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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or: 서은월
강시아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비비며 정성껏 수놓은 짐승의 머리에 마지막 바늘을 꿰맸다. 그 모습에 설강은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사옵니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자수 위로 쏟아지자 자수의 결 사이로 은은히 금빛이 번져 나왔다.

“어머, 금빛이 드러나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금실 한 올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수놓을 때 금실을 조금 섞어 넣었다. 혹여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니 의외로 참 근사하구나.”

설강은 진심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님의 솜씨는 궁궐의 수녀들마저 감히 따르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강시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답했다.

“내 바느질은 본디 궁중에서 배운 상궁께서 일러 준 것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번 생신 예물이 끝난 뒤에 네게도 작은 배저고리를 하나 수놓아 주마.”

설강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마님,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을…”

강시아는 더는 놀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금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저께 다녀온 그 자수방에 다시 가서 사 오너라.”

“예.”

설강은 문가에 이르렀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 유모에게 들러 이 사실을 전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장소를 바꾸자. 내가 직접 같이 가마.”

설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고 유모가 눈을 부릅떴다.

“겨우 며칠 지냈다고 벌써 믿음이 생긴 것이냐?”

설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을 함께 지내며 그녀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강시아는 새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곁방에 틀어박혀 수를 놓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딸아이의 글공부까지 봐주었다. 심지어는 말 한마디도 곱게 하였고, 아이 또한 어찌나 예의 바른지. 집안의 가장 어린 일곱 째 아가씨도 연아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인데 제멋대로 굴어 정 씨 댁의 뜰에서는 하녀들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고 유모는 설강을 데리고 자수방 두어 곳을 더 들렀다. 하나 놀랍게도 금실 값은 강시아가 다니는 그곳보다 훨씬 비쌌다. 설강은 끝내 강시아의 편을 들며 중얼거렸다.

“만약 강 마님께서 정말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 하셨다면 진즉에 은전 주머니를 제 손에 쥐셨을 것이옵니다. 비록 예전에는 가까이 모신 적 없어 잘 몰랐지만 두세 번 뵈니 알 수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따뜻하고 온화하시옵니다. 그러니 어제도 명옥이 뻔뻔스럽게 와서 도와달라 사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만만해 보이니 얕잡아본 것뿐이옵니다.”

고 유모는 이마를 찌르듯 그녀의 머리를 톡하고 치며 말했다.

“세상이 다 너처럼 속이 훤하면 이 집안에 나쁜 자가 어디 있겠느냐?”

설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번의 자수방으로 가서 금실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수틀 위의 서수는 이미 목덜미의 흰 털이 반쯤 수놓아져 있는 뒤였다.

그와 동시에, 강시아는 무언가를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다.

“마님, 어찌하여 잘라내시는 것이옵니까?”

“여기에는 금실이 어울리지 않으니 은실을 넣어야겠다.”

강시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바늘 끝으로 가는 금실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레 걷어냈다. 설강은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고 유모는 그녀와 점포 주인이 한통속이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하십시오. 날이 어두우니 자칫하면 눈이 상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제야 강시아가 시큰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네 말이 옳다. 성급히 손을 놀리다간 다른 실까지 잘려 이 부분을 몽땅 망칠 수 있을 테니. 연아는 어디 있느냐? 오늘은 웬일로 나를 졸라대지 않는구나.”

설강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아왔을 땐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하 유모도 계시지 않았고요. 아마 바깥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곧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황혼빛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강시아의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서늘해졌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가서 찾아봐야겠구나.”

영국공부는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얼마 전 연아가 그녀를 데리고 은전을 묻어두었다던 곳도 서쪽 담장 근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폐가 한 채도 있었다.

