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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作者: 서은월
“태후 마마의 생신이 머지않았는데, 온 경성이 다 아는 일을 제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며칠을 애써 궁리하다가 그럴듯한 계책을 하나 떠올리긴 했으나…”

고 유모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님, 부디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큰 마님께서도 이번 생신은 지극히 중대한 날이라 하셨습니다!”

“다만, 제법 많은 은전이 들어야 하니… 감히 입을 열었다가 괜한 불쾌만 사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을 뿐입니다.”

고 유모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큰 마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이르셨습니다. 돈 쓰는 건 두렵지 않으니 남들과 똑같아서는 안 된다고요. 그리고 만약 국공부에서 내지 못한다면 큰 마님께서 사비라도 내시겠답니다. 마님은 그저 큰 마님께 아뢰기만 하시면 됩니다.”

강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도안을 챙겨 들고 곧장 유모와 함께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안쪽 방에 있는 명옥을 돌아보며 일렀다.

“명옥아, 내가 고 유모와 함께 다녀올 테니, 부디 연아를 잘 살펴주거라.”

강시아는 서둘러 완성된 화고를 품에 안고 고 유모를 따라 뜰을 나섰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설 때 즈음, 뒤편 자기 뜰 쪽으로 시선을 흘렸는데, 강시아의 입가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미소가 번져 있었다.

큰 마님의 처소는 집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어 작년에도 새로 단장한 곳이었다. 그곳은 강시아의 손바닥만 한 뜰과는 감히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작은 정자 옆에서는 배나무 한 그루가 한창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강시아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자 고 유모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것은 작년에 세자께서 옮겨오게 하신 나무랍니다. 두어 해는 지나야 뿌리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금세 꽃을 피웠지요.”

강시아가 담담히 웃으며 응했다.

“제 작은 뜰에도 심어 두었으나 아쉽게도 뿌리내리진 못했습니다.”

그 나무 또한 주종현이 손수 사람을 시켜 심게 한 것이었다.

큰 마님은 마침 작은 불당에서 경을 읊고 있었고, 강시아는 문밖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고 유모가 먼저 들어가 강시아가 오랫동안 발걸음하지 못한 사정을 대신 아뢰자, 큰 마님은 목탁을 두드리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 것아, 언제부터 남의 변명까지 네가 대신해 준 것이냐?”

고 유모가 부축하듯 큰 마님을 일으키며 웃었다.

“큰 마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아랫것들이 다소 태만히 굴었는데 강 마님께서는 성정이 유약하다 보니 누르지 못하셨던 것이옵니다.”

큰 마님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 아이 성품이라면 오직 하윤이의 손길 아래에서나 겨우 숨통이 트이겠지. 어서 들여보내거라.”

강시아는 준비한 도안을 정성껏 펼쳐 보였다. 모두 지난 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완성한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서수헌도’라 불린 도안은 본래 누군가가 그녀를 모함하기 위해 내놓은 계책이어서, 그녀가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공적은 끝내 남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큰 마님, 아직 미숙한 생각을 몇 가지 그려 보았으니 부디 살펴 주시옵소서.”

큰 마님의 눈길은 단번에 서수헌도에 닿았다.

“이 그림은 어떤 구상을 하고 그린 것이냐?”

강시아가 공손히 답했다.

“이는 제가 백마사 장경동에서 본 벽화를 참조하여 그린 것입니다. 빛깔이 찬란하여 마치 서수가 속세로 내려온 듯하였지요. 만일 수예로 옮겨 담으려면 반드시 여주에서 나는 설잠사를 써야 하고 또 서수의 눈동자는 일명 화룡점정이라 하니 그 눈만큼은 묵취옥으로 장식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큰 마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하도록 하거라. 만약 이번 예물이 태후의 눈에 들면 너에게도 상을 내려주겠다.”

강시아는 놀란 척하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연기했다.

“큰 마님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며 입가의 웃음을 거두기도 전에 국공부인 조 씨가 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님, 태후의 생신 예물을 어찌하여 국공부인이 제가 아닌 계실의 첩실과 의논하시는 겁니까?”

강시아는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섰다.

하지만 큰 마님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은 뒤였다.

“후궁의 일은 번다하니, 굳이 네가 관여치 않아도 된다.”

조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예물이 국공부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 아니면 송 가를 위해 마련된 것인지 그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거라!”

큰 마님의 음성은 얼음 같았다.

국공부인과 큰 마님의 불화는 집안 안팎에 오래도록 알려진 사실이었다. 특히 세자 주종현의 혼사 문제에서 큰 마님은 송하윤을 지목했으나 조 씨는 태부가의 손녀를 원했었다. 결과는 뻔했다. 조 씨가 패한 것이다.

