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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비비며 정성껏 수놓은 짐승의 머리에 마지막 바늘을 꿰맸다. 그 모습에 설강은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사옵니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자수 위로 쏟아지자 자수의 결 사이로 은은히 금빛이 번져 나왔다.

“어머, 금빛이 드러나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금실 한 올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수놓을 때 금실을 조금 섞어 넣었다. 혹여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니 의외로 참 근사하구나.”

설강은 진심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님의 솜씨는 궁궐의 수녀들마저 감히 따르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강시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답했다.

“내 바느질은 본디 궁중에서 배운 상궁께서 일러 준 것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번 생신 예물이 끝난 뒤에 네게도 작은 배저고리를 하나 수놓아 주마.”

설강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마님,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을…”

강시아는 더는 놀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금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저께 다녀온 그 자수방에 다시 가서 사 오너라.”

“예.”

설강은 문가에 이르렀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 유모에게 들러 이 사실을 전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장소를 바꾸자. 내가 직접 같이 가마.”

설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고 유모가 눈을 부릅떴다.

“겨우 며칠 지냈다고 벌써 믿음이 생긴 것이냐?”

설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을 함께 지내며 그녀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강시아는 새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곁방에 틀어박혀 수를 놓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딸아이의 글공부까지 봐주었다. 심지어는 말 한마디도 곱게 하였고, 아이 또한 어찌나 예의 바른지. 집안의 가장 어린 일곱 째 아가씨도 연아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인데 제멋대로 굴어 정 씨 댁의 뜰에서는 하녀들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고 유모는 설강을 데리고 자수방 두어 곳을 더 들렀다. 하나 놀랍게도 금실 값은 강시아가 다니는 그곳보다 훨씬 비쌌다. 설강은 끝내 강시아의 편을 들며 중얼거렸다.

“만약 강 마님께서 정말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 하셨다면 진즉에 은전 주머니를 제 손에 쥐셨을 것이옵니다. 비록 예전에는 가까이 모신 적 없어 잘 몰랐지만 두세 번 뵈니 알 수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따뜻하고 온화하시옵니다. 그러니 어제도 명옥이 뻔뻔스럽게 와서 도와달라 사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만만해 보이니 얕잡아본 것뿐이옵니다.”

고 유모는 이마를 찌르듯 그녀의 머리를 톡하고 치며 말했다.

“세상이 다 너처럼 속이 훤하면 이 집안에 나쁜 자가 어디 있겠느냐?”

설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번의 자수방으로 가서 금실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수틀 위의 서수는 이미 목덜미의 흰 털이 반쯤 수놓아져 있는 뒤였다.

그와 동시에, 강시아는 무언가를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다.

“마님, 어찌하여 잘라내시는 것이옵니까?”

“여기에는 금실이 어울리지 않으니 은실을 넣어야겠다.”

강시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바늘 끝으로 가는 금실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레 걷어냈다. 설강은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고 유모는 그녀와 점포 주인이 한통속이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하십시오. 날이 어두우니 자칫하면 눈이 상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제야 강시아가 시큰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네 말이 옳다. 성급히 손을 놀리다간 다른 실까지 잘려 이 부분을 몽땅 망칠 수 있을 테니. 연아는 어디 있느냐? 오늘은 웬일로 나를 졸라대지 않는구나.”

설강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아왔을 땐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하 유모도 계시지 않았고요. 아마 바깥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곧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황혼빛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강시아의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서늘해졌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가서 찾아봐야겠구나.”

영국공부는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얼마 전 연아가 그녀를 데리고 은전을 묻어두었다던 곳도 서쪽 담장 근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폐가 한 채도 있었다.

