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수고하셨습니다.”
다른 군의관들이 하나 둘 수술방을 나왔다.
시현에게 인사를 하던 동료들이 사라지자, 시현도 수술복을 벗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 공허한 눈, 차가운 입꼬리.
모든 게 정부가 원하는 모범 시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목을 감싸던 작은 기계에서 경보음이 울린다.
-감정 수치 74%. 안정화 필요합니다.
시현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날카로운 조각 같은 얼굴에는 그 어디에도 균열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경보음이 계속되고, 점차 그의 눈빛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감정 수치 78%. 안정화 필요합니다.
‘귀찮았지. 짜증도 나고.’
앞으로는 그냥 대충 둘러댈까.
살려달라고 비는 사형수가, 사실은 내심 귀찮고 짜증이 났다.
어차피 애원해도 달라질 것 없는데 말이야.
피식, 그의 굳었던 입매에 작은 미소가 생겼다.
-감정 수치 82%. 안정화 필요합니다.
90%를 넘기면 드론이 날아올 거다.
하지만 시현은 억제제를 먹을 생각도, 애써 억누를 생각도 없었다.
도희가 시도 때도 없이 마구 치솟는다면, 시현은 아슬아슬하게 한계점 주위를 맴도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파견 명령 내려왔습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시현에게 작은 스크린을 건넸다.
“파견?”
“네, SMD로의 파견입니다.”
“SMD…….”
이제 진짜 마음대로 부려먹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걸까.
SMD, 정부 직속 산하 의료기관이었다.
여기에 간다는 건, 정부가 직접 시현을 눈여겨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시현은 궁금해졌다.
정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네, 알겠습니다.”
근무지와 자세한 소속까지 전부 확인한 시현은 화면을 꺼 버렸다.
어차피 거기 가도 똑같겠지.
똑같이 사람을 살리고, 그러다 몇 번은 또 사람을 죽이고.
그저 이렇게 로봇 흉내내는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야.
*** “백시현. 오늘부터 공군에서 SMD로 파견이라고?”“네, 그렇습니다.”
“근무지는?”
“섹터 2 M구역입니다.”
“백시현, 한도희 앞으로 더 철저하게 감시해. 하나하나 다 보고하고.”
소연이 머리를 짚었다.
골치아픈 일이 또 생겼다.
백시현, 위험인물 2순위.
한도희, 위험인물 1순위.
둘 다 소연이 직접 올렸다.
시현의 근무지는 섹터 2 M구역, 도희의 근무지는 섹터 2 A구역.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같은 섹터였다.
소연은 다시금 임무 수행 중인 도희를 촬영 중인 바디캠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임무 수행이다.
그러나, 오늘도 도희는 또…….
“아, 진짜 이 새끼가…….”
“이브, 진정 좀 해.”
“짜증나잖아.”
화면 속 도희는 있는 힘껏 짜증을 내고 있었다.
자기 얼굴에 작은 상처를 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희는 적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적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아이러니하지만 여기 대한민국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도희, 또 시작이군.’
요즘 빈도수가 잦아져.
칩도 점점 그녀의 광기를 막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연에게는 그게 보였다.
“작전 완료했습니다.”
“……그래. 복귀해.”
복귀 명령을 내리는 소연의 표정이 복잡했다.
저 시한폭탄 같은 애를 어떻게 제어하지.
결국 소연은 이번에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매번 같은 명령, 똑같은 지시였으나 지금의 소연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브, 복귀 후 안정화 교육 수료하고 로그 전송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 “아, 피 묻었잖아. 진짜 짜증나.”“한도희, 너 왜 그래?”
“뭐.”
옷을 갈아입는 도희를 동료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도희는 마치, 흑백 사진 속 홀로 발광하는 붉은 립스틱 같았다.
“너 지금 짜증 내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얼굴에 흠집 내고, 지금 옷에 피 튀었잖아. 괜히 지랄하는 바람에.”
“…….”
그는 무표정한 얼굴에, 맑게 비워진 눈을 하고 도희의 그 ‘짜증’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없이 도희는 그 시선을 받다가 피식 웃었다.
