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흘째 새벽이었다.
일요일. 다섯 시.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풀벌레 소리도 그쳐 있었다. 시월 끝의 새벽은 소리가 적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불 하나만 켜고. 수첩을 펴고.
아저씨 거기 있어요?
그 한 줄에 대답을 적으려고 나흘을 앉아 있었다.
첫날 밤엔 길게 썼다. 사월부터의 일을 전부.
한 쪽이 넘었다. 다 읽어 보고, 줄을 그었다. 전부.
그 사 년 동안에도 그랬다. 도서관 로비 탁자에서 출석부 뒷면에 해인에게 편지를 썼다. 부칠 데가 없는 편지를. 열 통쯤. 처음엔 길게 썼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다 쓰고 읽어 보면 전부 누군가에게 하는 변명 같았다. 줄을 그었다. 한 통도 빠짐없이.
그리고 줄 그은 쪽 맨 아래에 한 줄씩만 남겼다.
해인아, 나 오늘 자전거를 탔어.
해인아, 오늘은 녹차가 식지
일월 첫 토요일 밤 열 시.서재. 책상 위 노트북. 화면이 세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왼쪽 위 칸에 나. 서재 스탠드 불빛. 벽에 붙은 서아의 그림들. 많이. 우리 집 코 자.오른쪽 위 칸에 대니얼. 시카고의 토요일 아침 일곱 시. 부엌. 하얀 찬장. 냉장고에 아이 그림이 여러 장. 머그잔. World's Okayest Dad.그리고 아래 칸.작은 방이었다. 벽지. 형광등. 벽에 기대 세운 공책들. 스무 권쯤. 표지에 인쇄된 글자. 오답노트.가을이 앉아 있었다. 회색 후드티. 앞머리를 넘겨 실핀 두 개. 볼이 둥근. 열여덟의.가게 뒤의 작은 방이었다. 엄마가 새벽에 잠깐 눕던. 멈춘 그 세상에서 가을이 스무 날을 살았던. 여기서는 가을이 매일 밤 잠드는 방.셋 다 한참 말이 없었다.대니얼이 화면을 보았다. 아래 칸을. 가을을.가을도 대니얼을 보았다.그리고 가을이 먼저 움직였다. 방바닥에 앉은 채로 두 손을 앞에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화면을 향해."……송가을입니다."대니얼이 멈칫했다. 그리고 부엌 의자에서 일어났다. 머그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서툴게. 너무 깊이. 이 년 전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Daniel."대니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젖어 있었다."The red scarf girl."빨간 목도리 아가씨.가을이 웃었다. 그리고 옆에 개어 둔 무언가를 집어 화면 앞에 들어 보였다.빨간 목도리. 두툼한. 끝에 술이 달린."이거요?"나는 화면을 가까이 보았다. 털실에 보풀 하나 없었다. 술 끝이 가지런했다. 새것이었다."똑같은 거 찾느라 시장을 세 바퀴 돌았어요. 엄마가 뭘 그렇게 찾냐고, 목도리 하나에."
