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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비비며 정성껏 수놓은 짐승의 머리에 마지막 바늘을 꿰맸다. 그 모습에 설강은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사옵니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자수 위로 쏟아지자 자수의 결 사이로 은은히 금빛이 번져 나왔다.

“어머, 금빛이 드러나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금실 한 올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수놓을 때 금실을 조금 섞어 넣었다. 혹여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니 의외로 참 근사하구나.”

설강은 진심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님의 솜씨는 궁궐의 수녀들마저 감히 따르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강시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답했다.

“내 바느질은 본디 궁중에서 배운 상궁께서 일러 준 것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번 생신 예물이 끝난 뒤에 네게도 작은 배저고리를 하나 수놓아 주마.”

설강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마님,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을…”

강시아는 더는 놀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금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저께 다녀온 그 자수방에 다시 가서 사 오너라.”

“예.”

설강은 문가에 이르렀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 유모에게 들러 이 사실을 전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장소를 바꾸자. 내가 직접 같이 가마.”

설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고 유모가 눈을 부릅떴다.

“겨우 며칠 지냈다고 벌써 믿음이 생긴 것이냐?”

설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을 함께 지내며 그녀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강시아는 새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곁방에 틀어박혀 수를 놓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딸아이의 글공부까지 봐주었다. 심지어는 말 한마디도 곱게 하였고, 아이 또한 어찌나 예의 바른지. 집안의 가장 어린 일곱 째 아가씨도 연아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인데 제멋대로 굴어 정 씨 댁의 뜰에서는 하녀들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고 유모는 설강을 데리고 자수방 두어 곳을 더 들렀다. 하나 놀랍게도 금실 값은 강시아가 다니는 그곳보다 훨씬 비쌌다. 설강은 끝내 강시아의 편을 들며 중얼거렸다.

“만약 강 마님께서 정말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 하셨다면 진즉에 은전 주머니를 제 손에 쥐셨을 것이옵니다. 비록 예전에는 가까이 모신 적 없어 잘 몰랐지만 두세 번 뵈니 알 수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따뜻하고 온화하시옵니다. 그러니 어제도 명옥이 뻔뻔스럽게 와서 도와달라 사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만만해 보이니 얕잡아본 것뿐이옵니다.”

고 유모는 이마를 찌르듯 그녀의 머리를 톡하고 치며 말했다.

“세상이 다 너처럼 속이 훤하면 이 집안에 나쁜 자가 어디 있겠느냐?”

설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번의 자수방으로 가서 금실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수틀 위의 서수는 이미 목덜미의 흰 털이 반쯤 수놓아져 있는 뒤였다.

그와 동시에, 강시아는 무언가를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다.

“마님, 어찌하여 잘라내시는 것이옵니까?”

“여기에는 금실이 어울리지 않으니 은실을 넣어야겠다.”

강시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바늘 끝으로 가는 금실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레 걷어냈다. 설강은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고 유모는 그녀와 점포 주인이 한통속이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하십시오. 날이 어두우니 자칫하면 눈이 상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제야 강시아가 시큰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네 말이 옳다. 성급히 손을 놀리다간 다른 실까지 잘려 이 부분을 몽땅 망칠 수 있을 테니. 연아는 어디 있느냐? 오늘은 웬일로 나를 졸라대지 않는구나.”

설강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아왔을 땐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하 유모도 계시지 않았고요. 아마 바깥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곧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황혼빛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강시아의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서늘해졌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가서 찾아봐야겠구나.”

영국공부는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얼마 전 연아가 그녀를 데리고 은전을 묻어두었다던 곳도 서쪽 담장 근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폐가 한 채도 있었다.

지난 생에는 그 숲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 유모가 사직을 청할 때에도 눈에 띌 만한 기이한 징조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 연아와 함께 돌아왔을 때 하 유모의 이상한 기색조차 그저 비밀이 발각된 탓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하고 있었다. 명옥을 경계하면서도 정작 하 유모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시아는 황급히 대나무 숲으로 달려갔는데, 지난번 연아와 함께 은전을 발견했던 그 자리에 풀린 흙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설강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아침에 집을 나설 무렵, 하 유모가 연아에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아가씨에게 볶아 주겠사옵니다.”

