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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작가: 서은월

제1화

작가: 서은월
강시아는 다시 태어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물에 빠져 숨이 막힐 것 같은 질식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보드라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는 밤 과자가 먹고 싶어요.”

작디작은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꼭 쥐고 흔들었다. 강시아는 눈물이 뿌옇게 번져 생기 가득한 딸아이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하늘이 다시 기회를 주었다. 아이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

강시아는 초주 사람이며,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였고 열 네 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큰오라버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조차 못했기에 홀로 막막한 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단 열 냥에 자신을 국공부에 노비로 팔아 버렸다.

그러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세자 주종현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로 인해, 그녀는 딸아이 연아를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강시아는 세자의 유일한 첩실이 되었고, 세자는 직접 그녀에게 처소를 내어주며 하인까지 붙여 주었다.

강시아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하윤이 국공부 정실부인으로 들어올 때, 자신이 그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대면 때, 송하윤은 일부러 연아를 위해 과자를 챙겨 오며, 자신의 본가로 불러들여 놀게 했다. 그리고 아이를 돌려보낼 때마다 새 옷과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여주며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

그러다 하루는 큰 마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녀는 정실의 손에 맡겨야 앞길이 트인다고 말이다.

그 말에 강시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에게는 딸의 앞날을 열어 줄 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끝내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그런데 겨우 1년이 지났을 무렵, 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이상한 낌새에 그녀는 연아에게 몰래 물어보았는데, 송하윤이 잘 대해 준다 말하면서 눈동자 속에는 감춰지지 않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딸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세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처소에 들이닥친 것은 정실이 거느리는 하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침방에서 외간 남자와의 통정이라 꾸며낸 편지와 불의의 사생아를 품었다는 증거가 줄줄이 나왔다.

“천한 첩실 강 씨, 뒷방을 어지럽히고 외간의 씨를 품어 하늘을 속이려 하다니!”

늘 곁을 지키던 하녀 명옥이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마님, 노여워 마시옵소서… 노비가 낙태약을 훔치다 들켜버렸사옵니다.”

이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조작한 누명에 불과할 뿐.

그러나 송하윤은 강시아에게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세자의 수결을 내밀며 그녀에게 연못에 수장되는 형벌을 내렸다. 왜소한 다섯 살 딸아이가 비틀거리며 달려와 그녀를 감싸안고 애원했다.

“제발, 저희 어머니만은 살려주세요!”

송 씨는 앙상한 딸아이의 턱을 잡아 올리며 눈빛에 엄청난 혐오를 담고 말했다.

“아직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냐? 길러 줘도 보답할 줄 모르는 천한 년 같으니라고! 그래, 차라리 모녀가 함께 가거라. 그럼 황천길에서 덜 외롭지 않겠느냐? 여봐라! 이 자들을 물에 빠뜨리거라!”

“안 돼!”

연아는 비명을 지르며 송 씨의 손을 뿌리치고 죽기 살기로 죽통을 붙잡았다. 깡마른 두 손이었지만 순간적인 힘은 놀라워 두 하녀가 달라붙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강시아는 깨달았다. 정실은 국공부에 시집온 지 일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은 이미 연아를 둔 뒤이고, 심지어 이번에는 남자아이도 품었다.

정실은 서출의 아들이 자신의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리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죽을 운명. 남은 건 딸의 목숨을 구걸하는 길뿐이었다.

“마님, 천한 첩이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니 부디, 연아만은 살려주십시오. 지난 1년간 길러온 정을 봐서라도…”

강시아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죽통 속에 파묻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살려주라고?”

송하윤은 그녀의 아랫배를 노려보며 손수건을 찢어지도록 움켜쥐었다.

“내가 국공부에 들어온 지 꼬박 1년이 되도록 기척 하나 없었는데, 네 년은...!”

말끝을 꺾고 깊은 숨을 내쉰 후 그녀는 다시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그래도 서방님을 모셨던 성의를 봐서라도 모녀가 함께 길을 떠날 수 있게 하락해 주지.”

