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상의 뒷면: Chapter 1 - Chapter 10

80 Chapters

1화. 천둥

오전 7시 40분, 우리 집 부엌은 늘 전쟁이다."우진 씨, 서아 양말.""신겼어.""그거 짝짝이야."내려다보니 서아의 왼발엔 토끼, 오른발엔 곰이 있었다. 서아는 자기 발을 번갈아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본인은 짝짝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본인이 좋다는데.""어린이집 가서 선생님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빠가 대충 신겼다고 생각하지.""아빠가 대충 신긴 거 맞잖아."해인은 대꾸 대신 식빵 한 조각을 내 입에 물렸다. 그러고는 서아 앞에 쪼그려 앉아 곰을 벗기고 토끼를 신겼다. 서아가 곰 양말을 빼앗아 머리에 썼다. 해인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식빵이 입에서 떨어질 뻔했다.아내는 오늘 일찍 나가야 했다. 분기 마감이라고 했다. 그래서 등원은 내 몫이었다. 원래는 번갈아 가며 하는데, 요즘은 내가 더 자주 한다. 품질관리팀 대리가 영업팀 과장보다는 출근 시간이 여유로우니까. 그렇게 정리하면 공평해 보였다."오늘 늦어?""아마. 서아 저녁 부탁해. 냉장고에 카레 있어.""당신이 만든 거?""어머니가 주신 거.""다행이다."해인이 내 옆구리를 꼬집고 현관으로 나갔다. 구두를 신다 말고 돌아서서 서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서아야, 엄마 다녀올게.""엄마 빠이."서아는 곰 양말을 머리에 쓴 채 손을 흔들었다. 해인은 그 모습을 휴대폰으로 한 장 찍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매일 아침 듣는 소리였다. 이상하게 그날은 끝까지 들었다.서아와 나는 8시 반에 집을 나섰다. 어린이집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서아의 걸음으로는 이십 분. 서아는 가는 길에 멈출 곳을 정해 두고 있었다. 빵집 앞 유리창에서 한 번, 파란 대문 집의 고양이에게 한 번, 전봇대 밑 민들레에게 한 번. 오늘은 고양이가 없었다. 서아는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냥이 어디 갔어?""냥이도 출근했나 보다.""냥이 출근."서아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은 길 내내 "냥이 출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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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8시 53분

유리에서 손을 뗐다.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내 것이었다. 서아의 작은 손자국 옆에, 커다랗고 축축한 손자국 하나. 그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입김처럼, 그대로 거기 붙어 있었다.나는 그걸 한참 보다가 돌아섰다.생각을 해야 했다. 무서운 건 나중에 해도 됐다. 지금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부터 알아야 했다. 회사에서 불량이 터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거였다. 겁먹지 말고, 추측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확인한다. 현상, 범위, 조건. 삼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이었다.나는 큰길 쪽으로 걸어 나갔다.버스 정류장 앞에 파란 간선버스가 서 있었다. 앞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유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운전석이 비어 있었다. 좌석도 비어 있었다. 손잡이 몇 개가 한쪽으로 기운 채 멈춰 있었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다 선 것처럼.문 사이 고무 틈에 손가락을 넣고 옆으로 밀었다.뻑뻑했다. 한 번 더 힘을 주자 문이 덜컹, 하고 한 뼘쯤 벌어졌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흠칫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쇠 긁히는 소리가 퍼졌다가, 사라졌다.버스 안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공기가 그냥 거기 고여 있었다. 요금 단말기 화면이 까맸다. 교통카드를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운전석 계기판도 까맸다. 열쇠는 꽂혀 있었다. 돌려 보았다. 아무것도.나는 버스에서 내렸다.정류장 전광판도 까맸다. 방금 전까지 "간선 273 곧 도착"이 흘러가고 있던 전광판이었다. 나는 그걸 분명히 봤다. 아침마다 보는 거니까.길 건너 편의점으로 갔다. 자동문이 열리지 않았다. 손으로 밀었다. 고무 패킹이 끼익 하며 조금씩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켜진 채로 멈춰 있었다. 불빛이 깜빡이지도, 웅웅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밝았다. 사진 속 불빛처럼.계산대 모니터는 까맸다. 카드 단말기도, 포스기도. 냉장고 모터 소리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차가웠다. 음료수 캔 하나를 꺼냈다. 차가웠다. 한참 쥐고 있어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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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문