지난 생에는 그 숲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 유모가 사직을 청할 때에도 눈에 띌 만한 기이한 징조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 연아와 함께 돌아왔을 때 하 유모의 이상한 기색조차 그저 비밀이 발각된 탓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하고 있었다. 명옥을 경계하면서도 정작 하 유모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시아는 황급히 대나무 숲으로 달려갔는데, 지난번 연아와 함께 은전을 발견했던 그 자리에 풀린 흙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설강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아침에 집을 나설 무렵, 하 유모가 연아에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아가씨에게 볶아 주겠사옵니다.”

“지금쯤이면 뒤주방에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나 강시아의 머릿속은 끔찍한 장면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연아가 핏물을 토하며 시들어가던 모습, 송하윤이 차갑게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연못에 던져버리라 명하던 모습…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혀끝을 세게 깨물며 다시금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미 다시 태어났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설강, 너는 주방으로 가 보거라. 나는 화방으로 갈 테니. 하 유모의 남편…”

그제야 설강은 강시아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외쳤다.

“마님! 괜찮으시옵니까?”

그러자 강시아는 재빨리 손을 뿌리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괘, 괜찮다. 어서 가 보거라!”

강시아는 지난 생 하 유모와의 일들을 되새기며 화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었다. 하 유모의 남편은 국공부의 화공이었으나 골수까지 패가망신한 노름꾼이었기에, 모란을 키우는 솜씨 하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 하 유모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은전을 꾸어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이 지나자 더는 돈을 빌리러 오지 않았다. 사직을 청한 것도, 바로 송하윤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이었는데, 한 그 즈음부터, 하 유모는 새 옷을 갈아입고 은장식까지 달고 다녔다.

강시아의 머릿속은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기억들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곧장 방향을 틀어 자기가 사는 뜰로 돌아왔다.

그녀의 뜰은 크지 않았다. 한 칸의 본채와, 그 양옆으로 귀방이 나란히 있었고 왼쪽에는 또 두 칸의 곁방이 붙어 있었다.

하 유모는 늘 오른쪽 귀방에서 거처했다. 어릴 적에 연아는 그녀와 함께 지냈고 자라서는 자주 어머니의 침상으로 기어들어와 함께 잠들곤 했다. 왼쪽 귀방은 지금 자수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강시아는 갑자기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하 유모는 무엇인가를 허둥지둥 상자에 쑤셔 넣다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혔다.

“쿵, 쿵”

두어 차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상자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마님, 어, 어찌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하 유모의 눈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침상에 누운 연아에게로 향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곤히 잠들었사옵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뛰놀아 지쳐서 그런 걸 겁니다!”

강시아는 한 발, 또 한 발 다가섰다.

“잠든 것이냐, 아니면 약을 먹인 것이냐?”

그녀의 말에 하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가? 어찌 제가 아가씨께 약을 쓰겠사옵니까?”

“남몰래 재물을 빼돌리려 했다면 들키더라도 아이의 장난으로 돌릴 수 있을 터. 흙을 파헤치다 우연히 찾았다면서 말이지.”

하 유모는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그녀가 눈치챈 것이다.

“하나 네 죄는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은 데 있다!”

강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하 유모는 급히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 남편은 겨우 오십 냥에 손댔을 뿐이옵니다! 도박판의 무리들이 그의 손을 자르겠다 위협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하기를 그 상자는 이미 썩었으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하여 그만 그른 마음을 품은 것이옵니다. 마님, 부디 용서하시고 세자께만은 알리지 마시옵소서!”

강시아는 연아의 곁으로 가 아이의 손목을 살며시 짚었다. 규칙적이고 힘 있는 맥박이 또렷이 전해지자 그녀는 그제야 가라앉은 숨을 내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억눌렀다. 그리고 하 유모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꺼내거라.”

하 유모는 다리를 떨며 상자 속에서 은전을 한 덩이를 꺼내왔다. 열 냥짜리 은괴 하나였다.

