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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비비며 정성껏 수놓은 짐승의 머리에 마지막 바늘을 꿰맸다. 그 모습에 설강은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사옵니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자수 위로 쏟아지자 자수의 결 사이로 은은히 금빛이 번져 나왔다.

“어머, 금빛이 드러나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금실 한 올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수놓을 때 금실을 조금 섞어 넣었다. 혹여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니 의외로 참 근사하구나.”

설강은 진심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님의 솜씨는 궁궐의 수녀들마저 감히 따르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강시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답했다.

“내 바느질은 본디 궁중에서 배운 상궁께서 일러 준 것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번 생신 예물이 끝난 뒤에 네게도 작은 배저고리를 하나 수놓아 주마.”

설강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마님,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을…”

강시아는 더는 놀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금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저께 다녀온 그 자수방에 다시 가서 사 오너라.”

“예.”

설강은 문가에 이르렀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 유모에게 들러 이 사실을 전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장소를 바꾸자. 내가 직접 같이 가마.”

설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고 유모가 눈을 부릅떴다.

“겨우 며칠 지냈다고 벌써 믿음이 생긴 것이냐?”

설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을 함께 지내며 그녀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강시아는 새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곁방에 틀어박혀 수를 놓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딸아이의 글공부까지 봐주었다. 심지어는 말 한마디도 곱게 하였고, 아이 또한 어찌나 예의 바른지. 집안의 가장 어린 일곱 째 아가씨도 연아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인데 제멋대로 굴어 정 씨 댁의 뜰에서는 하녀들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고 유모는 설강을 데리고 자수방 두어 곳을 더 들렀다. 하나 놀랍게도 금실 값은 강시아가 다니는 그곳보다 훨씬 비쌌다. 설강은 끝내 강시아의 편을 들며 중얼거렸다.

“만약 강 마님께서 정말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 하셨다면 진즉에 은전 주머니를 제 손에 쥐셨을 것이옵니다. 비록 예전에는 가까이 모신 적 없어 잘 몰랐지만 두세 번 뵈니 알 수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따뜻하고 온화하시옵니다. 그러니 어제도 명옥이 뻔뻔스럽게 와서 도와달라 사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만만해 보이니 얕잡아본 것뿐이옵니다.”

고 유모는 이마를 찌르듯 그녀의 머리를 톡하고 치며 말했다.

“세상이 다 너처럼 속이 훤하면 이 집안에 나쁜 자가 어디 있겠느냐?”

설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번의 자수방으로 가서 금실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수틀 위의 서수는 이미 목덜미의 흰 털이 반쯤 수놓아져 있는 뒤였다.

그와 동시에, 강시아는 무언가를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다.

“마님, 어찌하여 잘라내시는 것이옵니까?”

“여기에는 금실이 어울리지 않으니 은실을 넣어야겠다.”

강시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바늘 끝으로 가는 금실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레 걷어냈다. 설강은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고 유모는 그녀와 점포 주인이 한통속이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하십시오. 날이 어두우니 자칫하면 눈이 상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제야 강시아가 시큰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네 말이 옳다. 성급히 손을 놀리다간 다른 실까지 잘려 이 부분을 몽땅 망칠 수 있을 테니. 연아는 어디 있느냐? 오늘은 웬일로 나를 졸라대지 않는구나.”

설강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아왔을 땐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하 유모도 계시지 않았고요. 아마 바깥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곧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황혼빛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강시아의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서늘해졌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가서 찾아봐야겠구나.”

영국공부는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얼마 전 연아가 그녀를 데리고 은전을 묻어두었다던 곳도 서쪽 담장 근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폐가 한 채도 있었다.

지난 생에는 그 숲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 유모가 사직을 청할 때에도 눈에 띌 만한 기이한 징조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 연아와 함께 돌아왔을 때 하 유모의 이상한 기색조차 그저 비밀이 발각된 탓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하고 있었다. 명옥을 경계하면서도 정작 하 유모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시아는 황급히 대나무 숲으로 달려갔는데, 지난번 연아와 함께 은전을 발견했던 그 자리에 풀린 흙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설강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아침에 집을 나설 무렵, 하 유모가 연아에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아가씨에게 볶아 주겠사옵니다.”

