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Author: 서은월

제1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다시 태어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물에 빠져 숨이 막힐 것 같은 질식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보드라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는 밤 과자가 먹고 싶어요.”

작디작은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꼭 쥐고 흔들었다. 강시아는 눈물이 뿌옇게 번져 생기 가득한 딸아이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하늘이 다시 기회를 주었다. 아이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

강시아는 초주 사람이며,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였고 열 네 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큰오라버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조차 못했기에 홀로 막막한 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단 열 냥에 자신을 국공부에 노비로 팔아 버렸다.

그러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세자 주종현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로 인해, 그녀는 딸아이 연아를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강시아는 세자의 유일한 첩실이 되었고, 세자는 직접 그녀에게 처소를 내어주며 하인까지 붙여 주었다.

강시아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하윤이 국공부 정실부인으로 들어올 때, 자신이 그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대면 때, 송하윤은 일부러 연아를 위해 과자를 챙겨 오며, 자신의 본가로 불러들여 놀게 했다. 그리고 아이를 돌려보낼 때마다 새 옷과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여주며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

그러다 하루는 큰 마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녀는 정실의 손에 맡겨야 앞길이 트인다고 말이다.

그 말에 강시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에게는 딸의 앞날을 열어 줄 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끝내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그런데 겨우 1년이 지났을 무렵, 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이상한 낌새에 그녀는 연아에게 몰래 물어보았는데, 송하윤이 잘 대해 준다 말하면서 눈동자 속에는 감춰지지 않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딸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세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처소에 들이닥친 것은 정실이 거느리는 하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침방에서 외간 남자와의 통정이라 꾸며낸 편지와 불의의 사생아를 품었다는 증거가 줄줄이 나왔다.

“천한 첩실 강 씨, 뒷방을 어지럽히고 외간의 씨를 품어 하늘을 속이려 하다니!”

늘 곁을 지키던 하녀 명옥이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마님, 노여워 마시옵소서… 노비가 낙태약을 훔치다 들켜버렸사옵니다.”

이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조작한 누명에 불과할 뿐.

그러나 송하윤은 강시아에게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세자의 수결을 내밀며 그녀에게 연못에 수장되는 형벌을 내렸다. 왜소한 다섯 살 딸아이가 비틀거리며 달려와 그녀를 감싸안고 애원했다.

“제발, 저희 어머니만은 살려주세요!”

송 씨는 앙상한 딸아이의 턱을 잡아 올리며 눈빛에 엄청난 혐오를 담고 말했다.

“아직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냐? 길러 줘도 보답할 줄 모르는 천한 년 같으니라고! 그래, 차라리 모녀가 함께 가거라. 그럼 황천길에서 덜 외롭지 않겠느냐? 여봐라! 이 자들을 물에 빠뜨리거라!”

“안 돼!”

연아는 비명을 지르며 송 씨의 손을 뿌리치고 죽기 살기로 죽통을 붙잡았다. 깡마른 두 손이었지만 순간적인 힘은 놀라워 두 하녀가 달라붙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강시아는 깨달았다. 정실은 국공부에 시집온 지 일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은 이미 연아를 둔 뒤이고, 심지어 이번에는 남자아이도 품었다.

정실은 서출의 아들이 자신의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리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죽을 운명. 남은 건 딸의 목숨을 구걸하는 길뿐이었다.

“마님, 천한 첩이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니 부디, 연아만은 살려주십시오. 지난 1년간 길러온 정을 봐서라도…”

강시아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죽통 속에 파묻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살려주라고?”

송하윤은 그녀의 아랫배를 노려보며 손수건을 찢어지도록 움켜쥐었다.

“내가 국공부에 들어온 지 꼬박 1년이 되도록 기척 하나 없었는데, 네 년은...!”

말끝을 꺾고 깊은 숨을 내쉰 후 그녀는 다시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그래도 서방님을 모셨던 성의를 봐서라도 모녀가 함께 길을 떠날 수 있게 하락해 주지.”

그 순간, 연아가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입안 가득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동그란 두 눈은 휘둥그레져 혼이 빠져나간 듯 허공만 응시했다.

그때, 강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날마다 본가에서 보내오던 보양우유이다. 연아가 그토록 마시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아!”

