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서은월
주종현이 뒤를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송하윤은 가볍게 웃으며,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강 마님은 오라버니를 몇 해나 모셔왔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닙니까?”

그러자 주종현의 머릿속에 순간 상사절 그날 밤, 달빛 아래 겸손했던 그녀의 자태가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는 그런 몰지각한 여인이 아니네.”

송하윤은 그가 다른 여인을 두둔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스산하게 저렸다. 그러나 그 불쾌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정실은 자신이 될 터, 게다가 그녀는 송 가의 적녀가 아닌가? 돈 주고 사들인 하녀는 기껏해야 잠시 기분을 달래는 존재일 뿐, 굳이 마음을 쓸 필요도 없었다.

주종현은 송하윤을 송부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송이당이 문을 나서려다 마침 눈앞에 누이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대낮에 길바닥에서 부둥켜안고, 체통이란 게 있느냐!”

송하윤은 턱을 치켜들고 거만히 말했다.

“주 가와 송 가는 이미 혼담을 나눈 사이입니다. 누가 감히 입방아를 찧겠습니까?”

송이당은 누이가 버릇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눈을 주종현에게 돌렸다.

“제 누이가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해도, 주 세자마저 이 도리를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주종현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정이 급박했습니다.”

“오라버니, 공무가 있지 않으십니까? 어서 가 보셔야지요!”

그가 또다시 입을 열기 전에 송하윤은 억지로 그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주종현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 너와 함께 가서 마님을 뵙겠네.”

“필요 없습니다!”

송하윤은 손수건을 움켜쥐고 이미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이미 궁에 들어가신 걸 보니 아마 어머니께서도 무사하실 겁니다. 오늘 집까지 바려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오라버니께서 온청을 데리고 오십시오. 함께 차를 마시며 꽃을 감상합시다.”

송하윤이 황급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곁에 있던 시녀 소영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만약 세자께서 우리가 속인 걸 알게 되신다면…”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

송하윤은 여전히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국공부인께서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고 며칠 뒤 무슨 다과회를 연다더라. 그게 다 뭣이더냐? 결국엔 여서린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수작일 뿐이지. 오늘 종현 오라버니와 함께 번화한 거리에서 나란히 말을 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시어머니가 될 이에게까지. 오라버니는 오직 나를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준 셈이다.”

송하윤은 불현듯 조금 전 주종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이를 악물며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천한 첩… 종현 오라버니가 감히 그녀를 두둔하다니! 어린 나이에 침소에 기어들지 않았다면 어찌 종현 오라버니께서 벌써 자식을 두었겠느냐!”

“아가씨…”

소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송하윤은 무심히 마당의 목련 한 송이를 꺾었다. 새하얀 꽃잎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만약 그녀가 얌전히 구석에 숨어서 목숨을 구걸한다면 나라도 너그럽게 대해줄 것 같다. 허나, 감히 종현 오라버니의 마음을 넘본다면...!”

말은 끝내 맺지 않았으나 갓 꺾은 목련은 이미 그녀의 발 밑에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결국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현무가 위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시아는 길가에 서서 질풍처럼 지나쳐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연아를 배었을 때, 집안 식구들은 모두 동산 장원에서 피서를 보냈다. 그 장원에는 한 무리의 청매림이 있었고 집안에서 담그는 매실주는 모두 그곳의 매실로 빚어진 것이었다. 숲 사이에는 몇 그루의 뽕나무도 있었는데 마침 붉게 익어가던 참이었다.

강시아는 홀로 나무 아래 앉아 오디를 배부르게 먹었다. 한참 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명옥이 그녀를 찾으러 올 때쯤 그녀는 이미 한 시간 넘게 숲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배가 불러 걸음이 더뎌진 데다, 몸에 태기까지 있어 들어올 때는 멀지 않아 보였던 숲이 돌아갈 때는 끝도 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명옥은 그녀가 느릿느릿 걷는 게 싫어 저 혼자 먼저 달려가 버린 뒤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종현이 말을 끌고 나타났다.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그녀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다가 뒤꿈치가 풀숲 속 돌에 걸려 중심을 잃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러자 주종현이 순식간에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네 몸이 어떤지 헤아려 본 적도 없느냐!”

바로 그 순간, 강시아는 그만 발목을 접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배를 부여안고 입술을 꼭 깨문 채 힘들어하며 말했다.

“첩이… 첩이 발목을 접질렸습니다. 서방님께서 저를 데려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주종현은 그녀의 발목을 흘깃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서방님…?”

강시아는 얼떨떨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두려는 걸까?

“적토마는 타인에게 등을 내주지 않는다. 사람을 불러 너를 데리러 오게 하마.”

그는 말을 끌며 떠나 버렸다.

