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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서은월
“태후 마마의 생신이 머지않았는데, 온 경성이 다 아는 일을 제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며칠을 애써 궁리하다가 그럴듯한 계책을 하나 떠올리긴 했으나…”

고 유모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님, 부디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큰 마님께서도 이번 생신은 지극히 중대한 날이라 하셨습니다!”

“다만, 제법 많은 은전이 들어야 하니… 감히 입을 열었다가 괜한 불쾌만 사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을 뿐입니다.”

고 유모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큰 마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이르셨습니다. 돈 쓰는 건 두렵지 않으니 남들과 똑같아서는 안 된다고요. 그리고 만약 국공부에서 내지 못한다면 큰 마님께서 사비라도 내시겠답니다. 마님은 그저 큰 마님께 아뢰기만 하시면 됩니다.”

강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도안을 챙겨 들고 곧장 유모와 함께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안쪽 방에 있는 명옥을 돌아보며 일렀다.

“명옥아, 내가 고 유모와 함께 다녀올 테니, 부디 연아를 잘 살펴주거라.”

강시아는 서둘러 완성된 화고를 품에 안고 고 유모를 따라 뜰을 나섰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설 때 즈음, 뒤편 자기 뜰 쪽으로 시선을 흘렸는데, 강시아의 입가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미소가 번져 있었다.

큰 마님의 처소는 집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어 작년에도 새로 단장한 곳이었다. 그곳은 강시아의 손바닥만 한 뜰과는 감히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작은 정자 옆에서는 배나무 한 그루가 한창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강시아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자 고 유모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것은 작년에 세자께서 옮겨오게 하신 나무랍니다. 두어 해는 지나야 뿌리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금세 꽃을 피웠지요.”

강시아가 담담히 웃으며 응했다.

“제 작은 뜰에도 심어 두었으나 아쉽게도 뿌리내리진 못했습니다.”

그 나무 또한 주종현이 손수 사람을 시켜 심게 한 것이었다.

큰 마님은 마침 작은 불당에서 경을 읊고 있었고, 강시아는 문밖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고 유모가 먼저 들어가 강시아가 오랫동안 발걸음하지 못한 사정을 대신 아뢰자, 큰 마님은 목탁을 두드리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 것아, 언제부터 남의 변명까지 네가 대신해 준 것이냐?”

고 유모가 부축하듯 큰 마님을 일으키며 웃었다.

“큰 마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아랫것들이 다소 태만히 굴었는데 강 마님께서는 성정이 유약하다 보니 누르지 못하셨던 것이옵니다.”

큰 마님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 아이 성품이라면 오직 하윤이의 손길 아래에서나 겨우 숨통이 트이겠지. 어서 들여보내거라.”

강시아는 준비한 도안을 정성껏 펼쳐 보였다. 모두 지난 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완성한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서수헌도’라 불린 도안은 본래 누군가가 그녀를 모함하기 위해 내놓은 계책이어서, 그녀가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공적은 끝내 남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큰 마님, 아직 미숙한 생각을 몇 가지 그려 보았으니 부디 살펴 주시옵소서.”

큰 마님의 눈길은 단번에 서수헌도에 닿았다.

“이 그림은 어떤 구상을 하고 그린 것이냐?”

강시아가 공손히 답했다.

“이는 제가 백마사 장경동에서 본 벽화를 참조하여 그린 것입니다. 빛깔이 찬란하여 마치 서수가 속세로 내려온 듯하였지요. 만일 수예로 옮겨 담으려면 반드시 여주에서 나는 설잠사를 써야 하고 또 서수의 눈동자는 일명 화룡점정이라 하니 그 눈만큼은 묵취옥으로 장식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큰 마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하도록 하거라. 만약 이번 예물이 태후의 눈에 들면 너에게도 상을 내려주겠다.”

강시아는 놀란 척하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연기했다.

“큰 마님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며 입가의 웃음을 거두기도 전에 국공부인 조 씨가 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님, 태후의 생신 예물을 어찌하여 국공부인이 제가 아닌 계실의 첩실과 의논하시는 겁니까?”

강시아는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섰다.

하지만 큰 마님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은 뒤였다.

“후궁의 일은 번다하니, 굳이 네가 관여치 않아도 된다.”

조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예물이 국공부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 아니면 송 가를 위해 마련된 것인지 그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거라!”

큰 마님의 음성은 얼음 같았다.

