴한 소리에 시현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드론이야.” 시현의 목소리에 경계가 서렸다. 작게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아직 저놈은 우릴 발견하지
“아으, 여기면 되겠지? 거리도 나쁘지 않고, 인터넷 되고.”버려진 한 기지.민기는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콜록거렸다.몇 시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인터넷이 되는 기지를 찾았다.근무 대기 신청을 해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무기들을 챙겨 그는 정보국을 몰래 탈출했다.삼엄한 경비와 두꺼운 장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민기는 어찌저찌 그 장애물들을 전부 통과했다.사실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뭔가 부서졌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고함을 쳤던 것 같기도 한데.결국 남은 건 팔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들.“아, 이거 귀한 건데 기스 났네. 이게 얼마짜린데, 하…….”탈출하면서 비싼 기기에 흠집도 났다.투덜거리던 민기가 대충 말아둔 모포 더미에 풀썩 주저앉았다.사사로운 정의감이나, 목숨을 건 탈출 따위의 같잖은 헛소리는 민기의 것이 아니었다.죽기를 각오한 건 맞지만, 그런 진지함을 가지고 이 낡아빠진 폐기지로 온 거라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어디 보자…… 전원 버튼이…….”수석 해커를 괜히 단 그가 아니었다.기계라면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굴릴 수 있는 민기였다.OFF에서 멈춰 있던 글자가 ON으로 바뀌는 순간.-환영합니다. 재부팅을 시작합니다.이것저것 전선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깔아놓자 그제야 민기는 거울을 보았다.거울에 쌓인 두껍던 먼지가 민기의 손길에 후두둑 떨어지자 그는 천천히 금속탐지기를 들었다.직접 해킹하고 개조한 탐지기였다.탐지기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자 탐지기가 곧 울렸다.목덜미에서 징징대던 탐지기는 귀 뒤로 올라가자 미친 듯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정보국 요원이었던 민기조차도 몰랐던 칩의 위치.‘거기구나. 귀 뒤에.’거울 속 민기가 씩 웃었다.곧 그는 칼을 들었다.라이터로 칼을 소독한 후, 그는 고른 한숨을 내쉬었다.무겁지 않은 한숨이었다.“괜찮아.”내 궁극의 반항은 내 몸을 해킹하는 것.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그걸 잘 아는 민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거침없이 칼로 피부를 도
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소연의 사무실.손이 초조하게 바빴다.키보드를 두드렸다가도 패드를 들었다가, 손톱을 딱딱 물었다.-1중대 2소대 전멸. 확인 생존자 없음. 수배자 시신 확인 실패.군부대들이 가져온 건 두 연놈의 시신이 아닌 차가운 실패의 데이터.그 둘의 허튼 총질에 엘리트 부대원들이 죄다 사냥당한 것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피해는 입힐 줄 알았는데.’시신은커녕 피해를 입혔다는 보고조차 없었다.소연은 더 이상 무식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손톱을 찢던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본부가 적막에 뒤덮였다.‘안 되겠다. 무력으로는 감당 안 돼.’소연의 결론에서는 되찾은 평정이 짙게 깔렸다.보고서에서는 단순히 실패만 적혀 있던 게 아니었다.‘타깃 1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고, 타깃 2는 그 소리에 유인된 아군들을 후처리한다. 살상보다는 기능 상실 유도. 타깃 1이 간혹 성급하게 행동하나 타깃 2는 강화된 시야로 아군 공격을 차단하고…….’백시현, 한도희 그 둘의 공조는 소대 하나쯤은 전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폭탄은 약물의 독성을 퍼트리고 약물은 화약을 터트리는 이치.‘그러니 내가 뭘 해야겠어. 머리를 써야지. 둘이 다시는 못 만나게. 그게 힘으로 되겠어?’그것이야말로 소연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백시현, 한도희 둘 정보 다 긁어와. 쓸데없는 정보여도 돼. 입대하고 활동 시기까지 전부 다 싹싹 모아서 가져와.”소연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말끝에 차가운 한숨이 뱉어졌다.그녀의 말에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요한 살의는 여전히 눈앞의 실패 보고서를 쏘고 있었다.소연의 입술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터졌다.이런 패배를 안겨준 놈들은 처음인지라 분노와 흥분이 뒤엉켜 난리를 부렸다.“최대한 빨리 드리겠습니다.”“그래.”두 수배자 때문에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해 무장한 군대가 서울과 그 근방을 장악했다.이미 사살 당한 의심 인물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위급한 상황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 팀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