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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서은월
연아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고 고개를 연신 흔들며 다시 외쳤다.

“아버지께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겁니다!”

강시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서방님, 오늘 연아가 이렇게 즐거워하는데… 조금만 더 놀게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주종현은 단호하게 잘랐다.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은 다시 망성각으로 돌아왔다. 불꽃놀이가 이미 끝나 인파도 한결 줄어든 뒤였다. 마부는 마차 곁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마차에는 이미 누군가 타고 있었다.

안에서는 주온청은 송하윤을 끌어안고 위로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오라버니 뒤에 선 여인을 보자마자 날카롭게 꾸짖었다.

“감히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돌아다니다니! 연아라도 잃어버렸으면 당신 같은 천한 목숨이 열이라도 갚을 수 있었겠습니까!”

강시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연아가 이만큼 자랄 때까지 그녀에게서 아이의 안부를 걱정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었던가?

송하윤은 창백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고 나직이 말했다.

“나는 괜찮다. 무엇보다 연아의 안전이 중요하지.”

주온청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괜찮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부터 몸이 약한데! 방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적 때문에 놀라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오라버니께서는 굳이 저자들을 찾으러 나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송하윤은 고개를 숙이며 그 손등을 살짝 다독였다.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고,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웠다.

“그리 말하지 말거라. 종현 오라버니 역시 강 마님과 아이의 안전이 걱정되어 그러신 것이니.”

주종현은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을 향해 물었다.

“그대의 마차는 어디 있는 겐가?”

주온청이 먼저 마차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오라버니, 하윤 언니께서 놀라셨습니다. 송부는 또 저 남쪽에 있으니 이 늦은 시각에 가기 힘들지요.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직접 모셔다 드리세요.”

말을 마치며 그녀는 주종현의 품에 안겨있는 연아를 덥석 받아 간 후 강시아의 품에 돌려주었다.

“셋째 아가씨께서 서방님과 함께 송 아가씨를 모셔다 드리면 됩니다. 저는 아이만 데리고 천천히 돌아가겠습니다.”

주종현은 모녀를 한 번 돌아보고 곧 동생에게 명했다.

“온청, 네가 연아를…”

“좋습니다! 제가 연아를 꼭 데려다 드릴게요!”

주온청은 서둘러 그의 말을 잘라내며 대답했다. 주종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마차가 떠나간 뒤, 주온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가, 곧장 고개를 돌려 강시아 모녀를 바라보며 얼굴빛을 차갑게 바꾸었다.

“쓸데없는 마음은 접으세요. 하윤 언니와 저희 오라버니는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지낸 사이라, 언젠가는 반드시 저희 집안의 정실로 들어올 분이십니다.”

강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대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주온청은 코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으면 됐습니다. 연아가 당신 뱃속에서 나왔다 해서 그것만 믿고 제멋대로 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연아는 오라버니의 장녀일 뿐, 적녀가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 그 아이를 위한다면 사사로운 욕심 따위는 버리세요. 훗날 당신 모녀의 삶은 하윤 언니의 손에 달려 있으니.”

강시아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턱을 살짝 기울여 연아의 귀 옆에 얼굴을 기대었다.

절반쯤 가려진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었고, 그저 아주 낮은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셋째 아가씨의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감히 불순한 마음은 품지 않겠습니다.”

국공부에 도착했을 때, 연아는 이미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작디작은 몸이 강시아의 어깨에 축 늘어졌기에 그녀는 애써 아이의 다리를 받쳐 들고 있었다.

명옥이 다가와 아이를 받으려 했으나 그녀는 손을 저어 물렸다.

그녀의 팔에서는 벌써 힘이 빠져 있었지만 끝내 스스로 아이를 품에 안았다.

훗날 도망칠 때 아이조차 안아 올리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방으로 돌아와 하인들을 물린 뒤에야 그녀는 아이 곁에 누울 수 있었다.

그녀는 작은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난 것이 분명했다.

딸을 데리고 국공부를 떠나려면 오래 준비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오늘 연이를 데리고 흑시의 통행증을 알아보러 간 일만 해도 위험이 많았다.

명옥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지난 생에 송하윤이 집안에 들어온 후 곧 사직하고 떠났다. 안뜰에 있는 허드렛일 소녀도 겉으론 아무 탈 없었지만 그녀 또한 믿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전이야 말로 모녀의 생존을 지켜줄 유일한 밑천이었다.