자기 아들조차 뜻대로 하지 못한 울분이 오래도록 쌓여 있었는데, 태후의 예물 문제에서 큰 마님이 조 씨를 제쳐두고 강시아 같은 첩실을 찾은 일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어머님, 이제 집안 살림은 제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태후의 예물에 제가 한마디 보태는 것이 그리 방자한 일입니까? 차라리 저 중궁 열쇠를 회수하셔서 앞으로의 살림은 어머님의 손자며느리가 될 송하윤에게 맡기심이 더 낫겠습니다.”

양편이 맞부딪치며 막 언성이 높아지려는 순간, 강시아는 눈치껏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곧 고 유모가 뒤따라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님, 잠깐만요! 이것은 큰 마님께서 내리신 은전입니다. 부족하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강시아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갖고 싶었으나 지금은 취할 때가 아니었다. 길게 낚싯줄을 드리워야 큰 고기를 낚는 법.

“유모께서 갖고 계시지요. 제가 목록을 써 드릴 테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사람을 시켜 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고 유모는 그녀가 눈치 있게 굴자 순순히 주머니를 거두어 주었다.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마님은 목록을 써 주시고, 저는 즉시 사람을 내보내도록 하죠.”

강시아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유모께서는 어서 돌아가십시오. 큰 마님께서는 연세도 많으신데 괜한 언쟁으로 인해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고 유모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마님께서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셔서 일부러 저를 보내어 마님을 찾으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소문나지 않도록 조심하시려는 것이죠.”

그러자 강시아가 슬며시 물었다.

“혹시 뜰의 계집아이들 중 누군가 입이 가벼워 밖으로 흘린 것은 아닐까요?”

고 유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큰 마님께서 제게 말씀하실 때, 방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말을 잇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큰 마님의 뜰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강시아의 방에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배반하는 못된 년이 숨어 있던 것이었다!

강시아는 고 유모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보자 이미 자신이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유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 유모가 정신을 차리며 입가를 억지로 당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어서 돌아가시지요.”

그녀가 뜰로 돌아오니 명옥이는 연아와 함께 공깃돌 모양의 주머니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그녀는 강시아를 힐끔 곁눈질하더니 연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연아야, 너의 어머님께서 돌아오셨구나. 네 어머님은 대체 어디에 놀러 가셨기에 너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단 말이냐?”

연아는 쏜살같이 달려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

강시아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큰 마님께 문안을 드리러 다녀온 것이다. 고 유모께서 연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더구나. 아마 다음에는 연아에게 호두사탕이라도 사다 주실 게다.”

모녀는 기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명옥만은 그 자리에 남아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된 일인가? 이토록 중요한 일을 큰 마님께서는 작은 마님을 제쳐두고 곧장 강시아에게 맡기다니. 작은 마님께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녀를 탓했을 것이다.

하 유모가 갓 지어낸 죽순탕을 내놓을 무렵, 고 유모가 사람을 시켜 목록을 받아 갔다. 강시아는 아예 죽순탕의 절반을 나누어 시녀에게 들려 보냈다.

“이것을 고 유모께 드려 맛 좀 보시라 하거라.”

고 유모는 빛깔 고운 탕을 받아 한 모금 맛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강 마님께서 나에게 따로 부탁할 것이 있는 것 같구나.”

어린 시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아이 하나가 행실이 올곧지 않다. 더구나 그 아이는 본래 작은 마님께서 세자 댁에 억지로 들여보낸 자가 아니더냐. 뒤늦게 강 마님 곁으로 옮겨 붙었을 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고 유모와 명옥의 부모는 옛 벗이었으나 이미 오래전 장원으로 내쳐졌다. 그러니 그들은 아마도 이 딸 하나에 기대어 입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 유모께서는 강 마님을 도우려 하십니까?”

고 유모는 죽순탕 한 사발을 덜어 시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돕는다. 왜 안 돕겠느냐?”

저녁 무렵, 고 유모가 사 온 색실이 도착했다. 한 상자 가득 불빛 아래서 찬란히 빛나는 고운 색실이었다. 강시아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수틀에 걸쳐 보다가 눈썹을 좁혔다.

“어라, 이 몇 타래는 색이 다르구나. 분명 상점 주인이 유모를 속인 게야. 유모께서 잘 모르시는 줄 알고 슬그머니 바꿔 넣은 것이 틀림없어. 명옥, 이 실을 가져가 고 유모께 사정을 아뢰거라.”