그 순간, 연아가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입안 가득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동그란 두 눈은 휘둥그레져 혼이 빠져나간 듯 허공만 응시했다.

그때, 강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날마다 본가에서 보내오던 보양우유이다. 연아가 그토록 마시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아!”

그녀의 절규는 죽통에 갇혀 허공에 메아리쳤다. 송하윤은 역겨운 듯 한 발 물러서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느냐? 어서 끝내거라!”

“송하윤, 네 년은 천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가운 물결이 콧속을 파고들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고, 강시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어린 딸이 하녀들 손에 의해 거칠게 밀려 물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 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물이 목구멍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힘이 점점 빠져가며 시야는 어둡게 잠겨갔다.

그 순간,

“어머니, 왜 울고 계십니까?”

작은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강시아는 질식할 것 같은 회억에서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아이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돌고 생기발랄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딸아이에게 속삭였다.

“나는 울지 않는다. 기뻐서 그런 것이야…”

“마님, 송 아가씨께서 오셨사옵니다.”

하녀 명옥이 발을 들이며 울고 있는 모녀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드리웠다.

“두 분께서는 왜 함께 울고 계시옵니까?”

“아무 일도 아니다.”

강시아가 눈물을 훔치던 손길을 멈추며 되물었다.

“송 아가씨라고?”

그 순간, 뇌리에 번뜩 떠오른 것은 그녀를 수장시켰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강시아의 손톱은 깊숙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져 내릴 듯한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마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그러자 명옥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강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 속의 끝없는 원한은 이미 숨겨져 있었다.

“송 아가씨를 모시거라. 연아는 안쪽에 들어가 글을 쓰게 하고.”

잠시 뒤, 송하윤은 시녀 소영을 데리고 손에 음식 바구니를 든 채 들어왔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핀 채로 방 안을 대충 둘러본 후, 손수건을 부채 삼아 가볍게 흔들었다. 비좁은 이 방은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조차 담기 버거운 듯했다.

시녀 소영이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강 마님, 저희 아가씨께서 큰 마님을 뵈러 가시던 중 일부러 아가씨를 위해 덕흥루에 들러 과자를 사오셨사옵니다. 마님께서는 집안일로 바쁘시니 잘 모르실 테지만 덕흥루 과자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사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가식의 가면 뒤에 감춘 것은 뱀과 전갈의 심장. 고작 몇 조각 과자로 스스로의 이름을 높이려 하다니.

“덕흥루 과자라니! 연아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송 아가씨.”

그러고는 바로 바구니를 받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덮개를 젖혔다.

“에이!”

그러자 자줏빛 소매를 한 소영의 얼굴빛이 변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찬합 속의 과자는 몇 조각만 남기고 모두 부서져버렸다.

“어머, 어쩌면 전부 부서졌을까?”

강시아가 놀라움에 입을 틀어쥐었다. 소영은 그녀가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다. 물건을 받지도 않고 곧장 뚜껑부터 열어 보다니. 그녀는 얼른 자기 주인의 얼굴빛을 살핀 뒤 먼저 입을 열어 강시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분명 도착했을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사옵니다. 분명히 강 마님께서 직접 뚜껑을 열다가 잘못 건드려 부서뜨린 게지요!”

강시아는 빙긋 웃었다.

“소영이는 참으로 재밌는 아이구나. 나는 그저 과자가 부서졌다고 말했을 뿐이지, 누구를 탓한 적은 없다. 좋든 나쁘든 모두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생각해 보내주신 성의 아니겠느냐? 과자야 본래 잘 부서지지는 것이고. 네가 이렇게 반응하니 오히려 나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송하윤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녀의 눈에 강시아 따위는 그저 남자들이 잠시 즐기는 장난감일 뿐, 대단치 않은 존재였다. 송하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들어 소영이를 꾸짖었다.