동시에 경보음이 울렸다.
-감정 수치 88%. 안정화 필요합니다.
그 기계음 속 도희는 여전히 웃는다.
비틀린 입꼬리를 바라보던 동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도희를 몇 초 동안 돌연변이라도 보는 듯 쳐다보는 게 끝이었다.
도희는 그런 시선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감함이 역겹고 싫었다.
“나 간다. 너 오늘도 안정화 교육 수료하래.”
“알았어.”
혼자 남게 된 도희는 거울을 보고 피를 마저 닦아냈다.
피비린내가 아직 팔뚝 사이사이 남아 있었다.
도희는 무감각한 얼굴로 팔을 닦다가, 잔혹히도 말끔해지는 피부를 바라보았다.
“……왜 안 먹히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귀 뒤쪽, 목덜미 속 감정 제어 칩.
수치를 낮춰야 했다.
지금도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더 올라가면 드론이 올 것이다.
짜증, 분노, 기쁨, 슬픔, 사랑……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은 시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느꼈다.
거울 속 도희가 천천히 웃었다.
“내가 에러인가. 시스템 오류, 돌연변이, 바이러스.”
-감정 수치 89%. 안정화 필요합니다.
본부에서 도희를 지켜보다 다시 상승하는 수치를 보며 움찔했다.
드론 출동 대기 중.
그래프는 불안정하게 튀었고, 심박수는 빨라졌다.
도희도 안다.
그 사실이 너무 재미있어서, 또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명확한 이름을 가지지 못해 더 짜릿한.
그녀는 칩을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몰라, 내가 고장났나 봐.”
그녀는 억제제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감정 수치 73%. 안정화 필요합니다.
*** 3년이 지났다.소연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시현과 도희를 감시하고 살피느라 바쁘다.
다행인 건, 둘이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는 점.
“오늘 한도희 요원 근무지 변경시켜. 백시현 대위랑 가까워.”
“알겠습니다.”
“그리고 백시현 대위, 오늘 14시 수술 잡아. 5시간 이상 걸릴 만한 걸로.”
“네.”
부하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현란하게 스크린을 조작한다.
소연에게 시현과 도희는 만나게 해서는 안 될 도화선들이었다.
“신입, 이리 와.”
“아, 네!”
신입 직원이 올 때마다 소연은 가르친다.
“백시현, 한도희. 둘이 절대 같이 묶어두지 마. 이해 못 하겠으면 그냥 외워. 가까운 구역으로 배치하는 것도 절대 안 돼. 최소 오늘만큼의 거리 유지는 필수야. 알겠어?”
“네,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 소연.
지금까지 3년 동안 둘을 잘 격리해 왔다.
지금처럼만 하면 돼.
도희와 시현의 감정 수치 게이지가 나란히 화면에 띄워져 있다.
자꾸 선을 건드리는 도희, 자꾸 선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맴도는 시현.
“저 두 사람 기록이 위험인물 1순위, 2순위에 랭크된 것을 봤습니다, 본부장님.”
“그래, 잘 봤네. 저 둘.”
소연이 조용히 경고했다.
“한도희는 시한폭탄. 백시현은…… 목줄 풀린 군견이지.”
“둘 다 사살하는 게 어떻습니까? 본부장님께서 직접 위험인물로 올리신 사람들인데…….”
“3년 전에도 딱 그 질문을 하는 놈이 있었어.”
소연이 픽 웃었다.
그러나 도희에 비해서는 아주 작고 옅은 미소.
“한도희 저거 괴물이야. 사람 아니야. 빨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빨아먹어야지.”
임무 성공률 97%는 아직도 유지 중이었다.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저 둘을 절대 같이 있게 하면 안 돼. 철저히 격리시키고 못 만나게 해. 서로 존재도 모르게 만들어.”
“알겠습니다.”
교육을 받는 신입 옆에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한 남직원, 민기가 중얼거렸다.
그는 소연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다.
“금수저 주제에 진짜 끝을 모르네. 대통령이라도 될 거야, 뭐야?”