어린이집 유리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원래 아침 9시 반까지는 열어 둔다. 늦게 오는 아이들 때문이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문이 열렸다. 경첩이 삐걱, 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복도 끝까지 굴러갔다가 사라졌다.서아의 손자국이 문과 함께 옆으로 비껴 갔다. 나는 손자국이 지워질까 봐 유리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들어갔다.현관 바닥에 아이들 실내화가 줄지어 놓인 신발장이 있었다. 칸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코팅한 종이에 사진과 이름. 김도윤, 박하린, 최시우, 이서아.이서아.서아 칸에 노란 운동화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방금 내가 찍찍이를 붙여 준 그 운동화였다. 한 짝은 조금 비뚤게 들어가 있었다. 선생님이 급하게 넣은 모양이었다. 운동화 옆에는 분홍색 실내화가 없었다. 서아는 실내화를 신고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나는 운동화를 꺼냈다. 찍찍이가 붙어 있었다. 내가 붙인 그대로였다. 끈 대신 붙인 벨크로의 까슬까슬한 감촉. 안창에 서아의 발 모양이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나는 운동화를 다시 넣었다. 똑바로.복도로 들어갔다.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소리 없이.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해, 무지개, 엄마, 아빠. 이름 없는 그림들 사이에서 나는 서아의 그림을 찾았다. 서아는 아직 그림이라고 할 만한 걸 못 그린다. 동그라미 비슷한 것에 선을 몇 개 긋는 게 전부다. 그래도 선생님은 그걸 벽에 붙여 줬다. 제목은 선생님이 대신 써 줬다. '우리 아빠'.그 동그라미가 벽에 있었다. 노란 크레파스로 그린 동그라미에 팔인지 다리인지 모를 선 네 개. 그 아래 '우리 아빠 — 이서아'.나는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서아야."불렀다. 이번엔 작게. 큰 소리를 내면 이 복도가 무너질 것 같았다.대답이 없었다.복도 끝에 교실이 세 개 있었다. 햇살반, 달님반, 별님반. 서아는 햇살반이었다. 두 살 반.햇살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나는 문을 밀었다.교실이 텅 비어 있었다.낮은 책상 네 개, 작은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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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집

집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이었다. 서아와 함께라면.혼자 걸으니 십이 분이 걸렸다. 아마도. 시계는 8시 53분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나는 걸음 수를 셌다. 어린이집 앞 골목에서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천육백사십 걸음. 세다가 두 번쯤 틀렸으니 천육백 몇십 걸음.오는 길에 서아가 멈추는 곳들을 지났다.빵집 앞 유리창. 진열대에 소보로빵이 놓여 있었다. 서아는 소보로의 울퉁불퉁한 껍질을 좋아해서 늘 유리에 코를 박고 들여다봤다. 유리에 작은 코 자국이 있을까 싶어 들여다보았는데,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안 멈췄으니까.파란 대문 집. 고양이는 없었다. "냥이 출근." 서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들리는 것 같았을 뿐이다. 실제로 들리는 건 내 발소리뿐이었다.전봇대 밑 민들레. 노란 꽃 세 송이가 있었다. 한 송이가 바람에 기운 채 멈춰 있었다. 바람은 없는데 기울어 있었다. 53분에 불던 바람의 모양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아파트 단지 정문은 사람 대신 차단기만 서 있었다. 경비실이 비어 있었다. 경비 아저씨의 라디오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소리 없이.우리 동은 108동, 12층.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위 숫자판도 까맸다. 당연했다. 이것도 머리를 쓰는 기계였다.계단을 올랐다.12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 본 건 이사 온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은 엘리베이터 점검 날이었다. 해인은 만삭이었고, 나는 해인의 가방과 내 가방과 화분 두 개를 들고 올라갔다. 해인은 7층에서 한 번 쉬고, 10층에서 한 번 쉬었다. 10층 계단참에 앉아서 해인이 말했다."우리 애는 엘리베이터 고장 나도 안 쉬고 올라가는 튼튼한 애로 키우자."그 계단참을 지났다. 나는 쉬지 않았다. 쉬면 안 될 것 같았다.1201호 앞에 섰다.현관문은 도어락이었다. 번호를 누르는 전자식. 나는 번호판에 손을 댔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눌러도 삑 소리가 나지 않았다.잠겼다. 당연했다.나는 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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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잠