그녀의 절규는 죽통에 갇혀 허공에 메아리쳤다. 송하윤은 역겨운 듯 한 발 물러서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느냐? 어서 끝내거라!”

“송하윤, 네 년은 천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가운 물결이 콧속을 파고들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고, 강시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어린 딸이 하녀들 손에 의해 거칠게 밀려 물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 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물이 목구멍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힘이 점점 빠져가며 시야는 어둡게 잠겨갔다.

그 순간,

“어머니, 왜 울고 계십니까?”

작은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강시아는 질식할 것 같은 회억에서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아이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돌고 생기발랄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딸아이에게 속삭였다.

“나는 울지 않는다. 기뻐서 그런 것이야…”

“마님, 송 아가씨께서 오셨사옵니다.”

하녀 명옥이 발을 들이며 울고 있는 모녀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드리웠다.

“두 분께서는 왜 함께 울고 계시옵니까?”

“아무 일도 아니다.”

강시아가 눈물을 훔치던 손길을 멈추며 되물었다.

“송 아가씨라고?”

그 순간, 뇌리에 번뜩 떠오른 것은 그녀를 수장시켰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강시아의 손톱은 깊숙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져 내릴 듯한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마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그러자 명옥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강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 속의 끝없는 원한은 이미 숨겨져 있었다.

“송 아가씨를 모시거라. 연아는 안쪽에 들어가 글을 쓰게 하고.”

잠시 뒤, 송하윤은 시녀 소영을 데리고 손에 음식 바구니를 든 채 들어왔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핀 채로 방 안을 대충 둘러본 후, 손수건을 부채 삼아 가볍게 흔들었다. 비좁은 이 방은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조차 담기 버거운 듯했다.

시녀 소영이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강 마님, 저희 아가씨께서 큰 마님을 뵈러 가시던 중 일부러 아가씨를 위해 덕흥루에 들러 과자를 사오셨사옵니다. 마님께서는 집안일로 바쁘시니 잘 모르실 테지만 덕흥루 과자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사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가식의 가면 뒤에 감춘 것은 뱀과 전갈의 심장. 고작 몇 조각 과자로 스스로의 이름을 높이려 하다니.

“덕흥루 과자라니! 연아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송 아가씨.”

그러고는 바로 바구니를 받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덮개를 젖혔다.

“에이!”

그러자 자줏빛 소매를 한 소영의 얼굴빛이 변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찬합 속의 과자는 몇 조각만 남기고 모두 부서져버렸다.

“어머, 어쩌면 전부 부서졌을까?”

강시아가 놀라움에 입을 틀어쥐었다. 소영은 그녀가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다. 물건을 받지도 않고 곧장 뚜껑부터 열어 보다니. 그녀는 얼른 자기 주인의 얼굴빛을 살핀 뒤 먼저 입을 열어 강시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분명 도착했을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사옵니다. 분명히 강 마님께서 직접 뚜껑을 열다가 잘못 건드려 부서뜨린 게지요!”

강시아는 빙긋 웃었다.

“소영이는 참으로 재밌는 아이구나. 나는 그저 과자가 부서졌다고 말했을 뿐이지, 누구를 탓한 적은 없다. 좋든 나쁘든 모두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생각해 보내주신 성의 아니겠느냐? 과자야 본래 잘 부서지지는 것이고. 네가 이렇게 반응하니 오히려 나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송하윤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녀의 눈에 강시아 따위는 그저 남자들이 잠시 즐기는 장난감일 뿐, 대단치 않은 존재였다. 송하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들어 소영이를 꾸짖었다.

“소영, 바깥에 나왔다고 해서 규칙을 잊었느냐?”

때 마침 문밖으로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소영은 즉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의 호의가 헛되이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옵니다. 아가씨를 위해 불공평하다 여겨…!”

순간 주종현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일이냐?”

강시아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서방님께서는 노여워 마옵소서.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위해 특별히 과자를 보내주셨는데 전부 부서져 소영이가 괜히 제 탓을 할까 염려해 한마디 보탠 것뿐이옵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경계를 늦추어 소영이 곧장 과자를 연아의 손에 쥐여주었고 겨우 세 살이던 아이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해 곧바로 떨어뜨렸다. 과자가 산산이 흩어지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미처 이곳으로 들어오는 세자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소영은 연아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 실수라며 먼저 나서서 얘기했었다.

