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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서은월
“태후 마마의 생신이 머지않았는데, 온 경성이 다 아는 일을 제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며칠을 애써 궁리하다가 그럴듯한 계책을 하나 떠올리긴 했으나…”

고 유모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님, 부디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큰 마님께서도 이번 생신은 지극히 중대한 날이라 하셨습니다!”

“다만, 제법 많은 은전이 들어야 하니… 감히 입을 열었다가 괜한 불쾌만 사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을 뿐입니다.”

고 유모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큰 마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이르셨습니다. 돈 쓰는 건 두렵지 않으니 남들과 똑같아서는 안 된다고요. 그리고 만약 국공부에서 내지 못한다면 큰 마님께서 사비라도 내시겠답니다. 마님은 그저 큰 마님께 아뢰기만 하시면 됩니다.”

강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도안을 챙겨 들고 곧장 유모와 함께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안쪽 방에 있는 명옥을 돌아보며 일렀다.

“명옥아, 내가 고 유모와 함께 다녀올 테니, 부디 연아를 잘 살펴주거라.”

강시아는 서둘러 완성된 화고를 품에 안고 고 유모를 따라 뜰을 나섰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설 때 즈음, 뒤편 자기 뜰 쪽으로 시선을 흘렸는데, 강시아의 입가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미소가 번져 있었다.

큰 마님의 처소는 집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어 작년에도 새로 단장한 곳이었다. 그곳은 강시아의 손바닥만 한 뜰과는 감히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작은 정자 옆에서는 배나무 한 그루가 한창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강시아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자 고 유모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것은 작년에 세자께서 옮겨오게 하신 나무랍니다. 두어 해는 지나야 뿌리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금세 꽃을 피웠지요.”

강시아가 담담히 웃으며 응했다.

“제 작은 뜰에도 심어 두었으나 아쉽게도 뿌리내리진 못했습니다.”

그 나무 또한 주종현이 손수 사람을 시켜 심게 한 것이었다.

큰 마님은 마침 작은 불당에서 경을 읊고 있었고, 강시아는 문밖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고 유모가 먼저 들어가 강시아가 오랫동안 발걸음하지 못한 사정을 대신 아뢰자, 큰 마님은 목탁을 두드리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 것아, 언제부터 남의 변명까지 네가 대신해 준 것이냐?”

고 유모가 부축하듯 큰 마님을 일으키며 웃었다.

“큰 마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아랫것들이 다소 태만히 굴었는데 강 마님께서는 성정이 유약하다 보니 누르지 못하셨던 것이옵니다.”

큰 마님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 아이 성품이라면 오직 하윤이의 손길 아래에서나 겨우 숨통이 트이겠지. 어서 들여보내거라.”

강시아는 준비한 도안을 정성껏 펼쳐 보였다. 모두 지난 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완성한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서수헌도’라 불린 도안은 본래 누군가가 그녀를 모함하기 위해 내놓은 계책이어서, 그녀가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공적은 끝내 남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큰 마님, 아직 미숙한 생각을 몇 가지 그려 보았으니 부디 살펴 주시옵소서.”

큰 마님의 눈길은 단번에 서수헌도에 닿았다.

“이 그림은 어떤 구상을 하고 그린 것이냐?”

강시아가 공손히 답했다.

“이는 제가 백마사 장경동에서 본 벽화를 참조하여 그린 것입니다. 빛깔이 찬란하여 마치 서수가 속세로 내려온 듯하였지요. 만일 수예로 옮겨 담으려면 반드시 여주에서 나는 설잠사를 써야 하고 또 서수의 눈동자는 일명 화룡점정이라 하니 그 눈만큼은 묵취옥으로 장식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큰 마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하도록 하거라. 만약 이번 예물이 태후의 눈에 들면 너에게도 상을 내려주겠다.”

강시아는 놀란 척하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연기했다.

“큰 마님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며 입가의 웃음을 거두기도 전에 국공부인 조 씨가 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님, 태후의 생신 예물을 어찌하여 국공부인이 제가 아닌 계실의 첩실과 의논하시는 겁니까?”

