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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Author: 서은월

제1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다시 태어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물에 빠져 숨이 막힐 것 같은 질식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보드라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는 밤 과자가 먹고 싶어요.”

작디작은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꼭 쥐고 흔들었다. 강시아는 눈물이 뿌옇게 번져 생기 가득한 딸아이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하늘이 다시 기회를 주었다. 아이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

강시아는 초주 사람이며,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였고 열 네 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큰오라버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조차 못했기에 홀로 막막한 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단 열 냥에 자신을 국공부에 노비로 팔아 버렸다.

그러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세자 주종현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로 인해, 그녀는 딸아이 연아를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강시아는 세자의 유일한 첩실이 되었고, 세자는 직접 그녀에게 처소를 내어주며 하인까지 붙여 주었다.

강시아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하윤이 국공부 정실부인으로 들어올 때, 자신이 그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대면 때, 송하윤은 일부러 연아를 위해 과자를 챙겨 오며, 자신의 본가로 불러들여 놀게 했다. 그리고 아이를 돌려보낼 때마다 새 옷과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여주며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

그러다 하루는 큰 마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녀는 정실의 손에 맡겨야 앞길이 트인다고 말이다.

그 말에 강시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에게는 딸의 앞날을 열어 줄 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끝내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그런데 겨우 1년이 지났을 무렵, 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이상한 낌새에 그녀는 연아에게 몰래 물어보았는데, 송하윤이 잘 대해 준다 말하면서 눈동자 속에는 감춰지지 않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딸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세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처소에 들이닥친 것은 정실이 거느리는 하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침방에서 외간 남자와의 통정이라 꾸며낸 편지와 불의의 사생아를 품었다는 증거가 줄줄이 나왔다.

“천한 첩실 강 씨, 뒷방을 어지럽히고 외간의 씨를 품어 하늘을 속이려 하다니!”

늘 곁을 지키던 하녀 명옥이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마님, 노여워 마시옵소서… 노비가 낙태약을 훔치다 들켜버렸사옵니다.”

이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조작한 누명에 불과할 뿐.

그러나 송하윤은 강시아에게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세자의 수결을 내밀며 그녀에게 연못에 수장되는 형벌을 내렸다. 왜소한 다섯 살 딸아이가 비틀거리며 달려와 그녀를 감싸안고 애원했다.

“제발, 저희 어머니만은 살려주세요!”

송 씨는 앙상한 딸아이의 턱을 잡아 올리며 눈빛에 엄청난 혐오를 담고 말했다.

“아직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냐? 길러 줘도 보답할 줄 모르는 천한 년 같으니라고! 그래, 차라리 모녀가 함께 가거라. 그럼 황천길에서 덜 외롭지 않겠느냐? 여봐라! 이 자들을 물에 빠뜨리거라!”

“안 돼!”

연아는 비명을 지르며 송 씨의 손을 뿌리치고 죽기 살기로 죽통을 붙잡았다. 깡마른 두 손이었지만 순간적인 힘은 놀라워 두 하녀가 달라붙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강시아는 깨달았다. 정실은 국공부에 시집온 지 일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은 이미 연아를 둔 뒤이고, 심지어 이번에는 남자아이도 품었다.

정실은 서출의 아들이 자신의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리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죽을 운명. 남은 건 딸의 목숨을 구걸하는 길뿐이었다.

“마님, 천한 첩이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니 부디, 연아만은 살려주십시오. 지난 1년간 길러온 정을 봐서라도…”

강시아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죽통 속에 파묻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살려주라고?”

송하윤은 그녀의 아랫배를 노려보며 손수건을 찢어지도록 움켜쥐었다.

“내가 국공부에 들어온 지 꼬박 1년이 되도록 기척 하나 없었는데, 네 년은...!”

말끝을 꺾고 깊은 숨을 내쉰 후 그녀는 다시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그래도 서방님을 모셨던 성의를 봐서라도 모녀가 함께 길을 떠날 수 있게 하락해 주지.”

그 순간, 연아가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입안 가득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동그란 두 눈은 휘둥그레져 혼이 빠져나간 듯 허공만 응시했다.

그때, 강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날마다 본가에서 보내오던 보양우유이다. 연아가 그토록 마시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아!”