국공부인과 큰 마님의 불화는 집안 안팎에 오래도록 알려진 사실이었다. 특히 세자 주종현의 혼사 문제에서 큰 마님은 송하윤을 지목했으나 조 씨는 태부가의 손녀를 원했었다. 결과는 뻔했다. 조 씨가 패한 것이다.

자기 아들조차 뜻대로 하지 못한 울분이 오래도록 쌓여 있었는데, 태후의 예물 문제에서 큰 마님이 조 씨를 제쳐두고 강시아 같은 첩실을 찾은 일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어머님, 이제 집안 살림은 제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태후의 예물에 제가 한마디 보태는 것이 그리 방자한 일입니까? 차라리 저 중궁 열쇠를 회수하셔서 앞으로의 살림은 어머님의 손자며느리가 될 송하윤에게 맡기심이 더 낫겠습니다.”

양편이 맞부딪치며 막 언성이 높아지려는 순간, 강시아는 눈치껏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곧 고 유모가 뒤따라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님, 잠깐만요! 이것은 큰 마님께서 내리신 은전입니다. 부족하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강시아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갖고 싶었으나 지금은 취할 때가 아니었다. 길게 낚싯줄을 드리워야 큰 고기를 낚는 법.

“유모께서 갖고 계시지요. 제가 목록을 써 드릴 테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사람을 시켜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고 유모는 그녀가 눈치 있게 굴자 순순히 주머니를 거두어 주었다.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마님은 목록을 써 주시고, 저는 즉시 사람을 내보내도록 하죠.”

강시아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유모께서는 어서 돌아가십시오. 큰 마님께서는 연세도 많으신데 괜한 언쟁으로 인해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고 유모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마님께서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셔서 일부러 저를 보내어 마님을 찾으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소문나지 않도록 조심하시려는 것이죠.”

그러자 강시아가 슬며시 물었다.

“혹시 뜰의 계집아이들 중 누군가 입이 가벼워 밖으로 흘린 것은 아닐까요?”

고 유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큰 마님께서 제게 말씀하실 때, 방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말을 잇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큰 마님의 뜰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강시아의 방에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배반하는 못된 년이 숨어 있던 것이었다!

강시아는 고 유모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보자 이미 자신이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유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 유모가 정신을 차리며 입가를 억지로 당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어서 돌아가시지요.”

그녀가 뜰로 돌아오니 명옥이는 연아와 함께 공깃돌 모양의 주머니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그녀는 강시아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연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연아야, 너의 어머님께서 돌아오셨구나. 네 어머님은 대체 어디에 놀러 가셨기에 너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단 말이냐?”

연아는 쏜살같이 달려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

강시아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큰 마님께 문안을 드리러 다녀온 것이다. 고 유모께서 연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더구나. 아마 다음에는 연아에게 호두사탕이라도 사다 주실 게다.”

모녀는 기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명옥만은 그 자리에 남아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된 일인가? 이토록 중요한 일을 큰 마님께서는 작은 마님을 제쳐두고 곧장 강시아에게 맡기다니. 작은 마님께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녀를 탓했을 것이다.

하 유모가 갓 지어낸 죽순탕을 내놓을 무렵, 고 유모가 사람을 시켜 목록을 받아 갔다. 강시아는 아예 죽순탕의 절반을 나누어 시녀에게 들려 보냈다.

“이것을 고 유모께 드려 맛 좀 보시라 하거라.”

고 유모는 빛깔 고운 탕을 받아 한 모금 맛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강 마님께서 나에게 따로 부탁할 것이 있는 것 같구나.”

어린 시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아이 하나가 행실이 올곧지 않다. 더구나 그 아이는 본래 작은 마님께서 세자 댁에 억지로 들여보낸 자가 아니더냐. 뒤늦게 강 마님 곁으로 옮겨 붙었을 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고 유모와 명옥의 부모는 옛 벗이었으나 이미 오래전 장원으로 내쳐졌다. 그러니 그들은 아마도 이 딸 하나에 기대어 입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 유모께서는 강 마님을 도우려 하십니까?”

고 유모는 죽순탕 한 사발을 덜어 시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돕는다. 왜 안 돕겠느냐?”

저녁 무렵, 고 유모가 사 온 색실이 도착했다. 한 상자 가득 불빛 아래서 찬란히 빛나는 고운 색실이었다. 강시아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수틀에 걸쳐 보다가 눈썹을 좁혔다.