과자는 우유로 만든 것이었고 연아는 우유를 싫어해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며 먹기 싫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주종현은 얼굴을 굳히며 그녀가 딸을 버릇없이 길렀다고, 남의 호의를 헛되이 한다며 차갑게 꾸짖었다.

그 기억이 스치자 강시아의 시선은 곁에서 시중드는 명옥에게로 향했다. 연아가 우유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가까이 모시는 명옥과 유모라면 당연히 알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종현은 흩어진 과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송하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아씨의 정성에 감사하네. 그리고 과자란 원래 잘 부서지는 법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네.”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강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전생에서는 잘못이 아닌 일로도 연아를 꾸짖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설사 아이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고작 세 살배기에게 괜찮다는 한마디조차 아끼던 이가!

송하윤은 고개를 들어 턱을 살짝 치켜세우고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천한 첩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와야 했을까? 어머니께서는 공연히 괜한 걱정만 한다니까.’

그녀는 더 이상 강시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큰 마님께 가 보겠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의 불길한 조짐들이 이미 드러났음을 그제서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연아는 어디 있느냐?”

“연아는 안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서는 순간, 강시아는 명옥의 눈가에서 스치듯 지나간 연심을 포착해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감춰버렸다.

강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명옥, 벌써 주인을 배반했구나..’

한편, 내실.

어린 연아는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리며 정성껏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손에 커다란 붓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획을 그었다.

주종현은 그런 그녀의 뒤에서 팔을 감싸 안고 커다란 손으로 작은 손과 붓을 함께 잡았다.

“연아야, 글씨에는 항상 시작하는 기세와 마무리의 맺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양이 나지. 이 짧은 한 획을 아버지는 어린 시절 무려 두 해나 연습했단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기세가 무엇입니까?”

그는 딸의 작은 손을 이끌어 한 획 한 획 쓰며 인내심 있게 가르쳤다. 강시아는 환히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매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와 아이의 앞길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송하윤은 결국 이 집안의 정실로 들어올 것이고 자신과 연아는 다시 그 전생의 죽음길로 내몰릴 운명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찬합으로 옮겨졌다. 잠시 후, 그녀는 명옥을 불러들였다.

강시아는 화장대 서랍에서 작은 장신구함을 꺼냈다. 딸랑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잡아끌자 어린 연아의 눈망울이 금세 빛이 났다. 주종현은 그런 딸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글 쓰는데 집중해야지.”

고개를 들자 강시아가 장신구함에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은전을 꺼내 명옥에게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덕흥루에서 밤 과자를 좀 사 오거라. 우유가 들어간 건 사지 말고. 연아가 싫어한다.”

주종현이 말을 보탰다.

“그깟 은전으로 덕흥루 과자를 살 수 있겠느냐?”

강시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서방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제가 돈을 벌 길이 없어 평소 모아둔 게 이것 뿐이라….”

주종현은 탁자 뒤에 앉아 있던 딸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연아야, 아버지에게 말해 보거라. 무엇을 제일 좋아하느냐?”

작은 소녀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지며 웃었다.

“밤 과자요!”

그러다 잠시 머뭇하다 덧붙였다.

“우유는 말고요!”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젖었다.

“알겠다. 그럼, 우유는 빼고.”

연아는 다시 아버지의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달콤한 두부 꽃을 제일 좋아합니다.”

주종현은 손가락 끝으로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작은 요정 같은 것.”

그는 딸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자, 오늘 글씨를 열심히 쓴 상으로 아버지가 직접 데려가 주마. 덕흥루에 가서 먹자구나.”

세 식구가 문을 나서자 마침 맞닥뜨린 이는 주 가의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송하윤이었다.

“어머, 큰 오라버니, 어디 가십니까?”

뒤를 따르던 강시아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얌전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주종현이 가볍게 딸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연아야, 인사드려야지.”

연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통통한 두 손을 아랫배 앞에서 공손히 모아 합장하듯 예를 올렸다.

“연아, 셋째 고모께 문안드립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자 송하윤의 입매가 은근히 휘어졌다.