지난 생에는 그 숲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 유모가 사직을 청할 때에도 눈에 띌 만한 기이한 징조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 연아와 함께 돌아왔을 때 하 유모의 이상한 기색조차 그저 비밀이 발각된 탓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하고 있었다. 명옥을 경계하면서도 정작 하 유모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시아는 황급히 대나무 숲으로 달려갔는데, 지난번 연아와 함께 은전을 발견했던 그 자리에 풀린 흙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설강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아침에 집을 나설 무렵, 하 유모가 연아에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아가씨에게 볶아 주겠사옵니다.”

“지금쯤이면 뒤주방에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나 강시아의 머릿속은 끔찍한 장면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연아가 핏물을 토하며 시들어가던 모습, 송하윤이 차갑게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연못에 던져버리라 명하던 모습…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혀끝을 세게 깨물며 다시금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미 다시 태어났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설강, 너는 주방으로 가 보거라. 나는 화방으로 갈 테니. 하 유모의 남편…”

그제야 설강은 강시아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외쳤다.

“마님! 괜찮으시옵니까?”

그러자 강시아는 재빨리 손을 뿌리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괘, 괜찮다. 어서 가 보거라!”

강시아는 지난 생 하 유모와의 일들을 되새기며 화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었다. 하 유모의 남편은 국공부의 화공이었으나 골수까지 패가망신한 노름꾼이었기에, 모란을 키우는 솜씨 하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 하 유모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은전을 꾸어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이 지나자 더는 돈을 빌리러 오지 않았다. 사직을 청한 것도, 바로 송하윤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이었는데, 한 그 즈음부터, 하 유모는 새 옷을 갈아입고 은장식까지 달고 다녔다.

강시아의 머릿속은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기억들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곧장 방향을 틀어 자기가 사는 뜰로 돌아왔다.

그녀의 뜰은 크지 않았다. 한 칸의 본채와, 그 양옆으로 귀방이 나란히 있었고 왼쪽에는 또 두 칸의 곁방이 붙어 있었다.

하 유모는 늘 오른쪽 귀방에서 거처했다. 어릴 적에 연아는 그녀와 함께 지냈고 자라서는 자주 어머니의 침상으로 기어들어와 함께 잠들곤 했다. 왼쪽 귀방은 지금 자수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강시아는 갑자기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하 유모는 무엇인가를 허둥지둥 상자에 쑤셔 넣다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혔다.

“쿵, 쿵”

두어 차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상자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마님, 어, 어찌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하 유모의 눈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침상에 누운 연아에게로 향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곤히 잠들었사옵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뛰놀아 지쳐서 그런 걸 겁니다!”

강시아는 한 발, 또 한 발 다가섰다.

“잠든 것이냐, 아니면 약을 먹인 것이냐?”

그녀의 말에 하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가? 어찌 제가 아가씨께 약을 쓰겠사옵니까?”

“남몰래 재물을 빼돌리려 했다면 들키더라도 아이의 장난으로 돌릴 수 있을 터. 흙을 파헤치다 우연히 찾았다면서 말이지.”

하 유모는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그녀가 눈치챈 것이다.

“하나 네 죄는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은 데 있다!”

강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하 유모는 급히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 남편은 겨우 오십 냥에 손댔을 뿐이옵니다! 도박판의 무리들이 그의 손을 자르겠다 위협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하기를 그 상자는 이미 썩었으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하여 그만 그른 마음을 품은 것이옵니다. 마님, 부디 용서하시고 세자께만은 알리지 마시옵소서!”

강시아는 연아의 곁으로 가 아이의 손목을 살며시 짚었다. 규칙적이고 힘 있는 맥박이 또렷이 전해지자 그녀는 그제야 가라앉은 숨을 내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억눌렀다. 그리고 하 유모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꺼내거라.”

하 유모는 다리를 떨며 상자 속에서 은전을 한 덩이를 꺼내왔다. 열 냥짜리 은괴 하나였다.

강시아가 손에 들어 올려 뒤집자 선제의 연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관부의 인장까지 뚜렷이 남아 있었으니 이것은 무려 삼십 년 전 조정의 창고에서 풀린 관영 은전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은전의 존재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큰 마님만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작년에 큰 마님의 뜰을 새로 고친 것도 이 은전을 꺼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삼십 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이 은전의 출처가, 결코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시아의 입가에는 냉혹한 웃음이 흘렀다.