“어라, 이 몇 타래는 색이 다르구나. 분명 상점 주인이 유모를 속인 게야. 유모께서 잘 모르시는 줄 알고 슬그머니 바꿔 넣은 것이 틀림없어. 명옥, 이 실을 가져가 고 유모께 사정을 아뢰거라.”

명옥은 내키지 않는 듯 실꾸러미를 들고 떠났으나 그날 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고 유모가 또다시 직접 찾아왔다. 새로운 색실과 낯선 시녀 하나를 데리고 말이다.

“이 아이는 큰 마님께서 특별히 강 마님께 붙여드린 시녀입니다.”

새로 온 시녀 설강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시녀 설강, 마님께 문안드리옵니다.”

강시아는 딸아이를 불렀다.

“연아야, 이분은 설강 언니란다. 앞으로는 이 언니가 네 곁에서 놀아주실 게다.”

연아는 곧장 설강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토끼 연을 보여주겠다며 떠났다.

그제야 고 유모가 말을 이었다.

“마님, 안심하세요. 설강은 큰 마님 곁에 있는 시녀 중 가장 믿음직한 아이입니다.”

강시아는 명옥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설강이라면 당연히 믿지요. 다만 큰 마님께서 귀히 쓰시던 아이를 제게 내어주셨으니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입니다.”

고 유모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그저 편히 계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어제 거두어 갔던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큰 마님께서는 실을 잘 알지 못하시니 괜히 헛걸음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 돈은 마님께서 직접 지니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강시아는 잔잔히 웃었다. 아직 이 고기는 미끼로 낚기에는 너무 작았다.

“차라리 설강에게 맡기세요. 큰 마님께서 가장 믿음직하다 하셨으니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러고는 딸아이와 놀고 있는 설강을 불러왔다.

고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돈주머니를 설강에게 건네며 일렀다.

“이제 네가 강 마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곧 강 마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주인을 잘 모시는 것이 네 본분임을 잊지 말거라.”

설강이 공손히 답했다.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렇게 이튿날, 강시아는 설강을 데리고 새 색실을 사러 나갔다. 마차에 앉아 그녀는 설강의 좌우를 살피는 눈길을 못 본 체했다.

원래 지난 생에서 큰 마님은 특별히 설강을 주종현 곁에 붙여주려 했었지만, 결국 큰 마님 소유의 서점에서 고된 필사로 연명하던 한 가난한 서생과 눈이 맞아 버렸다. 그러나 송하윤이 들어온 뒤, 설강은 큰 마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주종현의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외가에서 몰래 ‘밀회’를 하던 현장을 송하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물론 설강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고 강시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변고가 닥치기 전날, 설강이 직접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 서생이 곧 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마지막으로 그의 배웅을 나가겠노라고. 그런데 설강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송하윤이 사람들을 이끌고 와 그 길목을 막아섰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 명옥은 이미 곁에서 사라졌으니 큰 마님이 먼저 설강을 그녀 곁에 붙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강시아는 자수를 맡긴 뒤, 한참 실을 고르다가 설강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덕흥루가 멀지 않더구나. 수고스럽겠지만 연아에게 줄 밤 과자를 좀 사다 주렴.”

“그리고 여기서 지불할 돈은 내가 따로 내지 않겠다. 네가 돌아오면 계산하거라.”

설강은 깜짝 놀라 강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강시아는 못 본 체하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젯밤 연아와 약속을 했다. 덕흥루는 언제나 붐벼 혹여 밤 과자를 사지 못하면 아이가 실망할 게다.”

설강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지금 다녀오겠사옵니다.”

강시아는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곧장 길을 건넜다. 상사절 그날, 끝내 묻지 못한 통행증의 마차 행을 찾아야 했다. 점원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아, 지난번 그 마님이시군요.”

강시아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통행증 한 장에 얼마이냐?”

그러자 점원이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한 장에 오십 냥입니다.”

“그리 비싸단 말이냐?!”

강시아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약 요 며칠 새 조금의 은전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통행증 한 장조차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점원은 더 이상 말싸움을 하지 않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싼 데는 비싼 까닭이 있지요.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가 성 밖의 상단과도 연락을 드려 마님을 원하시는 곳까지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강시아가 담담히 물었다.

“통행증은 언제쯤 뗄 수 있느냐?”

“태후 마마의 생신이 머지않았습니다. 더구나 인접한 나라의 사신들까지 조공을 들고 오니 성문은 삼엄히 봉쇄될 터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빨라야 석 달 뒤에나 가능하실 겁니다.”

강시아는 망설임 없이 오십 냥을 꺼내 놓았다.