강시아는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섰다.

하지만 큰 마님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은 뒤였다.

“후궁의 일은 번다하니, 굳이 네가 관여치 않아도 된다.”

조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예물이 국공부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 아니면 송 가를 위해 마련된 것인지 그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거라!”

큰 마님의 음성은 얼음 같았다.

국공부인과 큰 마님의 불화는 집안 안팎에 오래도록 알려진 사실이었다. 특히 세자 주종현의 혼사 문제에서 큰 마님은 송하윤을 지목했으나 조 씨는 태부가의 손녀를 원했었다. 결과는 뻔했다. 조 씨가 패한 것이다.

자기 아들조차 뜻대로 하지 못한 울분이 오래도록 쌓여 있었는데, 태후의 예물 문제에서 큰 마님이 조 씨를 제쳐두고 강시아 같은 첩실을 찾은 일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어머님, 이제 집안 살림은 제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태후의 예물에 제가 한마디 보태는 것이 그리 방자한 일입니까? 차라리 저 중궁 열쇠를 회수하셔서 앞으로의 살림은 어머님의 손자며느리가 될 송하윤에게 맡기심이 더 낫겠습니다.”

양편이 맞부딪치며 막 언성이 높아지려는 순간, 강시아는 눈치껏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곧 고 유모가 뒤따라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님, 잠깐만요! 이것은 큰 마님께서 내리신 은전입니다. 부족하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강시아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갖고 싶었으나 지금은 취할 때가 아니었다. 길게 낚싯줄을 드리워야 큰 고기를 낚는 법.

“유모께서 갖고 계시지요. 제가 목록을 써 드릴 테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사람을 시켜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고 유모는 그녀가 눈치 있게 굴자 순순히 주머니를 거두어 주었다.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마님은 목록을 써 주시고, 저는 즉시 사람을 내보내도록 하죠.”

강시아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유모께서는 어서 돌아가십시오. 큰 마님께서는 연세도 많으신데 괜한 언쟁으로 인해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고 유모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마님께서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셔서 일부러 저를 보내어 마님을 찾으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소문나지 않도록 조심하시려는 것이죠.”

그러자 강시아가 슬며시 물었다.

“혹시 뜰의 계집아이들 중 누군가 입이 가벼워 밖으로 흘린 것은 아닐까요?”

고 유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큰 마님께서 제게 말씀하실 때, 방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말을 잇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큰 마님의 뜰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강시아의 방에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배반하는 못된 년이 숨어 있던 것이었다!

강시아는 고 유모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보자 이미 자신이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유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 유모가 정신을 차리며 입가를 억지로 당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어서 돌아가시지요.”

그녀가 뜰로 돌아오니 명옥이는 연아와 함께 공깃돌 모양의 주머니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그녀는 강시아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연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연아야, 너의 어머님께서 돌아오셨구나. 네 어머님은 대체 어디에 놀러 가셨기에 너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단 말이냐?”

연아는 쏜살같이 달려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

강시아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큰 마님께 문안을 드리러 다녀온 것이다. 고 유모께서 연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더구나. 아마 다음에는 연아에게 호두사탕이라도 사다 주실 게다.”

모녀는 기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명옥만은 그 자리에 남아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된 일인가? 이토록 중요한 일을 큰 마님께서는 작은 마님을 제쳐두고 곧장 강시아에게 맡기다니. 작은 마님께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녀를 탓했을 것이다.

하 유모가 갓 지어낸 죽순탕을 내놓을 무렵, 고 유모가 사람을 시켜 목록을 받아 갔다. 강시아는 아예 죽순탕의 절반을 나누어 시녀에게 들려 보냈다.

“이것을 고 유모께 드려 맛 좀 보시라 하거라.”

고 유모는 빛깔 고운 탕을 받아 한 모금 맛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강 마님께서 나에게 따로 부탁할 것이 있는 것 같구나.”