“이 은전에는 관부의 인장과 연호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관영 창고에서 찍어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삼십 년 전에 풀린 은전인데 아직도 이렇게 반짝이다니... 너희는 정말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하 유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녀는 황급히 무릎으로 기어와 강시아의 발끝에 엎드렸다.

“마님,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십시오!”

강시아의 시선은 하 유모에게서 은전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참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금주 땅에 두 달 내리 쏟아지던 장마로 인해 농토가 무너져 내리고 가을 추수가 전멸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하필 주종현은 그 시기에 송하윤과 혼인을 올렸고 하늘로 치솟은 곡가 때문에 하객들은 밥 한 끼조차 채우지 못할 뻔했다.

만약 돈이 있다면 지금 곡식을 사들여 두었다가 석 달 뒤 국공부에 되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국공부를 떠난다 한들 평생 굶주릴 필요는 없을 텐데.

강시아는 은전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단호히 속삭였다.

“살고 싶으냐?”

하 유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고 싶사옵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오너라.”

설강이 돌아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회랑 아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강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아는 아무렇지 않다. 괜히 헛걸음 하게 해서 너만 고생 시켰구나.”

설강은 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미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땔나무 방에서 잠들었는데 어머니께서 한참을 찾아 헤매셨지요. 결국 모두가 찾기를 포기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를 찾아낸 건 어머니였사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저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긴 했지만요.”

강시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줄곧 큰 마님의 뜰에서 지내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는…”

설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희 어머니도 고 유모와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셨는데, 고 유모 말씀으로는 제 어머니께서는 몸을 던져 주인을 지키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큰 마님께서는 부모 잃은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뜰에 두셨던 것이옵니다.”

강시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큰 마님의 뜰에서는 일등 시녀였는데 지금은 내 이 작은 뜰에 배속되었구나…”

“사실은…”

설강은 잠시 머뭇거리며 강시아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안에 있던 하 유모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설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자 댁에서 난 소리 같사옵니다.”

강시아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가 보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그 한 마디 비명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인근의 뜰들은 모두 이미 따로 분가한 집안 젊은 자제들의 거처였다.

강시아가 도착했을 때,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넷째 아가씨 주은혜도 잇따라 도착해 있었다. 주종현의 얼굴은 철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명옥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뜰 마당에 무릎 꿇고 있었고 이마에는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주은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장 언니의 팔을 잡았다.

“셋째 언니, 여긴 큰 오라버니의 뜰입니다.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온청은 송하윤을 위해 치미는 분노에 코끝이 다 비뚤어질 정도였다.

“난 안 간다! 저 천한 계집 것들이 하나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하윤 언니를 위해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주겠느냐?”

송하윤이 곧 이 집에 들어오려는 이때, 이런 난동이 벌어지다니. 혹여라도 이 계집 것에게 기회를 빼앗긴다면 주종현이 어찌 송하윤을 볼 낯이 있겠는가!

“세자 저하, 부디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사옵니다!”

명옥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흐느꼈다.

강시아는 인파 뒤에 서서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냉소를 흘렸다. 지난 생애 자신은 명옥을 온전히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가장 신뢰하던 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번 생의 죄악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 끝 모를 탐욕이 부른 업보일 뿐이다!

주온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강시아 곁에 붙어 있던 시녀가 아니더냐. 누구의 허락을 받았기에 감히 주인의 침방을 넘본 것이냐!”