“좋다. 이것은 계약금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찾으러 오마.”

석 달 뒤라. 바로 지난 생 주종현이 송하윤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그날이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하늘이 정한 운명일지 모른다.

차마행을 나서던 그녀는 마침 달려오는 말과 지나쳤다. 말 등 위에 앉은 이는 주종현이었고 그의 뒤에는 송하윤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종현 오라버니, 저기 있는 분은 강 마님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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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포두께서는 지금 당직 중이신 걸로 압니다만, 현아에 계시지 않고 개인 일을 보시는 건 썩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네요.”석 포두의 몸이 굳었다.“그건... 맞습니다.”농민이 뭔가 더 말하려 하자 석 포두는 그를 밀어 밖으로 내보냈다.“구촌 어르신,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더 기다릴수록 값은 계속 떨어질 겁니다. 다들 상의해서 서둘러 파시지요.”나중에 곡식으로 물건을 바꿔야 할 지경이 되면 그땐 정말 헐값이 될 테니 말이다.구촌 어른은 굳게 닫힌 대문을 한 번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밖에서 기다리던 농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구촌 어르신, 어찌 됐습니까!”“방법이 없답니까?”구촌 어른은 고개를 저었다.“될 수 있는 건 다 해봤네. 우리 집 곡식은 어제 갔던 장 씨 상회에 넘길 생각이네. 곡가가 워낙 불안정하니 그대들은 각자 형편에 맞게 결정하시게.”그 틈에서 구경만 하던 복이 삼촌이 코웃음을 쳤다.“역시 돈 있는 것들이 더 야박하다니까. 다 똑같네. 우리 굶어 죽으라고 버티는 거지. 우리가 솥에 밥도 못 올릴 때쯤 헐값으로 땅까지 사들이려는 거라고.”귀가 얇은 몇몇 사람들의 분노가 단번에 불붙었다.“맞아! 저 여자들이랑 조 씨 집이랑 뭐가 다르다고!”“주부에 고발합시다!”정신이 좀 든 사람이 복이 삼촌을 돌아보며 말했다.“복이 삼촌 말도 웃기네요. 안 사면 다른 데 가서 팔면 되지 않습니까? 조 씨 집은 예전에 곡식을 가져가 놓고 돈을 안 주거나 덜 줬습니다. 지금은 곡식이 다 자기들 손에 있는데 뭘 고발한다는 겁니까? 강제로 못 팔게 됐다고 화풀이하는 겁니까?”복이 삼촌은 이미 벌금도 물었고 올해 농사도 망쳤다. 그 모든 게 다 자기 선택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부추겨 함께 난리를 치려 했다.사정을 꿰뚫어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곡식을 점검했다. 지금 팔면 큰돈은 못 벌어도 헛수고는 면할 수 있을 터.끝내 깨닫지 못한 소수만이 복이 삼촌 곁에 남았다.“복이 삼촌, 그럼 이제 어찌 합니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27화

    “그건 네가 그들보다 잘 살고 있기 때문이야.”단낭은 그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그럼 더 잘 살아야겠습니다. 아주 잘 살아서 숨넘어가게 만들어야겠어요.”“그래야지.”아람은 복동이를 받아안았다.“그런 인간들 때문에 식욕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 난 아직도 생선살 죽을 기다리고 있거든.”단낭은 아람이 자신을 달래려 일부러 저렇게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단 씨 집안일로 더는 아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비영이 해결하지 못하면 그땐 자신이 단비영을 해결하면 될 일이다. 자기 집안 일로도 모자라 이제는 상단 마님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이다.단낭이 남편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단비영은 주종현과 함께 건주로 떠났다.무슨 일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녹봉이 두 냥이나 올랐다.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단 씨 집안이 더더욱 단비영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단 노파는 단비영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 근처에 올 담은 없었기에 길에서 몇 차례 단낭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단낭은 그때마다 매몰차게 뿌리쳤다.아무리 험한 말을 퍼붓고 화이시키겠다고 협박해도 단낭은 더 단단해질 뿐이었다.그녀의 태도에 단 노파는 분통이 터져 허벅지를 쿵쿵 내리쳤다.깊은 가을이 지나자 날이 부쩍 쌀쌀해졌고 아이들은 눈에 띄게 훌쩍 자라 있었다.아람 상단의 곡물 창고는 가득 찼다. 버티며 팔지 않던 농가들은 곡가가 내려가고 나서야 팔지 못한 것을 깨닫고 뒤늦게 허둥대기 시작했다.아설이 이 소식을 전하자 몇 달 동안 참아왔던 아람은 마침내 속이 후련해졌다.“여인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더니.”아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냥 네가 알아서 하거라. 지금까지 전부 네가 결정했잖아.”정현에 머문 지 반 년이 넘은 아설은 어느새 제법 큰 상단 주인다운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석 포두가 농민들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 아설은 단호하게 문전박대를 했다. 예전에 차라리 풀어버리겠다고 했던 쌀을 이제 와서 사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26화

