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스물여덟 겨울, 황태자비 레티시아는 매일 밤 마시던 차를 마시고 잠들듯 죽었다. 눈을 뜨니 열여덟 봄, 혼인 칙서가 내려오기 3주 전. 이번엔 피하겠다고 생일 새벽 오래 알던 기사와 신전에서 먼저 서약했다. 그런데 정오, 칙서는 그대로 내려왔다. 300년 만의 옛 법 «한 지붕 법». 혼인 심판 날까지 두 남편이 한 집에 산다.
Lihat lebih banyak차가 식기 전에 마셔야 했다.
레티는 침대 옆 탁자에서 찻잔을 들었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잔을 받친 다른 손까지 가늘게 떨렸다.
“오늘도 늦으시는구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녀는 차를 놓고 물러났고, 문밖의 발소리도 끊긴 지 오래였다.
황태자궁의 겨울밤은 조용했다.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지만 누군가를 불러 창을 살펴 달라고 할 기운도 없었다. 레티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은방울잎 차였다. 매일 밤 마시는 차라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끝에 남는 옅은 단맛. 식으면 조금 더 진해지는 풀 냄새.
한 모금을 삼키자 목 안쪽이 따뜻해졌다.
탁자 맞은편에는 쓰지 않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두 잔을 준비해 달라고 했고, 나중에는 말하지 않아도 두 잔이 올라왔다. 그중 하나는 늘 깨끗한 채로 치워졌다.
열아홉에 결혼해 아홉 해가 지났다.
남편과 차 한 잔 마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레티는 빈 의자에서 눈을 거두었다. 오늘도 유리엘은 늦었다.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들었지만, 기다리지 않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했다.
잔을 내려놓으려는데 손목이 꺾였다. 차가 조금 쏟아져 잠옷 소매를 적셨다.
‘이것도 못 하네.’
손등을 닦으려던 손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며칠째 잠이 늘었다. 의원은 몸이 약해졌으니 쉬어야 한다고 했다. 충분히 쉬고 있는데도 자꾸 더 자고 싶었다.
스물여덟인데.
아버지께 답장을 써야 하는데.
레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다. 촛불이 흐려지고 탁자 모서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추위는 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문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
레티는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입술도 조금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이불 위에서 미끄러지는 자신의 손이었다.
▽
새가 울었다.
레티는 눈을 떴다. 천장에 작은 꽃무늬가 있었다. 황태자궁 침실의 천장에는 아무 무늬도 없었다.
한참 꽃을 세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지럽지 않았다.
이불을 밀어 내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는 차가 쏟아진 자국이 없었다. 잠옷 소매는 마른 채였고, 소매 끝에 달린 연분홍 끈이 손목을 간질였다.
이 잠옷을 알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입던 잠옷이었다.
레티는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맨발에 닿는 양탄자도 익숙했다. 모서리가 조금 말려 올라간 자리까지 그대로였다.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장미 정원 너머로 두 별채가 보였다. 왼쪽 지붕 끝에 걸린 아침 햇빛, 정원사가 물통을 내려놓던 돌계단, 어릴 때 노엘과 숨었던 덤불.
하르벨 공작저였다.
겨울이어야 했다. 그런데 정원에는 연한 잎이 돋아 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도 봄 냄새가 났다.
레티는 창틀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이 아팠다.
‘꿈에서 이런 것까지 아픈가.’
화장대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밤색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여자가 있었다. 창백했던 뺨에 혈색이 돌았고, 눈 아래의 그늘은 사라져 있었다.
레티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뺨을 누르고, 턱을 짚고, 귀 뒤를 더듬었다. 거울 속 여자가 똑같이 움직였다. 왼쪽 소매를 걷자 손목에 작은 흉이 드러났다. 어릴 때 데인 자국이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열여덟의 자신이었다.
문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레티는 돌아보지도 못한 채 화장대 끝을 붙들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노라가 물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주근깨가 선명한 얼굴이었다. 앞치마 끈을 단단히 묶은 허리도, 머리를 올려 고정한 핀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레티는 노라의 손에 든 물그릇을 바라보다가 얼굴로 눈을 옮겼다.
“노라.”