그녀의 절규는 죽통에 갇혀 허공에 메아리쳤다. 송하윤은 역겨운 듯 한 발 물러서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느냐? 어서 끝내거라!”

“송하윤, 네 년은 천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가운 물결이 콧속을 파고들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고, 강시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어린 딸이 하녀들 손에 의해 거칠게 밀려 물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 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물이 목구멍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힘이 점점 빠져가며 시야는 어둡게 잠겨갔다.

그 순간,

“어머니, 왜 울고 계십니까?”

작은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강시아는 질식할 것 같은 회억에서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아이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돌고 생기발랄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딸아이에게 속삭였다.

“나는 울지 않는다. 기뻐서 그런 것이야…”

“마님, 송 아가씨께서 오셨사옵니다.”

하녀 명옥이 발을 들이며 울고 있는 모녀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드리웠다.

“두 분께서는 왜 함께 울고 계시옵니까?”

“아무 일도 아니다.”

강시아가 눈물을 훔치던 손길을 멈추며 되물었다.

“송 아가씨라고?”

그 순간, 뇌리에 번뜩 떠오른 것은 그녀를 수장시켰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강시아의 손톱은 깊숙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져 내릴 듯한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마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그러자 명옥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강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 속의 끝없는 원한은 이미 숨겨져 있었다.

“송 아가씨를 모시거라. 연아는 안쪽에 들어가 글을 쓰게 하고.”

잠시 뒤, 송하윤은 시녀 소영을 데리고 손에 음식 바구니를 든 채 들어왔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핀 채로 방 안을 대충 둘러본 후, 손수건을 부채 삼아 가볍게 흔들었다. 비좁은 이 방은 그녀의 화려한 옷자락조차 담기 버거운 듯했다.

시녀 소영이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강 마님, 저희 아가씨께서 큰 마님을 뵈러 가시던 중 일부러 아가씨를 위해 덕흥루에 들러 과자를 사오셨사옵니다. 마님께서는 집안일로 바쁘시니 잘 모르실 테지만 덕흥루 과자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사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가식의 가면 뒤에 감춘 것은 뱀과 전갈의 심장. 고작 몇 조각 과자로 스스로의 이름을 높이려 하다니.

“덕흥루 과자라니! 연아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송 아가씨.”

그러고는 바로 바구니를 받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덮개를 젖혔다.

“에이!”

그러자 자줏빛 소매를 한 소영의 얼굴빛이 변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찬합 속의 과자는 몇 조각만 남기고 모두 부서져버렸다.

“어머, 어쩌면 전부 부서졌을까?”

강시아가 놀라움에 입을 틀어쥐었다. 소영은 그녀가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다. 물건을 받지도 않고 곧장 뚜껑부터 열어 보다니. 그녀는 얼른 자기 주인의 얼굴빛을 살핀 뒤 먼저 입을 열어 강시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분명 도착했을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사옵니다. 분명히 강 마님께서 직접 뚜껑을 열다가 잘못 건드려 부서뜨린 게지요!”

강시아는 빙긋 웃었다.

“소영이는 참으로 재밌는 아이구나. 나는 그저 과자가 부서졌다고 말했을 뿐이지, 누구를 탓한 적은 없다. 좋든 나쁘든 모두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생각해 보내주신 성의 아니겠느냐? 과자야 본래 잘 부서지지는 것이고. 네가 이렇게 반응하니 오히려 나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송하윤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녀의 눈에 강시아 따위는 그저 남자들이 잠시 즐기는 장난감일 뿐, 대단치 않은 존재였다. 송하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들어 소영이를 꾸짖었다.

“소영, 바깥에 나왔다고 해서 규칙을 잊었느냐?”

때 마침 문밖으로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소영은 즉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의 호의가 헛되이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옵니다. 아가씨를 위해 불공평하다 여겨…!”

순간 주종현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일이냐?”

강시아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서방님께서는 노여워 마옵소서. 송 아가씨께서 연아를 위해 특별히 과자를 보내주셨는데 전부 부서져 소영이가 괜히 제 탓을 할까 염려해 한마디 보탠 것뿐이옵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경계를 늦추어 소영이 곧장 과자를 연아의 손에 쥐여주었고 겨우 세 살이던 아이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해 곧바로 떨어뜨렸다. 과자가 산산이 흩어지자 그녀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미처 이곳으로 들어오는 세자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소영은 연아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 실수라며 먼저 나서서 얘기했었다.

