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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서은월
주종현은 연아 곁에 앉아 긴 다리로 좁디좁은 마차 통로를 가로막았다.

“두어 마디만 나누었더니, 다행히 마차가 멀리 가지 않았더군. 그래서 곧장 따라잡았다.”

강시아는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핑계를 찾고 있었는데 말이란 단어가 들리자마자 연아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큰 말! 연아는 말을 타고 싶습니다! 하준 오라버니는 안 태워줬으니까 아버지께서 사주세요!”

목하준은 이미 출가한 주다언의 아들이었기에, 주종현은 딸아이의 작은 코끝을 가볍게 긁었다.

“아직은 너무 어리다. 두어 해만 더 크면 이 아버지가 친히 가르쳐 주마.”

그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던졌다. 강시아의 품에 툭 떨어진 것은 묵녹색 주머니. 그것은 묵직하게 부풀어 있었고 안에는 은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서방님, 이건…?”

그녀는 모른 체하며 되물었다.

“세상 사람들한테 내가 첩 하나 건사 못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강시아는 주머니를 움켜쥐고 싱긋 웃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시나요? 저는 입고 먹는 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라면 도망칠 여비였다.

덕흥루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 모두 손에 과자 한 봉을 들고나오는 듯했다. 연아는 작은 고양이처럼 창틀을 잡고 발돋움해 목을 길게 빼며 내다보았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에 언제나 차갑던 주종현의 눈빛마저 얕은 웃음으로 물들었다.

그때, 시종이 두 개의 음식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주종현은 그중 하나를 받아 들며 말했다.

“나머지는 온청에게 돌려주거라.”

그 말에 강시아의 심장이 순간 멎는 듯했다. 그녀는 국공부에 들어온 지 오래 되었지만 온청이 과자를 즐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덕흥루의 단골은 송하윤이었으니 말이다.

이 상자는 그녀를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어머니, 드시지요.”

딸아이는 방금 베어 문 흔적이 남아 있는 과자 조각을 내밀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 그녀의 즐거움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강시아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구나.”

그때, 마차 문이 열리며 시종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갓 내온 듯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단팥 두부 꽃이었다. 강시아는 얼떨떨하게 주종현이 그것을 건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뭘 하고 있느냐? 본 세자가 직접 떠먹여줘야 겠느냐?”

“아, 아닙니다! 제가 직접 먹겠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두부 꽃을 받아 들었다.

“성북의 망성각으로 가자.”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오늘은 상사절이라, 잠시 뒤 풍수강에 철화를 뿌릴 텐데 망성각에서 가장 잘 보인다. 연아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강시아는 나무 숟가락을 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서방님께서는 한가하시군요…”

주종현은 얼굴을 반쯤 그릇 속에 묻은 그녀를 흘낏 보며 미간을 치켜세웠다.

“오늘따라 네 불만이 커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은전을 조금 더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킨 첩이라 강시아는 오늘 주종현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감히 돈을 더 달라 졸라댄 것이었다.

“오늘은 어찌 된 게... 돈 귀신이 들렸느냐?”

“저는… 단지 조금 전 연아가 서방님과 함께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강시아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뵌 송 아가씨는 기품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작은 마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송 아가씨께서는 금기서화(琴棋书画)를 통달한 재녀 랍니다. 한데 작은 마님께서는 연아가 많은 재주를 배울 필요 없다 하시며 그저 여계만 익히면 족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연아에게 글씨와 예법을 가르치고 싶으나, 돈이 모자라…”

주종현은 자신의 어머니가 연아를 곱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그저 젊을 적 집에서 첩들과 서녀에게 당한 적이 있어 마음이 삐뚤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말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내일 사람을 시켜 다시 은전을 넉넉히 보낼 테니 연아에게 스승을 들이거라. 적서 따질 것 없다. 연아는 내 첫 장녀다. 내가 바쁘니 네가 마음을 다해 보살피거라.”

“예, 서방님. 감사합니다.”

강시아는 눈을 내리 깔며 가슴 깊숙한 곳에 감정을 숨겼다.

지난 생에 그가 정말 조금만 더 마음을 써주었더라면… 연아가 그렇게 해쓱해질 리는 없었을 텐데

여자는 잃으면 새로 들이고 아이는 죽으면 다시 낳을 수 있다. 남자들의 정은 결국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다.