“소영, 바깥에 나왔다고 해서 규칙을 잊었느냐?”

때 마침 문밖으로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소영은 즉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의 호의가 헛되이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옵니다. 아가씨를 위해 불공평하다 여겨…!”

순간 주종현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일이냐?”

강시아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서방님께서는 노여워 마옵소서.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위해 특별히 과자를 보내주셨는데 전부 부서져 소영이가 괜히 제 탓을 할까 염려해 한마디 보탠 것뿐이옵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경계를 늦추어 소영이 곧장 과자를 연아의 손에 쥐여주었고 겨우 세 살이던 아이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해 곧바로 떨어뜨렸다. 과자가 산산이 흩어지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미처 이곳으로 들어오는 세자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소영은 연아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 실수라며 먼저 나서서 얘기했었다.

과자는 우유로 만든 것이었고 연아는 우유를 싫어해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며 먹기 싫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주종현은 얼굴을 굳히며 그녀가 딸을 버릇없이 길렀다고, 남의 호의를 헛되이 한다며 차갑게 꾸짖었다.

그 기억이 스치자 강시아의 시선은 곁에서 시중드는 명옥에게로 향했다. 연아가 우유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가까이 모시는 명옥과 유모라면 당연히 알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종현은 흩어진 과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송하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아씨의 정성에 감사하네. 그리고 과자란 원래 잘 부서지는 법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네.”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강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전생에서는 잘못이 아닌 일로도 연아를 꾸짖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설사 아이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고작 세 살배기에게 괜찮다는 한마디조차 아끼던 이가!

송하윤은 고개를 들어 턱을 살짝 치켜세우고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천한 첩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와야 했을까? 어머니께서는 공연히 괜한 걱정만 한다니까.’

그녀는 더 이상 강시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큰 마님께 가 보겠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의 불길한 조짐들이 이미 드러났음을 그제서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연아는 어디 있느냐?”

“연아는 안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서는 순간, 강시아는 명옥의 눈가에서 스치듯 지나간 연심을 포착해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감춰버렸다.

강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명옥, 벌써 주인을 배반했구나..’

한편, 내실.

어린 연아는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리며 정성껏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손에 커다란 붓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획을 그었다.

주종현은 그런 그녀의 뒤에서 팔을 감싸 안고 커다란 손으로 작은 손과 붓을 함께 잡았다.

“연아야, 글씨에는 항상 시작하는 기세와 마무리의 맺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양이 나지. 이 짧은 한 획을 아버지는 어린 시절 무려 두 해나 연습했단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기세가 무엇입니까?”

그는 딸의 작은 손을 이끌어 한 획 한 획 쓰며 인내심 있게 가르쳤다. 강시아는 환히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매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와 아이의 앞길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송하윤은 결국 이 집안의 정실로 들어올 것이고 자신과 연아는 다시 그 전생의 죽음길로 내몰릴 운명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찬합으로 옮겨졌다. 잠시 후, 그녀는 명옥을 불러들였다.

강시아는 화장대 서랍에서 작은 장신구함을 꺼냈다. 딸랑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잡아끌자 어린 연아의 눈망울이 금세 빛이 났다. 주종현은 그런 딸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글 쓰는데 집중해야지.”

고개를 들자 강시아가 장신구함에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은전을 꺼내 명옥에게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덕흥루에서 밤 과자를 좀 사 오거라. 우유가 들어간 건 사지 말고. 연아가 싫어한다.”

주종현이 말을 보탰다.

“그깟 은전으로 덕흥루 과자를 살 수 있겠느냐?”

강시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서방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제가 돈을 벌 길이 없어 평소 모아둔 게 이것 뿐이라….”

주종현은 탁자 뒤에 앉아 있던 딸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연아야, 아버지에게 말해 보거라. 무엇을 제일 좋아하느냐?”

작은 소녀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지며 웃었다.

“밤 과자요!”