과자는 우유로 만든 것이었고 연아는 우유를 싫어해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며 먹기 싫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주종현은 얼굴을 굳히며 그녀가 딸을 버릇없이 길렀다고, 남의 호의를 헛되이 한다며 차갑게 꾸짖었다.

그 기억이 스치자 강시아의 시선은 곁에서 시중드는 명옥에게로 향했다. 연아가 우유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가까이 모시는 명옥과 유모라면 당연히 알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종현은 흩어진 과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송하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아씨의 정성에 감사하네. 그리고 과자란 원래 잘 부서지는 법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네.”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강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전생에서는 잘못이 아닌 일로도 연아를 꾸짖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설사 아이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고작 세 살배기에게 괜찮다는 한마디조차 아끼던 이가!

송하윤은 고개를 들어 턱을 살짝 치켜세우고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천한 첩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와야 했을까? 어머니께서는 공연히 괜한 걱정만 한다니까.’

그녀는 더 이상 강시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큰 마님께 가 보겠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의 불길한 조짐들이 이미 드러났음을 그제서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연아는 어디 있느냐?”

“연아는 안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서는 순간, 강시아는 명옥의 눈가에서 스치듯 지나간 연심을 포착해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감춰버렸다.

강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명옥, 벌써 주인을 배반했구나..’

한편, 내실.

어린 연아는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리며 정성껏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손에 커다란 붓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획을 그었다.

주종현은 그런 그녀의 뒤에서 팔을 감싸 안고 커다란 손으로 작은 손과 붓을 함께 잡았다.

“연아야, 글씨에는 항상 시작하는 기세와 마무리의 맺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양이 나지. 이 짧은 한 획을 아버지는 어린 시절 무려 두 해나 연습했단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기세가 무엇입니까?”

그는 딸의 작은 손을 이끌어 한 획 한 획 쓰며 인내심 있게 가르쳤다. 강시아는 환히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매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와 아이의 앞길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송하윤은 결국 이 집안의 정실로 들어올 것이고 자신과 연아는 다시 그 전생의 죽음길로 내몰릴 운명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찬합으로 옮겨졌다. 잠시 후, 그녀는 명옥을 불러들였다.

강시아는 화장대 서랍에서 작은 장신구함을 꺼냈다. 딸랑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잡아끌자 어린 연아의 눈망울이 금세 빛이 났다. 주종현은 그런 딸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글 쓰는데 집중해야지.”

고개를 들자 강시아가 장신구함에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은전을 꺼내 명옥에게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덕흥루에서 밤 과자를 좀 사 오거라. 우유가 들어간 건 사지 말고. 연아가 싫어한다.”

주종현이 말을 보탰다.

“그깟 은전으로 덕흥루 과자를 살 수 있겠느냐?”

강시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서방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제가 돈을 벌 길이 없어 평소 모아둔 게 이것 뿐이라….”

주종현은 탁자 뒤에 앉아 있던 딸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연아야, 아버지에게 말해 보거라. 무엇을 제일 좋아하느냐?”

작은 소녀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지며 웃었다.

“밤 과자요!”

그러다 잠시 머뭇하다 덧붙였다.

“우유는 말고요!”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젖었다.

“알겠다. 그럼, 우유는 빼고.”

연아는 다시 아버지의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달콤한 두부 꽃을 제일 좋아합니다.”

주종현은 손가락 끝으로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작은 요정 같은 것.”

그는 딸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자, 오늘 글씨를 열심히 쓴 상으로 아버지가 직접 데려가 주마. 덕흥루에 가서 먹자구나.”

세 식구가 문을 나서자 마침 맞닥뜨린 이는 주 가의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송하윤이었다.

“어머, 큰 오라버니, 어디 가십니까?”

뒤를 따르던 강시아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얌전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주종현이 가볍게 딸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연아야, 인사드려야지.”

연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통통한 두 손을 아랫배 앞에서 공손히 모아 합장하듯 예를 올렸다.

“연아, 셋째 고모께 문안드립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자 송하윤의 입매가 은근히 휘어졌다.

“우리 작은 연아는 왜 나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냐?”