민기의 조금 격한 손짓 아래 데이터가 전산 속으로 사라졌다.
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 1팀 요원, 정민기.
도희의 데이터를 업로드하고, 로딩 중에 그는 문득 혼자 물었다.
“근데 둘이 만나면 서로 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왜 저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할 만큼 만나게 하면 안 되는 거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나직한 질문이었다.
*** “타깃 생포 완료.”오늘도 도희는 임무 수행 중이었다.
기밀을 캐내는 게 필요해서, 오늘은 생포해야 하는 임무였다.
“야, 기밀 불어.”
도희의 말투는 냉철한 특수부대 요원의 것이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투였다.
“너네 배후 따로 있는 거 다 알아. 누구야, 어디 소속이야?”
“우, 우리 단독 행동이야!”
“다 안다니까? 주둥이 다문다고 뭐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말 못 해!”
지금 도희가 짜증을 내며 추궁하고 있는 사람은 무장 세력의 간부였다.
그러나 정부에게는 ‘반역자’, 도희에게는 그저 ‘타깃’.
“이브, 차라리 본부로 데려가서…….”
“아니, 난 여기서 입 열고 싶어.”
“본부로 데려가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야! 왜 그래?”
이번에도 틈 하나 없는 얼굴로 동료가 도희를 말렸다.
도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왜냐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경보음과 함께, 도희가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하는 소리가 나며 도희는 인질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누었다.
“좆같잖아.”
-감정 수치 89%. 안정화 필요합니다.
이제 경보음마저 도희에겐 소음이었다.
“죽이면 안 돼!”
도희는 총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위협은 해야 입을 열든 말든 하지 않을까?
도희의 고개가 천천히,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입 열어. 진짜 쏴 버리기 전에.”
“너 나 못 쏘는 거 알아.”
인질의 말에 도희는 농락이라도 당한 듯,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해 보니까 진짜 짜증나네?
“……개새끼가.”
도희의 군홧발이 인질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분노와 화가 틈을 비집고 기어이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도희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스스로도 분노를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브, 그만해. 뭐해, 지금?”
동료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도희를 말렸지만, 도희는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 기회야.”
도희는 정말 인질을 쏴 버릴 것 같아서 총을 냅다 바닥에 집어던졌다.
인질을 쏘면 중요한 기밀을 얻지 못하게 된다.
정부에서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것이고.
도희는 피 묻은 인질의 머리를 발로 거칠게 눌렀다.
“…….”
인질은 입술을 깨물며 끝내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뚝.
도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입꼬리가 비틀리듯 일그러졌다.
“이 씨발……!”
용암이 폭발하듯 게이지가 한계점을 뚫었다.
-감정 수치 94%. 안정화 필요합니다.
경보음과 함께 들려오는 드론 소리.
고속 회전음이 들려오고, 하얀 기계가 도희의 눈에 들어왔다.
정부가 파견한, 일정 감정 수치 이상이면 자동으로 안정제가 발사되도록 명령이 입력된 병기였다.
도희는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여기 날아왔는지도 안다.
-대상 0092. 감정 초과, 제어 불가. 안정화 프로토콜 가동합니다.
붉은 조준선이 도희의 이마에 맺혔다.
그러나 도희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사살해야 할 타깃을 바라보던 때와 똑같았다.
도희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쾅-
고열을 띤 무언가가 손끝에서 튀어나오고, 드론이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폭발음이 벽을 때렸다.
동료들이 비명을 질렀고, 도희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숨소리에는 아직 다 지우지 못한 분노가 남아 있다.
‘전부 다 죽여버리고 싶어.’