그러다 잠시 머뭇하다 덧붙였다.

“우유는 말고요!”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젖었다.

“알겠다. 그럼, 우유는 빼고.”

연아는 다시 아버지의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달콤한 두부 꽃을 제일 좋아합니다.”

주종현은 손가락 끝으로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작은 요정 같은 것.”

그는 딸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자, 오늘 글씨를 열심히 쓴 상으로 아버지가 직접 데려가 주마. 덕흥루에 가서 먹자구나.”

세 식구가 문을 나서자 마침 맞닥뜨린 이는 주 가의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송하윤이었다.

“어머, 큰 오라버니, 어디 가십니까?”

뒤를 따르던 강시아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얌전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주종현이 가볍게 딸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연아야, 인사드려야지.”

연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통통한 두 손을 아랫배 앞에서 공손히 모아 합장하듯 예를 올렸다.

“연아, 셋째 고모께 문안드립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자 송하윤의 입매가 은근히 휘어졌다.

“우리 작은 연아는 왜 나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냐?”

연아는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비비꼬며 한참 망설였지만, 끝내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송하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삼월 상사절입니다. 종현 오라버니께서는 강 마님과 연아를 데리고 풍수 언덕에 가 철화를 구경하셨는지요?”

그러자 주온청이 곧장 거들었다.

“우리도 가려고 합니다. 큰 오라버니 우리와 함께 가주세요!”

그러고는 곁에 있는 강시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풍수 강변에 인파가 얼마나 많은데...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쉽지 않을 겁니다. 철화라면 상사절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며칠 후 태후 마마의 수연에도 궁정 가득 불꽃놀이가 펼쳐질 텐데 굳이 지금 나갈 필요는 없죠.”

강시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딸을 받아 안았다.

“셋째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서방님께서는 두 아가씨와 함께 다녀오세요. 저는 연아를 데리고 덕흥루에 들를 참이니.”

주종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강시아는 연아를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저잣거리를 벗어나 국공부가 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즈음, 그녀는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성 마시로 가거라.”

그녀는 말을 사고파는 그곳에서 흑시의 출성로 통행증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수도라 해도 바람길은 언제나 뚫려 있는 법이니.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래가 성사된다. 각 집안과 관부에는 달아난 노비도 있고 본분을 벗어나고픈 귀족 자제도 있다.

출성 통행증은 하나의 거대한 장사였다. 관부에서 내주는 정식 증서 말고도 암암리에 위조된 통행증이 흑시에서 은밀히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비록 전 재산을 몽땅 바치더라도 위조 통행증 두 장을 손에 넣어 반드시 연아를 데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저택을 벗어나리라.

복수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복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국공부 안에서 그녀는 인맥도, 의지할 힘도 없었다. 지난 생애 연못에 가라앉기 전 그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그녀는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송하윤이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출 딸은 반드시 정실의 교양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연아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웃음 많고 명랑하던 딸이 점점 말라가고 두려움에 시달리다 기침을 달고 사는 병든 아이로 변해가는 것을. 그녀가 매일같이 입으로 밀어 넣던 보양 우유 속에는 아이의 심폐를 갉아먹는 독이 은밀히 스며 있었다.

강시아는 고개를 숙여 딸의 통통한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전생 연못에서 차가운 물결 속으로 가라앉던 그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복수는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딸의 목숨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난 생애의 궤적을 따르자면 송하윤이 정실로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석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모녀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배반한 시녀들과 유모들, 그자들에게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바로 그때, 날카로운 남자의 음성이 그녀의 사유를 끊어내듯 울려 퍼졌다.

“말시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

강시아는 온몸이 굳어졌다.

분명 방금 전 이미 떠나보냈던 그가 다시 돌아와 차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갑고 길게 찢어진 듯한 눈매가 모녀 둘을 무심하게 훑기 시작했다.