강시아의 마음속에서는 끝없이 소용돌이가 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강시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방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주종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높이면 연아가 깰 테니 밖에서 이야기하자.”

밤바람은 서늘하게 불어오고 달빛은 고르게 땅 위를 비추고 있었다.

강시아는 툇마루 난간에 기댄 채 앉았다. 달빛을 이렇게 가만히 바라본 게 얼마 만인지. 그 또한 연아를 품고 있던 시절, 잠 못 들 때 잠시 나와 앉아보곤 했을 뿐이었다.

주종현은 달빛에 젖은 그녀의 맑고 투명한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송 아가씨의 성품이 매우 온화하다고 하셨다. 훗날 그녀가 집안에 들어온다 해도 너와 연아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시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온화하다 하셨습니까? 만약 그녀가 온화하지 않다면 그래도 아내로 맞이하시겠습니까?”

주종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 더러 너 하나만을 위해 정실을 들이지 말라는 것이냐?”

강시아는 입술을 열었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종현은 언젠가 반드시 아내를 맞이할 것이다. 송하윤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누가 과연 친딸이 아닌 아이를 너그러이 품어줄 수 있단 말인가?

국공부는 본래 첩과 자식이 여럿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국공부 안주인의 수하에서 도대체 몇 명의 목숨이 사라졌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남의 시혜에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길을 열어야 하는 것이 나았다!

지난 생에서 저지른 오류는 두 번 다시 범하지 않을 것이다.

주종현의 미간이 더욱 깊이 구겨졌다.

“강시아, 송 아가씨는 현명하고 덕이 있으며 무엇보다 연아를 무척이나 아낀다. 그녀가 국공부에 와서 연아에게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은 적이 있더냐?”

강시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천천히 일어나 그를 향해 무릎을 굽혀 절을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다.

“첩이 망언을 하였습니다. 부디 서방님께서 책망해 주시옵소서.”

주종현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꽂힌 배꽃 은비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시아, 장차 정실이 들어온 뒤 일 년이 지나 아이가 있든 없든… 그때는 네 피임약을 끊게 하겠다. 다시 한 아이를 안겨 주마.”

“첩, 서방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강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번졌다.

은혜라니. 정녕 우스운 일이었다.

“어머니!”

강시아가 눈을 떴을 때, 연아의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 얼굴을 여기저기 마구 쪽쪽대고 있었다. 언제 이리로 기어 온 건지 알 수도 없었다.

“어머니, 또 여기로 와서 주무신 겁니까? 혹시 연아가 또 발길질해서 어머니를 걷어찼나요?”

연아는 뽀얀 뺨으로 그녀를 마구 비비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의 머리칼은 어느새 흘러내려 흐트러져 있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 가닥이 통통한 뺨 옆에 달라붙어 흔들릴 때마다 얼굴로 흘러내렸고, 그럴 때면 그녀는 작은 손으로 능숙히 쓸어 올렸다.

강시아는 웃으며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니다. 우리 연아는 늘 얌전히 잘 자는 아이잖아.”

모녀는 침상 위에서 데굴데굴 뒹굴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때 명옥이 새 옷과 작은 목함을 들고 들어왔다.

“마님, 세자께서 보내신 물건이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의 목소리가 곧장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기 두거라.”

명옥이 물러나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은전 이백 냥이 들어 있었다!

열네 살에 국공부에 들어와 스물하나가 되기까지 꼬박 일곱 해 동안 모아도 오십 냥을 모으지 못했는데... 단 하루 만에 주종현과 그 우연한 호구 같은 두 사람에게서 무려 오백 냥에 달하는 돈이 그녀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강시아는 눈앞의 먹구름이 걷히는 듯 은표를 모조리 끌어모아 연아의 작은 호랑이 베개 속에 밀어 넣었다. 은전은 너무 무거우니 반드시 은표로 바꿔야 한다.

연아가 기어와 물었다.

“어머니, 은전이 그렇게 좋습니까?”

강시아는 아이의 통통한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입술을 맞췄다.

“그럼, 당연히 좋지!”

연아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어머니와 함께 은전을 캐러 가겠습니다!”

은전을 캐러 간다고?

강시아는 웃으며 아이를 따라 대나무 숲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땅속에서 진짜로 은전이 파헤쳐져 나왔을 때, 그녀는 너무 놀라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있었구나. 연아, 넌 어떻게 이걸 알았느냐?”