“우리 작은 연아는 왜 나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냐?”

연아는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비비꼬며 한참 망설였지만, 끝내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송하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삼월 상사절입니다. 종현 오라버니께서는 강 마님과 연아를 데리고 풍수 언덕에 가 철화를 구경하셨는지요?”

그러자 주온청이 곧장 거들었다.

“우리도 가려고 합니다. 큰 오라버니 우리와 함께 가주세요!”

그러고는 곁에 있는 강시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풍수 강변에 인파가 얼마나 많은데...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쉽지 않을 겁니다. 철화라면 상사절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며칠 후 태후 마마의 수연에도 궁정 가득 불꽃놀이가 펼쳐질 텐데 굳이 지금 나갈 필요는 없죠.”

강시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딸을 받아 안았다.

“셋째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서방님께서는 두 아가씨와 함께 다녀오세요. 저는 연아를 데리고 덕흥루에 들를 참이니.”

주종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강시아는 연아를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저잣거리를 벗어나 국공부가 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즈음, 그녀는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성 마시로 가거라.”

그녀는 말을 사고파는 그곳에서 흑시의 출성로 통행증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수도라 해도 바람길은 언제나 뚫려 있는 법이니.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래가 성사된다. 각 집안과 관부에는 달아난 노비도 있고 본분을 벗어나고픈 귀족 자제도 있다.

출성 통행증은 하나의 거대한 장사였다. 관부에서 내주는 정식 증서 말고도 암암리에 위조된 통행증이 흑시에서 은밀히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비록 전 재산을 몽땅 바치더라도 위조 통행증 두 장을 손에 넣어 반드시 연아를 데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저택을 벗어나리라.

복수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복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국공부 안에서 그녀는 인맥도, 의지할 힘도 없었다. 지난 생애 연못에 가라앉기 전 그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그녀는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송하윤이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출 딸은 반드시 정실의 교양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연아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웃음 많고 명랑하던 딸이 점점 말라가고 두려움에 시달리다 기침을 달고 사는 병든 아이로 변해가는 것을. 그녀가 매일같이 입으로 밀어 넣던 보양 우유 속에는 아이의 심폐를 갉아먹는 독이 은밀히 스며 있었다.

강시아는 고개를 숙여 딸의 통통한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전생 연못에서 차가운 물결 속으로 가라앉던 그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복수는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딸의 목숨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난 생애의 궤적을 따르자면 송하윤이 정실로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석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모녀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배반한 시녀들과 유모들, 그자들에게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바로 그때, 날카로운 남자의 음성이 그녀의 사유를 끊어내듯 울려 퍼졌다.

“말시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

강시아는 온몸이 굳어졌다.

분명 방금 전 이미 떠나보냈던 그가 다시 돌아와 차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갑고 길게 찢어진 듯한 눈매가 모녀 둘을 무심하게 훑기 시작했다.

“서… 서방님, 어째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강시아는 놀란 숨을 토해내듯 외쳤다.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Pinakabagong kabanata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8화

    그녀는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그가 오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만나지 않았다.그가 사람을 보내 물건을 전해도 그녀는 그저 명옥에게 맡겨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창고에 넣어 두게 했다.송하윤을 처음 본 것은, 송학당의 뜰이었다.그날, 송하윤은 큰 마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웃음이 가득했다.그녀는 예법에 따라 들어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신첩, 큰 마님과 송 아가씨께 문안드립니다.”허리를 굽힌 그녀의 태도는 땅에 닿을 듯 낮고도 겸손했다.그 순간, 날카로운 시선 하나가 곧장 그녀를 꿰뚫었다.노골적인 탐색과 적의가 담긴 눈길이었다.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 사람이 강 마님인가요?”송하윤의 목소리는 꿀을 입힌 듯 달콤했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독기가 스며 있었다.“생김새가 제법 괜찮긴 하네요. 그러니 사촌 오라버니를 그토록 홀려 놓았겠지요.”큰 마님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눌렀다.“윤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강시아의 심장이 툭 하고 가라앉았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연아의 손을 꽉 잡았다.연아 역시 그 기운을 느낀 듯 작은 몸을 더욱 그녀의 뒤로 숨겼다.그 순간, 그녀는 또렷이 깨달았다.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렇게 가문이 높고, 곧 세자부인이 될 송하윤과 무엇으로 맞설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물러나는 것뿐이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물러나 다투지 않고 빼앗으려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그러나 때로는 물러난다고 해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태후의 생신을 맞아 각 가문은 축하 예물을 바쳐야 했다.송하윤은 미래의 세자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이 일을 도맡았다. 그리고 강시아를 불러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강 마님 자수 솜씨가 이 집에서 가장 좋다고 들었어요. 이 ‘송학연년도’는 강 마님에게 맡길게요. 우리 영국공부를 위해 힘을 보태는 셈이니, 잘 부탁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7화