“서… 서방님, 어째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강시아는 놀란 숨을 토해내듯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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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님, 청풍루에 새로 단막극이 올랐다 합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주연아는 그네에 몸을 기대고 웅크린 채,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재미없다.”그녀의 어머니는 경성에 이름난 진국공부의 적녀였고 아버지는 군권을 쥔 상산왕이었다.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그 사방이 막힌 경성 안에서, 비단옷과 풍족함 속에서 무탈하게 흘러갔을 터였다.하지만 그녀는 그 ‘별다른 일’이었다.어릴 적,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던 나날들.고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늘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그럼에도 그 시간은 즐거웠다.규칙도 없고, 예법도 없고, 경성 사람들 얼굴마다 얹혀 있던 그 가면도 없었다.논두렁에 앉아 녹아내리듯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다.어머니는 그녀를 안고 불꽃놀이를 보여주었고 외삼촌은 온갖 작은 장난감을 사 주었다.그러다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웅장한 국공부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부모의 이야기는 너무도 길어서 몇 날 밤을 새워도 다 들을 수 없을 만큼 깊었다.하지만 바깥세상에 어떤 풍파가 불어도 그녀는 늘 어머니의 날개 아래에서 아무 탈 없이 자라났다.그녀가 자라자 넓던 경성은 오히려 좁아졌다. 늘 그 밖으로 날아가 세상을 보고 싶었다.그녀가 계례를 치르던 해, 궁에서 성지가 내려왔다.어릴 적 함께 자란 소림이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겠다는 것이었다.경성조차 좁게 느끼던 그녀에게 손바닥만 한 황궁은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그녀는 말을 타고 떠났고 부모는 막지 않았다.짐 속에는 어머니가 몰래 넣어 둔 은표까지 들어 있었다.서역에도 갔다. 통행증이 없어 관문 안쪽에서 멀찍이 바라보는 데 그쳤지만 말이다.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강남에 이르렀다.강남은 좋았다. 비에 젖은 안개,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그야말로 부드럽고 풍요로운 고장이었다.그러나 주연아의 본성에는 강남 여인의 온화함 따위는 한 점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90화

    그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몸에 밴 피로와 서툴게나마 그녀를 달래려는 마음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그가 더 자주 찾아올수록 송하윤의 수법은 점점 더 잔혹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위험해졌다.강시아에게는 더 이상 기댈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세자, 제발… 연아를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대로 가면… 연아는 죽어요.”주종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조금만 더 기다려라.”또 그 말이었다.“시아야, 나를 믿어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내가 돌아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주겠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더 기다리라는 것인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딸이 무사히, 평안하게 자라나는 것.그 소망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결국 그녀의 재앙이 찾아왔다.그녀는 다시 아이를 가졌다.의원이 맥을 짚고 회임이라 알린 순간, 기쁨은 한 점도 없었다.오로지 차갑고도 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덮쳐 왔다.송하윤이라면 이 아이를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아이와 함께 죽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주종현에게 소식을 전하려 했다.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평소 믿을 만하다 여겼던 하인 하나에게 몰래 편지를 맡겼다.그러나 그 편지는 그대로 송하윤의 손에 들어갔다.그녀의 구원 요청은 외간 남자와 간통했다는 증거가 되어 버렸다.송하윤은 주종현이 떠나기 전 남긴 명령서를 들고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그녀의 뜰로 들이닥쳤다.“이 천한 것!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이냐! 우리 영국공부의 체면을 더럽히다니! 잡아라! 돼지우리 형에 처하거라!”그녀는 몇몇 하인들에게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입에는 헝겊이 틀어막혔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증오가 타올랐다.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이 집에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9화