그녀는 해가 저물도록 기다렸으나 주종현도, 그가 보낸다는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홀로 절뚝이며 장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적토마가 사람을 태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만을 태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멀어져 가는 말 그림자가 눈앞에서 사라져가자, 강시아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간신히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억눌렀다.

돌아온 설강의 눈동자에는 가려지지 않는 부끄러움이 어려 있었다.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참이나 늦어 먼저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설강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강 마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눈을 피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제가... 줄에 오래 서 있던 탓이옵니다!”

강시아는 모든 것을 꿰뚫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구나. 하마터면 괜히 너를 오해할 뻔했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맞다. 내가 이미 점포 주인과 말해 두었으니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비단실은 잎으로 전부 이곳에서 사 오면 된다.”

“모두 여기서요?”

설강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자 점포 안주인이 곧장 덧붙였다.

“저희 가게에서는 직접 댁까지 실을 배달해 드리기도 합니다.”

설강은 강시아와 점포 안주인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곧장 강시아의 말을 고 유모에게 전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는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작은 뜰의 곁방은 이미 자수방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틀 위에 빛깔 찬란한 비단실이 줄지어 걸려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색조라 해도 이 비단실만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강시아는 수틀 앞에 앉아 손가락을 재빠르게 놀렸다. 연아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섰고 문가로부터 비친 햇살이 아이의 작은 몸 뒤로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가 수틀 위에서 흔들리자 강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일부러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다가오자 불쑥 몸을 돌려 번쩍 안아 올렸다.

“꺅!”

아이는 놀라 비명을 지른 뒤 이내 어머니 품속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강시아는 아이를 꼭 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설강은 어디 있느냐?”

연아의 동그란 눈동자가 촉촉이 빛났다.

“설강 언니는 방금 막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속삭이듯 말했다.

“설강 언니가 은전을 주웠대요!”

그러자 강시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걸 네가 본 것이냐?”

연아는 고개를 흔들며 귀엽게 대꾸했다.

“언니가 웃었어요. 꼭 어머니께서 돈을 세실 때처럼요!”

강시아는 실소를 흘리며 아이를 다독였다.

“하나 이건 다른 이에게 말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설강 언니가 서운해할 게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연아는 금약… 금약 할 거예요!”

“금약?”

강시아는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리며 정정해 주었다.

“그건 ‘일약천금’이라고 한단다.”

설강이 들어섰을 때, 강시아는 수틀 앞에 딸과 나란히 앉아 실타래를 쪼개고 있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실이라 한순간 방심하거나 기침이라도 하면 금세 흩어져 사라질 정도였다.

그녀의 솜씨는 본디 상 상궁의 절기였는데 그 많은 소녀들 중 오직 강시아만이 전수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수공은 눈을 해치니 연아는 평생 즐겁게만 살면 된다.”

설강은 연아의 손을 잡아주며 다가왔다.

“마님, 명옥이 와 있사옵니다.”

강시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정문 앞에 명옥이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저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명옥은 본디 집안의 소생으로 부모 또한 국공부인 조 씨의 지참 노비였다. 비록 지금은 장원으로 내쳐졌으나 적어도 조 씨 앞에서는 조금의 체면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명옥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마님, 부디 저를 살려 주시옵소서!”

강시아는 위쪽 자리에 앉아 맑은 차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무력했다.

“명옥, 너는 지금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명옥은 국공부인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큰 마님의 수하에게 몰려 궁지에 처해 있었다. 국공부인의 체면을 잃게 만들었으니 이제 그녀 또한 보기가 싫을 터. 결국 국공부의 이등 시녀였던 그녀는 이제 각 뜰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남은 인생을 뒤뜰에서 고된 허드렛일을 하거나 아니면 어미처럼 장원으로 내쳐질 것이었다. 명옥은 깊이 후회했다. 애초에 괜히 스스로 앞장서 고자질하지 말 걸이라고.

“마님, 제가 네 해 넘게 마님과 아가씨를 모신 정을 생각하시어 저를 위해 한 말씀만 전해 주시옵소서!”

강시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옥아, 나를 더 괴롭히지 말거라. 내가 무슨 수로 너를 위해 청을 올리겠느냐? 설령 올린다 해도, 과연 누구에게 닿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명옥이 성급히 몸을 곧추세우며 외쳤다.

“고 유모! 마님께서 고 유모 앞에서 한마디만 해 주셔도 저는 족하옵니다. 어쨌든 마님은 세자의 곁을 지키는 분이신데, 고 유모께서 어찌 감히 외면할 수 있겠사옵니까?”

강시아는 의아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되물었다.