    그 착각은 거울 속 꽃과 물 위의 달처럼, 손을 대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꿈처럼 흐르던 삼 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영국공부 세자, 주종현이 혼인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그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연아의 작은 옷에 노란 영춘화를 수놓고 있었다.바늘끝이 그대로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번져 나와 연한 꽃잎을 물들였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일부러 그녀가 듣도록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하녀들의 말만이 맴돌았다.“들었어? 송 가 아가씨래.”“그 송 아가씨는 우리 세자의 사촌이래. 태후 마마께서도 칭찬하신 재녀라잖아.”“이게 바로 문벌이 맞는 혼사고, 친가끼리 더 가까워지는 거지.”“그렇지 뭐. 예전에 약혼까지 했었다잖아. 송 가에 일이 생겨서 깨졌을 뿐이지…”“이젠 송 가 장자가 출세했으니, 이 혼사도 다시 올라온 거고.”그들의 말은 바늘처럼 하나하나 그녀를 찔렀다.모두가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강 마님의 좋은 날은 이제 끝났다고.그 유일했던 총애도 곧 정실부인에게로 돌아갈 거라고.총애라니. 강시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애초에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그저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쥘 수 없는 하나의 첩일 뿐이었다.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 연아가 무사히,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뿐이었다.혼례 날짜가 정해진 뒤로 이상하게도 주종현은 오히려 더 자주 그녀의 뜰을 찾았다.예전처럼 그저 조용히 앉아 있거나 연아를 놀아 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그는 무언가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동쪽 거리의 새로 생긴 과자, 서쪽 장인의 손에서 나온 적금 비녀, 남쪽에서 막 들어온 신선한 여지.마치 무언가를 메우려는 듯, 혹은 달래려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짙어졌다.그리고 이 “총애”는 곧 큰 마님의 귀에 들어갔다.그날, 그녀는 송학당으로 불려갔다.큰 마님은 상석에 앉아 염주를 굴리며 눈길조차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6화

    후원에서 벌어지는 다툼이란 고작 담장 하나로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몸은 지켜 줄 수 있었지만 스며들 틈을 찾는 소문과 독을 머금은 시선까지는 막아 주지 못했다.그러다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조 씨와 큰 마님은 다시 한 번 움직였다.이번에는 그들의 얼굴에서 처음과 같은 단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됐다. 어차피 우리 주 씨 집안의 핏줄이니, 아이가 태어나서 이름도 없이 자라게 할 수는 없지.”“첩으로 들이도록 하자.”그리하여 강시아는 주종현의 강 마님이 되었다.신분이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하룻밤 사이, 그녀는 다시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한때 그녀를 업신여기던 하녀들조차 이제는 마주치면 공손히 무릎을 굽혀 마님이라 불렀다.어떤 이들은 몰래 다가와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언니, 아니… 강 마님, 어떻게 세자의 눈에 드신 겁니까? 좀 가르쳐 주세요.”그들은 이것이 그녀가 바라던 영화라고 믿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돈을 모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분명, 그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그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뒤에서는 욕을 했다.왜 자신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된 걸까.그녀는 밤마다 홀로 눈물을 흘렸다.주종현은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는 다정한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서툴지만 행동으로 그녀를 달랬다.성 서쪽에서 가장 유명한 절임 과일을 사 오기도 했고 입덧으로 밤새 괴로워할 때면 잠도 자지 않고 곁을 지켰다. 때로는 아무 말도 없이 마당에 함께 앉아 그저 같은 시간을 보냈다.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줄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모든 체면과 배려를 그녀에게 내어 주었다.열 달을 품고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다.산실에서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순간, 그녀는 자신도 다시 살아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딸이었다.주종현은 유모의 손에서 그 작고 쭈글쭈글한 아이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럽게, 서툴게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5화