‘드론 하나가 파괴됐어. 실시간 추적이 안 돼. 마지막 위치는…….’화경대학교 근처.소연은 회수한 드론들의 개수를 세어보며, 드론 하나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걸 파악했다.그녀는 직감했다.놈들이다.지금 드론의 위치도 안 잡히고, 연결도 안 된다.분명 파괴됐을 것이다.소연은 바로 마지막으로 추적 위치가 끊긴 곳으로 향했다.폐허가 된 역사, 그 앞에 익숙한 드론 형체가 보였다.가만히 다가간 소연은 발로 드론을 뒤집고 끌어냈다.끼기긱 하는 소리를 내며 드론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었다.소연의 눈과 귀를 대신했던 드론이, 이제는 부서진 채 그저 한낱 고철덩어리가 되어 있었다.‘메모리도 망가졌네.’치명적인 아쉬움이었다.드론의 메모리가 부서져 두 사람을 추적할 수가 없다.그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다 담겼을 텐데.소연은 이제 하찮은 철제 덩어리를 발로 밀쳐내고, 천천히 지하철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그 안에 무슨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평소의 날카로운 힐이 아닌, 투박한 슈트 소리가 역내에 울렸다.‘보나마나 CCTV도 없을 테고.’이번에도 허탕인가.소연이 작게 혀를 차고 돌아가려는 찰나.부스럭-“누구냐!”바로 나노건을 겨눈 소연.“사, 살려주세요!”소연이 눈을 찌푸렸다.별 볼 것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거지꼴에, 더러워진 옷과 얼굴.품에는 인스턴트 음식 봉투가 한가득이었다.혁명군은 아닌 것 같고, 정말 혼자서 살아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것 같은데.무기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아 소연은 천천히 총을 거두었다.소연은 무턱대고 죽이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죽여도 이용하고 죽여야지.그게 소연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뭐하는 놈이지?”“저,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요…….”“소속은?”“그런 거 없어요…….”겁먹었는지 그가 울먹거리며 말했다.온몸을 탄소나노 슈트와 강철로 휘감은 소연과 달리, 그는 허름한 옷조각에 더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소연의 얼굴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슈트보다 안광이 사라진
“놀이공원 가고 싶어.”“놀이공원? 갑자기?”거처에서 조용히 총기를 분해하다 다시 조립하기를 반복하던 도희였다.철컥, 철컥, 탁.다시 탁, 탁.절그럭.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도희가 만지는 총열과 그 부품들의 소리만 침묵을 채웠다.그녀는 혼자 있거나 심란할 때 강박처럼 총기 분해를 하곤 했다.모든 걸 풀어헤쳤다가 하나 둘 역순으로 조립하는 게, 마음을 정리해 나가는 것만 같아서였다.그런 도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맥락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놀이공원.옆에서 메스를 닦던 시현도 어리둥절해 소독약을 묻힌 거즈를 툭 떨어트렸다.“응, 놀이공원. 가서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도.”말이 안 된다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남은 총기 부품을 탁 쑤셔넣었다.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희의 작은 목소리가 묻혔다.“못 타는 건 나도 알아.”하지만 강화인간인 시현의 귀에 그게 안 들리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그날 밤, 시현이 앉은 모니터에는 좌표와 화살표가 빼곡했다.마냥 떠돌아다니던 시현에게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다.‘남쪽에 하나, 이 근처에 하나.’그가 찾는 것은 오늘 도희가 무심코 던졌던 그곳이었다.꿈과 환상의 나라.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다 죽어버려 콘크리트 황무지가 된 이곳에서 꿈과 환상이라니.그러나 시현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찾아낸 건 두 군데.은신처 바로 옆에 놀이공원이 하나 있었지만, 혁명군의 기지로 쓰이고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소리가 펑펑 터지던 곳이었다.거긴 패스.다른 곳은…….바쁘게 돌아다니던 시현의 눈동자가 한 점에서 멈췄다.점선과 파란 위치 아이콘이 가리키는 곳, 그 아래 숫자는 17min.한강을 건너면 보이는 곳이었다.‘여기다.’근처에는 호수와 강이 있고 복합쇼핑몰과 병원들까지.새로 거처를 잡을 후보지도 차고 넘치는 곳.‘군부대는 없지만…… 폐벙커와 기지가 많아. 여기서는 의약품을 챙길 수 있고 여기서는 생필품
