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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서은월
강시아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비비며 정성껏 수놓은 짐승의 머리에 마지막 바늘을 꿰맸다. 그 모습에 설강은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사옵니다!”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자수 위로 쏟아지자 자수의 결 사이로 은은히 금빛이 번져 나왔다.

“어머, 금빛이 드러나옵니다!”

그 말에 강시아는 금실 한 올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수놓을 때 금실을 조금 섞어 넣었다. 혹여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니 의외로 참 근사하구나.”

설강은 진심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님의 솜씨는 궁궐의 수녀들마저 감히 따르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강시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답했다.

“내 바느질은 본디 궁중에서 배운 상궁께서 일러 준 것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번 생신 예물이 끝난 뒤에 네게도 작은 배저고리를 하나 수놓아 주마.”

설강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마님,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을…”

강시아는 더는 놀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금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저께 다녀온 그 자수방에 다시 가서 사 오너라.”

“예.”

설강은 문가에 이르렀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 유모에게 들러 이 사실을 전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장소를 바꾸자. 내가 직접 같이 가마.”

설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고 유모가 눈을 부릅떴다.

“겨우 며칠 지냈다고 벌써 믿음이 생긴 것이냐?”

설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을 함께 지내며 그녀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강시아는 새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곁방에 틀어박혀 수를 놓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딸아이의 글공부까지 봐주었다. 심지어는 말 한마디도 곱게 하였고, 아이 또한 어찌나 예의 바른지. 집안의 가장 어린 일곱 째 아가씨도 연아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인데 제멋대로 굴어 정 씨 댁의 뜰에서는 하녀들이 수도 없이 바뀌었다.

고 유모는 설강을 데리고 자수방 두어 곳을 더 들렀다. 하나 놀랍게도 금실 값은 강시아가 다니는 그곳보다 훨씬 비쌌다. 설강은 끝내 강시아의 편을 들며 중얼거렸다.

“만약 강 마님께서 정말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 하셨다면 진즉에 은전 주머니를 제 손에 쥐셨을 것이옵니다. 비록 예전에는 가까이 모신 적 없어 잘 몰랐지만 두세 번 뵈니 알 수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따뜻하고 온화하시옵니다. 그러니 어제도 명옥이 뻔뻔스럽게 와서 도와달라 사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만만해 보이니 얕잡아본 것뿐이옵니다.”

고 유모는 이마를 찌르듯 그녀의 머리를 톡하고 치며 말했다.

“세상이 다 너처럼 속이 훤하면 이 집안에 나쁜 자가 어디 있겠느냐?”

설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번의 자수방으로 가서 금실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수틀 위의 서수는 이미 목덜미의 흰 털이 반쯤 수놓아져 있는 뒤였다.

그와 동시에, 강시아는 무언가를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다.

“마님, 어찌하여 잘라내시는 것이옵니까?”

“여기에는 금실이 어울리지 않으니 은실을 넣어야겠다.”

강시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바늘 끝으로 가는 금실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레 걷어냈다. 설강은 괜스레 마음이 저려왔다. 그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고 유모는 그녀와 점포 주인이 한통속이라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하십시오. 날이 어두우니 자칫하면 눈이 상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제야 강시아가 시큰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네 말이 옳다. 성급히 손을 놀리다간 다른 실까지 잘려 이 부분을 몽땅 망칠 수 있을 테니. 연아는 어디 있느냐? 오늘은 웬일로 나를 졸라대지 않는구나.”

설강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아왔을 땐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하 유모도 계시지 않았고요. 아마 바깥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곧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황혼빛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강시아의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서늘해졌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가서 찾아봐야겠구나.”

영국공부는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얼마 전 연아가 그녀를 데리고 은전을 묻어두었다던 곳도 서쪽 담장 근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폐가 한 채도 있었다.

지난 생에는 그 숲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 유모가 사직을 청할 때에도 눈에 띌 만한 기이한 징조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 연아와 함께 돌아왔을 때 하 유모의 이상한 기색조차 그저 비밀이 발각된 탓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심하고 있었다. 명옥을 경계하면서도 정작 하 유모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시아는 황급히 대나무 숲으로 달려갔는데, 지난번 연아와 함께 은전을 발견했던 그 자리에 풀린 흙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설강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아침에 집을 나설 무렵, 하 유모가 연아에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아가씨에게 볶아 주겠사옵니다.”

