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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서은월
주종현이 뒤를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송하윤은 가볍게 웃으며,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강 마님은 오라버니를 몇 해나 모셔왔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닙니까?”

그러자 주종현의 머릿속에 순간 상사절 그날 밤, 달빛 아래 겸손했던 그녀의 자태가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는 그런 몰지각한 여인이 아니네.”

송하윤은 그가 다른 여인을 두둔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스산하게 저렸다. 그러나 그 불쾌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정실은 자신이 될 터, 게다가 그녀는 송 가의 적녀가 아닌가? 돈 주고 사들인 하녀는 기껏해야 잠시 기분을 달래는 존재일 뿐, 굳이 마음을 쓸 필요도 없었다.

주종현은 송하윤을 송부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송이당이 문을 나서려다 마침 눈앞에 누이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대낮에 길바닥에서 부둥켜안고, 체통이란 게 있느냐!”

송하윤은 턱을 치켜들고 거만히 말했다.

“주 가와 송 가는 이미 혼담을 나눈 사이입니다. 누가 감히 입방아를 찧겠습니까?”

송이당은 누이가 버릇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눈을 주종현에게 돌렸다.

“제 누이가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해도, 주 세자마저 이 도리를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주종현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정이 급박했습니다.”

“오라버니, 공무가 있지 않으십니까? 어서 가 보셔야지요!”

그가 또다시 입을 열기 전에 송하윤은 억지로 그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주종현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 너와 함께 가서 마님을 뵙겠네.”

“필요 없습니다!”

송하윤은 손수건을 움켜쥐고 이미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이미 궁에 들어가신 걸 보니 아마 어머니께서도 무사하실 겁니다. 오늘 집까지 바려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오라버니께서 온청을 데리고 오십시오. 함께 차를 마시며 꽃을 감상합시다.”

송하윤이 황급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곁에 있던 시녀 소영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만약 세자께서 우리가 속인 걸 알게 되신다면…”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

송하윤은 여전히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국공부인께서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고 며칠 뒤 무슨 다과회를 연다더라. 그게 다 뭣이더냐? 결국엔 여서린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수작일 뿐이지. 오늘 종현 오라버니와 함께 번화한 거리에서 나란히 말을 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시어머니가 될 이에게까지. 오라버니는 오직 나를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준 셈이다.”

송하윤은 불현듯 조금 전 주종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이를 악물며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천한 첩… 종현 오라버니가 감히 그녀를 두둔하다니! 어린 나이에 침소에 기어들지 않았다면 어찌 종현 오라버니께서 벌써 자식을 두었겠느냐!”

“아가씨…”

소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송하윤은 무심히 마당의 목련 한 송이를 꺾었다. 새하얀 꽃잎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만약 그녀가 얌전히 구석에 숨어서 목숨을 구걸한다면 나라도 너그럽게 대해줄 것 같다. 허나, 감히 종현 오라버니의 마음을 넘본다면...!”

말은 끝내 맺지 않았으나 갓 꺾은 목련은 이미 그녀의 발 밑에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결국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현무가 위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시아는 길가에 서서 질풍처럼 지나쳐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연아를 배었을 때, 집안 식구들은 모두 동산 장원에서 피서를 보냈다. 그 장원에는 한 무리의 청매림이 있었고 집안에서 담그는 매실주는 모두 그곳의 매실로 빚어진 것이었다. 숲 사이에는 몇 그루의 뽕나무도 있었는데 마침 붉게 익어가던 참이었다.

강시아는 홀로 나무 아래 앉아 오디를 배부르게 먹었다. 한참 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명옥이 그녀를 찾으러 올 때쯤 그녀는 이미 한 시간 넘게 숲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배가 불러 걸음이 더뎌진 데다, 몸에 태기까지 있어 들어올 때는 멀지 않아 보였던 숲이 돌아갈 때는 끝도 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명옥은 그녀가 느릿느릿 걷는 게 싫어 저 혼자 먼저 달려가 버린 뒤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종현이 말을 끌고 나타났다.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그녀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다가 뒤꿈치가 풀숲 속 돌에 걸려 중심을 잃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러자 주종현이 순식간에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네 몸이 어떤지 헤아려 본 적도 없느냐!”

바로 그 순간, 강시아는 그만 발목을 접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배를 부여안고 입술을 꼭 깨문 채 힘들어하며 말했다.

“첩이… 첩이 발목을 접질렸습니다. 서방님께서 저를 데려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주종현은 그녀의 발목을 흘깃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서방님…?”

