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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Author: 서은월

제1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다시 태어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물에 빠져 숨이 막힐 것 같은 질식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보드라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는 밤 과자가 먹고 싶어요.”

작디작은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꼭 쥐고 흔들었다. 강시아는 눈물이 뿌옇게 번져 생기 가득한 딸아이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하늘이 다시 기회를 주었다. 아이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

강시아는 초주 사람이며,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였고 열 네 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큰오라버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조차 못했기에 홀로 막막한 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단 열 냥에 자신을 국공부에 노비로 팔아 버렸다.

그러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세자 주종현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로 인해, 그녀는 딸아이 연아를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강시아는 세자의 유일한 첩실이 되었고, 세자는 직접 그녀에게 처소를 내어주며 하인까지 붙여 주었다.

강시아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하윤이 국공부 정실부인으로 들어올 때, 자신이 그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대면 때, 송하윤은 일부러 연아를 위해 과자를 챙겨 오며, 자신의 본가로 불러들여 놀게 했다. 그리고 아이를 돌려보낼 때마다 새 옷과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여주며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

그러다 하루는 큰 마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녀는 정실의 손에 맡겨야 앞길이 트인다고 말이다.

그 말에 강시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에게는 딸의 앞날을 열어 줄 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끝내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그런데 겨우 1년이 지났을 무렵, 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이상한 낌새에 그녀는 연아에게 몰래 물어보았는데, 송하윤이 잘 대해 준다 말하면서 눈동자 속에는 감춰지지 않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딸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세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처소에 들이닥친 것은 정실이 거느리는 하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침방에서 외간 남자와의 통정이라 꾸며낸 편지와 불의의 사생아를 품었다는 증거가 줄줄이 나왔다.

“천한 첩실 강 씨, 뒷방을 어지럽히고 외간의 씨를 품어 하늘을 속이려 하다니!”

늘 곁을 지키던 하녀 명옥이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마님, 노여워 마시옵소서… 노비가 낙태약을 훔치다 들켜버렸사옵니다.”

이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조작한 누명에 불과할 뿐.

그러나 송하윤은 강시아에게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세자의 수결을 내밀며 그녀에게 연못에 수장되는 형벌을 내렸다. 왜소한 다섯 살 딸아이가 비틀거리며 달려와 그녀를 감싸안고 애원했다.

“제발, 저희 어머니만은 살려주세요!”

송 씨는 앙상한 딸아이의 턱을 잡아 올리며 눈빛에 엄청난 혐오를 담고 말했다.

“아직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냐? 길러 줘도 보답할 줄 모르는 천한 년 같으니라고! 그래, 차라리 모녀가 함께 가거라. 그럼 황천길에서 덜 외롭지 않겠느냐? 여봐라! 이 자들을 물에 빠뜨리거라!”

“안 돼!”

연아는 비명을 지르며 송 씨의 손을 뿌리치고 죽기 살기로 죽통을 붙잡았다. 깡마른 두 손이었지만 순간적인 힘은 놀라워 두 하녀가 달라붙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강시아는 깨달았다. 정실은 국공부에 시집온 지 일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은 이미 연아를 둔 뒤이고, 심지어 이번에는 남자아이도 품었다.

정실은 서출의 아들이 자신의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리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죽을 운명. 남은 건 딸의 목숨을 구걸하는 길뿐이었다.

“마님, 천한 첩이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니 부디, 연아만은 살려주십시오. 지난 1년간 길러온 정을 봐서라도…”

강시아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죽통 속에 파묻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살려주라고?”

송하윤은 그녀의 아랫배를 노려보며 손수건을 찢어지도록 움켜쥐었다.

“내가 국공부에 들어온 지 꼬박 1년이 되도록 기척 하나 없었는데, 네 년은...!”

말끝을 꺾고 깊은 숨을 내쉰 후 그녀는 다시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그래도 서방님을 모셨던 성의를 봐서라도 모녀가 함께 길을 떠날 수 있게 하락해 주지.”

그 순간, 연아가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입안 가득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동그란 두 눈은 휘둥그레져 혼이 빠져나간 듯 허공만 응시했다.

그때, 강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날마다 본가에서 보내오던 보양우유이다. 연아가 그토록 마시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아!”