    송하윤은 연아를 향해 손짓했다.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리 오너라. 어미 곁으로.”연아는 겁먹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강시아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송하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너도 이 집에 오래 있었으니 규율쯤은 알겠지. 서출 자식은 마땅히 적모가 거두어 기르는 법이다. 앞으로는 연아를 내 처소로 옮기도록 하거라. 내가 직접 가르치겠다.”강시아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며 하얘졌다.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아… 안 됩니다, 마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연아는 아직 어립니다. 저를 떠날 수 없습니다. 마님, 제발…”“무례하다!”송하윤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로운 꾸짖음이 쏟아졌다.“내가 아이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첩의 신분으로 감히 적모를 넘보겠다는 것이냐?”순식간에 감당하기 힘든 죄명이 씌워졌다.강시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연아를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신첩은… 감히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감히 없다?”송하윤이 냉소를 흘렸다.“내가 보기엔, 네 간이 제법 크구나.”그때,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주종현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방 안의 상황을 훑어보며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송하윤은 곧장 표정을 바꾸고는 억울함이 어린 얼굴로 다가갔다.“부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연아도 이제 글을 배울 나이가 된 것 같아, 제 곁에 두고 직접 가르치려 했습니다. 헌데 강 마님이 차마 놓지 못하네요.”주종현의 시선이 송하윤의 얼굴에서 천천히 옮겨져 강시아의 창백하고 떨리는 얼굴에 머물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연아는 아직 어리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자.”그가 입을 열었다.그 말은 그녀를 위한 변호였다.“연아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거라.”“예, 세자...”강시아는 사면을 받은 듯, 연아를 꼭 끌어안고 허둥지둥 그곳을 벗어났다.하지만 이유도 없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8화

    그녀는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그가 오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만나지 않았다.그가 사람을 보내 물건을 전해도 그녀는 그저 명옥에게 맡겨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창고에 넣어 두게 했다.송하윤을 처음 본 것은, 송학당의 뜰이었다.그날, 송하윤은 큰 마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웃음이 가득했다.그녀는 예법에 따라 들어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신첩, 큰 마님과 송 아가씨께 문안드립니다.”허리를 굽힌 그녀의 태도는 땅에 닿을 듯 낮고도 겸손했다.그 순간, 날카로운 시선 하나가 곧장 그녀를 꿰뚫었다.노골적인 탐색과 적의가 담긴 눈길이었다.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 사람이 강 마님인가요?”송하윤의 목소리는 꿀을 입힌 듯 달콤했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독기가 스며 있었다.“생김새가 제법 괜찮긴 하네요. 그러니 사촌 오라버니를 그토록 홀려 놓았겠지요.”큰 마님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눌렀다.“윤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강시아의 심장이 툭 하고 가라앉았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연아의 손을 꽉 잡았다.연아 역시 그 기운을 느낀 듯 작은 몸을 더욱 그녀의 뒤로 숨겼다.그 순간, 그녀는 또렷이 깨달았다.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렇게 가문이 높고, 곧 세자부인이 될 송하윤과 무엇으로 맞설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물러나는 것뿐이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물러나 다투지 않고 빼앗으려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그러나 때로는 물러난다고 해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태후의 생신을 맞아 각 가문은 축하 예물을 바쳐야 했다.송하윤은 미래의 세자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이 일을 도맡았다. 그리고 강시아를 불러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강 마님 자수 솜씨가 이 집에서 가장 좋다고 들었어요. 이 ‘송학연년도’는 강 마님에게 맡길게요. 우리 영국공부를 위해 힘을 보태는 셈이니, 잘 부탁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7화