송하윤이 들여오기까지는 이제 석 달. 그녀는 더 많은 돈을 마련해야 했다. 연아를 데리고 이 지옥 같은 집을 벗어나기 위해서!

망성각은 원래 망루였다.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증축을 거듭해 지금은 내성 안에 우뚝 솟아 망성각이 되었다. 망성각과 풍수강 다리는 정교하게 이어져 있어 오늘처럼 축제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이 되었다.

어스름이 깔리자 상사절의 등롱들이 차례로 불을 밝혔고, 긴 용등이 커다란 화염구를 몰고 거리 끝에서 강변으로 천천히 흘러왔다. 강변의 목대 위에서는 장인들이 이미 쇳물을 달궈 은빛 불꽃을 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아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 작은 토끼 등롱을 꼭 쥐며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강시아는 순간 아찔한 착각에 빠졌다. 마치 주종현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좋은 아버지라도 되는 듯한 착각 말이다.

“어머니!”

연아는 뒤돌아 어머니를 바라보며 몸을 틀어 품에 안기려 했지만, 주종현이 장난스러운 그녀의 등을 툭 치며 나무랐다.

“까불지 말거라. 사람이 너무 많다. 네 어미는 널 안기 어려워.”

다리 위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곳곳에는 가면을 쓴 젊은 남녀들이 섞여 있었다. 순간, 황금빛 불꽃이 밤하늘에 터져 오르자 다리 위의 군중이 일제히 난간 쪽으로 몰려들었다.

군중 틈에 가려진 탓에 강시아는 강가의 용춤은 볼 수 없어,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로 쏘아 올려지는 찬란한 쇳불꽃만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열광하던 그때, 다리 저편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시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시야가 아득해지더니 딸아이가 그녀의 품으로 쏙 안겨왔다.

주종현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인파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리 위가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강시아는 팔에 아이를 바싹 끌어안았다.

연아가 그녀의 목을 감싸며 속삭였다.

“어머니, 저 셋째 고모를 봤습니다.”

강시아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네 아버지는 지금 고모와 노닥거리러 갔다. 어미가 널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마.”

주온청과 송하윤은 원래 절친이라 늘 함께 어울렸다. 주종현이 아무 말없이 자리를 뜬 것도 아마 그들을 찾으러 간 것일 게 분명했다.

망성각 아래 길가에는 마차가 대기했고, 마부는 하늘에 터지는 쇳불꽃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강시아는 아이를 안은 채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사람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이렇게 집 밖을 나설 기회는 드물었고, 오늘만큼은 직접 확인해야 할 일도 있었다.

서성의 마시장은 이미 닫힌 뒤였지만 각 구역에는 말이나 마차를 빌릴 수 있는 점포가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마시장의 주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여보게, 마차가 있는가?”

“있습니다, 있습니다. 마침 마지막 한 대가 남아 있습니다.”

강시아는 말을 돌렸다.

“그럼 출성 통행증도 있겠지?”

점원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마님, 농담하시는 겁니까? 출성 통행증은 관가에서만 발급됩니다.”

강시아는 직설적으로 응수했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왜 여기까지 왔겠느냐? 관가를 찾으면 그만이지.”

점원은 문간의 수문장을 힐끔 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때가 좋지 않습니다. 곧 태후께서 탄신을 맞으셔서 지금 도성은 엄격히 금문령이 내려졌습니다. 통행증을 꾸며내기가 쉽지 않지요.”

“그럼 언제쯤 가능하단 말이냐?”

강시아는 미간을 바짝 찌푸렸다. 허가증 없이는 성문조차 나갈 수 없는 법이었다.

점원은 속삭였다.

“듣기로는… 우리 주인어른께서…”

“마차가 있느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시아가 뒤를 돌아보니 앞에는 잘생긴 문약한 공자가 서 있었고 뒤에는 흉악한 큰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마지막 마차가 한 대 있긴 한데…”

점원은 아까 들어온 강시아를 흘끔 보았다. 그녀가 먼저 예약을 하긴 했지만…

그러자 사내는 기다릴 틈도 없이 앞으로 나서더니 은원보 한 덩이를 쿵 하고 내려놓았다.