그녀의 절규는 죽통에 갇혀 허공에 메아리쳤다. 송하윤은 역겨운 듯 한 발 물러서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느냐? 어서 끝내거라!”

“송하윤, 네 년은 천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가운 물결이 콧속을 파고들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고, 강시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어린 딸이 하녀들 손에 의해 거칠게 밀려 물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 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물이 목구멍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힘이 점점 빠져가며 시야는 어둡게 잠겨갔다.

그 순간,

“어머니, 왜 울고 계십니까?”

작은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강시아는 질식할 것 같은 회억에서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아이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돌고 생기발랄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딸아이에게 속삭였다.

“나는 울지 않는다. 기뻐서 그런 것이야…”

“마님, 송 아가씨께서 오셨사옵니다.”

하녀 명옥이 발을 들이며 울고 있는 모녀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드리웠다.

“두 분께서는 왜 함께 울고 계시옵니까?”

“아무 일도 아니다.”

강시아가 눈물을 훔치던 손길을 멈추며 되물었다.

“송 아가씨라고?”

그 순간, 뇌리에 번뜩 떠오른 것은 그녀를 수장시켰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강시아의 손톱은 깊숙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져 내릴 듯한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마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그러자 명옥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강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 속의 끝없는 원한은 이미 숨겨져 있었다.

“송 아가씨를 모시거라. 연아는 안쪽에 들어가 글을 쓰게 하고.”

잠시 뒤, 송하윤은 시녀 소영을 데리고 손에 음식 바구니를 든 채 들어왔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핀 채로 방 안을 대충 둘러본 후, 손수건을 부채 삼아 가볍게 흔들었다. 비좁은 이 방은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조차 담기 버거운 듯했다.

시녀 소영이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강 마님, 저희 아가씨께서 큰 마님을 뵈러 가시던 중 일부러 아가씨를 위해 덕흥루에 들러 과자를 사오셨사옵니다. 마님께서는 집안일로 바쁘시니 잘 모르실 테지만 덕흥루 과자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사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가식의 가면 뒤에 감춘 것은 뱀과 전갈의 심장. 고작 몇 조각 과자로 스스로의 이름을 높이려 하다니.

“덕흥루 과자라니! 연아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송 아가씨.”

그러고는 바로 바구니를 받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덮개를 젖혔다.

“에이!”

그러자 자줏빛 소매를 한 소영의 얼굴빛이 변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찬합 속의 과자는 몇 조각만 남기고 모두 부서져버렸다.

“어머, 어쩌면 전부 부서졌을까?”

강시아가 놀라움에 입을 틀어쥐었다. 소영은 그녀가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다. 물건을 받지도 않고 곧장 뚜껑부터 열어 보다니. 그녀는 얼른 자기 주인의 얼굴빛을 살핀 뒤 먼저 입을 열어 강시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분명 도착했을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사옵니다. 분명히 강 마님께서 직접 뚜껑을 열다가 잘못 건드려 부서뜨린 게지요!”

강시아는 빙긋 웃었다.

“소영이는 참으로 재밌는 아이구나. 나는 그저 과자가 부서졌다고 말했을 뿐이지, 누구를 탓한 적은 없다. 좋든 나쁘든 모두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생각해 보내주신 성의 아니겠느냐? 과자야 본래 잘 부서지지는 것이고. 네가 이렇게 반응하니 오히려 나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송하윤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녀의 눈에 강시아 따위는 그저 남자들이 잠시 즐기는 장난감일 뿐, 대단치 않은 존재였다. 송하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들어 소영이를 꾸짖었다.

“소영, 바깥에 나왔다고 해서 규칙을 잊었느냐?”

때 마침 문밖으로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소영은 즉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의 호의가 헛되이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옵니다. 아가씨를 위해 불공평하다 여겨…!”

순간 주종현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일이냐?”

강시아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서방님께서는 노여워 마옵소서.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위해 특별히 과자를 보내주셨는데 전부 부서져 소영이가 괜히 제 탓을 할까 염려해 한마디 보탠 것뿐이옵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경계를 늦추어 소영이 곧장 과자를 연아의 손에 쥐여주었고 겨우 세 살이던 아이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해 곧바로 떨어뜨렸다. 과자가 산산이 흩어지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미처 이곳으로 들어오는 세자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소영은 연아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 실수라며 먼저 나서서 얘기했었다.