“고 유모라니. 어찌하여 고 유모에게 가려 하느냐? 내가 알기론, 네 어미는 작은 마님의 지참으로 들어왔고 너 또한 세자 댁에서 삼 해를 모셨지 않느냐? 그러니 차라리 작은 마님께 가서 구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느냐?”

명옥은 말문이 막혔다. 작은 마님에게 갈 수 있었다면 어찌 이리까지 굴러 들어왔겠는가?

강시아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돕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적에는 하찮은 시녀보다도 못했었다는걸.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위해 청을 올릴 수 있겠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더냐?”

명옥은 그녀의 말을 듣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 삼키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강시아가 집안에 들어왔을 때는 신발을 신겨 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자의 침소에 들어가 아이까지 낳아 주인이 되었으니 명옥은 억울하기만 했다. 본래 자신이 작은 마님을 통해 세자께 붙여질 통방이었건만 결국 운이 더 좋은 강시아에게 빼앗긴 것이다. 만약 자신이 세자의 총애만 얻을 수 있다면 고 유모는 물론이고 큰 마님까지 감히 간섭하지 못했을 것인데.

강시아는 명옥의 얼굴에 스치는 갖가지 감정의 빛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가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감탄하듯 읊조렸다.

“금년에 갓 들어온 춘차라더니 볶음의 화기가 적당하구나. 명옥, 다른 것은 도와줄 수 없으니 새 차라도 조금 나누어 주겠다.”

명옥은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사옵니다. 마님께서 직접 드시지요. 저에게도 곧 새로운 차가 생길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올 때 가득하던 근심과는 달리 떠나는 뒷모습에는 기묘하게도 몇 가닥의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설강은 연아를 데리고 내실에서 걸어 나왔다.

“마님, 명옥은 이미 고 유모께 벌을 받았사옵니다. 주인을 배반하고 영화를 좇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뻔뻔하게 마님께 구원을 청하는군요.”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게 어느 누구인들 쉽겠느냐?”

설강의 입술이 잠시 떨리듯 움직였다. 고 유모는 그녀에게 거듭 일렀다. 강시아의 유약한 겉모습에 결코 속아서는 안 된다고.

“예전에 세자 댁에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들여보내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오직 그녀만이 아이를 품었고 곧장 첩으로 올랐지. 한데 어찌 보통 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눈앞의 강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연아의 흩어진 머리를 다정히 손으로 빗어 올려 단정히 땋아 주고 있었다. 마치 명옥이 주인을 배반한 것은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모습에 설강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파동이 일어났다.

어쩌면 세자는 뒷전의 다툼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그저 이렇게 단순한 여인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5화

    “그럼 내 누이의 시신은 어디 있는 겐가?”“나도 모르지. 그건 오직 세자께서만 알고 계시네.”“그럼 세자는 언제 돌아오는 겐가?”“세자께서 언제 돌아오실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네.”강세오는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보따리에는 지난 세월 동안 어렵게 모은 은전이 가득했다. 모두 누이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한 돈이었다. 그는 이 먼 길을 오는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미행을 당하기도 했고 이유 없이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혹여 몸값을 잃을까 두려워 일부러 길을 돌아 겨우 그들을 따돌리고 경성까지 올라왔건만 이 사람들은 그의 누이가 죽었다고 말했다.그럴 리가 없었다.그의 누이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강세오는 밤이 새도록 대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집사는 여러 차례 나와 그를 지켜보았으나 강세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문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세자는 근래 몹시 바빠 그림자조차 보기 어려웠다. 며칠씩 집에 들르지 않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이렇게 기다려도 소용없네. 몸만 상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큰 손해 아니겠나?”강세오는 천천히 돌계단을 짚으며 일어서더니 바짝 마른 입술로 말했다.“내 누이는 죽지 않았네. 나는 다시 돌아와 당신들을 찾을 것이네.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네.”쉰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새어나왔다.하인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집사님, 마님께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집사는 그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세자께서는 지금 강 마님의 일로 작은 마님과 큰 마님께 모두 등을 돌리신 상태다. 이 사실을 알렸다가는 저 사람은 경성에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강세오가 유 씨 저택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마침 지나던 여서린의 마차가 그를 발견했다.“멈춰라. 사람이 쓰러져 있다.”여서린은 아직 상중이라 쉽게 마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환이는 가서 문을 두드리고, 마 할아범은 저 사람을 시원한 곳으로 옮기시오.”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4화