연아는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비비꼬며 한참 망설였지만, 끝내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송하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삼월 상사절입니다. 종현 오라버니께서는 강 마님과 연아를 데리고 풍수 언덕에 가 철화를 구경하셨는지요?”

그러자 주온청이 곧장 거들었다.

“우리도 가려고 합니다. 큰 오라버니 우리와 함께 가주세요!”

그러고는 곁에 있는 강시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풍수 강변에 인파가 얼마나 많은데...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쉽지 않을 겁니다. 철화라면 상사절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며칠 후 태후 마마의 수연에도 궁정 가득 불꽃놀이가 펼쳐질 텐데 굳이 지금 나갈 필요는 없죠.”

강시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딸을 받아 안았다.

“셋째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서방님께서는 두 아가씨와 함께 다녀오세요. 저는 연아를 데리고 덕흥루에 들를 참이니.”

주종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강시아는 연아를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저잣거리를 벗어나 국공부가 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즈음, 그녀는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성 마시로 가거라.”

그녀는 말을 사고파는 그곳에서 흑시의 출성로 통행증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수도라 해도 바람길은 언제나 뚫려 있는 법이니.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래가 성사된다. 각 집안과 관부에는 달아난 노비도 있고 본분을 벗어나고픈 귀족 자제도 있다.

출성 통행증은 하나의 거대한 장사였다. 관부에서 내주는 정식 증서 말고도 암암리에 위조된 통행증이 흑시에서 은밀히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비록 전 재산을 몽땅 바치더라도 위조 통행증 두 장을 손에 넣어 반드시 연아를 데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저택을 벗어나리라.

복수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복수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국공부 안에서 그녀는 인맥도, 의지할 힘도 없었다. 지난 생애 연못에 가라앉기 전 그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그녀는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송하윤이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출 딸은 반드시 정실의 교양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연아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웃음 많고 명랑하던 딸이 점점 말라가고 두려움에 시달리다 기침을 달고 사는 병든 아이로 변해가는 것을. 그녀가 매일같이 입으로 밀어 넣던 보양 우유 속에는 아이의 심폐를 갉아먹는 독이 은밀히 스며 있었다.

강시아는 고개를 숙여 딸의 통통한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전생 연못에서 차가운 물결 속으로 가라앉던 그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복수는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딸의 목숨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난 생애의 궤적을 따르자면 송하윤이 정실로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석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모녀는 시신조차 건지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배반한 시녀들과 유모들, 그자들에게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바로 그때, 날카로운 남자의 음성이 그녀의 사유를 끊어내듯 울려 퍼졌다.

“말시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

강시아는 온몸이 굳어졌다.

분명 방금 전 이미 떠나보냈던 그가 다시 돌아와 차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갑고 길게 찢어진 듯한 눈매가 모녀 둘을 무심하게 훑기 시작했다.

“서… 서방님, 어째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강시아는 놀란 숨을 토해내듯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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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사냥 소식이 퍼진 탓인지, 경성의 포목점마다 새 옷 주문이 갑자기 밀려들었다. 새 옷을 맞추면 당연히 새 장신구도 필요했다. 덩달아 보석상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아란 공주 일 이후로 한동안 가라앉아 있던 상권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아설은 발이 땅에 닿을 새 없이 바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한가해진 맹시은은 연아를 바라보았다.아이 키가 부쩍 자라 작년 가을 저고리는 이미 맞지 않았다. 그녀는 자수장을 집으로 불러 식구들 모두의 치수를 다시 재게 했다.“요즘 가을 옷 주문이 너무 많아 원단이 다른 집으로 다 나갔습니다.”자수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늘은 치수만 재고 내일 아침 일찍 원단을 들고 와 보여드리겠습니다.”“그래요.”연초에 이미 한 차례 옷을 맞췄기에 아이들만 빼고는 크게 달라진 몸치수는 없었다.이튿날, 맹시은은 일부러 집에 머물며 자수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어린 계집아이 하나만 허겁지겁 들어왔다.맹시은은 좀처럼 노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못 온다면 사람이라도 보내 말 한마디 전할 수는 없었느냐? 설마 상단 주인이 이제는 진국공부의 거래쯤은 우습게 보는 건 아니겠지.”어린 아이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해당 언니께서 아침 일찍 다 준비해 두시고 막 나서려는 참에 주 가의 아가씨께서 들이닥쳤어요. 그 바람에 그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말을 하다 잠시 멈추더니 작게 변명하듯 덧붙였다.“제가 분명 봤어요. 먼저 와서 부딪힌 건 그쪽이었어요. 해당 언니는 벌로 한쪽에 무릎 꿇고 시중을 들게 되었고 저희는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꾼도 곁에서 모시느라 가게에 남을 사람이 없어서… 저는 차를 나르다 몰래 빠져나와 전하러 온 겁니다.”“주 가 아가씨라니?”맹시은의 기억에 아직 출가하지 않은 주 가 아씨는 주은혜뿐이었다.하지만 원래 그녀는 온화하고 얌전한 성품이었는데 언제 저토록 오만해졌단 말인가?그런 태도라면 차라리 송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21화