과자는 우유로 만든 것이었고 연아는 우유를 싫어해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며 먹기 싫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주종현은 얼굴을 굳히며 그녀가 딸을 버릇없이 길렀다고, 남의 호의를 헛되이 한다며 차갑게 꾸짖었다.

그 기억이 스치자 강시아의 시선은 곁에서 시중드는 명옥에게로 향했다. 연아가 우유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가까이 모시는 명옥과 유모라면 당연히 알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종현은 흩어진 과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송하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아씨의 정성에 감사하네. 그리고 과자란 원래 잘 부서지는 법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네.”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강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전생에서는 잘못이 아닌 일로도 연아를 꾸짖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설사 아이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고작 세 살배기에게 괜찮다는 한마디조차 아끼던 이가!

송하윤은 고개를 들어 턱을 살짝 치켜세우고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천한 첩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와야 했을까? 어머니께서는 공연히 괜한 걱정만 한다니까.’

그녀는 더 이상 강시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큰 마님께 가 보겠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의 불길한 조짐들이 이미 드러났음을 그제서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연아는 어디 있느냐?”

“연아는 안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서는 순간, 강시아는 명옥의 눈가에서 스치듯 지나간 연심을 포착해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감춰버렸다.

강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명옥, 벌써 주인을 배반했구나..’

한편, 내실.

어린 연아는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리며 정성껏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손에 커다란 붓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획을 그었다.

주종현은 그런 그녀의 뒤에서 팔을 감싸 안고 커다란 손으로 작은 손과 붓을 함께 잡았다.

“연아야, 글씨에는 항상 시작하는 기세와 마무리의 맺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양이 나지. 이 짧은 한 획을 아버지는 어린 시절 무려 두 해나 연습했단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기세가 무엇입니까?”

그는 딸의 작은 손을 이끌어 한 획 한 획 쓰며 인내심 있게 가르쳤다. 강시아는 환히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매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와 아이의 앞길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송하윤은 결국 이 집안의 정실로 들어올 것이고 자신과 연아는 다시 그 전생의 죽음길로 내몰릴 운명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찬합으로 옮겨졌다. 잠시 후, 그녀는 명옥을 불러들였다.

강시아는 화장대 서랍에서 작은 장신구함을 꺼냈다. 딸랑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잡아끌자 어린 연아의 눈망울이 금세 빛이 났다. 주종현은 그런 딸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글 쓰는데 집중해야지.”

고개를 들자 강시아가 장신구함에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은전을 꺼내 명옥에게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덕흥루에서 밤 과자를 좀 사 오거라. 우유가 들어간 건 사지 말고. 연아가 싫어한다.”

주종현이 말을 보탰다.

“그깟 은전으로 덕흥루 과자를 살 수 있겠느냐?”

강시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서방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제가 돈을 벌 길이 없어 평소 모아둔 게 이것 뿐이라….”

주종현은 탁자 뒤에 앉아 있던 딸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연아야, 아버지에게 말해 보거라. 무엇을 제일 좋아하느냐?”

작은 소녀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지며 웃었다.

“밤 과자요!”

그러다 잠시 머뭇하다 덧붙였다.

“우유는 말고요!”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젖었다.

“알겠다. 그럼, 우유는 빼고.”

연아는 다시 아버지의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달콤한 두부 꽃을 제일 좋아합니다.”

주종현은 손가락 끝으로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작은 요정 같은 것.”

그는 딸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자, 오늘 글씨를 열심히 쓴 상으로 아버지가 직접 데려가 주마. 덕흥루에 가서 먹자구나.”

세 식구가 문을 나서자 마침 맞닥뜨린 이는 주 가의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송하윤이었다.

“어머, 큰 오라버니, 어디 가십니까?”

뒤를 따르던 강시아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얌전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주종현이 가볍게 딸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연아야, 인사드려야지.”

연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통통한 두 손을 아랫배 앞에서 공손히 모아 합장하듯 예를 올렸다.

