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열한 번째 금을 긋던 날, 나는 처음으로 뭔가를 부수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열흘 동안 쌓인 게 있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삼켜지는 목소리. 아무리 달려도 불지 않는 바람.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이지 않는 해.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뭐든.
부서지는 소리라도.
아파트 단지 뒤편 초등학교 체육 창고에서 야구방망이를 찾았다. 알루미늄 배트. 손에 쥐니 묵직했다. 휘둘러 보았다.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주 짧게, 내 귀 옆에서만.
손잡이에 감긴 테이프가 반쯤 풀려 있었다. 아이들이 쓰던 거라 손잡이가 가늘었다. 내 손에는 조금 작았다. 나는 풀린 테이프를 다시 감았다. 끈적한 면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큰길로 나가 상가 건물 앞에 섰다.
아침 햇살이 상가 간판들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셔터를 반쯤 올린 가게, 다 올린 가게, 아직 내려 둔 가게. 다들 문을 열 준비를 하던 시간이었다.
1층에 휴대폰 매장이 있었다. 통유리 쇼윈도. 진열대에 최신 휴대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전부 까만 화면.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장 반짝이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쇼윈도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배트를 쥔 남자. 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언제 떨어졌는지 몰랐다. 해인이었다면 벌써 알아채고 반짇고리를 꺼냈을 것이다.
나는 배트를 쥐었다.
손이 떨렸다. 이상하게. 이건 남의 가게였다. 저쪽 세상에서 누군가 매일 아침 셔터를 올리고, 유리를 닦고, 진열대를 정리하는 가게. 품질관리팀 이 대리의 몸은 그걸 알고 있었다. 남의 물건을 부수면 안 된다는 걸. 서른네 해 동안 한 번도 남의 유리창을 깬 적이 없었다.
"괜찮아."
나에게 말했다.
"여긴 저쪽이랑 상관없어. 부숴도 아무도 안 다쳐."
그게 사실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서아가 처음 컵을 깨던 날이 생각났다. 식탁에서 유리컵을 밀어 떨어뜨리고는, 깨지는 소리에 놀라 한참 울었다. 해인이 서아를 안고 달래는 동안 나는 유리 조각을 쓸었다. 서아는 울음을 그치고 내가 쓰는 걸 구경했다. 그다음부터 서아는 빗자루만 보면 "쨍" 하고 말했다.
배트를 휘둘렀다.
쩡——
유리가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금 간 자리에서 하얀 가루가 튀었다. 그런데 깨지지 않았다. 통유리였다. 두꺼웠다. 손바닥이 얼얼하게 울렸다.
한 번 더.
쩡——
금이 넓어졌다.
한 번 더. 이번엔 온몸으로, 허리를 틀어서.
와장창——!
유리가 무너졌다.
그리고 멈췄다.
무너지던 유리 조각들이, 공중에서. 수백 개의 조각이 내 앞에 떠 있었다. 쏟아져 내리던 모양 그대로. 커다란 조각, 작은 조각, 가루처럼 작은 조각까지. 햇빛을 받아 빛났다. 빛나는 채로 멈췄다. 유리 폭포가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소리도 멈췄다. 와장창, 하던 소리가 한 박자 만에 뚝 끊겼다. 소리가 떨어지다 만 것처럼.
나는 배트를 든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름다웠다.
부서지는 순간이 영원히 걸려 있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유리가 깨지는 순간을 손 닿는 거리에서, 천천히, 원하는 만큼 볼 수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공중의 조각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조각 안에 내 얼굴이 비쳤다. 수백 개의 조각마다 내 얼굴이 조금씩 다르게 비쳤다. 수백 명의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조각 하나를 집었다.
내 손에 들어오자 조각은 그냥 유리 조각이 됐다. 날카롭고 가벼운. 나는 그걸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더 작게 부서졌다. 내가 던진 건 끝까지 떨어졌다.
공중의 나머지 조각들은 그대로 떠 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손을 조심스럽게 넣어 보았다. 조각마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서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손등이 베일 것 같았다. 손을 빼냈다. 멈춰 있어도 유리는 유리였다.
나는 그 폭포를 피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발밑에서 내가 떨어뜨린 조각들이 버석거렸다. 진열대의 휴대폰 하나를 집었다. 최신 모델. 이백만 원짜리. 해인이 바꾸고 싶어 하던 것.
전원 버튼을 눌렀다. 까맸다.
나는 그걸 바닥에 내리쳤다.
쨍.
화면이 깨졌다. 거미줄처럼. 이백만 원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매장 주인도, 경찰도, 해인도.
나는 하나 더 집어 내리쳤다. 하나 더. 하나 더.
휴대폰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손에 쥘 때마다 매끈한 유리가 손바닥에 서늘하게 닿았다. 내리칠 때마다 손목이 찡하게 울렸다.
진열대를 발로 찼다. 진열대가 넘어지다 멈췄다. 비스듬히, 공중에서 45도로. 내가 손을 뗀 순간 이 세상의 것이 되어서.