“지금쯤이면 뒤주방에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나 강시아의 머릿속은 끔찍한 장면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연아가 핏물을 토하며 시들어가던 모습, 송하윤이 차갑게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연못에 던져버리라 명하던 모습…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혀끝을 세게 깨물며 다시금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미 다시 태어났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설강, 너는 주방으로 가 보거라. 나는 화방으로 갈 테니. 하 유모의 남편…”

그제야 설강은 강시아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외쳤다.

“마님! 괜찮으시옵니까?”

그러자 강시아는 재빨리 손을 뿌리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괘, 괜찮다. 어서 가 보거라!”

강시아는 지난 생 하 유모와의 일들을 되새기며 화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었다. 하 유모의 남편은 국공부의 화공이었으나 골수까지 패가망신한 노름꾼이었기에, 모란을 키우는 솜씨 하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 하 유모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은전을 꾸어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이 지나자 더는 돈을 빌리러 오지 않았다. 사직을 청한 것도, 바로 송하윤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이었는데, 한 그 즈음부터, 하 유모는 새 옷을 갈아입고 은장식까지 달고 다녔다.

강시아의 머릿속은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기억들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곧장 방향을 틀어 자기가 사는 뜰로 돌아왔다.

그녀의 뜰은 크지 않았다. 한 칸의 본채와, 그 양옆으로 귀방이 나란히 있었고 왼쪽에는 또 두 칸의 곁방이 붙어 있었다.

하 유모는 늘 오른쪽 귀방에서 거처했다. 어릴 적에 연아는 그녀와 함께 지냈고 자라서는 자주 어머니의 침상으로 기어들어와 함께 잠들곤 했다. 왼쪽 귀방은 지금 자수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강시아는 갑자기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하 유모는 무엇인가를 허둥지둥 상자에 쑤셔 넣다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혔다.

“쿵, 쿵”

두어 차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상자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마님, 어, 어찌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하 유모의 눈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침상에 누운 연아에게로 향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곤히 잠들었사옵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뛰놀아 지쳐서 그런 걸 겁니다!”

강시아는 한 발, 또 한 발 다가섰다.

“잠든 것이냐, 아니면 약을 먹인 것이냐?”

그녀의 말에 하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가? 어찌 제가 아가씨께 약을 쓰겠사옵니까?”

“남몰래 재물을 빼돌리려 했다면 들키더라도 아이의 장난으로 돌릴 수 있을 터. 흙을 파헤치다 우연히 찾았다면서 말이지.”

하 유모는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그녀가 눈치챈 것이다.

“하나 네 죄는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은 데 있다!”

강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하 유모는 급히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 남편은 겨우 오십 냥에 손댔을 뿐이옵니다! 도박판의 무리들이 그의 손을 자르겠다 위협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하기를 그 상자는 이미 썩었으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하여 그만 그른 마음을 품은 것이옵니다. 마님, 부디 용서하시고 세자께만은 알리지 마시옵소서!”

강시아는 연아의 곁으로 가 아이의 손목을 살며시 짚었다. 규칙적이고 힘 있는 맥박이 또렷이 전해지자 그녀는 그제야 가라앉은 숨을 내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억눌렀다. 그리고 하 유모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꺼내거라.”

하 유모는 다리를 떨며 상자 속에서 은전을 한 덩이를 꺼내왔다. 열 냥짜리 은괴 하나였다.

강시아가 손에 들어 올려 뒤집자 선제의 연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관부의 인장까지 뚜렷이 남아 있었으니 이것은 무려 삼십 년 전 조정의 창고에서 풀린 관영 은전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은전의 존재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큰 마님만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작년에 큰 마님의 뜰을 새로 고친 것도 이 은전을 꺼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삼십 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이 은전의 출처가, 결코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시아의 입가에는 냉혹한 웃음이 흘렀다.

“이 은전에는 관부의 인장과 연호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관영 창고에서 찍어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삼십 년 전에 풀린 은전인데 아직도 이렇게 반짝이다니... 너희는 정말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하 유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녀는 황급히 무릎으로 기어와 강시아의 발끝에 엎드렸다.

“마님,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십시오!”

강시아의 시선은 하 유모에게서 은전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참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금주 땅에 두 달 내리 쏟아지던 장마로 인해 농토가 무너져 내리고 가을 추수가 전멸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하필 주종현은 그 시기에 송하윤과 혼인을 올렸고 하늘로 치솟은 곡가 때문에 하객들은 밥 한 끼조차 채우지 못할 뻔했다.