    그녀의 말이 잠시 끊겼다.더구나 일곱번 째 왕야 소림이 함께 있는데 감히 누가 함부로 혀를 놀리겠는가.사람들은 모두 소림 앞에서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직 연아만이 처음엔 그의 신분을 모른 채 함께 뛰놀았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이미 둘은 함께 노는 데 익숙해져 버린 뒤였다.돌이켜보면 소림에게 연아는 단 한 명뿐인 친구였다. 그래서 지루함을 못 견디던 소림은 지난달 다시 국자감으로 돌아갔다.그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맹시은은 연아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종현이 들어왔다.“향이 참 좋군.”문을 열자마자 퍼지는 냄새에 그가 말했다.아설은 재빨리 두 손으로 탕 그릇을 덮었다.“이건 언니 드리려고 끓인 거예요!”주종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맹시은이 이미 두어 모금 마신 그릇을 들어 단숨에 비워 버렸다.“아설이 언제부터 이렇게 인색해졌지? 네 언니 거면 본세자는 마시면 안 되나?”아설은 콧방귀를 뀌듯 흥 하고 소리를 냈다.“세자께서 언니의 억울한 일 좀 풀어 주시면 후하게 해드리죠. 생선탕은 물론이고 불도장이라도 끓여 드릴 수 있습니다.”“좋아. 그럼 나는 네 불도장 기다리고 있지.”주종현은 품에서 초청장 한 장을 꺼냈다.“황가 가을 사냥 초대장이다. 폐하께서 즉위 첫 두 해만 가을 사냥을 여셨고 벌써 사 년째 열리지 않았지. 올해는 분명 성대할 거다.”아설은 어리둥절했다.“그게 억울한 일 푸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주종현이 웃으며 말했다.“사람이 가장 많이, 가장 골고루 모이는 자리가 어딘지 한 번 생각해 보거라.”그러나 맹시은은 미간을 좁혔다.“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겁니까?”“가을 사냥까지 두 달 남았다. 사 년이나 쓰지 않은 사냥터를 손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해. 무엇을 할지는… 그때 가 보면 알겠지.”맹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 안 갈 겁니다. 제 경험상, 당신이 뭘 준비한다 하면 좋은 일은 아니었어요. 저 이제 겨우 스무 살입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아요.”정현에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20화

    황성, 난옥각.폐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로 드리운 명황색 장막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지 못했다.황후는 기쁨에 찬 눈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폐하,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장비.”황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선발을 거쳐 입궁한 후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폐하가 자신을 ‘장비’라 부르다니.아주 짧은 찰나였다. 폐하의 눈빛은 이미 또렷해져 있었다. 그는 침상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황후,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느냐?”황후는 전 내관이 건네준 인삼차를 받아 들고 다가왔다.“사흘이나 혼수에 계셨습니다. 즉위하신 뒤로 쉼 없이 국사를 돌보시니 기혈이 크게 허해지셨다고 합니다. 태의가 더는 과로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폐하는 낮게 응답한 뒤, 곧바로 물었다.“주종현과 종도치는 어디 있지. 불찰친왕은 잡았느냐?”전 내관이 머뭇거리다 말했다.“주 대인께서… 불찰친왕에게 접응자가 있어 놓쳤다고 하셨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벌하실 자는 벌하시되 성체만은 상하게 하지 마옵소서.”폐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전 내관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그때 황제는 이미 황후의 손을 짚고 일어선 뒤였다.“주종현과 진도림을 들라 하라.”황후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황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겉옷을 걸친 채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그의 등을 바라보며 황후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곁의 상궁이 부축하며 속삭였다.“폐하께서는 사직을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우륵의 일도 중대한 시기이니 폐하를 더 살펴드리면 폐하께서도 황후 마마의 정성을 아실 것입니다.”황후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사직을 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나는 그저 성체가 걱정될 뿐이다.”최 태의가 자신에게 사실을 모두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과로라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19화