나는 그 기울어진 진열대를 붙잡고 온몸으로 밀었다. 이번엔 끝까지 넘어갔다. 쾅. 휴대폰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쏟아지다가, 내 손을 떠난 것들부터 차례로 멈췄다. 몇 개는 바닥에 닿고, 몇 개는 공중에 걸렸다.
나는 헐떡이며 그 난장판을 보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손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히려 하고 있었다. 셔츠 앞자락에 유리 가루가 반짝이며 붙어 있었다. 털어 냈다. 털어 낸 가루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몸에서 떨어진 건 끝까지 떨어졌다.
소리를 질렀다. 웃었다. 또 질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옆 가게 유리를 깼다. 그 옆 가게도. 편의점 유리문, 카페 창문, 은행 ATM 화면, 버스 정류장 광고판. 쩡, 와장창, 쨍그랑. 소리들이 한 박자씩 났다가 끊겼다. 거리에 유리 폭포가 하나씩 늘어갔다.
멈춘 승용차 앞 유리를 깼다. 사이드미러를 부쉈다. 헤드라이트를 부쉈다. 차 지붕 위로 올라가 뛰었다. 쿵, 쿵. 지붕이 우그러졌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게 문제였다.
한참을 부수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몇 번은 시원했다.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부술수록 시원함이 줄었다. 열 번째 유리를 깼을 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스무 번째에는 오히려 속이 무거워졌다.
부수는 게 재미있으려면 누가 말려야 했다. 누가 "야, 너 미쳤어?" 하고 달려와야 했다. 누가 혀를 차고, 누가 경찰에 신고하고, 누가 나중에 청구서를 보내야 했다.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부수는 게 그냥 일이었다.
회사에서 파손 시험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제품을 떨어뜨리고, 누르고, 깨질 때까지 두드렸다. 부서진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번호를 매기고 사진을 찍었다. 아무도 재미로 하지 않았다. 그건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것도 꼭 그랬다.
나는 배트를 내려놓고 인도 턱에 앉았다.
눈앞에 내가 만든 거리가 있었다. 깨진 유리창들, 공중에 걸린 유리 폭포들, 찌그러진 차, 넘어진 진열대. 그 사이로 영원한 아침 햇살이 비쳤다. 유리 조각마다 햇살이 박혔다. 거리 전체가 반짝였다. 움직이지 않는 반짝임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쓸쓸했다.
인도 턱이 엉덩이 밑에서 딱딱했다. 손바닥의 얼얼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라앉는 게 아쉬웠다. 그 얼얼함이 오늘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이건 저쪽 세상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저쪽의 휴대폰 매장 주인은 오늘 아침에도 멀쩡한 유리창을 닦고 있을 것이다. 저쪽의 승용차 주인은 찌그러지지 않은 지붕 아래서 출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나 혼자 한 일이었다.
부순 것도 나, 치울 것도 나. 볼 사람도 나.
나는 배트를 다시 들었다. 이번엔 부수려고가 아니었다.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섰다.
배트 끝이 보도블록에 닿을 때마다 딱, 딱 소리가 났다. 걸음마다 한 번씩. 내 발소리보다 조금 늦게.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 유리문 앞을 지났다. 내가 깬 유리문. 그 앞에 유리 폭포가 걸려 있었다. 조각 하나하나에 내 얼굴이 비쳤다.
수백 개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땀에 젖은, 지친, 조금 무서운 얼굴.
나는 그 얼굴들에게서 금방 눈을 돌렸다.
집 쪽으로 몇 걸음 가다가 돌아섰다. 휴대폰 매장 앞으로 다시 갔다. 바닥에 내가 떨어뜨린 유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공중의 폭포 말고, 내 손을 거쳐 바닥에 떨어진 것들. 나는 쪼그려 앉아 그 조각들을 손으로 쓸어 모았다. 매장 안쪽 청소 도구함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냈다. 내가 깬 휴대폰 화면 조각들, 부서진 진열대 나사, 바닥에 쏟아진 것들.
공중에 걸린 건 치울 수 없었다. 손을 대면 하나씩 떨어질 뿐이었다. 수백 개를 하나씩 떨어뜨려 쓸어 담을 자신은 없었다.
빗자루가 유리를 쓸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다. 그래도 끊기지 않았다. 내가 쓰는 동안은. 서아가 울음을 그치고 구경하던 그 소리였다.
그래도 바닥은 쓸었다. 쓰레받기에 담아 매장 쓰레기통에 부었다. 쓰레기통이 가득 찼다.
왜 치우는지 나도 몰랐다. 아무도 안 볼 텐데. 아무도 청구서를 보내지 않을 텐데.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어지른 건 내가 치우는 사람이고 싶었다. 여기서도. 아무도 없는 여기서도.
그날 밤, 벽에 금을 그으려다 손을 멈췄다. 금은 자고 일어나서 긋는 거였다. 규칙이었다. 규칙은 지켰다.
출석부 종이에만 적었다.
11. — 부쉈음. 많이. 아무도 안 말림. 그래서 별로였음.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