    그 착각은 거울 속 꽃과 물 위의 달처럼, 손을 대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꿈처럼 흐르던 삼 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영국공부 세자, 주종현이 혼인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그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연아의 작은 옷에 노란 영춘화를 수놓고 있었다.바늘끝이 그대로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번져 나와 연한 꽃잎을 물들였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일부러 그녀가 듣도록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하녀들의 말만이 맴돌았다.“들었어? 송 가 아가씨래.”“그 송 아가씨는 우리 세자의 사촌이래. 태후 마마께서도 칭찬하신 재녀라잖아.”“이게 바로 문벌이 맞는 혼사고, 친가끼리 더 가까워지는 거지.”“그렇지 뭐. 예전에 약혼까지 했었다잖아. 송 가에 일이 생겨서 깨졌을 뿐이지…”“이젠 송 가 장자가 출세했으니, 이 혼사도 다시 올라온 거고.”그들의 말은 바늘처럼 하나하나 그녀를 찔렀다.모두가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강 마님의 좋은 날은 이제 끝났다고.그 유일했던 총애도 곧 정실부인에게로 돌아갈 거라고.총애라니. 강시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애초에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그저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쥘 수 없는 하나의 첩일 뿐이었다.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 연아가 무사히,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뿐이었다.혼례 날짜가 정해진 뒤로 이상하게도 주종현은 오히려 더 자주 그녀의 뜰을 찾았다.예전처럼 그저 조용히 앉아 있거나 연아를 놀아 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그는 무언가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동쪽 거리의 새로 생긴 과자, 서쪽 장인의 손에서 나온 적금 비녀, 남쪽에서 막 들어온 신선한 여지.마치 무언가를 메우려는 듯, 혹은 달래려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짙어졌다.그리고 이 “총애”는 곧 큰 마님의 귀에 들어갔다.그날, 그녀는 송학당으로 불려갔다.큰 마님은 상석에 앉아 염주를 굴리며 눈길조차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64화

    “더 볼 것도 없군. 다 타 버렸다!”옆에 있던 관병이 무언가를 밟고 몸이 굳었다. 그것은 단순히 타버린 목재가 아니었다.그가 발을 옮기자 발바닥에 묻은 검은 재가 벗겨지며 금빛이 번쩍였다.금이었다!그는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조금 변형되긴 했지만 원래는 팔찌였음이 분명했다.“꺽다리! 이걸 좀 봐. 금이야!”꺽다리는 동료의 손에 든 물건을 보고 돌아섰다. 두 사람은 바로 머리를 맞대고 금덩이를 몰래 숨겼다.“빨리! 숨겨!”“더 찾아보자. 분명 예전에 누군가 여기에 숨겨둔 물건일 거야. 화재 덕분에 밖으로 나온 거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56화

    강시아는 손수건으로 연아의 작은 얼굴을 살며시 닦아주었다.“연아나 많이 먹거라.”하 유모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강시아의 손에서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마님, 내일부터는 연아 아가씨께서 열흘 동안 휴식을 취하신다 하옵니다.”강시아의 신분이 이토록 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곡식 장사에서 벌어들인 돈도 아낌없이 나눠주는 인심을 보며 하 유모는 예전부터 그녀가 복 많은 사람이라 여겼다. 얼마 전 하대우 역시 상단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곡식 가게가 자리를 제대로 잡기만 한다면, 빠르면 가을에 국공부에서 일을 관둘수도 있을 것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58화

    밤이 깊어갈 무렵, 설강은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돌아왔다.마당 한켠에서 콩뼈가 인기척을 듣고 쑥 튀어나오자 설강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삼키며 꽃덤불 속으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콩뼈!!”설강은 떨어뜨린 신발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콩뼈를 향해 던졌다. 콩뼈는 급정지라도 한 듯 멈칫하더니 냉큼 돌아 마당 깊숙이로 줄행랑쳤다.신발은 마침 막 들어오던 사람의 종아리에 툭 부딪혔다.위심은 발치에 떨어진 꽃신을 한번 쳐다보더니 곧 머리를 들어 꽃덤불에서 엉망으로 기어나오는 설강을 바라보았다.“설강 아가씨, 한밤중에 꽃밭 일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62화

    강시아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다리를 타고 담장을 내려온 후, 그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남은 인가루를 이쪽 뜰에도 뿌렸다. 태울 거라면 함께 태워야 했다. 그녀는 한 점의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다시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때 연아는 이미 작은 사내아이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다.“어머니는 이제 아버지가 되었어요!”강시아는 연아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래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란다.”설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럼 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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