    “폐하께서 용안이 노하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일이… 영국공부와 관련이라도 있다면?”영국공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어, 어찌 그게 우리와…”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주씨 큰 마님 뒤에 숨다시피 선 송하윤에게 꽂혔다.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켰다.“내 이럴 줄 알았다. 이 계집은 두어선 안 된다. 제 집안을 모조리 망쳐놓고 이제는 우리 집까지 재수 없게 하려는 게냐!”송하윤은 주씨 큰 마님의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움켜쥐고서야 겨우 표정을 지워냈다.지금 자신의 처지가 누구 때문인지,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저는 스스로 죄를 짊어진 몸임을 압니다. 매일 조모님의 작은 불당에서 경을 외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업보를 덜기 위해서입니다.”숨이 떨렸다.“오라버니가 어리석어 그릇된 주인을 따랐기에 화를 불렀습니다. 그는 이미 벌을 받았습니다. 남은 죄는… 제가 청등 아래에서 조금씩 갚겠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세상에 휩쓸린 가엾은 고아 같았다.주씨 큰 마님은 아들과 손자를 번갈아 보며 숨이 막힌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너희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내가 있는 한, 감히 하윤이를 건드릴 생각은 말아라!”그때 금위군이 두 손을 모아 아뢰었다.“대인, 현재까지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영국공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형부 대옥 같은 곳을 탈옥시키는 일에 어린 아가씨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그는 아들을 보며 덧붙였다.“오늘 아침 네 할머니께서 동산 장자에 간 일도 들었다. 허나 나는 네 할머니 말이 옳다 생각한다. 궁중 상황이 불투명한 지금, 네가 맹시은과 하루라도 빨리 혼인해야 한다. 부인을 맞고 맹 가를 우군으로 삼아야 두 아이도 정식으로 주 씨 족보에 올릴 수 있다. 일거삼득이지 않느냐?”그러나 주씨 큰 마님은 고개를 저었다.“나는 반대다. 경성에 어찌 저 아이 하나뿐이더냐. 죽은 줄 알고 도망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18화

    맹시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진국공부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스며든 공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어머니!”연아는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더니 끝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 역시 겁에 질려 있었고 잠만 들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아설은 한시도 떨어지지 못한 채 아이 곁을 지켰다.주종현은 딸의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연아, 무서워하지 마.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왔잖니.”그러고는 맹시은을 바라보았다.“불찰친왕이 형부 대옥을 탈출한 건,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을 벗어났다면 우리가 손쓸 틈도 없이 멀리 달아날 수도 있었지. 그런데도 굳이 동산 장자에 가서 너를 납치했다.”그 말에야 맹시은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굳어 있던 목을 조심스레 돌리며 입을 열었다.“동산 장자의 사람들은 전부 주부 소속 노복이에요. 저를 따라간 맹 가 하인들은 고작 여섯뿐이었고 그들은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헌데… 변수 하나가 있었죠.”어제 장자에 다녀갔던 송하윤.주종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송하윤과 관련 있다면 이번엔 누구도 그녀를 감싸주지 못한다.”맹시은은 농가 마당에서 보았던 파란 천 보자기를 떠올렸다.“아침에 누군가 마당에 파란 보자기를 던졌는데 참깨전병 같았어요.”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그렇게 이른 시간에 고작 참깨전병 하나를 보내려고 온 걸까요? 불찰이 저를 끌고 농가에 숨었을 때… 길을 세어 가더군요.”목소리가 낮아졌다.“마치 누군가 미리 그곳을 답사해 두고 거기 숨으라고 알려준 것처럼요.”주종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폐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다. 이 일은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거라.”주종현은 영국공부 송학당으로 돌아갔다.송하윤은 주씨 큰 마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큰 마님의 눈꼬리 주름이 두 줄은 더 늘어날 만큼 웃음이 번져 있었다.그러나 주종현이 굳은 얼굴로 들어서자 송학당 안은 순식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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