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출근길, 갑작스러운 정적과 함께 세상이 멈췄다. 사람도, 소리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무너지는 대신 읽고 쓰기 시작했다. 기록은 곧 기억이고, 기억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므로.
Lihat lebih banyak오전 7시 40분, 우리 집 부엌은 늘 전쟁이다.
"우진 씨, 서아 양말."
"신겼어."
"그거 짝짝이야."
내려다보니 서아의 왼발엔 토끼, 오른발엔 곰이 있었다. 서아는 자기 발을 번갈아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본인은 짝짝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본인이 좋다는데."
"어린이집 가서 선생님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빠가 대충 신겼다고 생각하지."
"아빠가 대충 신긴 거 맞잖아."
해인은 대꾸 대신 식빵 한 조각을 내 입에 물렸다. 그러고는 서아 앞에 쪼그려 앉아 곰을 벗기고 토끼를 신겼다. 서아가 곰 양말을 빼앗아 머리에 썼다. 해인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식빵이 입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내는 오늘 일찍 나가야 했다. 분기 마감이라고 했다. 그래서 등원은 내 몫이었다. 원래는 번갈아 가며 하는데, 요즘은 내가 더 자주 한다. 품질관리팀 대리가 영업팀 과장보다는 출근 시간이 여유로우니까. 그렇게 정리하면 공평해 보였다.
"오늘 늦어?"
"아마. 서아 저녁 부탁해. 냉장고에 카레 있어."
"당신이 만든 거?"
"어머니가 주신 거."
"다행이다."
해인이 내 옆구리를 꼬집고 현관으로 나갔다. 구두를 신다 말고 돌아서서 서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아야, 엄마 다녀올게."
"엄마 빠이."
서아는 곰 양말을 머리에 쓴 채 손을 흔들었다. 해인은 그 모습을 휴대폰으로 한 장 찍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매일 아침 듣는 소리였다. 이상하게 그날은 끝까지 들었다.
서아와 나는 8시 반에 집을 나섰다. 어린이집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서아의 걸음으로는 이십 분. 서아는 가는 길에 멈출 곳을 정해 두고 있었다. 빵집 앞 유리창에서 한 번, 파란 대문 집의 고양이에게 한 번, 전봇대 밑 민들레에게 한 번. 오늘은 고양이가 없었다. 서아는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냥이 어디 갔어?"
"냥이도 출근했나 보다."
"냥이 출근."
서아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은 길 내내 "냥이 출근"을 중얼거렸다.
서아는 신발을 꼭 한 번 벗는다.
어린이집 현관 앞에서, 매일 아침. 노란 운동화를 한 짝 벗어 손에 들고 나를 올려다본다. 이걸 왜 벗었는지는 본인도 모르는 얼굴이다. 나는 쪼그려 앉아 그 한 짝을 다시 신긴다. 찍찍이를 붙이는 소리가 난다. 서아는 그 소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벗는 거라고 아내는 말했다.
"찍."
서아가 말했다. 소리를 따라 한 것이다.
"찍. 다 됐다."
오전 8시 51분. 어린이집 유리문 너머에서 담임 선생님이 손을 흔들었다. 서아는 내 손을 놓고 문 쪽으로 두 걸음 가다가, 멈췄다. 돌아서서 나를 봤다. 울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아빠가 아직 거기 있는지.
"있어. 아빠 여기 있어."
서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닫혔다. 서아는 신발장 앞에서 선생님 손을 잡고 서 있다가, 갑자기 유리에 두 손바닥을 붙였다. 얼굴도 붙였다. 코가 눌려 납작해졌다. 나는 웃었다. 서아도 웃었다. 입김에 유리가 뿌옇게 흐려졌고, 그 위로 작은 손바닥 두 개가 선명하게 찍혔다.
선생님이 서아를 안아 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유리에는 손자국만 남았다.
나는 그걸 조금 더 보고 있었다. 매일 보는 건데도 그랬다. 두 살짜리 손바닥은 내 엄지손가락 두 마디만 했다. 저 손이 언젠가 내 손을 뿌리치고 혼자 버스를 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침부터 목이 멨다. 아내는 그걸 알고 늘 놀렸다. 당신은 딸 시집보낼 때 기절할 거라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떨렸다.
[해인] 서아 안 울었어?
[나] 신발 벗었다 신었음. 무사 등원.
[해인] ㅋㅋ 찍찍이 중독자
나는 휴대폰을 넣고 돌아섰다. 8시 52분. 회사까지는 버스로 사십 분. 9시 반까지만 들어가면 된다. 오늘은 오전에 불량 분석 회의가 있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 삼 년째 대리.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린이집 앞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 쪽으로 걸었다.
