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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8시 53분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7 12:13:54

유리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내 것이었다. 서아의 작은 손자국 옆에, 커다랗고 축축한 손자국 하나. 그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입김처럼, 그대로 거기 붙어 있었다.

나는 그걸 한참 보다가 돌아섰다.

생각을 해야 했다. 무서운 건 나중에 해도 됐다. 지금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부터 알아야 했다. 회사에서 불량이 터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거였다. 겁먹지 말고, 추측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확인한다. 현상, 범위, 조건. 삼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이었다.

나는 큰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버스 정류장 앞에 파란 간선버스가 서 있었다. 앞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유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운전석이 비어 있었다. 좌석도 비어 있었다. 손잡이 몇 개가 한쪽으로 기운 채 멈춰 있었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다 선 것처럼.

문 사이 고무 틈에 손가락을 넣고 옆으로 밀었다.

뻑뻑했다. 한 번 더 힘을 주자 문이 덜컹, 하고 한 뼘쯤 벌어졌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흠칫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쇠 긁히는 소리가 퍼졌다가, 사라졌다.

버스 안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공기가 그냥 거기 고여 있었다. 요금 단말기 화면이 까맸다. 교통카드를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운전석 계기판도 까맸다. 열쇠는 꽂혀 있었다. 돌려 보았다. 아무것도.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정류장 전광판도 까맸다. 방금 전까지 "간선 273 곧 도착"이 흘러가고 있던 전광판이었다. 나는 그걸 분명히 봤다. 아침마다 보는 거니까.

길 건너 편의점으로 갔다. 자동문이 열리지 않았다. 손으로 밀었다. 고무 패킹이 끼익 하며 조금씩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켜진 채로 멈춰 있었다. 불빛이 깜빡이지도, 웅웅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밝았다. 사진 속 불빛처럼.

계산대 모니터는 까맸다. 카드 단말기도, 포스기도. 냉장고 모터 소리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차가웠다. 음료수 캔 하나를 꺼냈다. 차가웠다. 한참 쥐고 있어도 미지근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캔을 제자리에 넣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계산을 안 했으니까, 였을 것이다.

계산대 옆에 일회용 라이터가 꽂혀 있었다. 하나 뽑아서 부싯돌 바퀴를 엄지로 굴렸다.

칙.

불이 붙었다.

나는 그 작은 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불꽃이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없으니까. 곧게, 가만히 서서 타고 있었다. 하지만 타고 있었다. 이건 움직이고 있었다. 라이터를 놓자 불이 꺼졌다. 다시 굴렸다. 붙었다.

"……라이터는 된다."

소리 내어 말했다. 확인한 걸 입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현장 점검 때 생긴 버릇이었다.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계산대 위에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올려놓았다. 역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편의점을 나와 다시 거리에 섰다.

주차된 승용차 한 대의 문손잡이를 당겼다. 잠겨 있었다. 옆 차. 열렸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계기판도, 라디오도, 비상등도. 핸들 옆 열쇠 구멍 같은 건 없었다. 요즘 차는 다 버튼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퍽, 하는 소리가 거리에 떨어졌다.

폰, 교통카드 단말기, 전광판, 포스기, 냉장고, 차.

라이터.

나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시계가 거기 있었다. 가죽 줄이 낡은 은색 손목시계. 할아버지가 공장에서 삼십 년을 일하고 받은 거라고 했다. 건전지가 없는 시계였다. 태엽을 감아야 가는 시계. 나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용두를 스무 번 감았다. 해인은 그게 무슨 의식이냐고 웃었다.

시곗바늘은 8시 53분에 서 있었다.

초침도 서 있었다. 12와 1 사이에서.

나는 용두를 잡고 감아 보았다. 드르륵, 드르륵. 태엽이 감기는 감촉이 손끝에 왔다. 감겼다. 분명히 감겼다. 태엽은 받아들였다.

그런데 초침은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원래라면 째깍째깍 작은 소리가 나야 했다. 태엽은 팽팽하게 감겨 있는데, 톱니가 돌지 않았다. 힘은 들어가 있는데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정리했다.

전기로 머리를 쓰는 것들은 전부 죽었다. 폰, 단말기, 전광판, 차, 계산대. 그런데 형광등은 켜진 채 멈춰 있다. 냉장고 안은 차가운 채 멈춰 있다. 켜져 있던 건 켜진 채로, 꺼져 있던 건 꺼진 채로. 그리고 다시 켤 수는 없다.

손으로 하는 것들은 된다. 버스 문은 밀면 열린다. 차 문도 열린다. 라이터는 불이 붙는다. 태엽은 감긴다.

하지만 흐르는 건 없다. 불꽃은 흔들리지 않고, 초침은 가지 않는다.

"내가 하는 것만 된다."

그렇게 말해 놓고 나니 등이 서늘해졌다.

내가 하는 것만. 내 손이 닿는 것만. 내가 움직이는 것만.

그 말은 거꾸로 하면 이런 뜻이었다.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건 나 하나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있었다. 길게 늘어진 아침 구름. 그 구름도 서 있었다. 흘러가지 않았다. 해는 낮은 곳에 떠 있었다. 아침 햇살이 건물 벽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그림자들이 서쪽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내 그림자도 있었다. 발밑에서 길게, 아스팔트 위로.

나는 손을 들어 흔들어 보았다. 그림자 손도 흔들렸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림자는 나를 따라왔다.

비둘기는 여전히 공중에 있었다. 커피 방울도. 나는 그 아래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비둘기의 깃털 끝에 손가락이 닿았다.

부드러웠다. 따뜻하지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손가락으로 살짝 밀자 비둘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에 박힌 못처럼 단단했다. 새가 아니라 새 모양을 한 무언가 같았다. 나는 손을 거뒀다.

커피 방울 하나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방울이 터지지 않았다. 손끝에 물기가 묻지도 않았다. 유리구슬 같았다. 갈색 유리구슬.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침착하자."

소리 내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침착하자, 이우진."

내 이름을 불렀다. 누가 대신 불러 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해인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회사에 연락해야 했다. 경찰에, 119에, 아무한테나. 하지만 폰은 까맸다. 공중전화를 찾아볼까 생각했다. 요즘 공중전화도 다 전자식일 것이다. 편의점 전화기도 까맸다.

아무한테도 연락할 수 없다.

그 사실이 천천히, 발끝부터 올라왔다.

나는 다시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53분.

서아를 들여보낸 게 8시 51분이었다. 해인에게 문자를 보낸 게 52분. 세 걸음, 네 걸음. 그리고 53분.

53분에 뭔가가 멈췄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가 멈춘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멈췄다. 나만 빼고.

아니면.

나만 어딘가로 빠져나왔거나.

나는 그 생각을 더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가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신 용두를 한 번 더 감았다. 드르륵. 태엽이 팽팽해졌다. 초침은 12와 1 사이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전광판도 폰도 죽었는데, 손목의 태엽만은 감겼다.

초침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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