부산역에 내린 건 토요일 아침 아홉 시였다.서아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벌름거렸다."바다 냄새!"역 광장. 사람들. 캐리어 바퀴 소리. 비둘기가 광장 바닥을 쪼다가 날아올랐다. 푸드득. 흘러서.해인이 서아의 목도리를 고쳐 매 주었다. 회색. 해인이 재작년에 산."당신 괜찮아?"해인이 나를 보았다. 광장 한가운데 멈춰 선 나를."……응."이 도시였다.이 년 넘게 나는 이 도시에 서른몇 번 왔다. 십 초, 한 시간, 몇 분. 멈춘 아침 여덟 시 칠 분에. 사람 하나 없는. 공중의 새, 굳은 파도, 떠 있는 은행잎.오늘은 흘렀다.택시를 탔다. 주소를 보여 주었다. 기사님이 아, 거기요, 하고 비탈길로 올라갔다. 차가 헐떡였다. 가팔랐다.창밖으로 낮은 집들이 산을 타고 올라가 있었다. 파란 지붕, 초록 지붕. 옥상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며.그리고 비탈 아래로.바다였다.회색빛. 방파제. 파도가 부서졌다. 하얗게. 그리고 다시 밀려왔다. 또 부서졌다. 쏴아아. 택시 창 너머로도 들렸다."아빠! 바다! 많이!"서아가 창에 코를 붙였다. 입김에 창이 뿌옇게 흐려졌다.나는 그 파도를 보았다. 부서지고, 밀려가고, 다시 오는.이 년 동안 이 바다는 숨을 참고 있었다. 레이스처럼. 유리 세공처럼.지금은 숨을 쉬었다.택시가 비탈 중간에서 모퉁이를 돌았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선 길.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남은. 십이월이니까.그 끝에 철문이 보였다. 초록 페인트가 벗겨진. 교문. 닫혀 있었다. 겨울 방학이니까.기둥에 금은 없었다. 쪽지도. 입김도.택시가 그 앞을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십이월 첫 주 화요일, 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한 손에 믹스커피. 다른 손에 봉투 하나."이 대리. 너한테 편지."나는 캘리퍼스를 든 채로 선배를 보았다."총무팀이 갖다줬다. 요즘 손 편지 받는 사람이 어딨냐고 웃더라."선배가 봉투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하얀 편지 봉투. 편의점에서 파는. 받는 사람 칸에 볼펜 글씨.회사 이름. 주소.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께.반듯한 글씨였다. 줄에 딱 맞게. 그런데 획의 끝이 둥글었다.보내는 사람 칸에는 이름이 없었다. 주소만. 부산.우표 옆에 소인. 부산.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서 두 번 만에.선배가 나를 보았다. 이마의 안경을 내려 쓰고."……누구냐.""……""네 얼굴이 불량 찾았을 때 얼굴이다. 아니, 그보다 더."나는 봉투를 들었다. 가벼웠다. 종이 한두 장."옥상 좀 다녀올게요."선배가 아무 말 없이 믹스커피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옥상은 추웠다. 십이월의 바람. 공장 굴뚝이 흰 김을 뱉고 있었다. 바람에 흩어지며.나는 난간에 기대어 봉투를 뜯었다. 천천히.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안에 종이가 두 장. 접힌.오답노트였다. 줄이 그어진. 맨 위에 작게 인쇄된 글자. 오답노트. 뜯어낸 자리가 삐뚤빼뚤했다.펼쳤다.우진 아저씨께.송가을이에요. 부산이요.나는 거기서 멈췄다.글씨를 보았다. 반듯했다. 오답노트를 빨강 파랑 형광으로 쓰던 열여덟의 글씨. 줄에 딱 맞고, 숫자 하나하나 같은 크기로.그런데 획의 끝이 둥글었다.그 끝이 둥근 글씨였다
십일월 셋째 목요일.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알람보다 한참 먼저.창밖이 아직 어두웠다. 창유리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손을 대니 차가웠다. 수능 한파. 어젯밤 뉴스가 그랬다. 올해도.해인은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서아는 가운데서. 이불을 발로 차 낸 채로.나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그리고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할아버지의 시계. 다섯 시 삼 분.용두를 쥐었다. 감았다. 스무 번. 새 줄이 손목에 조금 뻣뻣하게 감겼다. 봄이 지나도 아직 다 길들지 않은.목이 말랐다. 이불 밖으로 조용히 나와 부엌으로 갔다. 불은 켜지 않았다. 수도꼭지 밑의 컵이 거의 차 있었다. 밤새 떨어진 물. 똑. 삼 초 조금 안 되게.컵을 들고 물을 마시려다, 베란다 쪽을 보았다.유리문 너머가 어슴푸레했다. 가로등 불빛이 베란다 바닥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 빛 속에, 화분이 있었다.무언가 하얀 것이 있었다.