연아는 쓴 죽순 가지를 들고 땅을 꾹꾹 찌르며 대답했다.

“아지마가 죽순을 캐다가 발견했습니다.”

아지마는 연아의 첫 유모였다.

강시아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아지마는 이미 이 은전을 가져가지 않았느냐?”

연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지마께서 이건 가져가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강시아의 가슴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지난 생에 유모가 갑자기 사직한 게 이 은전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황급히 땅을 다시 덮어 원래 상태로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옷자락과 손이 흙투성이가 된 걸 보고 죽순 두 개를 뽑아 품에 안았다.

“연아야, 잊지 말거라. 오늘은 은전이 아니라 죽순을 캐러 나온 것이다!”

연아는 영문을 다 알지 못한 채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으로 돌아왔을 때 명옥과 하 유모는 모녀의 흙투성이 몰골에 흠칫 놀랐다.

명옥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마님, 어찌 아가씨를 데리고 이렇게 함부로 다니시는 것이옵니까?”

강시아는 미소 같지 않은 미소를 띠며 명옥을 힐끗 바라보았다.

“함부로? 세자께서도 한마디 꾸짖지 않으셨는데 네가 감히 먼저 주인을 꾸짖는단 말이냐?”

“노… 노비는, 노비는 다만 마님께서 꾸중을 들을까 염려되어서 그런 것이옵니다!”

명옥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원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노비이었고 국공부인이 직접 세자 댁으로 보내 붙인 시녀였다. 한 번에 신분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정작 하늘로 치솟은 이는 천하디도 천한 강시아였다. 결국 그녀는 세자의 명으로 이 여자를 모셔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강시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서 연아를 씻기겠다. 혹여 누가 오면 불러다오.”

겉으로 강시아는 명옥의 주인이었으나 실상은 처분권조차 없었다. 그녀가 움직이려면 반드시 빌미가 필요했다. 하 유모는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연아를 품에 안고 살며시 물었다.

“아가씨, 마님께서 아가씨를 데리고 죽순을 캐러 가신 것이옵니까?”

연아는 어머니의 당부를 기억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 유모는 감히 더 묻지 못했다. 아이가 땅에 은전이 파묻혔다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기라도 했다가는 화를 불러올까 두려웠다. 요 며칠 동안 그녀는 안채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누가 그 은전을 묻었든 괜스레 연루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 유모가 한 번 더 떠보려는 순간, 강시아가 죽순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지마의 죽순탕이 제일 맛있지. 그치, 연아야?”

“네. 맞습니다!”

하 유모는 모녀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보며 속으로는 근심을 안은 채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뒤, 강시아가 연아를 씻기고 나오자 벌써 큰 마님을 모시는 고 유모가 와 있었다.

그녀는 큰 마님 곁에서 수십 년을 모신 노비로, 국공 어르신조차도 그녀에게 두어 치 정도 체면을 세워줄 정도였다. 그런 인물이 감히 세자의 첩실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곧 그녀의 체면이 무너졌다는 소리와 똑같았다.

강시아는 고 유모의 살벌한 낯빛만 보고도 분명 명옥이 뒤에서 험담을 늘어놓았음을 짐작했다. 지난 생에서는 연아와 함께 죽순을 캐러 나가지도 않았기에 고 유모를 이토록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일도 없었다.

고 유모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강 마님, 대단합니다! 세자 곁의 유일한 총애라더니. 이 늙은 것도 차 세 잔을 마셔야 겨우 마님의 얼굴을 볼 수 있군요.”

강시아는 태연히 미소를 머금고 맞받았다.

“고 유모, 차 한 잔 드시지요.”

“차?”

고 유모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제가 차 물통입니까! 마님께서 하도 고귀하셔서 늙은 노비는 이제 감당 못 하겠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목소리가 맑은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연아가 꿈속에서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었다.

고 유모는 그 소리에 순간 얼어붙더니 부리나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시아는 연아를 다독이며 고 유모를 앉혔다.

“아이가 그저 꿈을 꾸는 것뿐입니다. 어제 서방님과 너무 늦게까지 놀았거든요.”

그녀는 은반지를 빼내 고 유모의 손에 쥐여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유모,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지요. 저는 서방님의 작은 첩실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유모의 명망과 권세에 비기겠습니까? 웃으실 일이지만 이 작은 뜰 안에서도 연아 말고는 제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답니다. 유모께서 이토록 오래 기다리신 것도 다 제 불찰이지요.”