강시아는 얼떨떨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두려는 걸까?

“적토마는 타인에게 등을 내주지 않는다. 사람을 불러 너를 데리러 오게 하마.”

그는 말을 끌며 떠나 버렸다.

그녀는 해가 저물도록 기다렸으나 주종현도, 그가 보낸다는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홀로 절뚝이며 장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적토마가 사람을 태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만을 태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멀어져 가는 말 그림자가 눈앞에서 사라져가자, 강시아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간신히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억눌렀다.

돌아온 설강의 눈동자에는 가려지지 않는 부끄러움이 어려 있었다.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참이나 늦어 먼저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설강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강 마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눈을 피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제가... 줄에 오래 서 있던 탓이옵니다!”

강시아는 모든 것을 꿰뚫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구나. 하마터면 괜히 너를 오해할 뻔했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맞다. 내가 이미 점포 주인과 말해 두었으니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비단실은 잎으로 전부 이곳에서 사 오면 된다.”

“모두 여기서요?”

설강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자 점포 안주인이 곧장 덧붙였다.

“저희 가게에서는 직접 댁까지 실을 배달해 드리기도 합니다.”

설강은 강시아와 점포 안주인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곧장 강시아의 말을 고 유모에게 전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는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작은 뜰의 곁방은 이미 자수방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틀 위에 빛깔 찬란한 비단실이 줄지어 걸려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색조라 해도 이 비단실만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강시아는 수틀 앞에 앉아 손가락을 재빠르게 놀렸다. 연아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섰고 문가로부터 비친 햇살이 아이의 작은 몸 뒤로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가 수틀 위에서 흔들리자 강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일부러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다가오자 불쑥 몸을 돌려 번쩍 안아 올렸다.

“꺅!”

아이는 놀라 비명을 지른 뒤 이내 어머니 품속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강시아는 아이를 꼭 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설강은 어디 있느냐?”

연아의 동그란 눈동자가 촉촉이 빛났다.

“설강 언니는 방금 막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속삭이듯 말했다.

“설강 언니가 은전을 주웠대요!”

그러자 강시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걸 네가 본 것이냐?”

연아는 고개를 흔들며 귀엽게 대꾸했다.

“언니가 웃었어요. 꼭 어머니께서 돈을 세실 때처럼요!”

강시아는 실소를 흘리며 아이를 다독였다.

“하나 이건 다른 이에게 말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설강 언니가 서운해할 게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연아는 금약… 금약 할 거예요!”

“금약?”

강시아는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리며 정정해 주었다.

“그건 ‘일약천금’이라고 한단다.”

설강이 들어섰을 때, 강시아는 수틀 앞에 딸과 나란히 앉아 실타래를 쪼개고 있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실이라 한순간 방심하거나 기침이라도 하면 금세 흩어져 사라질 정도였다.

그녀의 솜씨는 본디 상 상궁의 절기였는데 그 많은 소녀들 중 오직 강시아만이 전수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수공은 눈을 해치니 연아는 평생 즐겁게만 살면 된다.”

설강은 연아의 손을 잡아주며 다가왔다.

“마님, 명옥이 와 있사옵니다.”

강시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정문 앞에 명옥이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저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명옥은 본디 집안의 소생으로 부모 또한 국공부인 조 씨의 지참 노비였다. 비록 지금은 장원으로 내쳐졌으나 적어도 조 씨 앞에서는 조금의 체면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명옥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마님, 부디 저를 살려 주시옵소서!”

강시아는 위쪽 자리에 앉아 맑은 차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무력했다.

“명옥, 너는 지금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명옥은 국공부인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큰 마님의 수하에게 몰려 궁지에 처해 있었다. 국공부인의 체면을 잃게 만들었으니 이제 그녀 또한 보기가 싫을 터. 결국 국공부의 이등 시녀였던 그녀는 이제 각 뜰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남은 인생을 뒤뜰에서 고된 허드렛일을 하거나 아니면 어미처럼 장원으로 내쳐질 것이었다. 명옥은 깊이 후회했다. 애초에 괜히 스스로 앞장서 고자질하지 말 걸이라고.

“마님, 제가 네 해 넘게 마님과 아가씨를 모신 정을 생각하시어 저를 위해 한 말씀만 전해 주시옵소서!”

강시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옥아, 나를 더 괴롭히지 말거라. 내가 무슨 수로 너를 위해 청을 올리겠느냐? 설령 올린다 해도, 과연 누구에게 닿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명옥이 성급히 몸을 곧추세우며 외쳤다.