가짜 밤 속에서 나는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얼마나 앉아 있었는지는 모른다. 시계가 가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숨을 셌다. 들이쉬고 내쉬고가 한 번. 천 번쯤 셌을 때 세는 걸 그만두었다. 세는 게 더 무서웠다. 숫자는 늘어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배가 고팠다.어이없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팠다. 아침에 먹은 거라곤 해인이 입에 물려 준 식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 몸은 몸의 시간대로 가고 있었다. 세상이 멈췄어도 내 위장은 멈추지 않았다.냉장고를 열었다. 어머니가 주신 카레가 반찬통에 담겨 있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불을 켜려다 멈췄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는 전자식 점화였다. 버튼을 누르면 딸깍딸깍 불꽃이 튀는. 눌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주머니에서 편의점 라이터를 꺼냈다. 가스 밸브를 열고 버너 쪽에 라이터를 댔다.칙.화르륵, 파란 불꽃이 둥글게 일어났다.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불이 붙었다. 가스가 나오고 있었다. 가스관 속 가스는 멈춰 있어야 하지 않나. 수도관의 물처럼. 그런데 불이 붙었다.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는 가스통이 아니라 도시가스였다. 관 속의 가스는 세상의 것이다. 그런데 불이 붙었다. 수도는 안 되고 가스는 된다.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자. 불량 분석의 첫 번째 원칙. 한 번 본 걸로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나는 불을 끄고 다시 켜 보았다. 붙었다. 끄고 기다렸다가 다시. 붙었다. 세 번째에 불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불꽃이 흔들리지 않았다. 라이터처럼. 곧게, 둥글게, 가만히. 하지만 냄비를 올려놓자 냄비 바닥이 데워지기 시작했다.타는 건 된다. 흐르는 건 안 된다. 그런가. 모르겠다. 모르는 채로 카레를 데웠다.카레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그 냄새가 너무 평범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어머니의 카레 냄새. 감자를 크게 썰고 당근을 적게 넣는 카레. 해인은 이 카레를 "시댁 카레"라고 불렀고, 서아는 감자만 골라 먹었다.냄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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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세이브

둘째 날, 나는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첫날은 무서워서 집에 숨었다. 둘째 날은 무서워서 밖으로 나갔다. 같은 무서움인데 방향만 달랐다.나가기 전에 거실 벽 앞에 섰다. 서아 키를 재는 눈금자가 붙어 있는 벽이었다. 곰돌이 그림 옆에 연필로 그은 선 세 개. 돌, 18개월, 두 돌. 선 옆에 날짜와 키가 적혀 있었다. 77센티, 82센티, 87센티.나는 그 옆, 곰돌이 머리 위쪽 빈 벽에 연필로 금을 두 개 그었다.하나, 둘.해인이 보면 벽지에 낙서했다고 잔소리할 것이다. 나는 그 잔소리를 듣고 싶었다.두 돌 선을 긋던 날이 생각났다. 서아는 벽에 등을 대고 가만히 서 있지 못했다. 자꾸 발뒤꿈치를 들었다. 키가 커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연필이 머리에 닿는 게 간지러워서였다. 해인이 서아 이마를 손바닥으로 살짝 누르고, 나는 그 틈에 재빨리 선을 그었다. 87센티. 해인은 1센티쯤은 속은 것 같다고 했다.나는 내가 그은 금 두 개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연필 가루가 조금 묻어났다. 흑연 냄새가 났다. 서아의 선보다 훨씬 짧고 가는 금이었다.현관을 나서며 도어락 비상 열쇠를 챙겼다. 편의점 라이터, 볼펜, 출석부 종이. 그리고 서아의 분홍 실내화는 가방에 넣었다.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경찰서부터 갔다.가는 길에 어린이집 쪽 골목은 일부러 피했다. 유리문의 손자국을 또 보면 거기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일 것 같았다.동네 지구대는 걸어서 십 분 거리였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민원 창구 앞에 번호표 기계가 서 있었다. 대기 번호 17. 호출 번호 16. 번호표 한 장이 기계 입에서 반쯤 나오다 멈춰 있었다. 누군가 뽑으려던 17번.그 번호표를 뽑았다. 종이가 쉽게 빠져나왔다. 내 손에 들어온 순간 그냥 종이였다.얇고 매끄러운 종이였다. 17이라는 숫자가 까맣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걸 창구 위에 올려 두었다. 부를 사람이 없는 번호였다. 그래도 구겨서 버리지는 못했다."실례합니다."창구 너머 책상들이 비어 있었다. 모니터들은 까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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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공짜