강시아가 손에 들어 올려 뒤집자 선제의 연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관부의 인장까지 뚜렷이 남아 있었으니 이것은 무려 삼십 년 전 조정의 창고에서 풀린 관영 은전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은전의 존재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큰 마님만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작년에 큰 마님의 뜰을 새로 고친 것도 이 은전을 꺼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삼십 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이 은전의 출처가, 결코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시아의 입가에는 냉혹한 웃음이 흘렀다.

“이 은전에는 관부의 인장과 연호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관영 창고에서 찍어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삼십 년 전에 풀린 은전인데 아직도 이렇게 반짝이다니... 너희는 정말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하 유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녀는 황급히 무릎으로 기어와 강시아의 발끝에 엎드렸다.

“마님,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십시오!”

강시아의 시선은 하 유모에게서 은전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참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금주 땅에 두 달 내리 쏟아지던 장마로 인해 농토가 무너져 내리고 가을 추수가 전멸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하필 주종현은 그 시기에 송하윤과 혼인을 올렸고 하늘로 치솟은 곡가 때문에 하객들은 밥 한 끼조차 채우지 못할 뻔했다.

만약 돈이 있다면 지금 곡식을 사들여 두었다가 석 달 뒤 국공부에 되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국공부를 떠난다 한들 평생 굶주릴 필요는 없을 텐데.

강시아는 은전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단호히 속삭였다.

“살고 싶으냐?”

하 유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고 싶사옵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오너라.”

설강이 돌아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회랑 아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강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아는 아무렇지 않다. 괜히 헛걸음 하게 해서 너만 고생 시켰구나.”

설강은 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미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땔나무 방에서 잠들었는데 어머니께서 한참을 찾아 헤매셨지요. 결국 모두가 찾기를 포기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를 찾아낸 건 어머니였사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저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긴 했지만요.”

강시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줄곧 큰 마님의 뜰에서 지내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는…”

설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희 어머니도 고 유모와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셨는데, 고 유모 말씀으로는 제 어머니께서는 몸을 던져 주인을 지키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큰 마님께서는 부모 잃은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뜰에 두셨던 것이옵니다.”

강시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큰 마님의 뜰에서는 일등 시녀였는데 지금은 내 이 작은 뜰에 배속되었구나…”

“사실은…”

설강은 잠시 머뭇거리며 강시아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안에 있던 하 유모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설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자 댁에서 난 소리 같사옵니다.”

강시아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가 보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그 한 마디 비명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인근의 뜰들은 모두 이미 따로 분가한 집안 젊은 자제들의 거처였다.

강시아가 도착했을 때,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넷째 아가씨 주은혜도 잇따라 도착해 있었다. 주종현의 얼굴은 철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명옥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뜰 마당에 무릎 꿇고 있었고 이마에는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주은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장 언니의 팔을 잡았다.

“셋째 언니, 여긴 큰 오라버니의 뜰입니다.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온청은 송하윤을 위해 치미는 분노에 코끝이 다 비뚤어질 정도였다.

“난 안 간다! 저 천한 계집 것들이 하나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하윤 언니를 위해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주겠느냐?”

송하윤이 곧 이 집에 들어오려는 이때, 이런 난동이 벌어지다니. 혹여라도 이 계집 것에게 기회를 빼앗긴다면 주종현이 어찌 송하윤을 볼 낯이 있겠는가!

“세자 저하, 부디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사옵니다!”

명옥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흐느꼈다.

강시아는 인파 뒤에 서서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냉소를 흘렸다. 지난 생애 자신은 명옥을 온전히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가장 신뢰하던 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번 생의 죄악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 끝 모를 탐욕이 부른 업보일 뿐이다!

주온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강시아 곁에 붙어 있던 시녀가 아니더냐. 누구의 허락을 받았기에 감히 주인의 침방을 넘본 것이냐!”