만약 돈이 있다면 지금 곡식을 사들여 두었다가 석 달 뒤 국공부에 되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국공부를 떠난다 한들 평생 굶주릴 필요는 없을 텐데.

강시아는 은전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단호히 속삭였다.

“살고 싶으냐?”

하 유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고 싶사옵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오너라.”

설강이 돌아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회랑 아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강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아는 아무렇지 않다. 괜히 헛걸음 하게 해서 너만 고생 시켰구나.”

설강은 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미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땔나무 방에서 잠들었는데 어머니께서 한참을 찾아 헤매셨지요. 결국 모두가 찾기를 포기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를 찾아낸 건 어머니였사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저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긴 했지만요.”

강시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줄곧 큰 마님의 뜰에서 지내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는…”

설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희 어머니도 고 유모와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셨는데, 고 유모 말씀으로는 제 어머니께서는 몸을 던져 주인을 지키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큰 마님께서는 부모 잃은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뜰에 두셨던 것이옵니다.”

강시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큰 마님의 뜰에서는 일등 시녀였는데 지금은 내 이 작은 뜰에 배속되었구나…”

“사실은…”

설강은 잠시 머뭇거리며 강시아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안에 있던 하 유모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설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자 댁에서 난 소리 같사옵니다.”

강시아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가 보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그 한 마디 비명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인근의 뜰들은 모두 이미 따로 분가한 집안 젊은 자제들의 거처였다.

강시아가 도착했을 때,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넷째 아가씨 주은혜도 잇따라 도착해 있었다. 주종현의 얼굴은 철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명옥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뜰 마당에 무릎 꿇고 있었고 이마에는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주은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장 언니의 팔을 잡았다.

“셋째 언니, 여긴 큰 오라버니의 뜰입니다.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온청은 송하윤을 위해 치미는 분노에 코끝이 다 비뚤어질 정도였다.

“난 안 간다! 저 천한 계집 것들이 하나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하윤 언니를 위해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주겠느냐?”

송하윤이 곧 이 집에 들어오려는 이때, 이런 난동이 벌어지다니. 혹여라도 이 계집 것에게 기회를 빼앗긴다면 주종현이 어찌 송하윤을 볼 낯이 있겠는가!

“세자 저하, 부디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사옵니다!”

명옥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흐느꼈다.

강시아는 인파 뒤에 서서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냉소를 흘렸다. 지난 생애 자신은 명옥을 온전히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가장 신뢰하던 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번 생의 죄악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 끝 모를 탐욕이 부른 업보일 뿐이다!

주온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강시아 곁에 붙어 있던 시녀가 아니더냐. 누구의 허락을 받았기에 감히 주인의 침방을 넘본 것이냐!”

명옥은 몸을 움츠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려 인파 뒤에 선 강시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강 마님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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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주종현이 막 집으로 돌아오자 콩뼈가 대문 밖까지 달려 나와 그를 반겼다.강시아 일행이 없는 지금, 콩뼈는 그와 함께 지내며 매일 오후마다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주종현은 꼬리를 흔들며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작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너도 이렇게 날 기다리는데… 그녀는 왜 이틀도 기다려주지 못했을까?”콩뼈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발치에서 두어 바퀴를 돌더니 몸을 붙여오며 끙끙 소리를 냈다.마치 왜 자기를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듯했다.그때, 향 유모가 다가와 아뢰었다.“세자 저하, 작은 마님께서 오시랍니다.”고 유모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급히 말을 보탰다.“큰 마님께서 세자를 뵙고 싶어하시옵니다.”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주종현은 콩뼈를 데리고 곧장 작은 뜰로 향했다.“요즘 일이 많아 찾아뵙기 어려울 것 같구나.”“세자 저하…”고 유모가 뒤따라오려 하자 향 유모가 길을 막아섰다.“고 유모, 세자께서 바쁘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고 유모는 향 유모를 한번 바라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서 큰 마님의 뜰로 걸어갔다.이 일은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큰 마님은 송하윤을 영국공부로 데려와 주종현에게 받아들이라고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 씨뿐 아니라 영국공마저 크게 노했다. 지금 송 가는 진흙탕이었고 규수라면 경성에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송하윤을 고집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큰 마님은 아들과 며느리가 말을 듣지 않자 둘을 건너뛰고 곧장 손자에게로 향했다. 요구도 낮아져 정실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부탁했다. 이에 조 씨는 분을 삭이지 못해 거의 피를 토할 기세로 화를 냈다. 큰 마님이 송 가를 돕겠다며 손자까지 희생시키려 한다는 생각에 그녀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며느릿감을 물색하는 중이었다.정작 당사자인 아들은 집안을 피해 다니며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결국 주종현은 자신의 거처를 아예 작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1화