벽에 금이 다섯 개가 되던 날, 냉장고가 비었다.정확히는 비지 않았다. 반찬 몇 가지와 달걀 네 개, 케첩과 쌈장이 있었다. 하지만 카레는 끝났고 생수도 두 병 남았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둔 채 한참 서 있었다. 냉장고 불빛이 켜진 채로 멈춰 있었다. 모터 소리 없는 냉장고는 그냥 차가운 상자였다.장을 봐야 했다.그 말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장을 본다. 이 세상에서. 계산대에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장 보는 건 원래 해인 몫이었다. 해인은 휴대폰에 목록을 적어 갔고, 나는 카트를 밀며 목록에 없는 과자를 몰래 넣었다. 계산대에서 해인은 그걸 꺼내 들고 나를 봤다. 서아가 먹을 거라고 하면 한 번은 봐줬다.단지 앞 대형마트까지는 걸어서 칠 분이었다.가는 길에 빈 유모차 하나가 인도에 서 있었다. 바퀴 하나가 보도블록 틈에 걸린 채였다. 안에 작은 담요가 구겨져 있었다. 나는 담요를 펴 주려다 손을 거두었다.마트 자동문은 반쯤 열린 채 멈춰 있었다. 누군가 막 들어가던 참이었던 것처럼. 나는 그 틈으로 몸을 비틀어 들어갔다. 입구에 카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동전을 넣어야 빠지는 카트. 주머니에 백 원짜리가 있었다. 넣었다. 카트가 빠졌다. 백 원이 동전 구멍 안에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매장 안으로 굴러가다 사라졌다.매장은 넓었다. 형광등이 전부 켜져 있었다. 진열대마다 물건이 가득했다. 오전 9시 개점 직전이었는지, 진열이 완벽했다. 사과는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고, 우유는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빵은 봉지마다 반듯했다.매장 안은 서늘했다. 채소 코너 위로 물안개를 뿌리는 분무구가 있었는데, 하얀 안개가 상추 위에 얇게 걸려 있었다. 흩어지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 손을 넣어 보았다. 젖지 않았다. 빵 코너 앞에서는 구운 빵 냄새가 났다. 코를 진열대에 바짝 대야만.아무도 없었다. 계산대에도, 시식 코너에도, 정육 코너 유리 너머에도.나는 카트를 밀고 생수 코너로 갔다. 2리터 생수 여섯 개들이 묶음을 들어 카트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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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두 바퀴

걷는 건 한계가 있었다.해인의 회사까지 왕복 네 시간. 마트에서 12층까지 다섯 번 왕복. 이틀 동안 종아리가 돌처럼 뭉쳤다. 차는 안 된다. 지하철도, 버스도. 머리를 쓰는 건 다 죽었다.그렇다면 머리 없는 탈것.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체인이 돌고, 체인이 돌면 바퀴가 도는 것. 내 다리가 하는 만큼만 가는 것. 태엽이 감기고 라이터가 켜지는 세상이라면, 이것도 될 것이다.아파트 자전거 보관대에 자전거가 스무 대쯤 서 있었다. 대부분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비밀번호 자물쇠, 열쇠 자물쇠, 체인. 나는 보관대를 한 바퀴 돌았다. 자물쇠 없는 자전거는 두 대였다. 하나는 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었고, 하나는 아이용이었다.아이용 자전거 앞에 잠깐 서 있었다. 보조 바퀴가 달린 분홍색. 서아가 네 살쯤 되면 사 주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모델이었다. 해인이 인터넷으로 벌써 봐 둔 거였다.나는 분홍 자전거 핸들에 달린 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겨 보았다. 따릉. 작고 맑은 소리가 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서아라면 저걸 몇 번이고 누를 것이다. 해인은 시끄럽다고 할 것이고.나는 그 자전거를 지나쳤다.결국 관리사무소 옆 창고로 갔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 공구함이 있었다. 절단기가 있었다. 빨간 손잡이의 커다란 절단기.그걸 들고 보관대로 돌아와 제일 멀쩡해 보이는 자전거 앞에 섰다. 검은 하이브리드 자전거. 체인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절단기 날을 체인에 물렸다. 손잡이를 모았다.잘 안 됐다. 힘을 더 줬다. 이를 악물고, 온몸으로.탁.체인이 끊어졌다. 쇳조각이 튀어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져서, 굴렀다. 굴렀다. 내가 끊은 쇳조각이니까.손바닥이 얼얼했다. 절단기 손잡이의 빨간 고무가 손바닥에 줄무늬 자국을 남겼다. 쇳조각을 하나 주워 보았다. 끊어진 단면이 은색으로 반짝였다. 방금 생긴 반짝임이었다.나는 끊어진 체인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남의 자전거 자물쇠를 끊었다. 서른네 해 동안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할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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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부수기