명옥은 내키지 않는 듯 실꾸러미를 들고 떠났으나 그날 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고 유모가 또다시 직접 찾아왔다. 새로운 색실과 낯선 시녀 하나를 데리고 말이다.

“이 아이는 큰 마님께서 특별히 강 마님께 붙여드린 시녀입니다.”

새로 온 시녀 설강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시녀 설강, 마님께 문안드리옵니다.”

강시아는 딸아이를 불렀다.

“연아야, 이분은 설강 언니란다. 앞으로는 이 언니가 네 곁에서 놀아주실 게다.”

연아는 곧장 설강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토끼 연을 보여주겠다며 떠났다.

그제야 고 유모가 말을 이었다.

“마님, 안심하세요. 설강은 큰 마님 곁에 있는 시녀 중 가장 믿음직한 아이입니다.”

강시아는 명옥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설강이라면 당연히 믿지요. 다만 큰 마님께서 귀히 쓰시던 아이를 제게 내어주셨으니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입니다.”

고 유모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그저 편히 계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어제 거두어 갔던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큰 마님께서는 실을 잘 알지 못하시니 괜히 헛걸음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 돈은 마님께서 직접 지니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강시아는 잔잔히 웃었다. 아직 이 고기는 미끼로 낚기에는 너무 작았다.

“차라리 설강에게 맡기세요. 큰 마님께서 가장 믿음직하다 하셨으니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러고는 딸아이와 놀고 있는 설강을 불러왔다.

고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돈주머니를 설강에게 건네며 일렀다.

“이제 네가 강 마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곧 강 마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주인을 잘 모시는 것이 네 본분임을 잊지 말거라.”

설강이 공손히 답했다.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렇게 이튿날, 강시아는 설강을 데리고 새 색실을 사러 나갔다. 마차에 앉아 그녀는 설강의 좌우를 살피는 눈길을 못 본 체했다.

원래 지난 생에서 큰 마님은 특별히 설강을 주종현 곁에 붙여주려 했었지만, 결국 큰 마님 소유의 서점에서 고된 필사로 연명하던 한 가난한 서생과 눈이 맞아 버렸다. 그러나 송하윤이 들어온 뒤, 설강은 큰 마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주종현의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외가에서 몰래 ‘밀회’를 하던 현장을 송하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물론 설강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고 강시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변고가 닥치기 전날, 설강이 직접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 서생이 곧 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마지막으로 그의 배웅을 나가겠노라고. 그런데 설강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송하윤이 사람들을 이끌고 와 그 길목을 막아섰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 명옥은 이미 곁에서 사라졌으니 큰 마님이 먼저 설강을 그녀 곁에 붙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강시아는 자수를 맡긴 뒤, 한참 실을 고르다가 설강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덕흥루가 멀지 않더구나. 수고스럽겠지만 연아에게 줄 밤 과자를 좀 사다 주렴.”

“그리고 여기서 지불할 돈은 내가 따로 내지 않겠다. 네가 돌아오면 계산하거라.”

설강은 깜짝 놀라 강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강시아는 못 본 체하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젯밤 연아와 약속을 했다. 덕흥루는 언제나 붐벼 혹여 밤 과자를 사지 못하면 아이가 실망할 게다.”

설강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지금 다녀오겠사옵니다.”

강시아는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곧장 길을 건넜다. 상사절 그날, 끝내 묻지 못한 통행증의 마차 행을 찾아야 했다. 점원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아, 지난번 그 마님이시군요.”

강시아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통행증 한 장에 얼마이냐?”

그러자 점원이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한 장에 오십 냥입니다.”

“그리 비싸단 말이냐?!”

강시아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약 요 며칠 새 조금의 은전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통행증 한 장조차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점원은 더 이상 말싸움을 하지 않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싼 데는 비싼 까닭이 있지요.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가 성 밖의 상단과도 연락을 드려 마님을 원하시는 곳까지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강시아가 담담히 물었다.

“통행증은 언제쯤 뗄 수 있느냐?”

“태후 마마의 생신이 머지않았습니다. 더구나 인접한 나라의 사신들까지 조공을 들고 오니 성문은 삼엄히 봉쇄될 터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빨라야 석 달 뒤에나 가능하실 겁니다.”

강시아는 망설임 없이 오십 냥을 꺼내 놓았다.

“좋다. 이것은 계약금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찾으러 오마.”

석 달 뒤라. 바로 지난 생 주종현이 송하윤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그날이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하늘이 정한 운명일지 모른다.

