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린이집 유리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원래 아침 9시 반까지는 열어 둔다. 늦게 오는 아이들 때문이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문이 열렸다. 경첩이 삐걱, 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복도 끝까지 굴러갔다가 사라졌다.
서아의 손자국이 문과 함께 옆으로 비껴 갔다. 나는 손자국이 지워질까 봐 유리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들어갔다.
현관 바닥에 아이들 실내화가 줄지어 놓인 신발장이 있었다. 칸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코팅한 종이에 사진과 이름. 김도윤, 박하린, 최시우, 이서아.
이서아.
서아 칸에 노란 운동화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방금 내가 찍찍이를 붙여 준 그 운동화였다. 한 짝은 조금 비뚤게 들어가 있었다. 선생님이 급하게 넣은 모양이었다. 운동화 옆에는 분홍색 실내화가 없었다. 서아는 실내화를 신고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나는 운동화를 꺼냈다. 찍찍이가 붙어 있었다. 내가 붙인 그대로였다. 끈 대신 붙인 벨크로의 까슬까슬한 감촉. 안창에 서아의 발 모양이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나는 운동화를 다시 넣었다. 똑바로.
복도로 들어갔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소리 없이.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해, 무지개, 엄마, 아빠. 이름 없는 그림들 사이에서 나는 서아의 그림을 찾았다. 서아는 아직 그림이라고 할 만한 걸 못 그린다. 동그라미 비슷한 것에 선을 몇 개 긋는 게 전부다. 그래도 선생님은 그걸 벽에 붙여 줬다. 제목은 선생님이 대신 써 줬다. '우리 아빠'.
그 동그라미가 벽에 있었다. 노란 크레파스로 그린 동그라미에 팔인지 다리인지 모를 선 네 개. 그 아래 '우리 아빠 — 이서아'.
나는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서아야."
불렀다. 이번엔 작게. 큰 소리를 내면 이 복도가 무너질 것 같았다.
대답이 없었다.
복도 끝에 교실이 세 개 있었다. 햇살반, 달님반, 별님반. 서아는 햇살반이었다. 두 살 반.
햇살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문을 밀었다.
교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낮은 책상 네 개, 작은 의자 열두 개. 놀이 매트 위에 블록이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쌓다 만 블록 탑이 있었다. 세 칸짜리. 네 번째 블록이 탑 위 한 뼘 높이에 떠 있었다. 막 올려놓으려던 참이었던 것처럼. 그 블록을 쥐고 있던 손은 없었다.
창가에 어항이 있었다. 금붕어 두 마리가 물속에 멈춰 있었다. 하나는 꼬리를 튼 채로. 물풀도 한쪽으로 휜 채로. 공기 방울 몇 개가 수면 아래 동그랗게 매달려 있었다.
교실 한가운데 선생님 의자가 있었고, 그 옆 바닥에 분홍색 실내화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서아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았다. 실내화 코에 토끼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서아가 고른 거였다. 발등 쪽에 매직으로 '서아'라고 쓴 것도 나였다. 해인의 글씨는 동글동글하고 내 글씨는 각이 졌다. 거기 있는 건 각진 글씨였다.
실내화 한 짝.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집으려다가 멈췄다.
만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여기 떨어져 있다는 게, 서아가 여기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내가 집어 들면 그게 없어질 것 같았다.
결국 집었다. 가벼웠다. 속에 아무 온기도 없었다. 아이 발이 방금 빠져나간 신발이라면 조금은 따뜻해야 했다. 그런데 이 실내화는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버스 안 공기처럼. 캔 음료처럼. 그냥 거기 고여 있는 온도였다.
나는 실내화를 가슴에 대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벽에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9:00 자유놀이. 9:30 간식. 10:00 바깥놀이. 벽시계는 8시 53분이었다. 전자식이라 멈춘 건지, 이 세상이 멈춰서 멈춘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같은 말이었다.
사물함이 있었다. 칸마다 아이 이름. 서아 칸에 여벌 옷이 들어 있었다. 내가 어제 싸 준 거였다. 곰돌이 티셔츠, 회색 바지, 양말 한 켤레. 짝이 맞는 양말이었다. 해인이 다시 챙긴 모양이었다.
사물함 문 안쪽에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가족사진. 어린이집에서 달라고 해서 인화해 보낸 것. 서아가 내 어깨 위에 앉아 있고, 해인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작년 가을, 한강에서. 서아가 처음 "아빠"라고 제대로 말한 날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떼어 냈다.
떼어 내면서 생각했다. 이건 도둑질인가. 이 세상에 내 걸 가져가는 걸 뭐라고 해야 하나. 가족사진인데. 내 딸 사물함에서 내 가족사진을 가져가는 건데.
그 생각이 너무 우스워서, 나는 웃었다. 웃음소리가 교실에 퍼졌다가 사라졌다. 메아리 없이. 그 소리 없는 끝이 너무 무서워서, 웃음이 금방 멎었다.
사진을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실내화는 손에 들었다.
다른 교실도 보았다. 달님반, 별님반. 비어 있었다. 교무실도, 조리실도. 조리실 가스레인지 위에 큰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뚜껑 틈으로 김이 새어 나오다 멈춰 있었다. 하얀 김이 뚜껑 위에서 작은 구름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그 김에 손을 대 보았다. 뜨겁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장실 책상 위에 출석부가 펼쳐져 있었다. 종이였다. 오늘 날짜 칸에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서아, 동그라미. 8:51.
선생님이 방금 적은 것이다. 서아가 도착한 시간을.
나는 출석부를 오래 보았다. 볼펜이 출석부 위에 놓여 있었다. 뚜껑이 열린 채로. 나는 그 볼펜을 집었다. 종이 여백에 뭔가를 써 보았다.
이우진.
잉크가 나왔다. 글씨가 써졌다. 까만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었다. 이것도 되는구나. 내가 하는 건 된다. 라이터처럼, 태엽처럼.
나는 이름 아래 한 줄을 더 썼다.
8:53 이후, 여기 아무도 없음.
쓰고 나서 그 글씨를 보았다. 내 글씨였다. 각진 글씨. 그 글씨가 이 세상에서 새로 생긴 유일한 것이었다. 멈추지 않은 것. 방금, 내가 만든 것.
이상하게 그게 조금 위로가 됐다.
나는 볼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출석부 한 장을 조심스럽게 찢어 접었다. 서아 이름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장이었다. 그것도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으로 돌아왔다. 신발장의 노란 운동화를 한 번 더 보았다. 가져갈까 하다가, 두었다. 서아가 돌아오면 신어야 하니까.
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서아가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돌아간다고. 어느 쪽이든, 이게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 생각을 붙잡았다. 꽉.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서아의 손자국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옆에 내 손자국. 그리고 방금 문을 밀면서 생긴 내 손자국이 하나 더.
나는 그 손자국들을 등지고 섰다. 손에는 분홍색 실내화 한 짝. 주머니에는 가족사진과 출석부 한 장과 볼펜 한 자루와 라이터 하나.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신발장 서아 칸에는 노란 운동화가 똑바로 들어가 있었다. 방금 벗어 둔 것처럼.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