    소문은 새벽 안개보다도 더 빠르게 퍼져 나갔다.그녀가 자수방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영국공부 뒷채는 그 이야기로 가득했다.자수방의 하녀 하나가 무슨 요사스러운 수를 썼는지 세자께서 술에 취한 틈을 타 침상에 올라갔다는 이야기였다.“쯧쯧, 정말 사람 몰라본다니까.”평소 말 한마디 섞지 않던 하녀가 비꼬듯 입을 열었다.“겉으로는 그렇게 순한 척하더니 속셈은 다 뱃속에 감춰 두고 있었네.”“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죽어라 일하는데 저 계집은 슬쩍 세자 뜰로 기어들어 갔잖아.”“이제야말로 가지 위로 날아오른 셈이지.”그녀는 핏기 빠진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자수틀 앞으로 걸어갔다.찢어지는 듯한 몸의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한 땀, 또 한 땀 자수를 이어갔다.손을 멈추지 않는 한 이 모욕과 통증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주종현이 그가 직접 입에 올렸던 그 “명분”을 위해 지금 자신의 어머니와 마주 서 있다는 것을.“첩을 들인다고? 현아, 제정신이냐! 아직 정실도 들이지 않았으면서 먼저 첩부터 들이면, 어느 집에서 딸을 시집보내겠느냐.”주종현은 당 아래에 서 있었다.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흔들림 하나 없었다.“어머니, 이 일은 모두 제 책임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영국공부 세자가, 하인 하나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조 씨가 냉소했다.“정 마음에 걸린다면, 은전이나 좀 쥐여 주고 내보내면 그만이지.”“그럴 수 없습니다.”평소 며느리 조 씨와 사이가 좋지 않던 큰 마님마저 이 일에서는 뜻을 같이했다.“터무니없다!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네가 영국공부 세자인데, 하녀 하나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큰 마님의 지팡이가 바닥을 세차게 내리치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세자가 하녀에게 명분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곧장 뒷채에서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시아가 있었다.그녀를 못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4화

    구름 위에 선 사람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 같은 이가 감히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곳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자리란 그저 머무는 것뿐이었다.눈 깜짝할 사이, 오 년이 흘렀다.어리숙하던 소녀는 어느새 곱게 자라난 처녀가 되었고 몸값을 치를 은전도 이제 거의 다 모였다.곧 이 감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던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영국공부의 가연 자리에서였다. 이방 쪽 주종훈이라는 인물은 평소부터 풍류로 이름난 자였는데, 몇 잔 더 들이키자 눈빛이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그 시선이 거리낌 없이 그녀의 몸에 얽혀들었다.그는 그녀를 가리키며 국공부인 조 씨를 향해 웃었다.“숙모, 이 계집 마음에 드는데요. 제 통방으로 들여주시죠.”주위에서 웃음이 터졌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멍하니 울렸다.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혼이 빠진 듯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었다.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떨렸다.이대로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렇게 절망하던 순간,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상석에서 흘러나왔다.“술이 과합니다.”세자, 주종현이었다.그 순간 그녀는 그를 신처럼 느꼈다.하지만 알지 못했다.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그날 밤, 세자 뜰의 큰 하녀 명옥이 무언가 잘못 먹은 듯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러다 마침 곁을 지나던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나 정말 못 버티겠어. 잠깐만, 잠깐만 대신 좀 서 있어 줘.”명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거짓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마음이 약해진 그녀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그렇게 문가에 서 있던 순간, 휘청이는 그림자가 술병을 들고 밀려 들어왔다.주종훈이었다. 온몸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세 잔이나 비웠으니… 네 주인은 쓰러졌을 테고 네가 대신 마시거라.”“도련님, 저는 술을 못합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말했다.“못해?”주종훈이 비웃듯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3화