“지금쯤이면 뒤주방에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나 강시아의 머릿속은 끔찍한 장면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연아가 핏물을 토하며 시들어가던 모습, 송하윤이 차갑게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연못에 던져버리라 명하던 모습…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혀끝을 세게 깨물며 다시금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이미 다시 태어났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설강, 너는 주방으로 가 보거라. 나는 화방으로 갈 테니. 하 유모의 남편…”

그제야 설강은 강시아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외쳤다.

“마님! 괜찮으시옵니까?”

그러자 강시아는 재빨리 손을 뿌리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괘, 괜찮다. 어서 가 보거라!”

강시아는 지난 생 하 유모와의 일들을 되새기며 화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었다. 하 유모의 남편은 국공부의 화공이었으나 골수까지 패가망신한 노름꾼이었기에, 모란을 키우는 솜씨 하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 하 유모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은전을 꾸어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이 지나자 더는 돈을 빌리러 오지 않았다. 사직을 청한 것도, 바로 송하윤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이었는데, 한 그 즈음부터, 하 유모는 새 옷을 갈아입고 은장식까지 달고 다녔다.

강시아의 머릿속은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기억들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곧장 방향을 틀어 자기가 사는 뜰로 돌아왔다.

그녀의 뜰은 크지 않았다. 한 칸의 본채와, 그 양옆으로 귀방이 나란히 있었고 왼쪽에는 또 두 칸의 곁방이 붙어 있었다.

하 유모는 늘 오른쪽 귀방에서 거처했다. 어릴 적에 연아는 그녀와 함께 지냈고 자라서는 자주 어머니의 침상으로 기어들어와 함께 잠들곤 했다. 왼쪽 귀방은 지금 자수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강시아는 갑자기 힘껏 문을 밀어젖혔다. 하 유모는 무엇인가를 허둥지둥 상자에 쑤셔 넣다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혔다.

“쿵, 쿵”

두어 차례 둔탁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상자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마님, 어, 어찌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하 유모의 눈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침상에 누운 연아에게로 향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곤히 잠들었사옵니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뛰놀아 지쳐서 그런 걸 겁니다!”

강시아는 한 발, 또 한 발 다가섰다.

“잠든 것이냐, 아니면 약을 먹인 것이냐?”

그녀의 말에 하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가? 어찌 제가 아가씨께 약을 쓰겠사옵니까?”

“남몰래 재물을 빼돌리려 했다면 들키더라도 아이의 장난으로 돌릴 수 있을 터. 흙을 파헤치다 우연히 찾았다면서 말이지.”

하 유모는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그녀가 눈치챈 것이다.

“하나 네 죄는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은 데 있다!”

강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하 유모는 급히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 남편은 겨우 오십 냥에 손댔을 뿐이옵니다! 도박판의 무리들이 그의 손을 자르겠다 위협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하기를 그 상자는 이미 썩었으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하여 그만 그른 마음을 품은 것이옵니다. 마님, 부디 용서하시고 세자께만은 알리지 마시옵소서!”

강시아는 연아의 곁으로 가 아이의 손목을 살며시 짚었다. 규칙적이고 힘 있는 맥박이 또렷이 전해지자 그녀는 그제야 가라앉은 숨을 내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억눌렀다. 그리고 하 유모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꺼내거라.”

하 유모는 다리를 떨며 상자 속에서 은전을 한 덩이를 꺼내왔다. 열 냥짜리 은괴 하나였다.

강시아가 손에 들어 올려 뒤집자 선제의 연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관부의 인장까지 뚜렷이 남아 있었으니 이것은 무려 삼십 년 전 조정의 창고에서 풀린 관영 은전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은전의 존재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큰 마님만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작년에 큰 마님의 뜰을 새로 고친 것도 이 은전을 꺼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삼십 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이 은전의 출처가, 결코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시아의 입가에는 냉혹한 웃음이 흘렀다.

“이 은전에는 관부의 인장과 연호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관영 창고에서 찍어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삼십 년 전에 풀린 은전인데 아직도 이렇게 반짝이다니... 너희는 정말 모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하 유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녀는 황급히 무릎으로 기어와 강시아의 발끝에 엎드렸다.

“마님,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십시오!”

강시아의 시선은 하 유모에게서 은전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참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금주 땅에 두 달 내리 쏟아지던 장마로 인해 농토가 무너져 내리고 가을 추수가 전멸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하필 주종현은 그 시기에 송하윤과 혼인을 올렸고 하늘로 치솟은 곡가 때문에 하객들은 밥 한 끼조차 채우지 못할 뻔했다.