명옥은 몸을 움츠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려 인파 뒤에 선 강시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강 마님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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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백관은 숨을 죽인 채, 감히 크게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했다.칼끝이 맞닿을 듯 팽팽하게 긴장된 그 순간, 죽음 같은 적막을 깨뜨린 것은 한 노신의 늙고 떨리는 목소리였다.“폐하, 부디 삼가 숙고하소서!”백발이 성성한 노신이 비틀거리며 대열에서 나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폐하! 우륵의 병력은 강합니다. 삼십만 대군이 압박해 온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다시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옵니다!”그의 말은 고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곧바로 몇몇 화친을 주장하던 신하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폐하, 삼가 생각하소서!”“그러하옵니다, 폐하! 주… 주 대인께서 이미 평민이 된 지금, 군을 맡아 이끌 자가 없사옵니다. 전쟁을 택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하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변방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었다.한쪽은 적융을 막고, 한쪽은 우륵을 막았다.주종현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지자 그동안 눈치를 보던 자들마저 하나둘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순식간에 조정에는 화친을 청하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그 노신은 머리를 땅에 박다시피 하며 눈물과 함께 호소했다.“폐하, 우륵의 한왕이 이토록 성심으로 혼인을 청하며 경연군주를 지목하였으니… 그 뜻을 받아들이시옵소서!”“고작 군주 한 사람으로, 우리 대성조의 수십 년 평안과 수많은 장병들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폐하!”“그 입 다물라.”소림의 목소리는 한 점의 온기도 없이 차가웠다.서릿발 같은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노신을 곧장 꿰뚫었다.“우리 대성조가 언제부터 이토록 나약해졌느냐.”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한 글자 한 글자가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고작 우륵 따위가 짐의 미래 황후를 탐낸다고 해서, 짐이 스스로 내어주어야 한단 말이냐?”‘황후’라는 두 글자를 그는 유난히 깊게 눌러 말했다.끝없는 소유욕과 모욕당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노신은 온몸을 떨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그러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41화

    상산왕 주종현은 언행이 바르지 못하고, 어전에서 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왕작이 박탈되었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이던 상산왕이 하룻밤 사이에 평민으로 전락했다.사흘 뒤.우륵의 한왕이 사신을 보내 국서를 올렸다.말투는 정중하고 간절했으며, 대성조의 군주를 맞아 혼인을 청해 두 나라의 화친을 맺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조정 위에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 은밀히 출렁였다.경성에 없는 종친들을 제외하면, 군주로 책봉된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주종현은 작위를 빼앗겼으나, 연아의 군주 신분을 기록한 옥첩은 회수되지 않았다. 심지어 황후 책봉의 성지도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상태였다.우륵이 구하려는 이는 미래의 황후였다…그러나 소림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용좌 위에 앉은 황제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기에 희로애락을 읽을 수 없었다.그는 붉은 붓을 들어 단번에 내려 그었다.“허한다.”순식간에, 대성조의 군주들은 봄비 뒤 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공후귀족들의 집안에서 적령기의 규수들이 줄줄이 천거되었다.소림은 단숨에 여덟 명의 군주를 봉했다. 모두 꽃처럼 아름답고, 신분 또한 귀한 이들이었다.그렇게 그들은 일렬로 열무의 앞에 내어졌다.금빛으로 빛나는 조정 한가운데 열무는 전각에 서서, 늘 그렇듯 삐딱하고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여덟 명의 미인들에게는 단 한 번도 머물지 않았다.곧장 사람들 너머로 향해, 용좌 위의 젊은 황제를 향했다.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외삼촌이라 부르겠습니다.”그 외삼촌이라는 말은, 느릿하고도 가볍게 씹히며 흘러나왔다. 희롱과 도발이 뒤섞인 어조였다.“외삼촌께서도 아시겠지요. 제가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그 말이 떨어지자 문무백관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정적.전각 안은 숨이 막힐 듯 고요해졌다.소림은 용좌 위에 앉은 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다만 용포 넓은 소매 아래로 드리워진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마디마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후.그는 문득 웃었다. 입가에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940화