    그녀의 이름은 강시아였다.너무도 오래된 일들은, 이제는 희미해 잘 떠오르지 않았다.다만 기억나는 것은 늘 말수가 적고 엄격했던 아버지와 언제나 그녀 앞에 서서 어떤 일이든 막아 주고 지켜 주던 오라버니였다.아버지는 향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손에 쥔 회초리로 수많은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렸다. 그러나 그 회초리가 오라버니에게 내려진 횟수는 다른 모든 아이들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강세오, 반드시 급제하여 우리 강 씨 집안을 빛내야 한다!”아버지는 늘 그렇게 엄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이웃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강 가에서 문곡성이 날 인재가 나올 거라고.모두가 오라버니를 칭찬했다. 영리하고, 앞날이 창창하다고.하지만 그녀만은 알고 있었다.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보다 훨씬 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살림은 늘 궁핍했다.장터에서 파는 엿은 한 푼이면 두 알을 살 수 있었다.오라버니는 늘 더 큰 쪽을 골라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겨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자신은 작은 것을 입에 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라도 되는 양 웃었다.“시아야, 오라버니가 급제하면, 엿 한 상자를 사 줄게. 매일 먹게 해 주마.”그녀는 그 말을 믿고 오라버니가 급제하는 날을 가슴 가득 설렘으로 기다렸다.그러나 하늘을 뒤덮은 홍수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논밭도, 집도, 이미 약해져 있던 아버지의 몸마저 앗아갔다.물이 빠진 뒤,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곧이어 역병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평생 엿을 사 주겠다 약속했던 오라비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낡은 판자 위에 누운 그의 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쇠처럼 뜨거웠고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겨우 불러온 의원은 한 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이 병은 좋은 약으로 버텨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요.”하늘에 맡긴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그녀는 누워 있는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35화

    “마님, 얼른 돌아갑시다.”하 유모의 목소리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강시아는 일찍이 그들과 약속했었다. 곡식을 팔아 얻은 은표는 반으로 나누겠다고.“그래, 지금 돌아가자!”가장 큰일이 마무리되니 온몸이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마치 떠날 준비를 이미 전부 끝내 놓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마차 안에서 강시아는 약속을 바로 지켜 하 유모에게 은표를 나누어 주었다. 하 유모는 두 손을 덜덜 떨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긴장 때문에 목소리까지 바뀌어 있었다.무려 사천 냥이 넘는 돈이었다!“마님, 제가 혹시 꿈을 꾸고 있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37화

    강시아는 아무 표정도 없이 주온청의 품에서 깡충거리며 뛰노는 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수가 먹히지 않자 바로 다른 수를 꺼내 들었다. 연아를 그대로 꺼내오더니 자기 어머니와 함께 배를 타고 싶다고 떼를 쓰게 만든 것이다.‘저는 놀러 나가는 거지 애 보모나 하러 나가는 게 아니거든요!’저런 말을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던 사람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아를 끌어안고 있었다. 연아는 이전에 한 번도 배를 타본 적이 없었다. 그저 풍수교 위에서 멀리 바라본 게 다였다. 작은 아이는 눈이 가늘어질 만큼 웃으며 들떠 있었다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39화

    며칠 동안 쌓였던 그녀에 대한 호감이 곤두박질치듯 떨어지는 것 같았다.송하윤이야말로 장차 정실부인이 될 사람인데 아직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시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전생의 그 장면이 눈앞에 또렷하게 떠올랐다.전생에 잃어버린 아이가 자신을 찾아왔다.그런데 하필 바로 이 유람선에서 송하윤을 만나게 되었다.그녀의 시선은 급격히 차갑게 굳어지며 주온청을 쏘아보았다.“아가씨한테 저를 속여 데려오라고 시킨 겁니까?”“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주온청은 더욱 깊게 미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33화

    “강 마님!”이때, 하 유모가 급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그런데 주온청과 주은혜까지 있는 것을 보자 목이 꾹 막힌 듯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시아는 그녀의 그 얼굴빛만 보고도 분명 곡창에서 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혹시 연아가 또 소란을 피웠느냐?”그녀는 자수틀을 내려놓고 일어섰다.소란?하 유모는 즉시 눈을 번쩍 떴다.“맞습니다! 아주 크게 소란을 피웠사옵니다!”강시아는 두 사람을 향해 돌아보았다.“다음에 꼭 두 분께 다시 가르쳐드리겠습니다.”그 말만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

Higit pang Kabanata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