어린 시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아이 하나가 행실이 올곧지 않다. 더구나 그 아이는 본래 작은 마님께서 세자 댁에 억지로 들여보낸 자가 아니더냐. 뒤늦게 강 마님 곁으로 옮겨 붙었을 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고 유모와 명옥의 부모는 옛 벗이었으나 이미 오래전 장원으로 내쳐졌다. 그러니 그들은 아마도 이 딸 하나에 기대어 입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 유모께서는 강 마님을 도우려 하십니까?”

고 유모는 죽순탕 한 사발을 덜어 시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돕는다. 왜 안 돕겠느냐?”

저녁 무렵, 고 유모가 사 온 색실이 도착했다. 한 상자 가득 불빛 아래서 찬란히 빛나는 고운 색실이었다. 강시아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수틀에 걸쳐 보다가 눈썹을 좁혔다.

“어라, 이 몇 타래는 색이 다르구나. 분명 상점 주인이 유모를 속인 게야. 유모께서 잘 모르시는 줄 알고 슬그머니 바꿔 넣은 것이 틀림없어. 명옥, 이 실을 가져가 고 유모께 사정을 아뢰거라.”

명옥은 내키지 않는 듯 실꾸러미를 들고 떠났으나 그날 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고 유모가 또다시 직접 찾아왔다. 새로운 색실과 낯선 시녀 하나를 데리고 말이다.

“이 아이는 큰 마님께서 특별히 강 마님께 붙여드린 시녀입니다.”

새로 온 시녀 설강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시녀 설강, 마님께 문안드리옵니다.”

강시아는 딸아이를 불렀다.

“연아야, 이분은 설강 언니란다. 앞으로는 이 언니가 네 곁에서 놀아주실 게다.”

연아는 곧장 설강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토끼 연을 보여주겠다며 떠났다.

그제야 고 유모가 말을 이었다.

“마님, 안심하세요. 설강은 큰 마님 곁에 있는 시녀 중 가장 믿음직한 아이입니다.”

강시아는 명옥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설강이라면 당연히 믿지요. 다만 큰 마님께서 귀히 쓰시던 아이를 제게 내어주셨으니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입니다.”

고 유모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그저 편히 계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어제 거두어 갔던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큰 마님께서는 실을 잘 알지 못하시니 괜히 헛걸음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 돈은 마님께서 직접 지니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강시아는 잔잔히 웃었다. 아직 이 고기는 미끼로 낚기에는 너무 작았다.

“차라리 설강에게 맡기세요. 큰 마님께서 가장 믿음직하다 하셨으니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러고는 딸아이와 놀고 있는 설강을 불러왔다.

고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돈주머니를 설강에게 건네며 일렀다.

“이제 네가 강 마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곧 강 마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주인을 잘 모시는 것이 네 본분임을 잊지 말거라.”

설강이 공손히 답했다.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렇게 이튿날, 강시아는 설강을 데리고 새 색실을 사러 나갔다. 마차에 앉아 그녀는 설강의 좌우를 살피는 눈길을 못 본 체했다.

원래 지난 생에서 큰 마님은 특별히 설강을 주종현 곁에 붙여주려 했었지만, 결국 큰 마님 소유의 서점에서 고된 필사로 연명하던 한 가난한 서생과 눈이 맞아 버렸다. 그러나 송하윤이 들어온 뒤, 설강은 큰 마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주종현의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외가에서 몰래 ‘밀회’를 하던 현장을 송하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물론 설강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고 강시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변고가 닥치기 전날, 설강이 직접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 서생이 곧 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마지막으로 그의 배웅을 나가겠노라고. 그런데 설강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송하윤이 사람들을 이끌고 와 그 길목을 막아섰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 명옥은 이미 곁에서 사라졌으니 큰 마님이 먼저 설강을 그녀 곁에 붙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강시아는 자수를 맡긴 뒤, 한참 실을 고르다가 설강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덕흥루가 멀지 않더구나. 수고스럽겠지만 연아에게 줄 밤 과자를 좀 사다 주렴.”