차마행을 나서던 그녀는 마침 달려오는 말과 지나쳤다. 말 등 위에 앉은 이는 주종현이었고 그의 뒤에는 송하윤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종현 오라버니, 저기 있는 분은 강 마님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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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몸에 밴 피로와 서툴게나마 그녀를 달래려는 마음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그가 더 자주 찾아올수록 송하윤의 수법은 점점 더 잔혹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위험해졌다.강시아에게는 더 이상 기댈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세자, 제발… 연아를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대로 가면… 연아는 죽어요.”주종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조금만 더 기다려라.”또 그 말이었다.“시아야, 나를 믿어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내가 돌아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주겠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더 기다리라는 것인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딸이 무사히, 평안하게 자라나는 것.그 소망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결국 그녀의 재앙이 찾아왔다.그녀는 다시 아이를 가졌다.의원이 맥을 짚고 회임이라 알린 순간, 기쁨은 한 점도 없었다.오로지 차갑고도 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덮쳐 왔다.송하윤이라면 이 아이를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아이와 함께 죽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주종현에게 소식을 전하려 했다.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평소 믿을 만하다 여겼던 하인 하나에게 몰래 편지를 맡겼다.그러나 그 편지는 그대로 송하윤의 손에 들어갔다.그녀의 구원 요청은 외간 남자와 간통했다는 증거가 되어 버렸다.송하윤은 주종현이 떠나기 전 남긴 명령서를 들고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그녀의 뜰로 들이닥쳤다.“이 천한 것!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이냐! 우리 영국공부의 체면을 더럽히다니! 잡아라! 돼지우리 형에 처하거라!”그녀는 몇몇 하인들에게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입에는 헝겊이 틀어막혔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증오가 타올랐다.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이 집에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9화

    송하윤은 연아를 향해 손짓했다.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리 오너라. 어미 곁으로.”연아는 겁먹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강시아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송하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너도 이 집에 오래 있었으니 규율쯤은 알겠지. 서출 자식은 마땅히 적모가 거두어 기르는 법이다. 앞으로는 연아를 내 처소로 옮기도록 하거라. 내가 직접 가르치겠다.”강시아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며 하얘졌다.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아… 안 됩니다, 마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연아는 아직 어립니다. 저를 떠날 수 없습니다. 마님, 제발…”“무례하다!”송하윤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로운 꾸짖음이 쏟아졌다.“내가 아이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첩의 신분으로 감히 적모를 넘보겠다는 것이냐?”순식간에 감당하기 힘든 죄명이 씌워졌다.강시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연아를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신첩은… 감히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감히 없다?”송하윤이 냉소를 흘렸다.“내가 보기엔, 네 간이 제법 크구나.”그때,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주종현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방 안의 상황을 훑어보며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송하윤은 곧장 표정을 바꾸고는 억울함이 어린 얼굴로 다가갔다.“부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연아도 이제 글을 배울 나이가 된 것 같아, 제 곁에 두고 직접 가르치려 했습니다. 헌데 강 마님이 차마 놓지 못하네요.”주종현의 시선이 송하윤의 얼굴에서 천천히 옮겨져 강시아의 창백하고 떨리는 얼굴에 머물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연아는 아직 어리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자.”그가 입을 열었다.그 말은 그녀를 위한 변호였다.“연아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거라.”“예, 세자...”강시아는 사면을 받은 듯, 연아를 꼭 끌어안고 허둥지둥 그곳을 벗어났다.하지만 이유도 없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8화

    그녀는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그가 오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만나지 않았다.그가 사람을 보내 물건을 전해도 그녀는 그저 명옥에게 맡겨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창고에 넣어 두게 했다.송하윤을 처음 본 것은, 송학당의 뜰이었다.그날, 송하윤은 큰 마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웃음이 가득했다.그녀는 예법에 따라 들어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신첩, 큰 마님과 송 아가씨께 문안드립니다.”허리를 굽힌 그녀의 태도는 땅에 닿을 듯 낮고도 겸손했다.그 순간, 날카로운 시선 하나가 곧장 그녀를 꿰뚫었다.노골적인 탐색과 적의가 담긴 눈길이었다.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 사람이 강 마님인가요?”송하윤의 목소리는 꿀을 입힌 듯 달콤했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독기가 스며 있었다.“생김새가 제법 괜찮긴 하네요. 그러니 사촌 오라버니를 그토록 홀려 놓았겠지요.”큰 마님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눌렀다.“윤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강시아의 심장이 툭 하고 가라앉았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연아의 손을 꽉 잡았다.연아 역시 그 기운을 느낀 듯 작은 몸을 더욱 그녀의 뒤로 숨겼다.그 순간, 그녀는 또렷이 깨달았다.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렇게 가문이 높고, 곧 세자부인이 될 송하윤과 무엇으로 맞설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물러나는 것뿐이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물러나 다투지 않고 빼앗으려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그러나 때로는 물러난다고 해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태후의 생신을 맞아 각 가문은 축하 예물을 바쳐야 했다.송하윤은 미래의 세자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이 일을 도맡았다. 그리고 강시아를 불러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강 마님 자수 솜씨가 이 집에서 가장 좋다고 들었어요. 이 ‘송학연년도’는 강 마님에게 맡길게요. 우리 영국공부를 위해 힘을 보태는 셈이니, 잘 부탁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7화