“네. 물이 조금 따뜻해요. 창문을 벌써 여셨어요? 새벽 바람은 아직 찬데.”
노라는 물그릇을 내려놓고 창문부터 닫으려 했다. 레티가 손목을 잡자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말을 골라야 했다. 방금까지 겨울이었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느냐고 물으면 의원부터 부를 것이다.
“오늘이 며칠이지?”
“봄 둘째 달 19일이요.”
레티의 손가락이 느슨해졌다.
“둘째 달?”
“네. 생일 선물은 아직 못 여세요.”
“내 생일?”
노라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봄 셋째 달 10일이잖아요. 공작 각하께서 미리 들여놓으신 상자 말씀이세요? 집사님께 아무리 물어보셔도 안 알려 주실 거예요.”
레티는 입을 다물었다.
봄 둘째 달 19일.
생일을 3주 앞둔 아침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누나!”
노엘이 문턱에 서 있었다. 밤색 머리가 한쪽으로 눌렸고 셔츠 단추는 목 아래 하나가 어긋나 있었다. 손에는 나무로 깎은 작은 말이 들려 있었다.
레티는 노엘을 보자 화장대에서 손을 뗐다.
기억 속 마지막 노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턱선도 아직 둥글었다.
“들어오기 전에 두드리셔야죠, 도련님.”
“누나는 안 자잖아.”
“그건 들어오신 뒤에 아신 거고요.”
노엘은 문을 닫고 다시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
‘이미 들어왔잖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레티는 입술을 다물고 노엘에게 다가갔다. 어긋난 단추를 풀어 제 구멍에 끼웠다.
노엘이 얌전히 턱을 들었다.
“어제는 이거 고치라고 세 번이나 말했으면서.”
“그랬어?”
“오늘은 안 혼내?”
“고쳤잖아.”
레티는 단추를 채운 손을 내리지 못했다. 노엘의 어깨를 한 번 쓸고, 눌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했다.
노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누나, 나한테 부탁할 거 있어?”
“없어.”
“그럼 왜 이렇게 잘해 줘?”
“잘해 줘도 문제야?”
“아니. 계속해도 돼.”
노라가 물수건을 접다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레티는 노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나 씻어야 하니까 나가.”
“아침에 딸기 나와. 늦으면 내가 먹는다.”
노엘은 할 말을 마치자마자 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복도를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레티는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서 있었다.
노라가 수건을 건넸다.
“무서운 꿈이라도 꾸셨어요?”
젖은 수건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레티는 천천히 얼굴을 닦았다.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노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긴 꿈을 꿨어.”
“일어나셨으니까 괜찮아요. 오늘은 아침부터 볕도 좋고요.”
레티는 수건을 내려놓았다.
탁자에는 물그릇과 빗만 있었다. 늘 침대 곁에 놓여 있던 약병도, 마시다 남긴 차도 없었다.
“응. 일어났으니까.”
▽
식당 문 앞에서 레티는 한 번 멈췄다.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와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 아버지가 집사를 부르고 있었다.
“그레고리, 내 안경 못 봤나?”
“쓰고 계십니다, 공작님.”
“쓰고 있으면 글자가 보여야지.”
“이마 쪽에 계십니다.”
에드윈 공작이 손을 올렸다. 머리 위에 얹힌 안경을 찾아 코에 걸치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침에 서류를 너무 많이 봤군.”
레티는 문손잡이를 놓았다.
그레고리가 의자를 빼 주었다. 익숙한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신문을 접었다.
“잘 잤느냐?”
“네.”
“얼굴이 좀 놀란 것 같은데.”
“꿈을 꿔서요.”
공작은 더 캐묻지 않고 레티 앞쪽으로 잼을 밀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늦게까지 책 보지 말고 쉬어라.”
“아침부터 누우라고 하시면 밤에 못 자요.”
“그건 그렇지.”
노엘은 대화에 끼지 않았다. 접시 위의 빵을 열심히 자르는 척했다.
레티는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버터를 바른 빵 옆에 딸기가 세 알 놓여 있었다. 한 알의 꼭지 아래에는 포크로 찌른 자국이 있었다.
노엘의 입가에는 붉은 물이 묻어 있었다.