“지금쯤이면 뒤주방에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나 강시아의 머릿속은 끔찍한 장면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연아가 핏물을 토하며 시들어가던 모습, 송하윤이 차갑게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연못에 던져버리라 명하던 모습…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혀끝을 세게 깨물며 다시금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미 다시 태어났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설강, 너는 주방으로 가 보거라. 나는 화방으로 갈 테니. 하 유모의 남편…”

그제야 설강은 강시아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외쳤다.

“마님! 괜찮으시옵니까?”

그러자 강시아는 재빨리 손을 뿌리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괘, 괜찮다. 어서 가 보거라!”

강시아는 지난 생 하 유모와의 일들을 되새기며 화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었다. 하 유모의 남편은 국공부의 화공이었으나 골수까지 패가망신한 노름꾼이었기에, 모란을 키우는 솜씨 하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 하 유모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은전을 꾸어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이 지나자 더는 돈을 빌리러 오지 않았다. 사직을 청한 것도, 바로 송하윤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이었는데, 한 그 즈음부터, 하 유모는 새 옷을 갈아입고 은장식까지 달고 다녔다.

강시아의 머릿속은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기억들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곧장 방향을 틀어 자기가 사는 뜰로 돌아왔다.

그녀의 뜰은 크지 않았다. 한 칸의 본채와, 그 양옆으로 귀방이 나란히 있었고 왼쪽에는 또 두 칸의 곁방이 붙어 있었다.

하 유모는 늘 오른쪽 귀방에서 거처했다. 어릴 적에 연아는 그녀와 함께 지냈고 자라서는 자주 어머니의 침상으로 기어들어와 함께 잠들곤 했다. 왼쪽 귀방은 지금 자수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강시아는 갑자기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하 유모는 무엇인가를 허둥지둥 상자에 쑤셔 넣다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혔다.

“쿵, 쿵”

두어 차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상자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마님, 어, 어찌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하 유모의 눈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침상에 누운 연아에게로 향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곤히 잠들었사옵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뛰놀아 지쳐서 그런 걸 겁니다!”

강시아는 한 발, 또 한 발 다가섰다.

“잠든 것이냐, 아니면 약을 먹인 것이냐?”

그녀의 말에 하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가? 어찌 제가 아가씨께 약을 쓰겠사옵니까?”

“남몰래 재물을 빼돌리려 했다면 들키더라도 아이의 장난으로 돌릴 수 있을 터. 흙을 파헤치다 우연히 찾았다면서 말이지.”

하 유모는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그녀가 눈치챈 것이다.

“하나 네 죄는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은 데 있다!”

강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하 유모는 급히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 남편은 겨우 오십 냥에 손댔을 뿐이옵니다! 도박판의 무리들이 그의 손을 자르겠다 위협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하기를 그 상자는 이미 썩었으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하여 그만 그른 마음을 품은 것이옵니다. 마님, 부디 용서하시고 세자께만은 알리지 마시옵소서!”

강시아는 연아의 곁으로 가 아이의 손목을 살며시 짚었다. 규칙적이고 힘 있는 맥박이 또렷이 전해지자 그녀는 그제야 가라앉은 숨을 내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억눌렀다. 그리고 하 유모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꺼내거라.”

하 유모는 다리를 떨며 상자 속에서 은전을 한 덩이를 꺼내왔다. 열 냥짜리 은괴 하나였다.

강시아가 손에 들어 올려 뒤집자 선제의 연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관부의 인장까지 뚜렷이 남아 있었으니 이것은 무려 삼십 년 전 조정의 창고에서 풀린 관영 은전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은전의 존재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큰 마님만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작년에 큰 마님의 뜰을 새로 고친 것도 이 은전을 꺼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삼십 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이 은전의 출처가, 결코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시아의 입가에는 냉혹한 웃음이 흘렀다.

“이 은전에는 관부의 인장과 연호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관영 창고에서 찍어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삼십 년 전에 풀린 은전인데 아직도 이렇게 반짝이다니... 너희는 정말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하 유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녀는 황급히 무릎으로 기어와 강시아의 발끝에 엎드렸다.

“마님,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십시오!”

