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스무 번째 금을 그은 날, 나는 미술관에 갔다.
계획한 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목적 없이 달리다가 덕수궁 돌담길로 접어들었다. 돌담이 끝나는 곳에 미술관이 있었다.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특별전. 인상파 거장전. 해인이 가자고 했던 전시였다. 지난달에 개막했고, 우리는 "주말에 가자" 하고 두 번 미뤘다. 서아를 누구한테 맡기느냐 때문에.
돌담길은 해인과 연애할 때 자주 걷던 길이었다. 연인이 이 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해인은 그 말을 알고 일부러 내 손을 잡고 끝까지 걸었다. 헤어지나 안 헤어지나 보자고.
현수막 속 그림은 연못 위 수련이었다.
현수막 끝이 바람에 말려 올라간 채 멈춰 있었다. 연못의 한쪽 귀퉁이가 접혀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접힌 귀퉁이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자전거를 세웠다.
미술관 정문 유리문은 잠겨 있었다. 9시 반 개관이었다. 53분에는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나는 문 앞에 한참 서 있다가, 백팩에서 배트를 꺼냈다. 부수기 이후로 늘 들고 다녔다. 지팡이 삼아.
유리문을 깨려다 멈췄다.
이 문은 깨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휴대폰 매장 유리는 잘만 깼으면서.
나는 배트를 도로 백팩에 꽂았다. 손잡이가 지퍼 사이로 삐죽 나왔다. 유리문에 비친 내가 조금 멋쩍어 보였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뒤편에 직원 출입구가 있었다. 쇠문이었다. 열쇠 구멍이 있었다. 잠겨 있었다.
그 옆 경비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경비실 벽 열쇠함에 열쇠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름표가 붙은. 나는 창문 틈으로 팔을 넣어 '직원 출입구'라고 적힌 열쇠를 떼어 냈다.
비상용 열쇠, 마스터키, 경비실 열쇠. 요즘 내가 모으는 것들이었다.
열쇠는 차갑고 묵직했다. 톱니 끝이 닳아 둥글었다. 오래 쓴 열쇠였다. 누군가 매일 아침 이걸로 이 문을 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조금 조심스럽게 열쇠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미술관 안은 서늘했다.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림을 비추는 부드러운 노란 빛. 전시실 입구에 작품 해설 패널이 서 있었다. 순서대로 걸으라는 화살표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바닥은 나무였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작게 삐걱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전시실 벽에 닿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오래된 나무와 종이 냄새가 났다.
나는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바닥 화살표는 초록색이었다. 모서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수많은 발이 밟고 지나간 자리였다. 나는 화살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밟으며 걸었다.
첫 번째 방. 풍경화들. 들판, 강, 기차역. 캔버스 위 물감이 두껍게 올라와 있었다. 붓 자국이 보였다. 누군가 백 몇십 년 전에 이 앞에 서서 붓을 휘둘렀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붓 자국 하나에 코가 닿을 만큼 다가갔다. 물감이 굳으면서 생긴 작은 주름이 보였다. 거기 털 한 올이 박혀 있었다. 붓에서 빠진 털이었다. 백 몇십 년 동안 거기 그렇게 박혀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방. 초상화들. 모자를 쓴 여자, 피아노 치는 소녀들, 카페에 앉은 남자.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 멈춰 있었다. 당연히. 그림이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그림 속 사람들이 이 세상의 멈춘 것들과 다르게 보였다. 공중의 비둘기, 떠 있는 커피 방울, 유리 폭포. 그것들은 움직이다가 멈춘 것이었다. 움직임이 뚝 잘려 나간 것. 그래서 끔찍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처음부터 멈추려고 그려진 것이었다. 누군가 그 한순간을 붙잡으려고, 흘러가 버릴 그 빛과 표정을 남기려고, 온 힘을 다해 멈춰 놓은 것이었다.
같은 멈춤인데, 하나는 빼앗긴 것이고, 하나는 지켜 낸 것이었다.
나는 그 차이를 한참 생각했다.
공중의 비둘기를 처음 만졌을 때가 생각났다. 부드러운데 단단했다. 새가 아니라 새 모양을 한 무언가 같았다. 그림 속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손을 대지 않아도 사람 같았다.
세 번째 방에 수련이 있었다.
현수막의 그 그림이었다. 벽 하나를 거의 다 차지하는 큰 캔버스. 연못, 수련, 물에 비친 하늘과 구름. 가까이 가면 그냥 물감 덩어리였다. 파랑, 초록, 분홍, 보라가 아무렇게나 뭉개져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면 연못이 됐다. 두 걸음 물러서면 물이 흔들렸다.