“값은 더 치른다! 마차는 우리 주인어른께서 사신 거다!”

강시아는 연아를 품에 안고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눈앞의 사내들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부류였다. 허리에 찬 궁중 출입패가 눈에 띄었다. 저 정도라면 조정 대신이거나 황실 종실일 것이다.

그때 소휘가 미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말했다.

“저희 종이 무례한 것 같습니다. 마님을 놀라게 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급히 마차가 필요해서요, 대신 이걸 마님께서 양보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리다.”

강시아는 애초에 그냥 떠날 참이었으나 눈에 들어온 몇 장의 두툼한 은전표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주종현보다 훨씬 통 큰 씀씀이 아닌가!

연아는 아직 나이가 어렸으나 이미 돈의 쓸모를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작은 두 손을 쭉 내밀어 서슴없이 은표를 받아 들더니 귀엽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좋은 분이시군요.”

좋은 분?

소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강시아는 딸아이의 대담한 행동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인어른, 마차 준비되었습니다.”

소휘는 모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발길을 돌려 마차 행랑을 나섰다.

연아는 은표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두 손으로 떠받쳐 어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가난하지 않습니다!”

‘너희 어미는 가난하다.’

집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어린 아이 가슴에 또렷이 남아 있었나 보다.

강시아는 황급히 은표를 거두어 품에 감추고 문가를 스치듯 지나가는 주종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다그쳤다.

“이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연아는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한테도요?”

“당연히 아버지한테도!”

강시아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곧장 마차 행랑 맞은편에 있는 탈 가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가면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자신이, 다른 하나는 딸아이 얼굴에 씌웠다. 이어 몇 가지 자잘한 값싼 장신구들을 사서 꾸민 뒤 완벽히 위장을 마쳤다는 듯 태연히 걸음을 늦추었다.

“아버지입니다!”

연아의 눈이 번뜩이며 날카롭게 앞을 가리켰고, 주종현 역시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단박에 딸아이의 존재를 알아챘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아는 어머니의 당부를 기억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속삭였다.

“연아가 기억했습니다.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시아의 눈가가 순간 경련하듯 움찔했다. 저 멀리 주종현의 눈빛에 은은한 분노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상사절 인파 속, 하인 하나 없이 감히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먼 거리를 나오다니!

그는 낮게 투덜거리며 물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 나한테조차 말 못 할 일이 또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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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어째서 그토록 주종현과 맹 가를 신임하고 중용했는지. 그 이유가 이제야 분명해졌다.그 역시, 전생의 기억을 품은 채 돌아온 사람이었던 것이다.“짐은 지난 생에 참으로 어리석은 군주였다.”황제의 목소리에는 끝없는 회한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짐은 태후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였고, 간신을 믿고 충신을 멀리했다. 그 결과 외적이 침입하고, 번왕들이 난을 일으켰으며, 끝내는 나라가 무너지고 가문이 멸망했다. 짐은 이 대성조의 강산이 불길 속에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짐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늘이 가엾이 여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짐은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막 즉위하던 열한 해 전으로 돌아오게 되었지. 그리고 이 생에서는, 결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짐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숨결 또한 점점 가늘어졌다.“소휘는 이미 끝이 보인다. 조정의 독종들도 거의 다 뿌리 뽑았다. 헌데 짐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소림, 그 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다. 조정은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억눌린 야심들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지.”황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려앉을수록, 맹시은의 가슴도 서서히 가라앉았다.그제야 오늘 자신을 부른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짐은 그대 부부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짐을 대신해 이 대성조의 강산을 지켜다오. 소림을 보필하여, 진정한 명군으로 키워다오.”황제의 목소리에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간청이 담겨 있었다.“맹시은, 짐도 안다.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가족이 함께 앉아 따뜻한 등불 아래 지내는 평온한 나날이라는 것을. 허나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가정이 어찌 온전히 설 수 있겠느냐.”나라가 무너지면, 가정 또한 무너진다. 그 한마디가 바늘처럼 맹시은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렇다. 전생의 자신이야말로, 그 말의 가장 생생한 증거가 아니었던가.이번 생에서 그녀는 어렵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가정을 손에 넣었다.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61화

