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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청산
육준수도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체 어느 가문 규수인지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며 그녀의 얼굴이 점차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그 소녀가 오주은이라는 것을 알아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네가!”

오주은은 대문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여긴 내 집인데 내 집에서 내가 나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요?”

육준수는 이를 갈며 그녀의 차림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입고 있는 옷만 해도 적게 쳐서 백 냥 금은 넘어 보였다.

게다가 눈앞의 여인은 이런 것이 매우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자신을 만나러 올 때마다 입었던 소박한 차림을 떠올리자, 육준수의 표정은 더더욱 음침하게 굳어졌다.

“이리 값비싼 옷을 갖고 있었으면서 왜 내 앞에서는 가난한 집 딸처럼 입고 다닌 거지?”

“일부러 내가 동료들 앞에서 창피하라고 그런 것이야?”

오주은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영주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육 공자, 전에 근검절약을 추구한다며 사치를 혐오한다고 하신 분이 공자 아닙니까? 저희 아씨는 공자의 명성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신을 희생하였는데 어찌 그런 식으로 저희 아씨를 몰아가시는 겁니까?!”

‘희생이라니! 그럼 후작가의 세자인 내가 오주은보다 가난하단 소리야?’

육준수는 이를 갈며 매섭게 오주은을 노려보았지만, 오주은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육 공자, 혼서와 정혼 신물은 가져오셨겠지요?”

주인이 말이 없자 조급해진 추서가 곁에서 다그쳤다.

“공자, 저희가 오늘 온 목적을 잊지 마세요.”

“나도 알아, 그러니까 좀 닥쳐!”

육준수는 고함을 지르며 추서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그의 이런 행위는 오주은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오주은은 툭하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과거 자신이 뭘 보고 이런 인간과의 혼인을 허락했는지 내심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오주은, 네가 어제 황궁까지 가서 소란을 피워서 내 오늘 선물을 들고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다. 무릇 여인이라면 부군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법, 정신 차렸으면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서 우리 부모님께 사죄드려. 그럼 내 내키진 않지만 팔인 가마에 널 태워서 후작가의 부인으로 맞아주지.”

큰 선심을 쓰는 듯한 그의 말투에 화가 난 왕 집사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오주은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육준수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육 공자,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제가 당신과 당신 집안에 그 수모를 당하고도 화해의 선물 좀 가져왔다고 고분고분 당신 말에 따라줄 것 같았습니까?”

혐오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오주은의 차디찬 시선에 육준수는 그만 자존심이 상해 버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매섭게 으르렁거렸다.

“오주은, 거기까지만 해! 내 오늘 이렇게 화해를 구하러 왔는데 대체 뭘 더 바라는 게야!”

“이런, 내가 때를 잘못 맞춰서 왔나 보군. 표정을 보니 오 소저를 한 대 칠 기세로구나, 육 공자?”

바로 그때 갑자기 들려온 비웃음소리에 놀란 육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금사가 수놓인 하얀 비단옷에 늠름한 자태로 말을 타고 들어오는 연예준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살짝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는 오주은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렸다.

뒤따라온 심복 상청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주인의 얼굴을 보고 몰래 웃음을 지었다.

‘오 소저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화려한 의복까지 차려 입고 오셨으면서 아닌 척하시기는….’

“촉왕 전하를 뵙습니다.”

육준수는 애써 굴욕을 참으며 그에게 예를 행했다.

연예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다가가 추서가 들고 있는 선물함을 열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하찮은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상자를 뒤적이더니 그나마 값이 나갈 것 같은 옥여의를 집어 들었다.

“후작가가 요새 이 정도로 궁핍한가? 백옥루에서 가장 싸게 팔리는 옥여의를 화해의 선물이랍시고 들고 오다니?”

사실 처음부터 육준수는 오주은에게 귀중품을 선물할 생각이 없어서 창고에서 가장 싼 것으로 골라 가지고 왔던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오주은의 기를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촉왕이 방문했고, 그걸 대놓고 꺼내서 면박을 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육 공자는 진심으로 화해를 청하러 온 게 아니군. 차라리 지금 돌아가서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해 다시 오는 게 낫지 않겠어?”

연예준은 무심코 한 말 같았지만 육준수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무 억울해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촉왕 전하는 언제부터 오씨 가문과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면 매번 촉왕은 관건적인 순간에 나타나 오주은을 도와주었다.

‘설마 둘이 진작부터 바람이 난 건가?’

촉왕이 귀경하자마자 완전히 딴 사람이 된 오주은을 생각하니 꼭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괴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오주은은 입은 웃고 있지만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연예준을 힐끗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기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줄도 모르고!’

촉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무리 뻔뻔한 육준수라고 해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육 공자는 참으로 무례하군. 감히 내 개인사까지 질문하고 말이야. 정말 반역이라도 꾀할 생각인 건가?”

싸늘한 그의 목소리에 육준수와 그의 시종은 급기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육준수가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며 아뢰었다.

“오… 오해이십니다, 전하! 소인은 그저 오주은 저 단정치 못한 계집이 전하의 명성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 그만….”

육준수는 변명을 늘어놓느라 촉왕의 눈매가 매서워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촉왕은 손에 든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채찍에 사람 피가 안 묻은지도 꽤 오래되었지.”

“으악!”

추서가 비명을 지르며 기절 직전인 육준수를 부축했다.

“촉왕 전하, 저희 공자께서 고의로 무례를 범한 것은 절대 아니옵니다. 그러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어라? 기절했네?”

촉왕은 겁에 질려 혼절한 육준수를 힐끗 보고는 냉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어서 네 주인을 업고 돌아가. 여기 있어 봐야 너희 후작가 체면만 깎일 뿐이니까. 나도 평양 후작의 원망은 사기 싫으니 말이야.”

명이 떨어지자 추서는 재빨리 같이 온 시종을 불러 육준수를 끌고 돌아갔다.

오주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예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연예준이 상청에게 눈짓하자, 상청은 정교한 나무함과 봉투 하나를 공손히 두 손으로 받쳐 오주은에게 건넸다.

오주은은 나무함에서 나는 익숙한 대나무향에 눈을 깜빡이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내가 훌쩍 말에 오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장공주께서 내일 청명호에서 뱃놀이를 하신다고 초대장을 보냈더군. 그래서 나도 마침 지나가던 길이라 대신 심부름을 온 것이오. 원치 않으면 소저가 직접 거절하게.”

“전하께 또 신세를 졌네요. 내일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오주은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감사인사를 하기 바쁘게 사내는 말을 타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늠름하신 분이야.”

영주가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오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씨,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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