흔들렸다.
나는 숨을 멈췄다.
물론 흔들리지 않았다. 물감이 움직일 리 없었다. 그런데 눈에는 흔들렸다. 붓 자국이 물결이 되고, 물감 덩어리가 빛이 되어, 연못 수면이 아주 천천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수련 잎이 바람에 조금 떠밀리는 것 같았다. 물에 비친 구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흐르는 것을 보았다.
진짜 흐르는 건 아니었다. 그림이었다. 가짜였다. 그런데 이 세상의 진짜 강물보다 더 흘렀다. 저 멈춘 한강보다, 저 굳은 분수보다.
나는 그림 앞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조용히 하려고 애썼다.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누가 쉿 하고 말할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그 그림 앞에서는 조용히 하고 싶었다.
해인이 여기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해인은 그림을 잘 몰랐다. 나도 몰랐다. 그래도 해인은 전시를 좋아했다. 그림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나를 돌아보며 "이거 좀 봐. 여기 빛 봐" 하곤 했다. 나는 빛이 어딨는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전시장에 가면 꼭 엽서를 한 장씩 샀다. 사고 나서는 어디 뒀는지 잊어버렸다. 이사할 때 책 사이에서 엽서가 몇 장씩 떨어졌다. 해인은 그걸 주워 들고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좋아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여기 빛.
"해인아."
아주 작게 불렀다.
"여기 빛 봐."
목소리가 그림 앞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번엔 사라지는 게 괜찮았다. 그림이 대신 들어 준 것 같았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한 시간이었는지 세 시간이었는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목도 마르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수련을 보았다. 물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았다.
벤치는 딱딱했다. 엉덩이가 저려 와서 몇 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때마다 벤치가 작게 삐걱였다. 그 소리조차 그림 앞에서는 미안했다.
그러다 알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흐르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내 손에 든 물은 흐른다. 내가 딴 샴페인은 넘친다. 내가 굴린 자전거 바퀴는 구른다. 내가 부순 유리는 떨어진다. 그리고 누군가 그린 그림은, 백 년이 지나도, 세상이 멈춰도, 여전히 흐른다.
사람이 만든 것은 흐른다.
멈춘 세상에 남아서.
나는 일어나 전시실을 나섰다.
출구 쪽에 기념품점이 있었다. 도록, 머그컵, 에코백, 우산. 전부 수련이 그려져 있었다. 벽 한쪽에 엽서 진열대가 있었다. 한 장에 천오백 원. 수련 엽서가 몇 종류 꽂혀 있었다. 방금 본 그림도 있었다. 손바닥만 하게 줄어든 연못.
나는 그 엽서를 한 장 뽑았다.
그리고 계산대로 가서,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과 오백 원짜리 하나를 꺼내 올려놓았다.
마트에서 한우를 두 팩이나 담아 오고, 휴대폰을 수십 개 부순 사람이 엽서 한 장 값을 치렀다. 나도 내가 우스웠다. 그래도 이건 값을 내고 싶었다. 이 엽서는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사 가는 것이고 싶었다.
계산대 위 천오백 원이 형광등 아래 가만히 놓였다. 내 손을 떠난 순간, 멈췄다. 영원히 계산을 기다리는 돈이 되어.
엽서를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가족사진과 해인의 포스트잇 옆에.
주머니가 조금 불룩해졌다. 가족사진, 포스트잇, 엽서. 셔츠 위로 손바닥을 대면 종이들이 바스락거렸다.
도록 코너 옆에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종이 방명록. '오늘의 감상을 남겨 주세요.' 앞 장에 사람들의 글씨가 빼곡했다. 날짜, 이름, 한 줄 감상. "너무 좋았어요", "엄마랑 또 올게요", "수련 앞에서 울었다".
나는 볼펜을 꺼내 빈칸에 적었다.
— 날짜 모름. 이우진. 수련 앞에서 물이 흔들리는 걸 봤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쪽 세상 사람들은 이 방명록에서 내 글씨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의 글씨 옆에 내 글씨를 두고 싶었다. 같은 그림 앞에서 운 사람들 옆에.
방명록을 덮기 전에 앞 장을 몇 장 더 넘겨 보았다. 어떤 아이가 크레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다. 수련인지 해인지 알 수 없었다. 서아의 그림 같았다. '우리 아빠'처럼, 무엇인지는 그린 사람만 아는 동그라미.