세 걸음.
네 걸음.
쿵—
처음엔 공사장인 줄 알았다. 뭔가 크고 무거운 것이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가 밖에서 나지 않았다.
안에서 났다.
머리 안쪽, 두개골 한가운데서. 누가 거대한 북을 딱 한 번 친 것처럼, 소리라기보다는 떨림이 머릿속 전체를 한 번에 채웠다가 빠져나갔다. 귀가 먹먹해졌다. 눈앞이 한순간 하얗게 비었다가 돌아왔다.
나는 그 자리에 섰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쏟아졌다. 한 방울씩 흐르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셔츠가 등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뛰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픈 데도 없었다. 넘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서웠다.
이유가 없는 공포였다. 뭔가가 끝났다는 느낌. 방금 뭔가가, 아주 큰 뭔가가, 돌이킬 수 없게 지나가 버렸다는 느낌.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공포가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뒤에 뭐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알았다. 방금 그 소리는 내 뒤에서 난 거다. 머릿속에서 났지만, 뒤에서 났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린이집 앞 골목이었다. 방금 걸어 나온 그대로의 골목. 파란 대문의 연립주택, 전봇대, 누군가 내놓은 재활용 박스, 어린이집의 노란 간판.
그리고 유리문.
유리문에는 서아의 손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그 안에, 아무도 없었다.
신발장 앞에 서 있던 선생님도, 복도를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아침마다 현관에서 인사하던 원장 선생님도. 유리 너머 복도가 텅 비어 있었다. 형광등만 켜져 있었다.
"……뭐야."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컸다.
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큰길 쪽.
비둘기 한 마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날아가는 중이 아니었다. 떠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채, 전봇대 높이쯤에서. 깃털 하나하나가 펼쳐진 모양 그대로 멈춰 있었다. 사진처럼. 아니, 사진보다 더 가만히.
그 아래 횡단보도 신호등은 초록불이었다. 초록 사람이 걷는 모양으로 켜져 있었다. 깜빡이지 않았다.
길가에 테이크아웃 컵 하나가 기울어진 채 떠 있었다. 누군가 떨어뜨린 커피였다. 컵 입구에서 쏟아지던 갈색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물방울 몇 개가 컵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동그랗게 매달려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반짝임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은 없었다.
컵을 떨어뜨린 사람도,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도,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도. 방금 전까지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들 옆을 지나왔다. 그 사람들이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차도 위의 차들은 그대로 있었다. 버스 한 대, 택시 두 대, 흰색 승용차. 차선 위에 멈춰 있었다. 운전석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없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큰길에 서 있는데 차 소리가 없었다. 바람 소리가 없었다. 가로수 잎이 흔들리지 않았다. 멀리 공사장 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던 라디오 소리도, 새소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 숨소리만 들렸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 소리가 귓속에서 크게 울렸다. 이렇게 큰 소리로 숨을 쉬고 살았나 싶을 만큼.
"저기요."
나는 불렀다.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고.
"저기요! 누구 없어요?"
목소리가 골목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사라졌다.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게 없었다. 메아리도, 울림도. 소리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솜에 대고 소리친 것처럼.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소리였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이 검었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검었다. 길게 눌렀다. 검었다. 방금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 휴대폰이었다. 배터리는 칠십 퍼센트가 넘게 남아 있었다. 검은 화면에는 내 얼굴만 비쳤다.
식은땀에 젖은, 하얗게 질린 얼굴.
나는 그 얼굴을 한참 보았다. 누구인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다시 돌아섰다. 어린이집 쪽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서아.
서아는 저 안에 있다. 방금 들어갔다. 저 유리문 안으로, 선생님 품에 안겨서. 사람들이 다 없어졌어도, 서아는 있어야 한다. 서아는 방금 들어갔으니까. 방금 나를 보고 웃었으니까.
나는 유리문 앞으로 걸어갔다. 뛰지 않았다. 뛰면 뭔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유리문 앞에 섰다. 손자국이 눈높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었다. 작은 손바닥 두 개. 다섯 손가락이 다 보였다. 엄지가 조금 삐뚤었다. 입김 자국은 아직 뿌옜다.
아직 뿌옜다.
방금 전에 찍힌 입김 자국이 마르지 않고 그대로였다. 몇 초면 사라져야 할 김이, 유리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입김도 멈춰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손자국 옆에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내 손바닥은 서아의 손자국을 전부 덮고도 남았다.
"서아야."
대답이 없었다.
"서아야. 아빠야."
내 목소리가 유리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이집 유리문 너머엔 작은 손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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