고 유모는 반지를 어루만지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마님을 원망한 건 아닙니다. 그저 저에게도 맡은 바가 많아 마음이 급했을 뿐입니다.”

방금 전까지 분노로 치닫던 기세가 조금은 수그러든 듯 보였다. 애초에 세자 댁의 내실은 큰 마님조차 깊이 간섭하지 않는 곳인데 그녀가 관여할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고 유모는 문 뒤의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하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제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세자의 집안에 단 하나뿐인 첩, 누군가는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어린 계집아이가 감히 그녀를 이용해 오르려 하다니!

강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유모께서 오신 것은, 혹시 태후 마마의 생신 잔치에 바칠 예물 때문입니까?”

사실 그녀의 자수 솜씨는 일찍이 상 상궁에게서 전수받은 것이었다.

상 상궁는 궁에서 물러난 후 영국공의 청으로 집안 아가씨들의 수를 가르치고 시집갈 때의 혼수를 손수 지어주던 인물이었다. 다만 그녀는 4년 전 세상을 떠났다.

지난 생에 국공부에서 올린 예물은 바로 그녀가 만든 서수헌도(瑞兽献桃) 자수였다.

강시아의 말에 고 유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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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강은 약을 다 먹여 안정을 시킨 뒤에야 비로소 연아를 앞으로 내보냈다. 작은 아이는 곧장 어미의 품으로 뛰어들려 했으나 아버지의 팔에 의해 가로막혔다. 아이는 안달 난 채로 두 다리를 허공에서 급히 버둥거렸다.그러자 주종현이 단호하게 말했다.“너희 어미는 몸이 아직 성치 않으니 조심해야 한다.”연아는 울상을 지으며 올려다보았다. 벌써 오랜 세월 어미의 얼굴을 보지 못한 터라 억울함이 눈망울에 가득 담겨 있었다. 주종현은 딸을 품에 안아 침상 곁에 눕히며 이르렀다.“여기서만 조용히 머물거라.”아이는 감히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 대신 토실토실한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연아는 어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강시아는 두 팔로 딸을 꼭 끌어안아 여린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다행이구나. 그동안 누구도 널 학대하지 않았구나.”그 지난 나날 속에서 그녀는 자주 아득한 환영에 시달렸다. 때로는 아직 초주에서 소녀였던 시절로, 때로는 전생에서 다시금 죽음을 맞이하던 시절로. 마치 아직도 연아가 송하윤의 손아귀에서 고통받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지금, 아이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품 안에 있는 순간에야 그녀는 비로소 실감했다.아직 늦지 않았음을. 아직 살아갈 길이 남아 있음을 말이다. 연아 또한 태어나서 이토록 오랫동안 어미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간신히 만난 지금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싫어, 싫어!”하 유모가 품에 안아 데려가려 하자 작은 아이는 두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결코 놓으려 하지 않았다. 강시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으나 그래도 위험 속에 딸을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연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며칠만 지나면 어미가 다시 널 데리러 갈게. 알겠지?”“싫습니다!”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주종현은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연아, 네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7화