“그리고 여기서 지불할 돈은 내가 따로 내지 않겠다. 네가 돌아오면 계산하거라.”

설강은 깜짝 놀라 강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강시아는 못 본 체하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젯밤 연아와 약속을 했다. 덕흥루는 언제나 붐벼 혹여 밤 과자를 사지 못하면 아이가 실망할 게다.”

설강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지금 다녀오겠사옵니다.”

강시아는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곧장 길을 건넜다. 상사절 그날, 끝내 묻지 못한 통행증의 마차 행을 찾아야 했다. 점원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아, 지난번 그 마님이시군요.”

강시아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통행증 한 장에 얼마이냐?”

그러자 점원이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한 장에 오십 냥입니다.”

“그리 비싸단 말이냐?!”

강시아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약 요 며칠 새 조금의 은전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통행증 한 장조차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점원은 더 이상 말싸움을 하지 않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싼 데는 비싼 까닭이 있지요.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가 성 밖의 상단과도 연락을 드려 마님을 원하시는 곳까지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강시아가 담담히 물었다.

“통행증은 언제쯤 뗄 수 있느냐?”

“태후 마마의 생신이 머지않았습니다. 더구나 인접한 나라의 사신들까지 조공을 들고 오니 성문은 삼엄히 봉쇄될 터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빨라야 석 달 뒤에나 가능하실 겁니다.”

강시아는 망설임 없이 오십 냥을 꺼내 놓았다.

“좋다. 이것은 계약금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찾으러 오마.”

석 달 뒤라. 바로 지난 생 주종현이 송하윤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그날이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하늘이 정한 운명일지 모른다.

차마행을 나서던 그녀는 마침 달려오는 말과 지나쳤다. 말 등 위에 앉은 이는 주종현이었고 그의 뒤에는 송하윤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종현 오라버니, 저기 있는 분은 강 마님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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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여 년 넘게 집안에서 일해 온 몇몇 노복들을 제외하고는, 낯선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녀를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그 보호는 화려하게 장식된 감옥처럼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주연아는 창가에 앉아, 눈의 무게에 눌려 가지가 휘어진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생각하면 할수록,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심장을 움켜쥐듯 조여왔다.번뜩이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여우털 외투를 걸치고 눈보라 속으로 뛰쳐나갔다.밤은 깊고 고요했다. 눈 위에는 그녀의 발자국만이 깊었다 얕았다 이어지고 있었다.서재에 다가가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외삼촌의 차분한 목소리가 창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우륵은 오만하고 거칠다. 헌데 이번에는 아예 빌미를 우리 손에 쥐여주었어. 명분이 서는 전쟁이다. 하늘이 내린 기회지. 계획만 치밀하게 세운다면, 단숨에 제압해 우리 대성조 북방의 백 년 묵은 근심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을 거다.”주연아의 발걸음이 멎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서재 안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아버지가 더는 말을 잇지 않을 것만 같은, 긴 정적이었다.그제야, 주종현의 익숙하면서도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폐하는 아직 젊고 기세가 지나칩니다. 여러 차례 사적으로 제게 말했지요. 태조를 본받아, 친히 군을 이끌고 나가 영토를 넓히고 불세출의 공을 세우고 싶다고요. 이번에는…”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함과 무게가 실려 있었다.“이번에는 연아를 ‘투명장(投名状: 어떤 집단이나 편에 들어가기 위해 충성과 결의를 증명하려고 바치는 증표나 행동을)’으로 삼게 되었으니, 아마 조정의 노신들 입을 막을 더 확실한 이유가 생긴 셈입니다.”투명장…주연아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며 새하얗게 비어버렸다.그 뒤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그래서… 이런 거였나. 그녀는 그저 내세우기 좋은 명분이었을 뿐이었다.그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42화