강시아의 시선은 하 유모에게서 은전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참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금주 땅에 두 달 내리 쏟아지던 장마로 인해 농토가 무너져 내리고 가을 추수가 전멸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하필 주종현은 그 시기에 송하윤과 혼인을 올렸고 하늘로 치솟은 곡가 때문에 하객들은 밥 한 끼조차 채우지 못할 뻔했다.

만약 돈이 있다면 지금 곡식을 사들여 두었다가 석 달 뒤 국공부에 되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국공부를 떠난다 한들 평생 굶주릴 필요는 없을 텐데.

강시아는 은전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단호히 속삭였다.

“살고 싶으냐?”

하 유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고 싶사옵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오너라.”

설강이 돌아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회랑 아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강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아는 아무렇지 않다. 괜히 헛걸음 하게 해서 너만 고생 시켰구나.”

설강은 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미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땔나무 방에서 잠들었는데 어머니께서 한참을 찾아 헤매셨지요. 결국 모두가 찾기를 포기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를 찾아낸 건 어머니였사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저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긴 했지만요.”

강시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줄곧 큰 마님의 뜰에서 지내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는…”

설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희 어머니도 고 유모와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셨는데, 고 유모 말씀으로는 제 어머니께서는 몸을 던져 주인을 지키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큰 마님께서는 부모 잃은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뜰에 두셨던 것이옵니다.”

강시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큰 마님의 뜰에서는 일등 시녀였는데 지금은 내 이 작은 뜰에 배속되었구나…”

“사실은…”

설강은 잠시 머뭇거리며 강시아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안에 있던 하 유모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설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자 댁에서 난 소리 같사옵니다.”

강시아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가 보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그 한 마디 비명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인근의 뜰들은 모두 이미 따로 분가한 집안 젊은 자제들의 거처였다.

강시아가 도착했을 때,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넷째 아가씨 주은혜도 잇따라 도착해 있었다. 주종현의 얼굴은 철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명옥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뜰 마당에 무릎 꿇고 있었고 이마에는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주은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장 언니의 팔을 잡았다.

“셋째 언니, 여긴 큰 오라버니의 뜰입니다.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온청은 송하윤을 위해 치미는 분노에 코끝이 다 비뚤어질 정도였다.

“난 안 간다! 저 천한 계집 것들이 하나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하윤 언니를 위해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주겠느냐?”

송하윤이 곧 이 집에 들어오려는 이때, 이런 난동이 벌어지다니. 혹여라도 이 계집 것에게 기회를 빼앗긴다면 주종현이 어찌 송하윤을 볼 낯이 있겠는가!

“세자 저하, 부디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사옵니다!”

명옥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흐느꼈다.

강시아는 인파 뒤에 서서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냉소를 흘렸다. 지난 생애 자신은 명옥을 온전히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가장 신뢰하던 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번 생의 죄악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 끝 모를 탐욕이 부른 업보일 뿐이다!

주온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강시아 곁에 붙어 있던 시녀가 아니더냐. 누구의 허락을 받았기에 감히 주인의 침방을 넘본 것이냐!”