“고 유모! 마님께서 고 유모 앞에서 한마디만 해 주셔도 저는 족하옵니다. 어쨌든 마님은 세자의 곁을 지키는 분이신데, 고 유모께서 어찌 감히 외면할 수 있겠사옵니까?”

강시아는 의아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되물었다.

“고 유모라니. 어찌하여 고 유모에게 가려 하느냐? 내가 알기론, 네 어미는 작은 마님의 지참으로 들어왔고 너 또한 세자 댁에서 삼 해를 모셨지 않느냐? 그러니 차라리 작은 마님께 가서 구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느냐?”

명옥은 말문이 막혔다. 작은 마님에게 갈 수 있었다면 어찌 이리까지 굴러 들어왔겠는가?

강시아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돕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적에는 하찮은 시녀보다도 못했었다는걸.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위해 청을 올릴 수 있겠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더냐?”

명옥은 그녀의 말을 듣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 삼키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강시아가 집안에 들어왔을 때는 신발을 신겨 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자의 침소에 들어가 아이까지 낳아 주인이 되었으니 명옥은 억울하기만 했다. 본래 자신이 작은 마님을 통해 세자께 붙여질 통방이었건만 결국 운이 더 좋은 강시아에게 빼앗긴 것이다. 만약 자신이 세자의 총애만 얻을 수 있다면 고 유모는 물론이고 큰 마님까지 감히 간섭하지 못했을 것인데.

강시아는 명옥의 얼굴에 스치는 갖가지 감정의 빛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가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감탄하듯 읊조렸다.

“금년에 갓 들어온 춘차라더니 볶음의 화기가 적당하구나. 명옥, 다른 것은 도와줄 수 없으니 새 차라도 조금 나누어 주겠다.”

명옥은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사옵니다. 마님께서 직접 드시지요. 저에게도 곧 새로운 차가 생길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올 때 가득하던 근심과는 달리 떠나는 뒷모습에는 기묘하게도 몇 가닥의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설강은 연아를 데리고 내실에서 걸어 나왔다.

“마님, 명옥은 이미 고 유모께 벌을 받았사옵니다. 주인을 배반하고 영화를 좇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뻔뻔하게 마님께 구원을 청하는군요.”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게 어느 누구인들 쉽겠느냐?”

설강의 입술이 잠시 떨리듯 움직였다. 고 유모는 그녀에게 거듭 일렀다. 강시아의 유약한 겉모습에 결코 속아서는 안 된다고.

“예전에 세자 댁에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들여보내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오직 그녀만이 아이를 품었고 곧장 첩으로 올랐지. 한데 어찌 보통 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눈앞의 강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연아의 흩어진 머리를 다정히 손으로 빗어 올려 단정히 땋아 주고 있었다. 마치 명옥이 주인을 배반한 것은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모습에 설강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파동이 일어났다.

어쩌면 세자는 뒷전의 다툼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그저 이렇게 단순한 여인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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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네가 그들보다 잘 살고 있기 때문이야.”단낭은 그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그럼 더 잘 살아야겠습니다. 아주 잘 살아서 숨넘어가게 만들어야겠어요.”“그래야지.”아람은 복동이를 받아안았다.“그런 인간들 때문에 식욕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 난 아직도 생선살 죽을 기다리고 있거든.”단낭은 아람이 자신을 달래려 일부러 저렇게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단 씨 집안일로 더는 아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비영이 해결하지 못하면 그땐 자신이 단비영을 해결하면 될 일이다. 자기 집안 일로도 모자라 이제는 상단 마님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이다.단낭이 남편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단비영은 주종현과 함께 건주로 떠났다.무슨 일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녹봉이 두 냥이나 올랐다.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단 씨 집안이 더더욱 단비영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단 노파는 단비영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 근처에 올 담은 없었기에 길에서 몇 차례 단낭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단낭은 그때마다 매몰차게 뿌리쳤다.아무리 험한 말을 퍼붓고 화이시키겠다고 협박해도 단낭은 더 단단해질 뿐이었다.그녀의 태도에 단 노파는 분통이 터져 허벅지를 쿵쿵 내리쳤다.깊은 가을이 지나자 날이 부쩍 쌀쌀해졌고 아이들은 눈에 띄게 훌쩍 자라 있었다.아람 상단의 곡물 창고는 가득 찼다. 버티며 팔지 않던 농가들은 곡가가 내려가고 나서야 팔지 못한 것을 깨닫고 뒤늦게 허둥대기 시작했다.아설이 이 소식을 전하자 몇 달 동안 참아왔던 아람은 마침내 속이 후련해졌다.“여인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더니.”아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냥 네가 알아서 하거라. 지금까지 전부 네가 결정했잖아.”정현에 머문 지 반 년이 넘은 아설은 어느새 제법 큰 상단 주인다운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석 포두가 농민들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 아설은 단호하게 문전박대를 했다. 예전에 차라리 풀어버리겠다고 했던 쌀을 이제 와서 사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26화