    처방전에는 태를 안정시키는 약재가 몇 가지나 들어 있었다. 남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 사실을 입 밖에 내고 나서야 상 유모는 부랴부랴 입을 틀어막았다. 세자조차도 이를 감추려 애쓰는데 자신이 여기서 창호지를 찢듯 폭로하다니. 이건 죽을 길을 스스로 찾는 짓이 아닌가!그녀는 움츠린 목을 움찔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심한 듯, 발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떴다.“위심, 고작 이런 일에 우리가 둘씩이나 달라붙어야 하느냐?”멀지 않은 지붕 위에는 위심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숨어 있었다.위심이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계속 추적하려는 순간, 저 멀리 큰 나무 뒤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그 사람은 바로 국공부에 오래 기거해 온 막료였다. 그는 국공 어르신의 신임을 깊이 얻고 있지만, 말수가 매우 적어 위심은 그저 그를 밥값이나 아슬아슬하게 챙기는 자쯤으로 여겼다.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바로 송이당이 몰래 심어둔 심복이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국공 어르신 곁에까지 들러붙어 있는 것을 보면 제법 수완이 있는 자일 것이다.다행인 건 세자와 국공 어르신은 본래 한길이 아니어서 집안에서는 결코 정사를 논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위심은 옆에 있던 이를 툭 치며 속삭였다.“너는 설강을 따라붙어라. 난 저 자를 쫓겠다.”상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렸다.“도대체 의리라는 게 있는 것이냐! 공로는 네가 독차지하면 난 세자 앞에서 무슨 낯으로 서라는 것이냐!”분통이 치밀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이를 악물고 설강의 뒤를 밟을 수밖에. 혹여 또 다른 심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위심은 만천보다 무예가 뛰어나지 않았으나 경공만큼은 누구보다 앞섰다.그러므로 늘 이런 미행의 일은 그의 차지가 되었고, 우연히 공을 세우는 일도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세자 곁에 오래 머무르게 된 것이었다.그는 그림자처럼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지붕 위를 고양이처럼 스쳐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6화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모든 회상은 전부 여섯 살 이후, 오라비와 아버지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던 나날들 뿐이었다.아버지는 학식이 깊은 만큼 몸도 무척이나 허약했다. 마을 아이들이 모두 그의 무릎 앞에 앉아 글을 배우며 내는 푼돈은 고스란히 약 항아리에 들어갔지만 끝내 그의 목숨을 건져내진 못했다.오라비는 어디를 가든 늘 그녀를 업고 다녔고 먹을 것이 있으면 언제나 먼저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설령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고단하더라도 그녀는 그것이 괴롭다고 느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강시아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품어 온 그 바람이 이제는 뿌리째 돋아나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서방님을 뵙고 싶습니다! 서방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바깥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눈물이 범람하듯 터져 나와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도 모른 채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그러다 문가에서 갑자기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밀리자 황금빛 저녁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주종현의 눈에 비친 강시아는 속옷만 걸친 채 맨발로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피부는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온몸은 예전보다 훨씬 더 앙상해져 있었다. 손목에는 여전히 무거운 팔찌가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헐렁하게 매달려 꼭 잘못 산 물건처럼 보였다.위심은 말없이 물러나 문밖을 지켰다.주종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저들이 네게 밥을 주지 않았단 말이냐?”한참 만에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첩은 감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먹는다면… 다시는 연아를 볼 수 없을까 두려워서요.”“그럴 리 없다.”주종현은 낮게 한숨 같은 숨결을 흘렸다. 그는 몸을 굽혀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그 순간, 팔에 안긴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음을 뚜렷이 느낄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5화

    송하윤은 이미 이성이 흐려져 있었다. 그런데 영국공부의 대문 모퉁이를 돌기 직전 그녀의 마차가 가로막혀 버렸고, 잠시 후 차가운 바람과 함께 차일이 거칠게 젖혀졌다.송이당이 분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송하윤, 내가 한 말이 우습더냐!”송하윤은 그제야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오라버니, 저….”송이당의 눈 밑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미 이틀 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했고, 조정 일만으로도 산더미 같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이제 여동생마저 이렇듯 철없이 사고를 내려고 드니 그의 인내는 이미 바닥에 닿아 있었다.송하윤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렇게 무력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오라버니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오라버니, 저는 정말 더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늘 느껴집니다. 주종현은 저에게서 멀리 달아나고 있어요. 그의 몸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매여 있는데 그 끈의 다른 끝은 강시아에게 있고, 그녀가 그를 점점 더 멀리 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송이당은 울컥 붉어진 여동생의 눈동자를 오래 바라보다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하윤아, 설령 오늘 당장 강시아가 죽는다 한들, 훗날은 어찌할 것이냐? 너는 송 가의 딸이다. 주종현의 모친은 원래부터 우리 집안과 화합하지 못했다. 네가 들어간 뒤, 그가 다시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느냐? 지금조차 참지 못하고 안달나 하는데, 훗날 시모의 집요한 압박을 마주한다면 너는 시모의 목도 칠 것이냐?”송하윤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렇게 먼 앞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눈앞의 가시를 뽑아내는 것뿐이었다.“한데 아직 제가 문도 넘지 않았는데 강시아는 벌써 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며 도발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식으로 들어간 뒤면 그녀 곁에는 조 씨가 있을 겁니다. 그때면 저는 진정 홀로 버려진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라버니, 강시아는 훗날 들어올 그 어떤 첩들과도 다릅니다. 그녀는 이미 아이까지 낳았고 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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