    소림이 떠나자 넓디넓은 편전에는 순식간에 죽은 듯한 적막이 다시 내려앉았다.창밖에서는 그저 눈보라만이 지칠 줄 모르고 울부짖고 있었다.주연아는 천천히 차가운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앉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팔을 끌어안았다.하지만 뼛속 깊이 스며든 그 한기는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입술에는 아직도 그가 거칠게 빼앗아 간 흔적의 통증이 남아 있었고 공기 속에는 여전히 그의 강압적이면서도 맑은 용연향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주전 쪽에서는 희미하게 풍악 소리가 흘러왔다.술잔이 오가고 노랫소리와 춤이 어우러지는 태평성대의 기운.그때였다. 문 밖에서 미묘한 소란이 일어났다.병사들이 낮게 윽박지르는 소리와 궁녀들의 놀란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방자하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너희는 대체 누구냐! 감히 궁 안에서 손을 쓰다니!”곧이어 둔탁하게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그리고 다시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주연아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끼이익.”무거운 문이 밖에서 거칠게 밀려 열렸다.익숙하면서도 다급한 기척이 눈보라를 휘감은 채 역광 속에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연아!”어머니의 목소리였다.맹시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와 걱정이 가득했다.그녀의 뒤에서는 무비가 재빠르게 막아서려던 궁녀를 기절시키고, 곧장 문 앞을 경계하며 섰다.주연아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팽팽히 당겨져 있던 마음의 끈이 어머니를 본 그 순간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어머니…”그녀는 떨리는 몸으로 바닥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 따뜻한 품으로 파고들었다.“어머니!”그녀는 맹시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그 품에 묻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서러움과 공포가, 그 순간 산산이 터져 나오며 처절한 울음으로 쏟아졌다.“폐하께서...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어머니…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그녀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떨리고 있었다.맹시은의 심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86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주근 할머니는 문짝에 부딪혀 붙어 있다가 그대로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 비명을 한 번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철이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얼어붙었다. 문 앞의 사내는 병색이 완연했으나 온몸에 서린 살기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입에서 그딴 소리가 또 나오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철이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사, 살… 살인이야.”주근 할머니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크게 다쳐 한동안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침대머리를 부들부들 치며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61화

    아설이 떠난 지 여드렛째였다. 아람은 적막함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연아 또한 매일같이 물었다.“아설 언니는 왜 아직도 안 와요?”수차례 이모라 부르라고 고쳐줬으나 설강 언니에서 아설 언니로 굳어진 탓에 바꾸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아람도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두던 참이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두었다. 그때, 문희가 갓 지은 옷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아람 아가씨, 들으셨어요? 성문 앞에 방(榜:고려ㆍ조선 시대의 과거 합격자 명부)이 내걸렸다 합니다. 오늘 과거 급제자 명단이 나왔어요.”문희는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503화

    황제가 친히 진국공부를 찾은 뒤, 경성의 각 가문에서 보내오는 초청장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너무 많아 나중에는 시녀들이 바구니에 담아 들고 올 정도였다. 그 초청장들은 전부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에 차곡차곡 쌓였다.류영이 방을 정리하며 초청장들을 품계에 따라 나누고 있을 때, 아람의 시선이 각 묶음 맨 위에 놓인 글씨 위로 스쳤다.“글을 읽을 줄 아느냐?”류영는 고개를 숙였다.“예. 예전 아씨께서 규중에 계실 때 글을 좋아하셔서 곁에서 조금 배웠습니다.”“글을 아는 시녀라면 원래는 쉽게 풀어주지 않을 텐데.”아람의 말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647화

    “송 아가씨, 참으로 수완이 대단하군요.”자그마한 뜰에는 나무 받침대가 여럿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물기를 빼는 두부가 층층이 얹혀 있었다. 마당 가득 고소한 콩 향이 감돌았지만 정작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부엌 아궁이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안채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송하윤 앞에 맑은 차 한 잔을 따라 두었다.송하윤도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차에 손을 대지 않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한 번 내려다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당신,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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