명옥은 몸을 움츠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려 인파 뒤에 선 강시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강 마님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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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은 새벽 안개보다도 더 빠르게 퍼져 나갔다.그녀가 자수방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영국공부 뒷채는 그 이야기로 가득했다.자수방의 하녀 하나가 무슨 요사스러운 수를 썼는지 세자께서 술에 취한 틈을 타 침상에 올라갔다는 이야기였다.“쯧쯧, 정말 사람 몰라본다니까.”평소 말 한마디 섞지 않던 하녀가 비꼬듯 입을 열었다.“겉으로는 그렇게 순한 척하더니 속셈은 다 뱃속에 감춰 두고 있었네.”“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죽어라 일하는데 저 계집은 슬쩍 세자 뜰로 기어들어 갔잖아.”“이제야말로 가지 위로 날아오른 셈이지.”그녀는 핏기 빠진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자수틀 앞으로 걸어갔다.찢어지는 듯한 몸의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한 땀, 또 한 땀 자수를 이어갔다.손을 멈추지 않는 한 이 모욕과 통증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주종현이 그가 직접 입에 올렸던 그 “명분”을 위해 지금 자신의 어머니와 마주 서 있다는 것을.“첩을 들인다고? 현아, 제정신이냐! 아직 정실도 들이지 않았으면서 먼저 첩부터 들이면, 어느 집에서 딸을 시집보내겠느냐.”주종현은 당 아래에 서 있었다.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흔들림 하나 없었다.“어머니, 이 일은 모두 제 책임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영국공부 세자가, 하인 하나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조 씨가 냉소했다.“정 마음에 걸린다면, 은전이나 좀 쥐여 주고 내보내면 그만이지.”“그럴 수 없습니다.”평소 며느리 조 씨와 사이가 좋지 않던 큰 마님마저 이 일에서는 뜻을 같이했다.“터무니없다!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네가 영국공부 세자인데, 하녀 하나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큰 마님의 지팡이가 바닥을 세차게 내리치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세자가 하녀에게 명분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곧장 뒷채에서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시아가 있었다.그녀를 못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4화

    구름 위에 선 사람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 같은 이가 감히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곳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자리란 그저 머무는 것뿐이었다.눈 깜짝할 사이, 오 년이 흘렀다.어리숙하던 소녀는 어느새 곱게 자라난 처녀가 되었고 몸값을 치를 은전도 이제 거의 다 모였다.곧 이 감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던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영국공부의 가연 자리에서였다. 이방 쪽 주종훈이라는 인물은 평소부터 풍류로 이름난 자였는데, 몇 잔 더 들이키자 눈빛이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그 시선이 거리낌 없이 그녀의 몸에 얽혀들었다.그는 그녀를 가리키며 국공부인 조 씨를 향해 웃었다.“숙모, 이 계집 마음에 드는데요. 제 통방으로 들여주시죠.”주위에서 웃음이 터졌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멍하니 울렸다.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혼이 빠진 듯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었다.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떨렸다.이대로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렇게 절망하던 순간,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상석에서 흘러나왔다.“술이 과합니다.”세자, 주종현이었다.그 순간 그녀는 그를 신처럼 느꼈다.하지만 알지 못했다.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그날 밤, 세자 뜰의 큰 하녀 명옥이 무언가 잘못 먹은 듯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러다 마침 곁을 지나던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나 정말 못 버티겠어. 잠깐만, 잠깐만 대신 좀 서 있어 줘.”명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거짓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마음이 약해진 그녀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그렇게 문가에 서 있던 순간, 휘청이는 그림자가 술병을 들고 밀려 들어왔다.주종훈이었다. 온몸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세 잔이나 비웠으니… 네 주인은 쓰러졌을 테고 네가 대신 마시거라.”“도련님, 저는 술을 못합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말했다.“못해?”주종훈이 비웃듯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3화