    문무백관은 숨을 죽인 채, 감히 크게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했다.칼끝이 맞닿을 듯 팽팽하게 긴장된 그 순간, 죽음 같은 적막을 깨뜨린 것은 한 노신의 늙고 떨리는 목소리였다.“폐하, 부디 삼가 숙고하소서!”백발이 성성한 노신이 비틀거리며 대열에서 나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폐하! 우륵의 병력은 강합니다. 삼십만 대군이 압박해 온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다시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옵니다!”그의 말은 고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곧바로 몇몇 화친을 주장하던 신하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폐하, 삼가 생각하소서!”“그러하옵니다, 폐하! 주… 주 대인께서 이미 평민이 된 지금, 군을 맡아 이끌 자가 없사옵니다. 전쟁을 택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하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변방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었다.한쪽은 적융을 막고, 한쪽은 우륵을 막았다.주종현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지자 그동안 눈치를 보던 자들마저 하나둘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순식간에 조정에는 화친을 청하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그 노신은 머리를 땅에 박다시피 하며 눈물과 함께 호소했다.“폐하, 우륵의 한왕이 이토록 성심으로 혼인을 청하며 경연군주를 지목하였으니… 그 뜻을 받아들이시옵소서!”“고작 군주 한 사람으로, 우리 대성조의 수십 년 평안과 수많은 장병들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폐하!”“그 입 다물라.”소림의 목소리는 한 점의 온기도 없이 차가웠다.서릿발 같은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노신을 곧장 꿰뚫었다.“우리 대성조가 언제부터 이토록 나약해졌느냐.”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한 글자 한 글자가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고작 우륵 따위가 짐의 미래 황후를 탐낸다고 해서, 짐이 스스로 내어주어야 한단 말이냐?”‘황후’라는 두 글자를 그는 유난히 깊게 눌러 말했다.끝없는 소유욕과 모욕당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노신은 온몸을 떨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그러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41화

    상산왕 주종현은 언행이 바르지 못하고, 어전에서 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왕작이 박탈되었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이던 상산왕이 하룻밤 사이에 평민으로 전락했다.사흘 뒤.우륵의 한왕이 사신을 보내 국서를 올렸다.말투는 정중하고 간절했으며, 대성조의 군주를 맞아 혼인을 청해 두 나라의 화친을 맺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조정 위에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 은밀히 출렁였다.경성에 없는 종친들을 제외하면, 군주로 책봉된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주종현은 작위를 빼앗겼으나, 연아의 군주 신분을 기록한 옥첩은 회수되지 않았다. 심지어 황후 책봉의 성지도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상태였다.우륵이 구하려는 이는 미래의 황후였다…그러나 소림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용좌 위에 앉은 황제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기에 희로애락을 읽을 수 없었다.그는 붉은 붓을 들어 단번에 내려 그었다.“허한다.”순식간에, 대성조의 군주들은 봄비 뒤 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공후귀족들의 집안에서 적령기의 규수들이 줄줄이 천거되었다.소림은 단숨에 여덟 명의 군주를 봉했다. 모두 꽃처럼 아름답고, 신분 또한 귀한 이들이었다.그렇게 그들은 일렬로 열무의 앞에 내어졌다.금빛으로 빛나는 조정 한가운데 열무는 전각에 서서, 늘 그렇듯 삐딱하고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여덟 명의 미인들에게는 단 한 번도 머물지 않았다.곧장 사람들 너머로 향해, 용좌 위의 젊은 황제를 향했다.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외삼촌이라 부르겠습니다.”그 외삼촌이라는 말은, 느릿하고도 가볍게 씹히며 흘러나왔다. 희롱과 도발이 뒤섞인 어조였다.“외삼촌께서도 아시겠지요. 제가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그 말이 떨어지자 문무백관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정적.전각 안은 숨이 막힐 듯 고요해졌다.소림은 용좌 위에 앉은 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다만 용포 넓은 소매 아래로 드리워진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마디마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후.그는 문득 웃었다. 입가에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40화