“연아, 셋째 고모께 문안드립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자 송하윤의 입매가 은근히 휘어졌다.

“우리 작은 연아는 왜 나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냐?”

연아는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비비꼬며 한참 망설였지만, 끝내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송하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삼월 상사절입니다. 종현 오라버니께서는 강 마님과 연아를 데리고 풍수 언덕에 가 철화를 구경하셨는지요?”

그러자 주온청이 곧장 거들었다.

“우리도 가려고 합니다. 큰 오라버니 우리와 함께 가주세요!”

그러고는 곁에 있는 강시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풍수 강변에 인파가 얼마나 많은데...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쉽지 않을 겁니다. 철화라면 상사절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며칠 후 태후 마마의 수연에도 궁정 가득 불꽃놀이가 펼쳐질 텐데 굳이 지금 나갈 필요는 없죠.”

강시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딸을 받아 안았다.

“셋째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서방님께서는 두 아가씨와 함께 다녀오세요. 저는 연아를 데리고 덕흥루에 들를 참이니.”

주종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강시아는 연아를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저잣거리를 벗어나 국공부가 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즈음, 그녀는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성 마시로 가거라.”

그녀는 말을 사고파는 그곳에서 흑시의 출성로 통행증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수도라 해도 바람길은 언제나 뚫려 있는 법이니.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래가 성사된다. 각 집안과 관부에는 달아난 노비도 있고 본분을 벗어나고픈 귀족 자제도 있다.

출성 통행증은 하나의 거대한 장사였다. 관부에서 내주는 정식 증서 말고도 암암리에 위조된 통행증이 흑시에서 은밀히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비록 전 재산을 몽땅 바치더라도 위조 통행증 두 장을 손에 넣어 반드시 연아를 데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저택을 벗어나리라.

복수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복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국공부 안에서 그녀는 인맥도, 의지할 힘도 없었다. 지난 생애 연못에 가라앉기 전 그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그녀는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송하윤이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출 딸은 반드시 정실의 교양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연아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웃음 많고 명랑하던 딸이 점점 말라가고 두려움에 시달리다 기침을 달고 사는 병든 아이로 변해가는 것을. 그녀가 매일같이 입으로 밀어 넣던 보양 우유 속에는 아이의 심폐를 갉아먹는 독이 은밀히 스며 있었다.

강시아는 고개를 숙여 딸의 통통한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전생 연못에서 차가운 물결 속으로 가라앉던 그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복수는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딸의 목숨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난 생애의 궤적을 따르자면 송하윤이 정실로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석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모녀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배반한 시녀들과 유모들, 그자들에게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바로 그때, 날카로운 남자의 음성이 그녀의 사유를 끊어내듯 울려 퍼졌다.

“말시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

강시아는 온몸이 굳어졌다.

분명 방금 전 이미 떠나보냈던 그가 다시 돌아와 차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갑고 길게 찢어진 듯한 눈매가 모녀 둘을 무심하게 훑기 시작했다.

“서… 서방님, 어째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강시아는 놀란 숨을 토해내듯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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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종현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성왕은 마음이 깊고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손안에 또 어떤 패가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번에 폐하께서 성왕을 지방으로 내보낸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이에 위심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한 가지 더 보고드릴 일이 있사옵니다.”“무슨 일이냐?”위심은 잠시 주저했다. 자신이 과하게 의심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녕주에서 성왕에게 아 마님이라고 불리는 여인이 생겼고 아들도 하나 있다고 하옵니다.”“성왕에게 아들이 있다고?”폐하는 평생 자식이 없었고 성왕 역시 아내나 첩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 또한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성왕은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그 마님의 신분은 조사해보았느냐?”위심은 고개를 저었다.“행관에서 알아낸 바로는 그 부인의 성이 아 씨이고 우주 출신이라는 것뿐이옵니다.”시아… 아 마님…주종현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한 번 덜컥 내려앉았다.그는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다시 담담히 말했다.“아들이 있다면 흔적이 전혀 없을 리 없다. 계속 추적하거라. 또 한 가지. 경성 안에 적서와 길 문서를 조작하는 곳이 있더구나. 위조된 출성 기록은 모조리 조사해내거라.”“예.”주종현은 밀신들을 챙겨 들고 곧장 집을 나섰다.바쁘게 돌아다니기라도 해야 가슴 속 텅 빈 자리가 조금은 견딜 만해질 것 같았다.마차가 막 뜰을 벗어난 순간, 먼지투성이의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이가 영국공부 대문 앞에 나타났다.“이보시게. 나는 내 누이를 찾으러…”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인이 그를 계단 아래로 몰아냈다.“저리 가시게! 여기가 아무나 와서 누이를 찾을 수 있는 곳인 줄 아는 겐가?”강세오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내 누이는 이 집에서 하녀로 일한다고 했네! 한데 내가 못 찾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하인은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대 누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3화