나는 컵을 든 채로 베란다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발등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맨발로 나갔다. 타일이 얼음 같았다.꽃이었다.줄기 끝, 구월에 해인이 처음 본 그 봉오리 자리에. 흰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손톱 두 개만 한. 꽃잎이 다섯 장. 가장자리가 조금 말려 있었다. 밤사이 핀 것이었다. 어제 저녁에는 봉오리였으니까. 가을 내내 입을 꼭 다물고 있던.이름을 모르는 초록 잎이었다. 해인도 모르고 나도 몰랐다. 그 잎에서 이런 꽃이 필 줄은 둘 다 몰랐다.나는 쪼그려 앉아 한참 보았다. 입김이 하얗게 나갔다. 꽃잎 가까이 가서 흩어졌다.해인을 깨울까 생각했다. 깨우지 않았다. 서아에게도 아침에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아침은 다른 일로 가득할 테니까. 해인이 저녁에 물을 주러 나왔다가 스스로 보면 된다.손에 든 컵을 보았다. 밤새 떨어진
시월 셋째 토요일이 지나고 맞은 월요일 아침, 회사 로비의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왔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화면을 보았다. 작년 이맘때처럼.수능 한 달 앞. 교실. 책상에 엎드린 수험생들. 칠판 위에 붙은 숫자. D-31. 기자가 말했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십일월 셋째 주 목요일에 치러진다고. 수험생 몇십만 명. 그리고 화면 아래 자막.○○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그 숫자를 보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탔다. 나는 타지 않았다.그 숫자를 어디서 보았다.그 토요일 밤. 교문 앞. 가을이 여섯 번째 걸음을 들어 올리고, 학교 시계의 긴바늘이 한 칸을 건넜을 때.바람이 불었다. 그 세상에서 처음으로.교문 위에 걸린 현수막이 펄럭였다.이 년 동안 끝자락이 반쯤 말려 올라가 학교 이름을 가리고 있던. 한 자락이 접혀서 글씨가 보이지 않던. 그게 바람에 펼쳐졌다. 한 번. 활짝.나는 그걸 보았다. 비탈 위에서. 은행잎이 떨어지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오는 사이에.○○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제12시험장.그리고 그 옆 작은 현수막. 선배님 대박 나세요. 후배 일동.그때는 그 숫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가을이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여섯 번째 걸음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니까.나는 로비 한가운데 서서 텔레비전의 자막을 보았다.같은 숫자였다.아니. 잘못 본 거다.나는 엘리베이터 옆 벽에 기대어 섰다.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검색했다. 학년도. 수능. 올해.학년도는 이듬해 대학에 들어가는 해로 센다. 올해 십일월에 보는 수능은 내년의 학년도.그 숫자였다. 현수막의 숫자.나는 숨을 멈췄다.그리고 또 하나가 떠올랐다.가
다섯 번째 걸음이었다.비탈 위에서 나는 셌다. 교문을 넘어서 세 걸음, 네 걸음. 천 날 전 그 아침, 가을은 거기서 멈추고 돌아보았다.그리고 오늘, 다섯 번째.가을의 운동화가 흙바닥을 디뎠다. 멈춘 흙. 발자국이 남지 않는.그런데 남았다.비탈 위에서도 보였다. 가을의 발밑에 작은 자국이 하나. 운동화 밑창 모양으로.머무는 이의 자국. 도서관에서 내가 벽에 남긴 금처럼. 이 세상에서도 남는 것.가을은 멈추지 않았다.학교 건물 현관 위에 시계가 걸려 있었다.둥근. 흰 바탕에 검은 숫자. 운동장 어디서나 보이는. 나는 그 시계를 처음 보았다. 이 년 동안 교문 앞에 수십 번 섰는데. 늘 기둥을, 쪽지를, 비탈을 보았다. 시계는 보지 않았다.시계는 여덟 시 칠 분이었다.긴바늘이 7과 8 사이에. 7에 조금 더 가깝게.천 날 동안. 가을의 손목의 전자시계처럼. 08:07.가을이 여섯 번째 걸음을 들어 올렸다.그리고 나는 보았다.긴바늘이.움직였다.아주 조금. 딸깍, 하고. 소리는 비탈 위까지 오지 않았다. 그런데 보였다. 긴바늘이 한 칸을 건너가는 것이. 7과 8 사이에서, 8로.여덟 시 팔 분.경비실의 작은 창.유리 속에 교문 안쪽이 비쳤다. 흙바닥. 가을의 등. 패딩. 빨간 목도리. 땋은 머리.그 등 뒤가.비어 있었다.바로 등 뒤에 서 있던 것이. 거리 영에 서 있던 것이. 없었다. 떨어져 나간 것처럼. 오래 입은 겉옷을 벗어 내려놓듯이.소리도 빛도 없었다.가을은 몰랐을 것이다. 가을은 유리를 보지 않았으니까. 앞을 보고 있었으니까.그리고 교문 앞의 입김이.유난히 크게, 길게 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