    그 착각은 거울 속 꽃과 물 위의 달처럼, 손을 대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꿈처럼 흐르던 삼 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영국공부 세자, 주종현이 혼인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그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연아의 작은 옷에 노란 영춘화를 수놓고 있었다.바늘끝이 그대로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번져 나와 연한 꽃잎을 물들였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일부러 그녀가 듣도록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하녀들의 말만이 맴돌았다.“들었어? 송 가 아가씨래.”“그 송 아가씨는 우리 세자의 사촌이래. 태후 마마께서도 칭찬하신 재녀라잖아.”“이게 바로 문벌이 맞는 혼사고, 친가끼리 더 가까워지는 거지.”“그렇지 뭐. 예전에 약혼까지 했었다잖아. 송 가에 일이 생겨서 깨졌을 뿐이지…”“이젠 송 가 장자가 출세했으니, 이 혼사도 다시 올라온 거고.”그들의 말은 바늘처럼 하나하나 그녀를 찔렀다.모두가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강 마님의 좋은 날은 이제 끝났다고.그 유일했던 총애도 곧 정실부인에게로 돌아갈 거라고.총애라니. 강시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애초에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그저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쥘 수 없는 하나의 첩일 뿐이었다.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 연아가 무사히,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뿐이었다.혼례 날짜가 정해진 뒤로 이상하게도 주종현은 오히려 더 자주 그녀의 뜰을 찾았다.예전처럼 그저 조용히 앉아 있거나 연아를 놀아 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그는 무언가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동쪽 거리의 새로 생긴 과자, 서쪽 장인의 손에서 나온 적금 비녀, 남쪽에서 막 들어온 신선한 여지.마치 무언가를 메우려는 듯, 혹은 달래려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짙어졌다.그리고 이 “총애”는 곧 큰 마님의 귀에 들어갔다.그날, 그녀는 송학당으로 불려갔다.큰 마님은 상석에 앉아 염주를 굴리며 눈길조차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40화

    화선이 멀리까지 떠난 뒤에야 유한석은 손에 들고있던 술을 그대로 물속에 따라 버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서는 몇 명의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탁자 앞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잔을 돌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송이당이 잔을 들며 말했다.“주 세자, 어머니께서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습니다. 세자께서 집영위에 임명되시는 그날, 다시 성대한 경공연을 열어드리겠습니다!”곁의 누군가가 장난스레 맞장구쳤다.“경공연 한 번으로 되겠습니까? 최소한 미인 열댓 명은 있어야 하겠지요!”유한석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54화

    설강이 연아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마님, 지금 집안에서는… 마님이 무슨 대장군의 외손녀라며 떠들어 대던데요!”강시아는 이미 마음을 가라앉힌 뒤였다.이렇게까지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는 것은,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반드시 그 신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깔린 뜻이었다. 이것이 과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새 신분을 덧씌워주는 것인지, 아니면 더 값비싼 장기말로 만들려는 것인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설강은 강시아가 말이 없자 재빨리 문을 닫고 속삭였다.“마님, 그래도… 떠나실 생각이옵니까?”가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42화

    주온청은 서 유모의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제가 당신네 대공자 때문에 이랬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서 유모는 한 걸음 더 몰아붙였다.“저희 아가씨께서는 집에서 혼례 준비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신데 어찌하여 금명호까지 오셨단 말입니까! 그리 한가한 줄 아십니까?”그녀는 품에서 청첩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주 가의 셋째 아가씨께서 보낸 청첩인데 한 번 보십시오. 주 가의 하인이 가져왔으니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옵니다!”강시아는 차갑게 냉소를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68화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은 꽤나 모험적인 일이었지만 태후 일당의 원기를 가장 쉽게 꺾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주종현은 부드럽게 조서를 덮고서는 자리에 있는 관리들을 하나하나 훑어갔다.“대인들께서는 스스로 운이 따라주기를 바라십시오. 누구의 집에서든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나왔다면 저는 여기서 대인들의 생명줄이 길기를 빌겠습니다.”이제야 모든 관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이 되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만이었던 것이다.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불거지고 하나를 끌어내면 또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래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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