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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스위트룸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7 12:14:50

열다섯 번째 금을 긋고 나서, 나는 집을 나가기로 했다.

집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집이 너무 집이어서였다.

식탁 위 서아 식판의 포도 세 알. 소파 팔걸이의 곰 양말. 싱크대 위 해인의 머그잔. 안방 베개 위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 거실 벽의 키 눈금과 그 옆 열다섯 개의 금.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내가 손대지 않는 한, 영원히 그대로일 것이다.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매일 아침 — 매일 아침이 아침이지만 — 눈을 뜨면 똑같은 풍경이 나를 기다렸다. 박물관 같았다. 우리 가족의 마지막 아침을 전시한 박물관. 나는 그 박물관의 유일한 관람객이자 경비원이었다.

나는 곰 양말을 몇 번이나 집어 들었다가 다시 팔걸이에 걸었다. 치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아가 던진 모양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런데 그대로 두니까, 볼 때마다 서아가 양말을 던지는 장면이 다시 보였다.

하루쯤은 다른 데서 자고 싶었다.

"어디 좋은 데 가자."

소리 내어 말했다. 누구한테인지 모르고. 아마 나한테.

자전거를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한 시간쯤 달렸다. 바람 없는 길을.

광화문으로 가는 큰길은 넓었다. 멈춘 차들 사이로 버스 정류장들이 지나갔다. 정류장마다 누군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가방 하나, 우산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세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달렸다.

광화문 근처 5성급 호텔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결혼 5주년 때 해인과 한 번 오려고 예약했다가, 서아가 열이 나서 취소한 호텔이었다. 위약금을 물었다. 해인은 아까워서 사흘 동안 한숨을 쉬었다.

그때 해인은 예약한 방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창가에 욕조가 있는 방이었다. 해인은 그 주 내내 들떠 있었다. 서아의 열은 체크인 전날 밤에 올랐다. 해인은 서아를 안고 밤새 이마를 짚었다. 호텔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흘 동안의 한숨은 그다음이었다.

회전문을 손으로 밀어 돌렸다.

로비는 대리석이었다. 천장이 까마득히 높았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켜진 채 멈춰 있었다. 크리스털 수천 개가 빛을 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로비 가운데 커다란 꽃꽂이가 있었다. 백합 향이 났다. 향은 가까이 가야만 났다. 한 걸음 떨어지면 없었다.

로비 한쪽에 짐 카트가 서 있었다. 금색 봉에 캐리어 두 개가 실려 있었다. 손잡이에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어디로 떠나려던 사람인지, 어디서 막 도착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 사람은 여기 없었다.

프런트는 비어 있었다. 컴퓨터는 까맸다. 벽에 객실 카드키가 꽂힌 보관함이 있었다. 카드키. 이것도 전자식이었다. 문에 대면 삑 하고 열리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스위트룸은 글렀다.

그런데 프런트 안쪽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쇠로 된 열쇠. 태그에 '비상용 — 마스터'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객실에는 비상시에 쓰는 기계식 열쇠 구멍이 따로 있다. 우리 집 도어락처럼.

열쇠들이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맑은 소리였다. 나는 괜히 꾸러미를 몇 번 더 흔들었다.

나는 그 꾸러미를 들고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 있는 건 비상용이네."

엘리베이터는 안 됐다. 스위트룸은 34층이었다.

34층.

나는 계단 입구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12층도 다섯 번 왕복하며 10층에서 쉬었다. 34층은.

그래도 올라갔다.

10층에서 한 번 쉬었다. 20층에서 한 번. 27층에서는 계단에 드러누웠다. 계단참 창문 너머로 서울이 보였다. 높아질수록 도시가 작아졌다. 작아질수록 더 멈춰 보였다. 장난감 도시 같았다. 누가 태엽을 감다 만.

계단참마다 층수를 적은 표지판이 있었다. 나는 숫자를 소리 내어 읽으며 올라갔다. 스물하나, 스물둘. 내 목소리가 계단 통로를 따라 올라가다 몇 칸 위에서 사라졌다. 허벅지가 떨렸다. 해인이었다면 7층쯤에서 나를 버리고 로비 소파로 돌아갔을 것이다.

34층에 도착했을 때는 다리가 내 것이 아니었다.

복도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발소리가 카펫에 먹혔다. 원래도 소리가 없는 세상인데, 여기는 더 조용했다. 나는 벽을 짚고 천천히 걸었다.

스위트룸 문 옆 기계식 열쇠 구멍에 마스터키를 꽂았다. 돌렸다. 딸깍.

문이 열렸다.

방이 아니라 집이었다. 거실, 서재, 침실, 욕실. 우리 집보다 넓었다. 통유리 창이 두 면으로 나 있었다. 창밖으로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과 북악산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도시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수만 개의 창문, 수천 대의 차, 수백 개의 신호등. 전부 멈춰 있었다. 광장의 분수가 물줄기를 하늘로 뿜어 올린 채 굳어 있었다. 하얀 물기둥이 조각처럼 서 있었다. 경복궁 지붕 위로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다 멈춰 있었다. 수십 마리가 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그 풍경을 내 눈으로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도시 전체가 나를 위해 멈춰 선 것 같았다. 동시에, 이 도시 전체가 나를 두고 떠난 것 같았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유리가 서늘했다. 이마를 떼자 유리에 동그랗게 자국이 남았다. 어린이집 유리문의 작은 손자국이 생각났다. 거기서 한참 먼 곳이었다.