    소림이 떠나자 넓디넓은 편전에는 순식간에 죽은 듯한 적막이 다시 내려앉았다.창밖에서는 그저 눈보라만이 지칠 줄 모르고 울부짖고 있었다.주연아는 천천히 차가운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앉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팔을 끌어안았다.하지만 뼛속 깊이 스며든 그 한기는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입술에는 아직도 그가 거칠게 빼앗아 간 흔적의 통증이 남아 있었고 공기 속에는 여전히 그의 강압적이면서도 맑은 용연향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주전 쪽에서는 희미하게 풍악 소리가 흘러왔다.술잔이 오가고 노랫소리와 춤이 어우러지는 태평성대의 기운.그때였다. 문 밖에서 미묘한 소란이 일어났다.병사들이 낮게 윽박지르는 소리와 궁녀들의 놀란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방자하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너희는 대체 누구냐! 감히 궁 안에서 손을 쓰다니!”곧이어 둔탁하게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그리고 다시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주연아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끼이익.”무거운 문이 밖에서 거칠게 밀려 열렸다.익숙하면서도 다급한 기척이 눈보라를 휘감은 채 역광 속에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연아!”어머니의 목소리였다.맹시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와 걱정이 가득했다.그녀의 뒤에서는 무비가 재빠르게 막아서려던 궁녀를 기절시키고, 곧장 문 앞을 경계하며 섰다.주연아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팽팽히 당겨져 있던 마음의 끈이 어머니를 본 그 순간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어머니…”그녀는 떨리는 몸으로 바닥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 따뜻한 품으로 파고들었다.“어머니!”그녀는 맹시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그 품에 묻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서러움과 공포가, 그 순간 산산이 터져 나오며 처절한 울음으로 쏟아졌다.“폐하께서...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어머니…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그녀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떨리고 있었다.맹시은의 심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503화

    황제가 친히 진국공부를 찾은 뒤, 경성의 각 가문에서 보내오는 초청장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너무 많아 나중에는 시녀들이 바구니에 담아 들고 올 정도였다. 그 초청장들은 전부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에 차곡차곡 쌓였다.류영이 방을 정리하며 초청장들을 품계에 따라 나누고 있을 때, 아람의 시선이 각 묶음 맨 위에 놓인 글씨 위로 스쳤다.“글을 읽을 줄 아느냐?”류영는 고개를 숙였다.“예. 예전 아씨께서 규중에 계실 때 글을 좋아하셔서 곁에서 조금 배웠습니다.”“글을 아는 시녀라면 원래는 쉽게 풀어주지 않을 텐데.”아람의 말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86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주근 할머니는 문짝에 부딪혀 붙어 있다가 그대로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 비명을 한 번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철이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얼어붙었다. 문 앞의 사내는 병색이 완연했으나 온몸에 서린 살기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입에서 그딴 소리가 또 나오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철이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사, 살… 살인이야.”주근 할머니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크게 다쳐 한동안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침대머리를 부들부들 치며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61화

    아설이 떠난 지 여드렛째였다. 아람은 적막함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연아 또한 매일같이 물었다.“아설 언니는 왜 아직도 안 와요?”수차례 이모라 부르라고 고쳐줬으나 설강 언니에서 아설 언니로 굳어진 탓에 바꾸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아람도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두던 참이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두었다. 그때, 문희가 갓 지은 옷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아람 아가씨, 들으셨어요? 성문 앞에 방(榜:고려ㆍ조선 시대의 과거 합격자 명부)이 내걸렸다 합니다. 오늘 과거 급제자 명단이 나왔어요.”문희는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47화

    “송 아가씨, 참으로 수완이 대단하군요.”자그마한 뜰에는 나무 받침대가 여럿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물기를 빼는 두부가 층층이 얹혀 있었다. 마당 가득 고소한 콩 향이 감돌았지만 정작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부엌 아궁이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안채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송하윤 앞에 맑은 차 한 잔을 따라 두었다.송하윤도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차에 손을 대지 않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한 번 내려다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당신,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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