“내 딸기 먹었어?”
“아니.”
레티가 포크 자국을 가리켰다.
노엘은 잠깐 생각하더니 빵을 내려놓았다.
“내 접시에 옮기기 전에 한 입 먹은 건데.”
“그걸 먹었다고 하지.”
“한 알 다 먹지는 않았어.”
‘아주 엄격한 계산이네.’
레티가 접시를 들자 노엘은 자기 접시를 조금 뒤로 당겼다. 돌려달라고 할 줄 아는 얼굴이었다.
레티는 딸기 세 알을 전부 노엘의 접시에 옮겼다.
“먹어.”
노엘의 포크가 멈췄다.
“다?”
“응.”
“나중에 내 간식 뺏을 거야?”
“안 뺏어.”
노엘은 레티와 딸기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가장 큰 딸기를 다시 누나의 접시에 놓았다.
“이건 누나 먹어. 아버지가 누나 좋아한다고 가져오신 건데.”
에드윈 공작이 괜히 물잔을 들었다.
“시장에 있기에 산 거다.”
“아침부터 시장에 가셨어요?”
“사람을 보냈지.”
“딸기는 아직 비싸다고 집사님이 그랬는데.”
“노엘.”
공작이 아들을 보았다. 노엘은 입을 다물고 딸기를 먹었다.
레티는 접시에 남은 딸기를 잘랐다. 빨간 과육에서 즙이 배어 나왔다.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새콤한 맛이 먼저 났다.
이런 맛이었구나.
황태자궁에서는 계절마다 좋은 과일이 올라왔다. 빠진 것이 없는 식탁이었다. 그런데 누구와 무슨 말을 하며 먹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
공작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는 저도 같이 가요.”
“어디를?”
“시장에요. 사람 보내지 마시고요.”
“네가 시장에?”
레티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딸을 살폈다.
“사고 싶은 게 있느냐?”
“구경부터 하고요.”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마.”
“오늘 당장은 아니에요.”
“그렇지. 네가 꿈도 꿨고.”
“꿈은 이제 다 깼어요.”
에드윈 공작은 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도 갈래.”
“네 수업은?”
“수업 끝나고 가면 되지.”
“그럼 내가 기다려야 하잖아.”
“내가 길에서 딸기 들어 줄게.”
공작이 바로 말했다.
“짐은 마부가 들면 된다.”
“내가 들겠다는데.”
“무거우면 못 들지 않느냐.”
레티는 두 사람 사이에서 딸기를 마저 먹었다.
도움을 주겠다는 말로 이렇게 오래 다툴 수도 있었다. 노엘은 끝내 작은 봉지는 자신이 들기로 하고서야 빵에 손을 댔다.
레티는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음식이 남지 않은 아침이 얼마 만인지 셀 수 없었다.
▽
방으로 돌아온 레티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맨 위에는 반쯤 쓴 편지가 있었다. 마고에게 보낼 답장이었다. 그 아래에는 수놓다 만 손수건과 얇은 장부가 있었다.
장부 첫 장에는 용돈을 쓴 내역이 적혀 있었다.
리본, 편지지, 찻잎.
레티는 찻잎이라는 글자를 손끝으로 눌렀다. 작은 깡통들이 떠올랐다. 책장 아래 칸을 열자 기억한 자리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었다.
말린 사과 껍질과 홍차 잎이 섞여 있었다. 다른 통에는 꽃잎이 조금 들어 있었다. 비율을 바꿔 가며 섞고, 마고에게 맛을 봐 달라고 했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이런 통을 두지 않았다.
차는 시녀가 가져왔다. 취향을 물으면 괜찮다고 답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잔을 들고, 마신 뒤에는 돌려주었다.
레티는 깡통 하나를 책상 위에 놓았다.
노라가 옷을 정리하다가 돌아보았다.
“차 드시려고요? 주방에 말씀드릴게요.”
“뜨거운 물만 가져다줘.”
“찻잎은요?”
“내가 할게.”
레티는 작은 숟가락으로 찻잎을 덜었다. 사과 껍질이 너무 많아 몇 조각을 다시 통에 넣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꽃잎은 넣지 않았다.