만약 돈이 있다면 지금 곡식을 사들여 두었다가 석 달 뒤 국공부에 되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국공부를 떠난다 한들 평생 굶주릴 필요는 없을 텐데.

강시아는 은전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단호히 속삭였다.

“살고 싶으냐?”

하 유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고 싶사옵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오너라.”

설강이 돌아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회랑 아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님…”

강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아는 아무렇지 않다. 괜히 헛걸음 하게 해서 너만 고생 시켰구나.”

설강은 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미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땔나무 방에서 잠들었는데 어머니께서 한참을 찾아 헤매셨지요. 결국 모두가 찾기를 포기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를 찾아낸 건 어머니였사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저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긴 했지만요.”

강시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줄곧 큰 마님의 뜰에서 지내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는…”

설강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희 어머니도 고 유모와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셨는데, 고 유모 말씀으로는 제 어머니께서는 몸을 던져 주인을 지키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큰 마님께서는 부모 잃은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뜰에 두셨던 것이옵니다.”

강시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큰 마님의 뜰에서는 일등 시녀였는데 지금은 내 이 작은 뜰에 배속되었구나…”

“사실은…”

설강은 잠시 머뭇거리며 강시아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안에 있던 하 유모도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설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자 댁에서 난 소리 같사옵니다.”

강시아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가 보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그 한 마디 비명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인근의 뜰들은 모두 이미 따로 분가한 집안 젊은 자제들의 거처였다.

강시아가 도착했을 때, 셋째 아가씨 주온청과 넷째 아가씨 주은혜도 잇따라 도착해 있었다. 주종현의 얼굴은 철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명옥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뜰 마당에 무릎 꿇고 있었고 이마에는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주은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장 언니의 팔을 잡았다.

“셋째 언니, 여긴 큰 오라버니의 뜰입니다.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온청은 송하윤을 위해 치미는 분노에 코끝이 다 비뚤어질 정도였다.

“난 안 간다! 저 천한 계집 것들이 하나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하윤 언니를 위해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주겠느냐?”

송하윤이 곧 이 집에 들어오려는 이때, 이런 난동이 벌어지다니. 혹여라도 이 계집 것에게 기회를 빼앗긴다면 주종현이 어찌 송하윤을 볼 낯이 있겠는가!

“세자 저하, 부디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사옵니다!”

명옥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흐느꼈다.

강시아는 인파 뒤에 서서 그녀의 초라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냉소를 흘렸다. 지난 생애 자신은 명옥을 온전히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가장 신뢰하던 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번 생의 죄악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 끝 모를 탐욕이 부른 업보일 뿐이다!

주온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강시아 곁에 붙어 있던 시녀가 아니더냐. 누구의 허락을 받았기에 감히 주인의 침방을 넘본 것이냐!”