    “당신은 연아를 안기 힘들 테니 제가 안을게요.”아설은 연아를 문희에게 건네고서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저…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아람은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 주었다.“미안하다, 설아.”만약 자신이 그녀들을 데리고 행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산적을 마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아설은 그를 꽉 껴안으며 울먹였다.“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 큰 수염쟁이가 언니를 목 졸라 죽일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그녀는 옆방에 갇혀 있었다. 문은 걸쇠로 잠겨 있었기에 벽에 난 작은 구멍으로 겨우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급하고 답답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속을 태우며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아람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문희가 나섰다.“전하의 행렬과 함께라면 다른 건 몰라도 목숨 걱정은 없습니다.”아람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술만 다물고 아설의 어깨를 다독였다.“문희 아가씨 말이 맞다. 전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으니 더는 이런 위험은 없을 것이다.”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동쪽 하늘이 희끗하게 밝아오고 있었다.행관 밖 마차 행렬은 모두 정비되어 있었고 당기봉을 제외한 관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주목이던 시영은 당분간 자사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는지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틀 내내 공포에 떨었는데 성왕이 떠난다는 소식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 주목부에 잠입하는 바람에 그는 부인과 함께 침상 아래에 숨어 날이 밝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졸음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억지로 하품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눈물을 훔치던 순간, 성왕이 행관에서 걸어나왔다.잠시 멈칫하더니 시영은 얼른 달려가 말했다.“전하께서 이렇게 빨리 떠나시다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역시 조정 관리답게 대사는 술술 흘러나왔고 소매 끝에는 진짜 눈물까지 번져 있었다. 그 뒤의 관리들 역시 당황하여 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0화

    아정모는 원래 맹 노장군 휘하의 한 작은 장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맹 가의 아가씨인 맹청련과 서로 마음을 품고 있었다.맹 노장군은 경중의 명문세가의 아들을 사윗감으로 정했기에 맹 아가씨와 아 장군 두 사람은 사랑을 위해 혼례를 버리고 도망쳤었던 것이다.아정모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그의 얼굴빛 역시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지나간 장면들이 잔상처럼 스쳐갔다.소휘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씩 웃었다.“본왕이 하나 알려주지. 그 아이…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맹 노장군도 지금껏 찾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이야.”아정모의 동공이 떨렸다.“살아… 있다고요?”소휘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아 장군이 이 깊은 산에 숨어 지내면 그 아들은 결국 맹 노장군 손에 들어가고 말 것이지.”그 순간 아정모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탁자 위의 장계를 황급히 펼쳤다.“강세오....”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흔들렸다.“세오…!”“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소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본왕의 사람도 이어진 흔적을 놓쳤다. 전해지길 그는 올해 과거에 응시한다 하더군. 과거까지 두어 달 남았으니 그때면 경성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아정모는 이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지금 당장 경성으로 가겠습니다!”소휘가 그를 가로막았다.“아 장군, 급히 나서면 안 된다. 지금 경성으로 달려가는 것은 곧 맹 노장군에게자신이 살아있다 고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허! 저는 그를 무서워한 적이 없습니다!”“장군께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참고 살아오셨건만 이 잠시를 참지 못할리는 없겠지요.”아정모는 어금니를 악물었다.“성왕 전하께선 어떤 계책이 있기에 그러는 것입니까?”소휘는 가볍게 웃었다.“장군, 조급해 하지 말거라. 장군이 본왕을 따라 우주로 들어와 장군이 되어 준다면 본왕 역시 장군의 아들을 상처 하나 없이 돌려주겠다.”아정모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전하의 봉지가 우주인가 보군요. 거 참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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