    그녀의 이름은 강시아였다.너무도 오래된 일들은, 이제는 희미해 잘 떠오르지 않았다.다만 기억나는 것은 늘 말수가 적고 엄격했던 아버지와 언제나 그녀 앞에 서서 어떤 일이든 막아 주고 지켜 주던 오라버니였다.아버지는 향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손에 쥔 회초리로 수많은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렸다. 그러나 그 회초리가 오라버니에게 내려진 횟수는 다른 모든 아이들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강세오, 반드시 급제하여 우리 강 씨 집안을 빛내야 한다!”아버지는 늘 그렇게 엄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이웃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강 가에서 문곡성이 날 인재가 나올 거라고.모두가 오라버니를 칭찬했다. 영리하고, 앞날이 창창하다고.하지만 그녀만은 알고 있었다.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보다 훨씬 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살림은 늘 궁핍했다.장터에서 파는 엿은 한 푼이면 두 알을 살 수 있었다.오라버니는 늘 더 큰 쪽을 골라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겨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자신은 작은 것을 입에 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라도 되는 양 웃었다.“시아야, 오라버니가 급제하면, 엿 한 상자를 사 줄게. 매일 먹게 해 주마.”그녀는 그 말을 믿고 오라버니가 급제하는 날을 가슴 가득 설렘으로 기다렸다.그러나 하늘을 뒤덮은 홍수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논밭도, 집도, 이미 약해져 있던 아버지의 몸마저 앗아갔다.물이 빠진 뒤,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곧이어 역병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평생 엿을 사 주겠다 약속했던 오라비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낡은 판자 위에 누운 그의 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쇠처럼 뜨거웠고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겨우 불러온 의원은 한 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이 병은 좋은 약으로 버텨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요.”하늘에 맡긴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그녀는 누워 있는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348화

    그래서 논밭을 임대할 때도 일부러 일반 농가의 논들과 섞이게 한 것이었다. 일종의 눈가림이었다. 황제가 정현에 수군을 조직하라고 명한 것과 그녀가 전생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해도 지금부터 대비해야 했었다. 며칠 뒤, 그녀는 현청의 아졸에게 부탁해 말을 전하게 했다.골목에 살던 장 아주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곧장 찾아왔다. 불과 두 세달 남짓한 사이, 두 아이는 제법 키가 자라 있었다. 가장 신난 것은 다름아닌 연아였다. 아이 둘의 손을 잡아끌고는 아버지와 외삼촌이 사다 준 자잘한 장난감으로 가득 찬 방을 자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314화

    “심, 진정해요!”아설이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인삼탕은?”“화로 위에 달이고 있다. 내가 가져오마!”강세오는 급히 뛰어나가다가 문가에 서 있던 누이와 부딪칠 뻔했다. 아람은 문틀을 손아귀에 꽉 쥐고 있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눈가에서 넘쳐흐를 듯 흔들렸다.‘어떻게 이렇게 죽어버릴 수가 있어? 나를 한평생 죄책감 속에 묶어두려 하는 거야?’탕 의원은 온몸이 피투성이인 것도 개의치 않고 주종현의 옷을 죄다 가위로 잘라냈다. 그는 침구를 펼치고 균형 잡힌 호흡과 함께 정확한 각도로 침을 집어 올렸다가 정해진 혈자리에 차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317화

    주종현은 깨어났지만 그의 손은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었다. 탕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움직일 수는 있으나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칼이나 검은 더더욱 안 됩니다.”아람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탕 의원이 떠난 뒤, 그녀는 뜰에 한참을 서 있었다. 표정은 고요했고, 미동도 없는 것이 마치 어떤 감정도 맺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이미 며칠 동안 강세오와 위심을 만나지 못했다. 매일마다 누군가가 다쳤고,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351화

    그는 온갖 말로 타이르며 설득했건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강세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할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까?여봐라, 손님을 모셔 보내라.”“강 대인!”그는 두 사람을 더는 보지 않고 돌아섰다. 그의 눈동자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냉담함만 남아있었다. 허튼소리뿐이었다. 정녕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아이 취급하며 아무것도 모를 거라 여긴 것인가?시아가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을 잃은 이유가, 그 시절이 가장 어두웠기 때문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어머니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이유 또한, 맹 가가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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