열한 번째 금을 긋던 날, 나는 처음으로 뭔가를 부수고 싶었다.이유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열흘 동안 쌓인 게 있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삼켜지는 목소리. 아무리 달려도 불지 않는 바람.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이지 않는 해.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뭐든.부서지는 소리라도.아파트 단지 뒤편 초등학교 체육 창고에서 야구방망이를 찾았다. 알루미늄 배트. 손에 쥐니 묵직했다. 휘둘러 보았다.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주 짧게, 내 귀 옆에서만.손잡이에 감긴 테이프가 반쯤 풀려 있었다. 아이들이 쓰던 거라 손잡이가 가늘었다. 내 손에는 조금 작았다. 나는 풀린 테이프를 다시 감았다. 끈적한 면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큰길로 나가 상가 건물 앞에 섰다.아침 햇살이 상가 간판들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셔터를 반쯤 올린 가게, 다 올린 가게, 아직 내려 둔 가게. 다들 문을 열 준비를 하던 시간이었다.1층에 휴대폰 매장이 있었다. 통유리 쇼윈도. 진열대에 최신 휴대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전부 까만 화면.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장 반짝이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쇼윈도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배트를 쥔 남자. 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언제 떨어졌는지 몰랐다. 해인이었다면 벌써 알아채고 반짇고리를 꺼냈을 것이다.나는 배트를 쥐었다.손이 떨렸다. 이상하게. 이건 남의 가게였다. 저쪽 세상에서 누군가 매일 아침 셔터를 올리고, 유리를 닦고, 진열대를 정리하는 가게. 품질관리팀 이 대리의 몸은 그걸 알고 있었다. 남의 물건을 부수면 안 된다는 걸. 서른네 해 동안 한 번도 남의 유리창을 깬 적이 없었다."괜찮아."나에게 말했다."여긴 저쪽이랑 상관없어. 부숴도 아무도 안 다쳐."그게 사실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서아가 처음 컵을 깨던 날이 생각났다. 식탁에서 유리컵을 밀어 떨어뜨리고는, 깨지는 소리에 놀라 한참 울었다. 해인이 서아를 안고 달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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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스위트룸

열다섯 번째 금을 긋고 나서, 나는 집을 나가기로 했다.집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집이 너무 집이어서였다.식탁 위 서아 식판의 포도 세 알. 소파 팔걸이의 곰 양말. 싱크대 위 해인의 머그잔. 안방 베개 위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 거실 벽의 키 눈금과 그 옆 열다섯 개의 금.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내가 손대지 않는 한, 영원히 그대로일 것이다.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매일 아침 — 매일 아침이 아침이지만 — 눈을 뜨면 똑같은 풍경이 나를 기다렸다. 박물관 같았다. 우리 가족의 마지막 아침을 전시한 박물관. 나는 그 박물관의 유일한 관람객이자 경비원이었다.나는 곰 양말을 몇 번이나 집어 들었다가 다시 팔걸이에 걸었다. 치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아가 던진 모양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런데 그대로 두니까, 볼 때마다 서아가 양말을 던지는 장면이 다시 보였다.하루쯤은 다른 데서 자고 싶었다."어디 좋은 데 가자."소리 내어 말했다. 누구한테인지 모르고. 아마 나한테.자전거를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한 시간쯤 달렸다. 바람 없는 길을.광화문으로 가는 큰길은 넓었다. 멈춘 차들 사이로 버스 정류장들이 지나갔다. 정류장마다 누군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가방 하나, 우산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세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달렸다.광화문 근처 5성급 호텔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결혼 5주년 때 해인과 한 번 오려고 예약했다가, 서아가 열이 나서 취소한 호텔이었다. 위약금을 물었다. 해인은 아까워서 사흘 동안 한숨을 쉬었다.그때 해인은 예약한 방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창가에 욕조가 있는 방이었다. 해인은 그 주 내내 들떠 있었다. 서아의 열은 체크인 전날 밤에 올랐다. 해인은 서아를 안고 밤새 이마를 짚었다. 호텔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흘 동안의 한숨은 그다음이었다.회전문을 손으로 밀어 돌렸다.로비는 대리석이었다. 천장이 까마득히 높았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켜진 채 멈춰 있었다. 크리스털 수천 개가 빛을 품은 채 움직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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