나는 미술관을 나섰다. 나오면서 직원 출입구를 잠그고 열쇠를 경비실 열쇠함에 돌려 걸었다. 창문 틈으로 팔을 넣어서, 원래 자리에.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전시실의 노란 빛에 익은 눈이 한참 찡그려졌다. 돌담 위로 영원한 아침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돌담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페달을 밟지 않고, 끌고.
집에 돌아와 출석부 종이를 꺼냈다. 스무 번째 날. 적을 게 많았다. 그런데 막상 쓰려니 한 줄밖에 나오지 않았다.
20. — 미술관. 수련. 멈춘 게 두 가지다. 빼앗긴 멈춤과 지켜 낸 멈춤.
그 줄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종이를 뒤집어, 출석부의 앞면을 보았다. 이서아, 동그라미, 8:51. 선생님이 서아를 지켜 낸 한순간.
나는 그 동그라미 옆에 아주 작게, 각진 글씨로 적었다.
— 아빠가 지킬게.
"8시 53분이었어."내가 말했다. 아주 낮게. 서아의 머리 너머로.해인이 나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쯤 보이는 얼굴로."어린이집 앞. 서아가 유리에 손바닥 붙이고 들어간 다음. 골목 나와서 세 걸음, 네 걸음. 머릿속에서 쿵 소리가 났어. 천둥 같은. 그리고 무서웠어. 이유 없이.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돌아봤어."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로."아무도 없었어. 원장 선생님도, 아이들도, 길에 있던 사람들도. 비둘기가 공중에 멈춰 있었어. 누가 떨어뜨린 커피가 쏟아지다가 굳어 있었어. 소리가 없었어. 내 숨소리 말고는."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의 이마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세상이 멈춰 있었어. 8시 53분에. 나만 빼고."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해인이 말했다. 하나도 빼지 말고. 그런데 사 년은 하나도 빼지 않고 말하기엔 너무 길었다. 천오백 날. 그 하루하루를 다 말하면, 서아가 깨고, 해가 뜨고, 다시 질 것이다.그래서 순서대로 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불량 보고서를 쓰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집에 갔다고 했다. 도어락이 안 열려서 비상키로. 식탁에 식빵 봉지가 그대로 있었다고. 서아 식판에 밥풀이.해인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벽에 금을 그었다고 했다. 거실 벽. 서아 키 눈금 옆에. 곰돌이 머리 위에. 잠을 한 번 자면 하루라고 정하고."……곰돌이 머리 위에."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실 벽에 그 곰돌이 스티커가 있었다. 서아 돌 때 해인이 붙인."응. 거기. 금 하나, 둘. 처음엔 셌어.""몇 개까지.""집 벽엔 육십 몇 개. 그다음엔 도서관 벽에
첫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오지는 않았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하루 종일 회색이었다. 퇴근 버스 창에 입김이 서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거기 점을 찍었다. 하나, 둘, 셋. 입김이 금방 지워졌다. 흘러서.집에 오니 서아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해인이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체온계를 들고."38도 5부.""언제부터?""어린이집에서 오후에 전화 왔어. 낮잠 자고 일어나서부터 처져 있었대. 반차 쓰고 데려왔어. 해열제 먹였는데 아직."서아가 나를 보았다. 눈이 흐렸다. 볼이 빨갰다. 평소 같으면 아빠! 하고 달려왔을 텐데. 손가락만 조금 오므렸다 폈다."아빠 왔어?""응. 아빠 왔어."나는 서아 옆에 앉았다. 서아의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작은 손바닥이 불덩이 같았다."아빠 손 차가워.""응. 밖이 추워서.""좋아."서아가 내 손을 자기 볼에 갖다 댔다. 눈을 감았다.저녁은 해인이 끓인 흰죽이었다. 서아는 세 숟가락 먹고 고개를 저었다. 해인이 한 숟가락만 더, 했다. 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해인이 한숨을 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잠들기 전 서아가 곰 세 마리를 불러 달라고 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나는 서아 옆에 누워 불렀다. 작게.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너무 귀여워."서아가 따라 했다. 눈을 감은 채로. 그리고 으쓱 으쓱에서 어깨를 들썩이려다 말았다. 힘이 없어서. 한쪽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잘한다.""……잘한다."서아가 내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입꼬리만.아홉 시. 서아는 해인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해인과 내가 가운데 서아를 두고 자는 날. 열이 나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