손은 기억보다 서툴렀다. 그래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노라가 가져온 물을 붓자 옅은 향이 올라왔다.
“저도 한 잔 마셔도 돼요?”
“맛없으면?”
“다음에 고치시면 되죠.”
레티는 잔 두 개를 꺼냈다.
맞은편 자리에 노라를 앉히고 차를 나누었다. 노라는 한 모금 마신 뒤 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사과 냄새는 좋은데 조금 써요.”
“너무 오래 뒀나 봐.”
“꿀 넣을까요?”
“이번에는 그냥 마실래.”
레티는 작은 종이에 찻잎을 덜어 낸 양을 적었다. 다음에는 사과를 조금 더 넣고, 물을 부은 뒤 빨리 건져야 했다.
노라는 종이를 보고 물었다.
“또 섞으시게요?”
“응.”
“마고 아가씨가 좋아하시겠어요. 지난번에도 남은 것 싸 달라고 하셨잖아요.”
레티는 펜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이 만든 차를 마시고, 남은 것까지 가져가는 일.
그 작은 깡통을 건네며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조금 떠올랐다.
차를 파는 가게를 해 보면 어떨까.
입 밖에 낸 적 없이 지워 버렸던 생각이었다. 황태자비가 될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혼자 결론을 냈었다.
레티는 종이를 접지 않고 책상 앞에 두었다.
“나중에는 가게에서 팔아 보고 싶어.”
노라가 잔을 내려놓았다.
“차를요?”
“내가 섞은 차.”
“그럼 지금보다는 덜 써야겠는데요.”
“알아.”
레티가 웃자 노라도 따라 웃었다.
▽
해가 기울 무렵, 레티는 방 안의 달력을 가져왔다.
노라에게 물었던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봄 둘째 달 19일. 아침에 갈아 놓은 날짜 표시가 정확했다.
그 아래 달을 펼쳤다.
봄 셋째 달 10일.
생일 정오에 황실의 사람이 왔었다. 아버지는 인장을 확인했고, 레티는 새 드레스를 입은 채 칙서를 받았다.
그날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정작 결혼하고 싶은지 물은 사람은 없었다. 레티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아내가 되는 것보다 좋은 앞날은 없다고 믿었다.
아직 칙서는 오지 않았다.
유리엘과 결혼하지도 않았다.
레티는 왼손을 펼쳤다. 반지도, 반지가 눌렀던 자국도 없었다. 손가락을 굽혔다 펴다가 책상 서랍에서 빈 종이를 꺼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황실이 정한 혼인을 싫다고 하면 물릴 수 있을까. 아버지께 말하면 딸의 뜻부터 들어 주겠지만, 황제의 명을 거절한 책임도 아버지가 질 것이다.
레티는 펜 끝을 종이에 대지 않은 채 내려놓았다.
자기 혼인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알아봐야 했다. 칙서가 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황태자비가 아닌 이름으로 살아갈 방법이 있는지.
복도에서 노라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더 필요한 것 있으세요?”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을 보고 싶은데.”
“무슨 책이요?”
“혼인에 관한 책.”
문밖이 잠시 조용해졌다.
“공작 각하께 말씀드릴까요?”
“내가 먼저 찾아볼게. 내일 아침에.”
“그럼 촛불은 너무 오래 켜 두지 마세요.”
노라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레티는 달력 가까이 촛대를 옮겼다. 봄 셋째 달 10일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둥글게 그리려다 마지막 끝이 조금 겹쳤다.
그 아래에 짧게 적었다.
「칙서. 이번엔 안 받는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린 뒤 달력을 책상 정면에 세웠다. 찻잎을 적은 종이도 그 옆에 놓았다. 아침이 되면 둘 다 바로 보일 자리였다.
레티는 펜 뚜껑을 닫았다.
창밖 장미 정원 너머, 두 별채는 불 꺼진 채 조용했다. 저 집들에 누가 살게 될지 레티는 아직 몰랐다.