시현과 도희는 산책 중이었다. 날씨가 좋았다. 잿빛이 된 거리와 달리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빛은 적당히 따뜻했다. 도시가 망가지든 말든, 나무와 풀은 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엽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단풍은 이파리를 따라 제 영역을 넓혔다. “단풍 봐, 벌써 날씨가 시원해졌나 봐.” “예쁘다.” “그치? 진짜…….” “단풍이겠냐.” 시현이 픽 웃으며 도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 도희의 얼굴이 단풍을 닮아갔다. “가, 갑자기 뭐래…….” “싫어?” 그리고 언제나 시현이 한 수 위였다. “싫으면…… 안 하고.” “누가 싫대?” “그럼, 좋아?” “……응.” 도희의 대답이 시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돌아왔다. “방금은 당황했을 뿐이야. 네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도도한 고양이가 오늘은 삐끗, 헛발질을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그의 팔에 팔을 걸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 폐허는 말없이 둘을 외면했다. “근데 여기 호수, 괜찮다. 벚꽃 피면 진짜 예쁠 것 같아.” 도희가 말했다. “다음 봄에도 오면 되지.” 다음 봄이라는 그 말에 도희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시현의 그 무거운 말 앞에 모두 삼켰다. 도희는 그저 시현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도희…….” 시현이 도희를 부르려다 멈췄다. 불길하면서도 기괴한 소리에 시현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드론이야.” 시현의 목소리에 경계가 서렸다. 작게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아직 저놈은 우릴 발견하지
“아으, 여기면 되겠지? 거리도 나쁘지 않고, 인터넷 되고.”버려진 한 기지.민기는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콜록거렸다.몇 시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인터넷이 되는 기지를 찾았다.근무 대기 신청을 해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무기들을 챙겨 그는 정보국을 몰래 탈출했다.삼엄한 경비와 두꺼운 장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민기는 어찌저찌 그 장애물들을 전부 통과했다.사실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뭔가 부서졌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고함을 쳤던 것 같기도 한데.결국 남은 건 팔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들.“아, 이거 귀한 건데 기스 났네. 이게 얼마짜린데, 하…….”탈출하면서 비싼 기기에 흠집도 났다.투덜거리던 민기가 대충 말아둔 모포 더미에 풀썩 주저앉았다.사사로운 정의감이나, 목숨을 건 탈출 따위의 같잖은 헛소리는 민기의 것이 아니었다.죽기를 각오한 건 맞지만, 그런 진지함을 가지고 이 낡아빠진 폐기지로 온 거라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어디 보자…… 전원 버튼이…….”수석 해커를 괜히 단 그가 아니었다.기계라면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굴릴 수 있는 민기였다.OFF에서 멈춰 있던 글자가 ON으로 바뀌는 순간.-환영합니다. 재부팅을 시작합니다.이것저것 전선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깔아놓자 그제야 민기는 거울을 보았다.거울에 쌓인 두껍던 먼지가 민기의 손길에 후두둑 떨어지자 그는 천천히 금속탐지기를 들었다.직접 해킹하고 개조한 탐지기였다.탐지기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자 탐지기가 곧 울렸다.목덜미에서 징징대던 탐지기는 귀 뒤로 올라가자 미친 듯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정보국 요원이었던 민기조차도 몰랐던 칩의 위치.‘거기구나. 귀 뒤에.’거울 속 민기가 씩 웃었다.곧 그는 칼을 들었다.라이터로 칼을 소독한 후, 그는 고른 한숨을 내쉬었다.무겁지 않은 한숨이었다.“괜찮아.”내 궁극의 반항은 내 몸을 해킹하는 것.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그걸 잘 아는 민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거침없이 칼로 피부를 도