    “형님, 이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아직 아이 하나 제대로 못 달래시네요. 제가 할게요. 저는 한 번에 둘이나 낳았거든요.”단낭은 왕수연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이를 빼앗으려 들자 단낭은 깜짝 놀라 몸을 틀어 아이를 안은 채 물러섰다.“왜 여기 온 것입니까!”“제가 왜 왔냐고요?”왕수연이 콧방귀를 뀌었다.“형님께서는 몰래 큰돈을 벌고 있으면서 혼자만 꿀꺽하시는 겁니까?”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안쪽을 훑어보았다.“상단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단낭은 복동이를 달래며 오늘따라 새 옷감으로 단장한 올케를 곁눈질해 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아까 상단 마님께서 직접 문을 열어주셨는데 못 봤습니까?”문밖에서는 아직도 단 노파의 귀신 울음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왕수연의 얼굴이 확 굳었다.“큰일 났네!”그녀는 몸을 돌려 급히 문쪽으로 달려갔다.단 노파는 평생 거친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아람 같은 여자가 떼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이 손 놓으세요! 안 그러면 사람을 부를 겁니까! 감히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이닥치는 겁니까?”아람은 이런 몰상식한 노파를 처음 봤다.“네가 먼저 날 밀쳤잖아. 오늘은 주인댁에 확실히 보여줄 거다!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 어떻게 여기서 일한단 말이냐!”단 노파는 아람의 다리를 악착같이 끌어안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내리면 자기도 삼천 문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 생각에 고함은 더 커져만 갔다.맞은편 집에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봉변을 당한 줄 안 것이다.“아람 마님, 강세오 대인을 불러드릴까요?”그때 왕수연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어머니! 어서 놓으세요!”그녀는 노파를 끌어당기며 급히 말했다.“이분이 바로 상단 마님입니다.”단 노파는 그제야 손을 풀었다.“아, 아아… 상단 마님이셨군요.”순식간에 얼굴에 웃음을 덕지덕지 붙였다.“이 늙은이가 눈이 어두워 미처 못 알아봤습니다.”아람은 얼굴을 굳힌 채 두 사람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425화

    단비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게다가 단낭이 얼마를 받든 그건 전부 그 사람 능력입니다.”그때, 문밖에서 냉소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애나 보는 거였습니까? 그게 무슨 능력입니까? 여인이라면 다 하는 건데요.”단비영의 제수, 왕수연과 그녀의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섰다.왕 노파가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전 또 큰아주버님께서 무슨 큰 재주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결국 자기 마누라한테 다 몰아준 거였네요.”그녀는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수연아, 팔백 문이면 됐다. 그런 고생은 하지 말거라.”단비영은 예전엔 그나마 말이 통하던 어머니마저 이렇게 변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값은 마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사람을 뽑는 것도 그쪽입니다. 지금 여기서 저를 몰아붙여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상단 주인께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잡일꾼 하나, 녹봉은 팔백 문뿐이라고요. 내일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뽑겠답니다.”그는 더 이상 누구의 반응도 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단낭은 아람을 마주하기가 몹시 민망했다. 남편은 효심만 앞서고 비바람 맞으며 번 돈은 고스란히 둘째 집안의 입으로 들어가니 말이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고작 집을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잊어버린 것일까?엉망진창인 집안 사정에 마님까지 끌어들이다니. 자기 아우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칫 사람을 다치게라도 하면 자신이 무슨 낯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아람은 단낭이 이틀째 웃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아직도 그 일로 속을 앓고 있음을 알았다.“아직도 화났느냐? 그만 생각하거라. 잡일꾼치곤 팔백 문이 좀 센 건 맞지만 네가 삼천 문인데 제수는 팔백 문이잖아. 게다가 이틀이나 지났다. 그러니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단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가에 서운함이 어렸다.“송구합니다. 괜히 이런 일로 폐를 끼쳐서요.”아람은 단낭의 품에서 복동이를 받아 안았다.“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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