‘이번 생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1화 끝)
레티는 남은 차를 천천히 마셨다. 잔 바닥에 볶은 보리 한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는 이것을 치울 시간이 없을 터였다. 레티는 잔을 씻어 받침 위에 엎어 두고, 북부로 보낼 답장을 봉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등불을 끄기 전 예복 덮개를 살짝 들었다.흰 소매 끝에 작은 단추들이 가지런했다.레티는 손가락으로 단추 하나를 만진 뒤 덮개를 내렸다.▽“아가씨, 손을 조금만 더 내려 주세요.”레티는 거울 앞에서 손을 내렸다. 노라가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새벽빛은 아직 창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너도 오늘은 손이 느리네.”“단추를 잘못 잠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벌써 다섯 번은 확인한 것 같은데.”“여섯 번입니다.”노라는 대답하고도 소매 끝을 한 번 더 살폈다.‘이러다 생일이 끝나겠네.’레티가 웃자 노라도 입가를 풀었다. 탁자 위의 작은 여행 가방을 들기 전에 노라가 거울 속 레티와 눈을 맞췄다.“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고마워.”“결혼도요.”“그건 조금 뒤에 다시 해 줘.”“두 번 해 드릴 수 있습니다.”노라가 방문을 열었다.복도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안경을 벗었다 쓰던 손이 멈췄다. 레티가 다가가자 공작은 소매를 펴고 팔을 내밀었다.“불편한 곳은 없느냐?”“없어요.”“신발은?”“어제도 신어 봤잖아요.”“오늘은 오래 서 있어야 하니.”레티는 공작의 팔에 손을 올렸다. 단단히 굳어 있던 팔이 조금 내려갔다.계단 아래에서는 노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채였다. 레티를 보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왜?”“계단부터 내려오세요.”“말하면 내가 넘어질까 봐?”“그럴 수도 있잖아요.”노엘은 레티가 마지막 계단을 밟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누나, 생일 축하해.”“고마워.”“그리고 오늘은 상자 확인 안 해도 돼. 집사님하고 벌써 했어.”그레고리가 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반지도 있습니다.”“그것까지 말하시면 어떡해요.”노엘이 상자를 조금 몸 쪽으
“그건 벌써 주방에 말해 뒀어.”유리엘이 레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제가 받아 드리기 전부터요?”“네 식사니까.”레티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조금 들었다. 창가의 불빛 아래에서 작은 돌이 반짝였다. 유리엘은 손가락이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너무 꼭 맞나?”“아니요. 잘 맞아요.”“불편하면 고치면 돼.”“차부터 고쳐 드릴게요. 아주 식었어요.”레티가 빈 잔을 가져오자 유리엘이 주전자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레티가 손을 받치지 않았다. 차가 두 잔에 고르게 나뉘어 담겼다.“이제 혼자 하시네요.”“옆에서 보고 있잖아.”레티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리엘도 잔을 들었다. 탁자 가운데의 빈 반지 상자는 닫지 않은 채 두었다.밖에서 마차 바퀴가 멎는 소리가 났다.레티는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유리엘이 먼저 의자를 밀어 주었다.“날짜도 정해야겠군.”“제 생일에 하고 싶어요.”유리엘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머물렀다.“같은 날에?”“네. 이번에는 제가 정한 일로 바쁘고 싶어요.”유리엘은 열린 반지 상자를 닫았다.“그럼 그렇게 하자.”▽봄 둘째 달에 들어서자 공작저 서재의 큰 탁자가 다시 서류로 덮였다.이번에는 한 지붕 법 조문이 아니었다. 손님 명단과 신전에서 보낸 준비 목록, 천 견본을 붙인 종이가 나란히 놓였다.공작은 안경을 올리고 명단을 살폈다.“아침 예식이면 피로연은 점심에 해야겠구나. 노엘, 그 상자는 탁자에 내려놓아도 된다.”“괜찮아요.”노엘은 작은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레고리가 점심 쟁반을 들여왔을 때도 상자는 무릎 위에 있었다. 노엘은 한 손으로 빵을 집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레티가 손을 내밀었다.“먹는 동안 누나가 맡아 줄까?”“제가 맡기로 했잖아요.”“지금은 연습용 상자야. 반지는 아직 안 넣었어.”“그러니까 지금 연습해야죠.”노엘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 빵을 먹었다. 한쪽 팔꿈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있었다.유리엘이 빵 접시를 조금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