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소연의 사무실.손이 초조하게 바빴다.키보드를 두드렸다가도 패드를 들었다가, 손톱을 딱딱 물었다.-1중대 2소대 전멸. 확인 생존자 없음. 수배자 시신 확인 실패.군부대들이 가져온 건 두 연놈의 시신이 아닌 차가운 실패의 데이터.그 둘의 허튼 총질에 엘리트 부대원들이 죄다 사냥당한 것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피해는 입힐 줄 알았는데.’시신은커녕 피해를 입혔다는 보고조차 없었다.소연은 더 이상 무식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손톱을 찢던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본부가 적막에 뒤덮였다.‘안 되겠다. 무력으로는 감당 안 돼.’소연의 결론에서는 되찾은 평정이 짙게 깔렸다.보고서에서는 단순히 실패만 적혀 있던 게 아니었다.‘타깃 1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고, 타깃 2는 그 소리에 유인된 아군들을 후처리한다. 살상보다는 기능 상실 유도. 타깃 1이 간혹 성급하게 행동하나 타깃 2는 강화된 시야로 아군 공격을 차단하고…….’백시현, 한도희 그 둘의 공조는 소대 하나쯤은 전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폭탄은 약물의 독성을 퍼트리고 약물은 화약을 터트리는 이치.‘그러니 내가 뭘 해야겠어. 머리를 써야지. 둘이 다시는 못 만나게. 그게 힘으로 되겠어?’그것이야말로 소연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백시현, 한도희 둘 정보 다 긁어와. 쓸데없는 정보여도 돼. 입대하고 활동 시기까지 전부 다 싹싹 모아서 가져와.”소연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말끝에 차가운 한숨이 뱉어졌다.그녀의 말에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요한 살의는 여전히 눈앞의 실패 보고서를 쏘고 있었다.소연의 입술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터졌다.이런 패배를 안겨준 놈들은 처음인지라 분노와 흥분이 뒤엉켜 난리를 부렸다.“최대한 빨리 드리겠습니다.”“그래.”두 수배자 때문에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해 무장한 군대가 서울과 그 근방을 장악했다.이미 사살 당한 의심 인물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위급한 상황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 팀원들은
“으아악!”퍽-“아악!”“……허.”도희가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그녀가 더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백시현, 그의 살육이 본색을 드러냈다.마취제와 독이 섞인 주사기를 목에 꽂아넣어 적의 신경을 끊었다.허리춤에서 꺼낸 수혈 튜브로 목을 조이며 숨을 틀어막고, 그 순간 뒤에서 기습하려던 다른 적을 가뿐히 피하며 메스로 동맥을 갈랐다.“컥! 여, 여기! 도와줘!”시현의 살인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마음껏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몸부림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그리고 그 시간 속 인간은 천천히 시드는 것이었다.피의 분수 한가운데 이질적인 그의 무표정이 차가운 죽음을 내렸다.손끝마다 둔탁한 총소리를 내는 도희와 사뭇 달랐다.정확하게 어딜 노려야 사람이 죽는지, 어딜 찔러야 사람이 불구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시현의 몸놀림은 최소화되고, 깔끔한 움직임 한 번에 피가 튀었다.관절이 무너지고 근육이 찢기며 피가 역류했다.“뭐야, 내가 할 게 없잖아.”도희가 총을 집어넣었다.총 대신 꺼낸 칼날에 흥미어린 도희의 미소가 비쳤다.시현의 도구는 치료도, 죽음도 구분하지 않았다.“억!”또 한 줄의 동맥이 잘려나갔다.탕-튀어나오려던 마지막 비명은 도희가 가져가 버렸다.시현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면, 도희는 그저 파괴 그 자체였다.둘의 속도가 다르고 리듬도 달랐지만 단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다.원래 그게 그들이 맞물리는 방법이라는 듯이.어느새 사방은 고요해졌다.바닥은 피로 질척거렸고 여기저기 급소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먼지와 땀, 피가 섞여 공기가 불쾌하게 끈적거렸다.그러나 시현과 도희 둘 다 살갗 한 번 베인 흔적조차 없었다.완벽한 승리였다.쓰러진 적들의 시체를 하나, 둘 밟고 도희가 지나왔다.바람에 그녀의 옷이 펄럭였다.찢어진 군복과 옷이 길게 늘어져 휘날리고, 발목을 휘감았다.피와 살 위로 신성한 광기가 걸어왔다.“너 공주 같다.”“뭐?”도희가 귀를 의심했다.하지만 시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