    주종현이 말했다.“책망하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다.”그제야 계소만은 마음을 놓았다.“몇 번 되지 않습니다.”“한 번은… 강 누님께서는 자기 같은 여인은 사기당할 까 두렵다며 진주를 옥보루에 맡겨 위탁 판매해 달라 부탁했습니다.”“진주를 위탁 판매했다고?”주종현의 미간이 좁게 찌푸려졌다.계소만은 기억을 더듬으며 덧붙였다.“태후의 생신 연회 전 일이었습니다.”주종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연무장에 가서 만천을 찾아오너라.”“예.”계소만이 나가고서야 주종현은 곁에 놓인 자수틀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노잣돈을 벌기 위해 이런 위험한 일까지 했다는 말이냐?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떠나려 한 것이냐?”그는 텅 빈 뜰을 바라보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강시아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다.첫눈에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집안의 희망을 짊어진 장자로서 그는 할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영국공부의 장래를 떠받들겠다고 다짐했다.아버지가 늘 그를 꾸짖던 시절, 그는 강시아를 만났다. 그의 신분조차 알지 못했던 강시아는 단번에 그의 눈 속에 깃든 피로를 알아보았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뜻밖에도 그 작은 소녀에게서 마음이 놓이는 안도감을 찾게 된 것이다.두 번째로 만난 것은 그 이듬해였다. 그때는 멀리서도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그녀 또한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듯했지만 그를 보자마자 몸을 돌려 피해 버렸다.그해 연회에서 강시아는 그의 사촌 형님의 눈에 띄었고 형님이 농담조로 데려가겠다 하자 그도 농담처럼 이를 막아섰다.그러나 그날 밤, 옷을 전해주러 가던 길에 강시아는 술을 마시려던 형님과 마주쳤고 이미 그녀에게 눈독 들이고 있던 형님은 결국 약을 먹이고 말았다.이를 눈치챈 그는 곧장 강시아를 데리고 나왔지만 약의 힘은 어마어마했으며 그 일로 인해 강시아가 아이를 갖게 되자 그는 결단을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2화

    경성.주종현이 막 집으로 돌아오자 콩뼈가 대문 밖까지 달려 나와 그를 반겼다.강시아 일행이 없는 지금, 콩뼈는 그와 함께 지내며 매일 오후마다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주종현은 꼬리를 흔들며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작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너도 이렇게 날 기다리는데… 그녀는 왜 이틀도 기다려주지 못했을까?”콩뼈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발치에서 두어 바퀴를 돌더니 몸을 붙여오며 끙끙 소리를 냈다.마치 왜 자기를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듯했다.그때, 향 유모가 다가와 아뢰었다.“세자 저하, 작은 마님께서 오시랍니다.”고 유모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급히 말을 보탰다.“큰 마님께서 세자를 뵙고 싶어하시옵니다.”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주종현은 콩뼈를 데리고 곧장 작은 뜰로 향했다.“요즘 일이 많아 찾아뵙기 어려울 것 같구나.”“세자 저하…”고 유모가 뒤따라오려 하자 향 유모가 길을 막아섰다.“고 유모, 세자께서 바쁘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고 유모는 향 유모를 한번 바라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서 큰 마님의 뜰로 걸어갔다.이 일은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큰 마님은 송하윤을 영국공부로 데려와 주종현에게 받아들이라고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 씨뿐 아니라 영국공마저 크게 노했다. 지금 송 가는 진흙탕이었고 규수라면 경성에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송하윤을 고집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큰 마님은 아들과 며느리가 말을 듣지 않자 둘을 건너뛰고 곧장 손자에게로 향했다. 요구도 낮아져 정실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부탁했다. 이에 조 씨는 분을 삭이지 못해 거의 피를 토할 기세로 화를 냈다. 큰 마님이 송 가를 돕겠다며 손자까지 희생시키려 한다는 생각에 그녀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며느릿감을 물색하는 중이었다.정작 당사자인 아들은 집안을 피해 다니며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결국 주종현은 자신의 거처를 아예 작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1화