    “다 확인했느냐?”“모두 확인했습니다, 대인. 신기영의 이 교위(李校尉)와 이곳에서 접선하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좋다.”어둠 속에서, 주종현의 눈빛은 밤보다도 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그물을 거둬라.”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 매복해 있던 금군이 산을 내려오는 맹수처럼 순식간에 역참을 포위했다.안에 있던 자들은 미처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전부 제압되었다.현장 증거와 인물, 모두 빠짐없이 붙잡혔다.소휘가 보낸 심복들, 그리고 접선을 위해 나온 신기영의 이 교위까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다.심문 결과는 예상보다도 훨씬 충격적이었다.번왕 소휘는 사병을 몰래 양성하고 신기영과 결탁하여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증거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그 소식이 궁으로 전해지자, 황제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천둥 같은 기세로 내려진 한 장의 성지가 곧장 진국공부로 전달되었다.영국공 세자 주종현, 그리고 하 가의 장자 하훈에게 명하여 즉시 병사를 이끌고 변방으로 나아가 반역자 소휘를 토벌하라는 명이었다.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여름이 깊어갈수록 날씨는 점점 더 무더워졌다. 그리고 황제의 몸은 그와 반대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궁 안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늘 같았다. 그저 가벼운 감기일 뿐, 별일 없다는 말뿐이었다.하지만 태의원의 원판은 거의 매일 궁에 머물렀다. 그 일로 예민한 대신들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그날 맹시은은 뜻밖의 전교를 받았다. 그녀 혼자서 즉시 입궁하라는 황제의 명이었다.왜 하필 그녀였을까? 외조부를 불러 국사를 논하는 것도 아니고, 주종현을 불러 중책을 맡기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자신 같은 내택의 부인을 굳이 부른 것인가.의문을 가득 안은 채, 맹시은은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건청궁 안은 짙은 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그 쓴내는 마치 궁의 기둥 하나, 들보 하나마다 스며든 듯 무겁고 답답하게 가라앉아 있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59화

    아람은 소휘의 사람들이 따라붙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모험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단비영과 단낭은 야시장으로 나갔고 그녀는 여관에 남아 아이 셋을 지켰다.아이들의 기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침상 위에서 고른 숨소리가 차례로 퍼졌다.아람은 하루 종일 몸을 혹사했다. 배 위에서 눈만 감으면, 등 뒤에서 추격자들이 바짝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종일 가슴을 졸이며 버텨 온 탓에 아이들이 잠들자 그녀 역시 침상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잠결에 아람은 자신이 번잡한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기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56화

    마 노파는 곧장 혼례 담당자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침상 위의 뒷모습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는 성왕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사람을 불러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왕비 마마, 이제 단장하셔야 합니다. 길시를 놓치면 곤란합니다.”그제야 침상 위의 인영이 움직였다. 몸을 돌린 순간, 드러난 얼굴은 아람이 아닌 문희였다.“이게…!”마 노파는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을 붙여 밤낮으로 지키게 했고 단 한순간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문 마님으로 바뀌어 있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57화

    “아람 마님!”단낭이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아람은 온몸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아이들을 데리고 당장 떠나!”단낭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연아랑 선아부터 데려올게요.”“서둘러야 해.”단낭이 막 발길을 떼자 병색이 완연한 단비영이 밖으로 나왔다.“어찌 이 지경이 된 겁니까?”단비영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날 마님께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신 뒤, 제가 성문 밖까지 쫓아갔다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수군 쪽 형제들이 마침 복귀하던 길이 아니었다면 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46화

    성지가 내려지자 강 씨 남매와 맹 가 사람들의 신분은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가문으로도 주 대인과 격이 맞았고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오래된 미련 또한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황제는 고개를 저었다.“세상에 어찌 모든 것이 다 온전할 수 있겠느냐? 지금의 맹 가는 사방에서 뜯어먹으려는 형국이다. 맹 장군이 외손을 인정하려는 것도 결국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일 뿐이겠지.”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뒤, 낮게 중얼거리듯 덧붙였다.“주종현, 짐은 이제서야 네가 남겼던 말의 뜻을 알 것 같구나.”전생에서 주종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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