    “형님, 이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아직 아이 하나 제대로 못 달래시네요. 제가 할게요. 저는 한 번에 둘이나 낳았거든요.”단낭은 왕수연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이를 빼앗으려 들자 단낭은 깜짝 놀라 몸을 틀어 아이를 안은 채 물러섰다.“왜 여기 온 것입니까!”“제가 왜 왔냐고요?”왕수연이 콧방귀를 뀌었다.“형님께서는 몰래 큰돈을 벌고 있으면서 혼자만 꿀꺽하시는 겁니까?”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안쪽을 훑어보았다.“상단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단낭은 복동이를 달래며 오늘따라 새 옷감으로 단장한 올케를 곁눈질해 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아까 상단 마님께서 직접 문을 열어주셨는데 못 봤습니까?”문밖에서는 아직도 단 노파의 귀신 울음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왕수연의 얼굴이 확 굳었다.“큰일 났네!”그녀는 몸을 돌려 급히 문쪽으로 달려갔다.단 노파는 평생 거친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아람 같은 여자가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이 손 놓으세요! 안 그러면 사람을 부를 겁니까! 감히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이닥치는 겁니까?”아람은 이런 몰상식한 노파를 처음 봤다.“네가 먼저 날 밀쳤잖아. 오늘은 주인댁에 확실히 보여줄 거다!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 어떻게 여기서 일한단 말이냐!”단 노파는 아람의 다리를 악착같이 끌어안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내리면 자기도 삼천 문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 생각에 고함은 더 커져만 갔다.맞은편 집에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봉변을 당한 줄 안 것이다.“아람 마님, 강세오 대인을 불러드릴까요?”그때 왕수연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어머니! 어서 놓으세요!”그녀는 노파를 끌어당기며 급히 말했다.“이분이 바로 상단 마님입니다.”단 노파는 그제야 손을 풀었다.“아, 아아… 상단 마님이셨군요.”순식간에 얼굴에 웃음을 덕지덕지 붙였다.“이 늙은이가 눈이 어두워 미처 못 알아봤습니다.”아람은 얼굴을 굳힌 채 두 사람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25화

    단비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게다가 단낭이 얼마를 받든 그건 전부 그 사람 능력입니다.”그때, 문밖에서 냉소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애나 보는 거였습니까? 그게 무슨 능력입니까? 여인이라면 다 하는 건데요.”단비영의 제수, 왕수연과 그녀의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섰다.왕 노파가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전 또 큰아주버님께서 무슨 큰 재주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결국 자기 마누라한테 다 몰아준 거였네요.”그녀는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수연아, 팔백 문이면 됐다. 그런 고생은 하지 말거라.”단비영은 예전엔 그나마 말이 통하던 어머니마저 이렇게 변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값은 마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사람을 뽑는 것도 그쪽입니다. 지금 여기서 저를 몰아붙여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상단 주인께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잡일꾼 하나, 녹봉은 팔백 문뿐이라고요. 내일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뽑겠답니다.”그는 더 이상 누구의 반응도 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단낭은 아람을 마주하기가 몹시 민망했다. 남편은 효심만 앞서고 비바람 맞으며 번 돈은 고스란히 둘째 집안의 입으로 들어가니 말이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고작 집을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잊어버린 것일까?엉망진창인 집안 사정에 마님까지 끌어들이다니. 자기 아우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칫 사람을 다치게라도 하면 자신이 무슨 낯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아람은 단낭이 이틀째 웃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아직도 그 일로 속을 앓고 있음을 알았다.“아직도 화났느냐? 그만 생각하거라. 잡일꾼치곤 팔백 문이 좀 센 건 맞지만 네가 삼천 문인데 제수는 팔백 문이잖아. 게다가 이틀이나 지났다. 그러니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단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가에 서운함이 어렸다.“송구합니다. 괜히 이런 일로 폐를 끼쳐서요.”아람은 단낭의 품에서 복동이를 받아 안았다.“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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