    “당신은 연아를 안기 힘들 테니 제가 안을게요.”아설은 연아를 문희에게 건네고서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저…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아람은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 주었다.“미안하다, 설아.”만약 자신이 그녀들을 데리고 행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산적을 마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아설은 그를 꽉 껴안으며 울먹였다.“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 큰 수염쟁이가 언니를 목 졸라 죽일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그녀는 옆방에 갇혀 있었다. 문은 걸쇠로 잠겨 있었기에 벽에 난 작은 구멍으로 겨우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급하고 답답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속을 태우며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아람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문희가 나섰다.“전하의 행렬과 함께라면 다른 건 몰라도 목숨 걱정은 없습니다.”아람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술만 다물고 아설의 어깨를 다독였다.“문희 아가씨 말이 맞다. 전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으니 더는 이런 위험은 없을 것이다.”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동쪽 하늘이 희끗하게 밝아오고 있었다.행관 밖 마차 행렬은 모두 정비되어 있었고 당기봉을 제외한 관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주목이던 시영은 당분간 자사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는지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틀 내내 공포에 떨었는데 성왕이 떠난다는 소식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 주목부에 잠입하는 바람에 그는 부인과 함께 침상 아래에 숨어 날이 밝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졸음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억지로 하품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눈물을 훔치던 순간, 성왕이 행관에서 걸어나왔다.잠시 멈칫하더니 시영은 얼른 달려가 말했다.“전하께서 이렇게 빨리 떠나시다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역시 조정 관리답게 대사는 술술 흘러나왔고 소매 끝에는 진짜 눈물까지 번져 있었다. 그 뒤의 관리들 역시 당황하여 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0화

    아정모는 원래 맹 노장군 휘하의 한 작은 장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맹 가의 아가씨인 맹청련과 서로 마음을 품고 있었다.맹 노장군은 경중의 명문세가의 아들을 사윗감으로 정했기에 맹 아가씨와 아 장군 두 사람은 사랑을 위해 혼례를 버리고 도망쳤었던 것이다.아정모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그의 얼굴빛 역시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지나간 장면들이 잔상처럼 스쳐갔다.소휘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씩 웃었다.“본왕이 하나 알려주지. 그 아이…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맹 노장군도 지금껏 찾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이야.”아정모의 동공이 떨렸다.“살아… 있다고요?”소휘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아 장군이 이 깊은 산에 숨어 지내면 그 아들은 결국 맹 노장군 손에 들어가고 말 것이지.”그 순간 아정모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탁자 위의 장계를 황급히 펼쳤다.“강세오....”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흔들렸다.“세오…!”“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소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본왕의 사람도 이어진 흔적을 놓쳤다. 전해지길 그는 올해 과거에 응시한다 하더군. 과거까지 두어 달 남았으니 그때면 경성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아정모는 이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지금 당장 경성으로 가겠습니다!”소휘가 그를 가로막았다.“아 장군, 급히 나서면 안 된다. 지금 경성으로 달려가는 것은 곧 맹 노장군에게자신이 살아있다 고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허! 저는 그를 무서워한 적이 없습니다!”“장군께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참고 살아오셨건만 이 잠시를 참지 못할리는 없겠지요.”아정모는 어금니를 악물었다.“성왕 전하께선 어떤 계책이 있기에 그러는 것입니까?”소휘는 가볍게 웃었다.“장군, 조급해 하지 말거라. 장군이 본왕을 따라 우주로 들어와 장군이 되어 준다면 본왕 역시 장군의 아들을 상처 하나 없이 돌려주겠다.”아정모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전하의 봉지가 우주인가 보군요. 거 참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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