욕실에 들어갔다. 대리석 욕조가 창가에 놓여 있었다. 욕조에 누우면 도시가 보이게.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농담이 아니다. 34층을 다시 내려갔다. 로비 옆 레스토랑 주방으로. 거기 생수 박스가 쌓여 있었다. 500밀리리터짜리 스무 병 들이. 두 박스를 들었다. 그리고 34층을 다시 올라갔다.

두 번 더 오르내렸다. 생수 여섯 박스. 백이십 병.

그걸 전부 욕조에 부었다. 병뚜껑을 하나씩 따서, 하나씩. 백이십 번. 손목이 아팠다. 물이 차올랐다. 내가 부은 물은 흘렀다. 욕조 바닥에 고였다. 내 물이었다.

병을 기울일 때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욕조 바닥을 때리는 소리. 그 소리가 타일 벽까지 가지 못하고 내 곁에서만 맴돌았다. 그래도 물이 차오를수록 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욕조가 채워지는 소리였다.

차가웠다. 데울 방법이 없었다.

레스토랑 주방에서 가스를 쓸 수 있었을까. 냄비에 물을 데워 34층까지 나르는 건. 나는 생각을 멈췄다. 차가운 물이면 됐다.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숨이 멎을 만큼 차가웠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그래도 몸을 담갔다. 목까지. 창밖에 도시가 보였다. 분수의 물기둥, 비둘기 떼, 북악산.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가 부딪히는 채로.

"해인아. 나 스위트룸이야."

"우리 결혼기념일 때 못 온 데. 위약금 낸 데."

"욕조가 창가에 있어. 도시가 다 보여. 근데 물이 더럽게 차가워."

해인이 들었으면 "애 앞에서 욕하지 마" 했을 것이다. 서아는 없는데도.

욕조에서 나와 가운을 입었다. 호텔 가운. 두툼하고 부드러웠다. 미니바에서 샴페인을 꺼냈다. 코르크를 땄다. 펑. 거품이 넘쳤다. 넘쳐서 흘렀다. 내가 딴 거니까.

젖은 발이 대리석 바닥에 발자국을 남겼다. 발자국은 마르지 않았다. 욕실에서 창가까지 내 발자국이 줄지어 따라왔다.

창가 소파에 앉아 병째 마셨다.

거품이 코끝을 간질였다. 차가운 알갱이들이 혀 위에서 톡톡 터졌다. 샴페인은 결혼식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은 한 모금 마시자마자 인사하러 끌려 다녀서 맛도 몰랐다.

도시가 발아래 있었다. 나는 가운을 입고 샴페인을 들고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성공한 남자의 풍경이었다. 영화 속 한 장면.

아무도 안 봤다.

샴페인이 반쯤 비었을 때, 나는 창가에 서서 병을 들어 올렸다.

"건배."

도시에게. 멈춘 도시에게.

"건배, 서울."

아무도 잔을 부딪치지 않았다.

침대는 킹사이즈였다. 네 명이 누워도 남을 만큼. 나는 그 한가운데 누웠다. 시트가 빳빳하고 서늘했다. 호텔 냄새가 났다. 깨끗하고, 아무 추억도 없는 냄새.

베개가 네 개였다. 나는 그중 하나를 끌어안았다. 서아 베개보다 몇 배는 컸다. 서아는 베개를 두고도 꼭 내 팔을 베고 잤다. 아침이면 팔이 저려서 한참 주먹을 쥐었다 폈다.

집이 너무 집이어서 나왔는데, 여기는 너무 집이 아니었다.

나는 몸을 돌려 누웠다. 침대가 너무 넓었다. 어느 쪽으로 손을 뻗어도 아무도 없었다. 집 침대였다면 서아가 발로 내 옆구리를 차고 있었을 것이다. 해인이 이불을 다 가져가 돌돌 말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늘 이불 없이 잤다. 침대 끝에 겨우 매달려서.

그게 그리웠다. 이불 없이 침대 끝에 매달려 자던 게.

나는 백팩에서 서아의 분홍 실내화를 꺼냈다. 베개 옆에 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뚝.

일어났을 때, 창밖 도시는 그대로였다. 분수도, 비둘기도. 샴페인 병이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

벽에 금을 그을 수 없었다. 호텔 벽이었으니까. 금은 집 벽에 그어야 했다. 서아 키 눈금 옆에.

나는 가운을 벗고 옷을 입었다. 34층을 내려갔다.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렸다. 12층을 올라갔다.

거실 벽 앞에 섰다. 열여섯 번째 금을 그었다.

식탁 위 포도 세 알이 나를 반겼다. 곰 양말도. 해인의 머그잔도.

박물관이었다. 그래도 내 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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