명옥은 몸을 움츠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려 인파 뒤에 선 강시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강 마님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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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난옥각.폐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로 드리운 명황색 장막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지 못했다.황후는 기쁨에 찬 눈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폐하,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장비.”황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선발을 거쳐 입궁한 후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폐하가 자신을 ‘장비’라 부르다니.아주 짧은 찰나였다. 폐하의 눈빛은 이미 또렷해져 있었다. 그는 침상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황후,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느냐?”황후는 전 내관이 건네준 인삼차를 받아 들고 다가왔다.“사흘이나 혼수에 계셨습니다. 즉위하신 뒤로 쉼 없이 국사를 돌보시니 기혈이 크게 허해지셨다고 합니다. 태의가 더는 과로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폐하는 낮게 응답한 뒤, 곧바로 물었다.“주종현과 종도치는 어디 있지. 불찰친왕은 잡았느냐?”전 내관이 머뭇거리다 말했다.“주 대인께서… 불찰친왕에게 접응자가 있어 놓쳤다고 하셨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벌하실 자는 벌하시되 성체만은 상하게 하지 마옵소서.”폐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전 내관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그때 황제는 이미 황후의 손을 짚고 일어선 뒤였다.“주종현과 진도림을 들라 하라.”황후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황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겉옷을 걸친 채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그의 등을 바라보며 황후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곁의 상궁이 부축하며 속삭였다.“폐하께서는 사직을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우륵의 일도 중대한 시기이니 폐하를 더 살펴드리면 폐하께서도 황후 마마의 정성을 아실 것입니다.”황후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사직을 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나는 그저 성체가 걱정될 뿐이다.”최 태의가 자신에게 사실을 모두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과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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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께서 용안이 노하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일이… 영국공부와 관련이라도 있다면?”영국공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어, 어찌 그게 우리와…”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주씨 큰 마님 뒤에 숨다시피 선 송하윤에게 꽂혔다.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켰다.“내 이럴 줄 알았다. 이 계집은 두어선 안 된다. 제 집안을 모조리 망쳐놓고 이제는 우리 집까지 재수 없게 하려는 게냐!”송하윤은 주씨 큰 마님의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움켜쥐고서야 겨우 표정을 지워냈다.지금 자신의 처지가 누구 때문인지,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저는 스스로 죄를 짊어진 몸임을 압니다. 매일 조모님의 작은 불당에서 경을 외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업보를 덜기 위해서입니다.”숨이 떨렸다.“오라버니가 어리석어 그릇된 주인을 따랐기에 화를 불렀습니다. 그는 이미 벌을 받았습니다. 남은 죄는… 제가 청등 아래에서 조금씩 갚겠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세상에 휩쓸린 가엾은 고아 같았다.주씨 큰 마님은 아들과 손자를 번갈아 보며 숨이 막힌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너희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내가 있는 한, 감히 하윤이를 건드릴 생각은 말아라!”그때 금위군이 두 손을 모아 아뢰었다.“대인, 현재까지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영국공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형부 대옥 같은 곳을 탈옥시키는 일에 어린 아가씨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그는 아들을 보며 덧붙였다.“오늘 아침 네 할머니께서 동산 장자에 간 일도 들었다. 허나 나는 네 할머니 말이 옳다 생각한다. 궁중 상황이 불투명한 지금, 네가 맹시은과 하루라도 빨리 혼인해야 한다. 부인을 맞고 맹 가를 우군으로 삼아야 두 아이도 정식으로 주 씨 족보에 올릴 수 있다. 일거삼득이지 않느냐?”그러나 주씨 큰 마님은 고개를 저었다.“나는 반대다. 경성에 어찌 저 아이 하나뿐이더냐. 죽은 줄 알고 도망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18화

    맹시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진국공부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스며든 공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어머니!”연아는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더니 끝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 역시 겁에 질려 있었고 잠만 들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아설은 한시도 떨어지지 못한 채 아이 곁을 지켰다.주종현은 딸의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연아, 무서워하지 마.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왔잖니.”그러고는 맹시은을 바라보았다.“불찰친왕이 형부 대옥을 탈출한 건,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을 벗어났다면 우리가 손쓸 틈도 없이 멀리 달아날 수도 있었지. 그런데도 굳이 동산 장자에 가서 너를 납치했다.”그 말에야 맹시은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굳어 있던 목을 조심스레 돌리며 입을 열었다.“동산 장자의 사람들은 전부 주부 소속 노복이에요. 저를 따라간 맹 가 하인들은 고작 여섯뿐이었고 그들은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헌데… 변수 하나가 있었죠.”어제 장자에 다녀갔던 송하윤.주종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송하윤과 관련 있다면 이번엔 누구도 그녀를 감싸주지 못한다.”맹시은은 농가 마당에서 보았던 파란 천 보자기를 떠올렸다.“아침에 누군가 마당에 파란 보자기를 던졌는데 참깨전병 같았어요.”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그렇게 이른 시간에 고작 참깨전병 하나를 보내려고 온 걸까요? 불찰이 저를 끌고 농가에 숨었을 때… 길을 세어 가더군요.”목소리가 낮아졌다.“마치 누군가 미리 그곳을 답사해 두고 거기 숨으라고 알려준 것처럼요.”주종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폐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다. 이 일은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거라.”주종현은 영국공부 송학당으로 돌아갔다.송하윤은 주씨 큰 마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큰 마님의 눈꼬리 주름이 두 줄은 더 늘어날 만큼 웃음이 번져 있었다.그러나 주종현이 굳은 얼굴로 들어서자 송학당 안은 순식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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