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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청산
‘어리석은 것.’

유서음은 자신을 향한 육준수의 편애를 과시하고자 한 말이었지만 이건 절대 대놓고 떠벌릴 일이 아니었다.

귀하신 신분의 황후나 공주라도 혼례식 전에는 스스로 혼례복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은 여인의 수양과 수놓이 솜씨를 시가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 중, 수놓이에 재능이 없는 여인만이 재봉사에게 혼례복을 주문했다.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마치 자랑처럼 떠벌리다니.’

유서음이 자랑하고 떠들수록 그녀의 무지함만 증명될 뿐이었다.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바라보며 오주은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신분은 무슨, 오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뿐이고 간신히 살림을 유지할 정도인데 직접 수를 놓을 수밖에 없었지.”

“난 동생처럼 총애받는 처지가 아니라 팔인 가마도 없는데 신분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나.”

오주은은 짐짓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유서음은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준수 오라버니가 경고를 준 게 효과가 있었네! 그 고고하던 오주은이 드디어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유서음은 그녀가 그렇게 행동할수록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더욱 타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와 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정이 있으니까요. 오라버니께서 전에 천하에서 가장 좋은 것을 다 제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법이 허락한다면 십이승 가마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유서음은 뽐내듯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원은 순간적으로 고요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들이 경악한 눈을 하고 유서음을 바라보았다.

오주은도 그녀의 맹랑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유서음을 추켜세운 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은 제대로 된 혼례 격식을 누리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유서음이 이런 대역무도한 말까지 스스럼없이 내뱉을 줄이야!

십이승 가마는 천자의 예법이었다.

하인의 핏줄인 유서음 따위가 감히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유서음은 주위의 이상한 눈빛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혹여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유서음은 당황한 듯, 작은 소리로 오주은에게 물었다.

예전에 그녀는 저택에서 일을 하거나 육준수의 밤시중만 들었지 예법에 대해서는 공부한 적이 없었다.

‘분명 오라버니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오주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뒤에서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내게 천자의 격식으로 십이인 가마를 하사하였을 때, 난 그게 엄청난 은총인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 보니 아무 여인이나 혼례식 때 부릴 수 있는 거였잖아? 폐하께선 이런 흔해 빠진 걸 은총이랍시고 내게 하사하신 건가?”

뱀무늬가 수놓인 하얀 의복에 옥패를 두른 사내가 사람들 틈에서 걸어 나왔다. 겸양하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가늘고 긴 눈매에서는 천하를 좌시할 것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내의 등장에 사람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 이름은 연예준으로, 그는 평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오주은은 한 번에 그를 알아보고 즉시 무릎을 꿇었다.

“촉왕 전하를 뵈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인 장공주 마저도 이성왕인 그에게 예를 행했다.

당황한 유서음 또한 허둥지둥하며 서툰 자세로 오주은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뻔히 알면서 자신에게 예를 가르쳐 주지 않은 오주은을 탓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내게 망신을 주다니, 준수 오라버니한테 다 이를 거야!’

“모두 일어나거라.”

연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곁눈질로 오주은을 관찰했다.

몸을 일으키던 오주은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연예준을 오늘 처음 봤겠지만 그녀는 예전에 그를 만난 적 있었다.

부모님이 촉지의 수재를 다스리다 운명을 달리하신 이후, 그녀는 그곳의 현주가 되었다.

본디 풍요의 땅인 촉지였지만 수재 때문에 조정의 관심밖에 나게 되어, 수재가 해결된 뒤, 수많은 적국이 촉지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단 5년의 시간에 촉지를 되찾고 운국의 영토를 확장한 사람이 연예준이었다.

그가 승전하고 귀경하던 날, 오주은은 아침 일찍 성문으로 나가 멀리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부모님께서 목숨 걸고 지켜낸 촉지를 왜놈들의 손에서 되찾은 영웅이 궁금했다.

게다가 장군에서 이성왕에 책봉되기까지 단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더 이상 책봉이 의미가 없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천자의 의장(儀仗)을 하사하여 십이인 가마에 타고 조회 때 절을 할 필요가 없으며 검을 지닌 채, 황궁에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하사하였다.

연예준을 알현했다는 것은 황제의 친림과도 같다는 뜻이었다.

만천하에 십이인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은 황제와 촉왕 연예준뿐이었는데, 유서음이 그런 사람 앞에서 십이인 가마를 언급했다는 것은 죽을 죄를 지은 것과 같았다.

사람들을 둘러보던 연예준의 시선이 이내 유서음에게 닿았다.

강압적인 시선에 유서음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에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이런 예법도 모르는 걸 연회에 데리고 온 거야. 당장 끌어내!”

느긋한 어투였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게 하는 위압감이 있었다.

전장에서 수많은 적을 벤 영웅이 눈앞에 있는데 감히 누가 그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유서음이 촉왕의 안전에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들은 육준수는 떨리는 다리를 끌고 앞으로 나섰다.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촉왕 전하. 이 아이는 제 사촌 여동생이온데 배운 것이 없어 말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촉왕의 앞에 주저없이 무릎을 꿇는 육준수를 보자 유서음은 더욱 겁에 질렸다.

단지 그가 했던 말을 오주은의 앞에서 했을 뿐인데 이게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

연예준은 육준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오주은을 바라보았다.

“평양 후작의 세자였군. 이렇게 교양이 없는 여동생이었으면 함부로 데리고 나오지 말았어야지.”

육준수는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지만 촉왕이 죄를 묻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소신이 돌아가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촉왕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친 육준수는 재빨리 일어나서 유서음을 끌고 급급히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돌아간 후, 오주은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본디 혼례식 날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오늘 사람들 앞에서 비참한 모습 좀 보이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유서음이 생각지도 않은 실수를 하였으니 계획이 더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았다.

목적을 달성한 오주은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장공주께 작별을 고한 뒤,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렇게 장공주 관저를 나서는데 등 뒤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잠깐.”

육준수는 음침한 얼굴로 그녀를 불러세웠다.

“네가 이렇게 악독한 심보를 품고 있었을 줄이야.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계략을 꾸며 서음이 실언하도록 유도하다니!”

육준수의 비난에 오주은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계략을 꾸몄다니요? 저 아이가 참지 못하고 혼자 자랑을 떠벌린 것 아닙니까? 게다가 십이인 가마는 세자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오주은은 평양 후작가의 안녕을 원치 않았지만 일부러 유서음을 꾀어 실언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어리석어 자랑하기 위해 한 말이고, 육준수가 사적으로 대역무도한 말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육준수는 그녀의 반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육체적인 향락에 취해 그런 농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서음이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떠벌릴 줄은 누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따져보면 오주은이 혼례식 때 팔인 가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육준수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은 뒤로하고 여전히 오주은이 시기심에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서음에게 팔인 가마를 승낙한 것은 나야. 애먼 애한테 화풀이할 필요 없어. 이렇게 시기심이 많으니 앞으로 후작가가 어찌 안녕하겠느냐. 내가 볼 땐 육인 가마도 과분하구나.”

“격식을 사인 가마로 줄이겠으니 영광으로 알아!”

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유서음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사인 가마면 유서음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 격식이었다.

그러나 오주은의 마음에는 더 이상 파장이 일지 않았다.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4인 가마든 6인 가마든 어차피 면박은 매한가지이니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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