명옥은 몸을 움츠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려 인파 뒤에 선 강시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강 마님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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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네가 그들보다 잘 살고 있기 때문이야.”단낭은 그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그럼 더 잘 살아야겠습니다. 아주 잘 살아서 숨넘어가게 만들어야겠어요.”“그래야지.”아람은 복동이를 받아안았다.“그런 인간들 때문에 식욕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 난 아직도 생선살 죽을 기다리고 있거든.”단낭은 아람이 자신을 달래려 일부러 저렇게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단 씨 집안일로 더는 아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비영이 해결하지 못하면 그땐 자신이 단비영을 해결하면 될 일이다. 자기 집안 일로도 모자라 이제는 상단 마님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이다.단낭이 남편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단비영은 주종현과 함께 건주로 떠났다.무슨 일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녹봉이 두 냥이나 올랐다.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단 씨 집안이 더더욱 단비영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단 노파는 단비영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 근처에 올 담은 없었기에 길에서 몇 차례 단낭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단낭은 그때마다 매몰차게 뿌리쳤다.아무리 험한 말을 퍼붓고 화이시키겠다고 협박해도 단낭은 더 단단해질 뿐이었다.그녀의 태도에 단 노파는 분통이 터져 허벅지를 쿵쿵 내리쳤다.깊은 가을이 지나자 날이 부쩍 쌀쌀해졌고 아이들은 눈에 띄게 훌쩍 자라 있었다.아람 상단의 곡물 창고는 가득 찼다. 버티며 팔지 않던 농가들은 곡가가 내려가고 나서야 팔지 못한 것을 깨닫고 뒤늦게 허둥대기 시작했다.아설이 이 소식을 전하자 몇 달 동안 참아왔던 아람은 마침내 속이 후련해졌다.“여인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더니.”아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냥 네가 알아서 하거라. 지금까지 전부 네가 결정했잖아.”정현에 머문 지 반 년이 넘은 아설은 어느새 제법 큰 상단 주인다운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석 포두가 농민들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 아설은 단호하게 문전박대를 했다. 예전에 차라리 풀어버리겠다고 했던 쌀을 이제 와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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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님, 이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아직 아이 하나 제대로 못 달래시네요. 제가 할게요. 저는 한 번에 둘이나 낳았거든요.”단낭은 왕수연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이를 빼앗으려 들자 단낭은 깜짝 놀라 몸을 틀어 아이를 안은 채 물러섰다.“왜 여기 온 것입니까!”“제가 왜 왔냐고요?”왕수연이 콧방귀를 뀌었다.“형님께서는 몰래 큰돈을 벌고 있으면서 혼자만 꿀꺽하시는 겁니까?”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안쪽을 훑어보았다.“상단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단낭은 복동이를 달래며 오늘따라 새 옷감으로 단장한 올케를 곁눈질해 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아까 상단 마님께서 직접 문을 열어주셨는데 못 봤습니까?”문밖에서는 아직도 단 노파의 귀신 울음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왕수연의 얼굴이 확 굳었다.“큰일 났네!”그녀는 몸을 돌려 급히 문쪽으로 달려갔다.단 노파는 평생 거친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아람 같은 여자가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이 손 놓으세요! 안 그러면 사람을 부를 겁니까! 감히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이닥치는 겁니까?”아람은 이런 몰상식한 노파를 처음 봤다.“네가 먼저 날 밀쳤잖아. 오늘은 주인댁에 확실히 보여줄 거다!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 어떻게 여기서 일한단 말이냐!”단 노파는 아람의 다리를 악착같이 끌어안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내리면 자기도 삼천 문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 생각에 고함은 더 커져만 갔다.맞은편 집에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봉변을 당한 줄 안 것이다.“아람 마님, 강세오 대인을 불러드릴까요?”그때 왕수연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어머니! 어서 놓으세요!”그녀는 노파를 끌어당기며 급히 말했다.“이분이 바로 상단 마님입니다.”단 노파는 그제야 손을 풀었다.“아, 아아… 상단 마님이셨군요.”순식간에 얼굴에 웃음을 덕지덕지 붙였다.“이 늙은이가 눈이 어두워 미처 못 알아봤습니다.”아람은 얼굴을 굳힌 채 두 사람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25화

    단비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게다가 단낭이 얼마를 받든 그건 전부 그 사람 능력입니다.”그때, 문밖에서 냉소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애나 보는 거였습니까? 그게 무슨 능력입니까? 여인이라면 다 하는 건데요.”단비영의 제수, 왕수연과 그녀의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섰다.왕 노파가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전 또 큰아주버님께서 무슨 큰 재주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결국 자기 마누라한테 다 몰아준 거였네요.”그녀는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수연아, 팔백 문이면 됐다. 그런 고생은 하지 말거라.”단비영은 예전엔 그나마 말이 통하던 어머니마저 이렇게 변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값은 마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사람을 뽑는 것도 그쪽입니다. 지금 여기서 저를 몰아붙여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상단 주인께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잡일꾼 하나, 녹봉은 팔백 문뿐이라고요. 내일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뽑겠답니다.”그는 더 이상 누구의 반응도 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단낭은 아람을 마주하기가 몹시 민망했다. 남편은 효심만 앞서고 비바람 맞으며 번 돈은 고스란히 둘째 집안의 입으로 들어가니 말이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고작 집을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잊어버린 것일까?엉망진창인 집안 사정에 마님까지 끌어들이다니. 자기 아우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칫 사람을 다치게라도 하면 자신이 무슨 낯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아람은 단낭이 이틀째 웃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아직도 그 일로 속을 앓고 있음을 알았다.“아직도 화났느냐? 그만 생각하거라. 잡일꾼치곤 팔백 문이 좀 센 건 맞지만 네가 삼천 문인데 제수는 팔백 문이잖아. 게다가 이틀이나 지났다. 그러니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단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가에 서운함이 어렸다.“송구합니다. 괜히 이런 일로 폐를 끼쳐서요.”아람은 단낭의 품에서 복동이를 받아 안았다.“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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