    주종현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성왕은 마음이 깊고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손안에 또 어떤 패가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번에 폐하께서 성왕을 지방으로 내보낸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이에 위심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한 가지 더 보고드릴 일이 있사옵니다.”“무슨 일이냐?”위심은 잠시 주저했다. 자신이 과하게 의심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녕주에서 성왕에게 아 마님이라고 불리는 여인이 생겼고 아들도 하나 있다고 하옵니다.”“성왕에게 아들이 있다고?”폐하는 평생 자식이 없었고 성왕 역시 아내나 첩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 또한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성왕은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그 마님의 신분은 조사해보았느냐?”위심은 고개를 저었다.“행관에서 알아낸 바로는 그 부인의 성이 아 씨이고 우주 출신이라는 것뿐이옵니다.”시아… 아 마님…주종현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한 번 덜컥 내려앉았다.그는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다시 담담히 말했다.“아들이 있다면 흔적이 전혀 없을 리 없다. 계속 추적하거라. 또 한 가지. 경성 안에 적서와 길 문서를 조작하는 곳이 있더구나. 위조된 출성 기록은 모조리 조사해내거라.”“예.”주종현은 밀신들을 챙겨 들고 곧장 집을 나섰다.바쁘게 돌아다니기라도 해야 가슴 속 텅 빈 자리가 조금은 견딜 만해질 것 같았다.마차가 막 뜰을 벗어난 순간, 먼지투성이의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이가 영국공부 대문 앞에 나타났다.“이보시게. 나는 내 누이를 찾으러…”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인이 그를 계단 아래로 몰아냈다.“저리 가시게! 여기가 아무나 와서 누이를 찾을 수 있는 곳인 줄 아는 겐가?”강세오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내 누이는 이 집에서 하녀로 일한다고 했네! 한데 내가 못 찾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하인은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대 누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3화

    주종현이 말했다.“책망하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다.”그제야 계소만은 마음을 놓았다.“몇 번 되지 않습니다.”“한 번은… 강 누님께서는 자기 같은 여인은 사기당할 까 두렵다며 진주를 옥보루에 맡겨 위탁 판매해 달라 부탁했습니다.”“진주를 위탁 판매했다고?”주종현의 미간이 좁게 찌푸려졌다.계소만은 기억을 더듬으며 덧붙였다.“태후의 생신 연회 전 일이었습니다.”주종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연무장에 가서 만천을 찾아오너라.”“예.”계소만이 나가고서야 주종현은 곁에 놓인 자수틀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노잣돈을 벌기 위해 이런 위험한 일까지 했다는 말이냐?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떠나려 한 것이냐?”그는 텅 빈 뜰을 바라보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강시아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다.첫눈에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집안의 희망을 짊어진 장자로서 그는 할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영국공부의 장래를 떠받들겠다고 다짐했다.아버지가 늘 그를 꾸짖던 시절, 그는 강시아를 만났다. 그의 신분조차 알지 못했던 강시아는 단번에 그의 눈 속에 깃든 피로를 알아보았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뜻밖에도 그 작은 소녀에게서 마음이 놓이는 안도감을 찾게 된 것이다.두 번째로 만난 것은 그 이듬해였다. 그때는 멀리서도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그녀 또한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듯했지만 그를 보자마자 몸을 돌려 피해 버렸다.그해 연회에서 강시아는 그의 사촌 형님의 눈에 띄었고 형님이 농담조로 데려가겠다 하자 그도 농담처럼 이를 막아섰다.그러나 그날 밤, 옷을 전해주러 가던 길에 강시아는 술을 마시려던 형님과 마주쳤고 이미 그녀에게 눈독 들이고 있던 형님은 결국 약을 먹이고 말았다.이를 눈치챈 그는 곧장 강시아를 데리고 나왔지만 약의 힘은 어마어마했으며 그 일로 인해 강시아가 아이를 갖게 되자 그는 결단을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2화

    경성.주종현이 막 집으로 돌아오자 콩뼈가 대문 밖까지 달려 나와 그를 반겼다.강시아 일행이 없는 지금, 콩뼈는 그와 함께 지내며 매일 오후마다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주종현은 꼬리를 흔들며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작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너도 이렇게 날 기다리는데… 그녀는 왜 이틀도 기다려주지 못했을까?”콩뼈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발치에서 두어 바퀴를 돌더니 몸을 붙여오며 끙끙 소리를 냈다.마치 왜 자기를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듯했다.그때, 향 유모가 다가와 아뢰었다.“세자 저하, 작은 마님께서 오시랍니다.”고 유모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급히 말을 보탰다.“큰 마님께서 세자를 뵙고 싶어하시옵니다.”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주종현은 콩뼈를 데리고 곧장 작은 뜰로 향했다.“요즘 일이 많아 찾아뵙기 어려울 것 같구나.”“세자 저하…”고 유모가 뒤따라오려 하자 향 유모가 길을 막아섰다.“고 유모, 세자께서 바쁘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고 유모는 향 유모를 한번 바라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서 큰 마님의 뜰로 걸어갔다.이 일은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큰 마님은 송하윤을 영국공부로 데려와 주종현에게 받아들이라고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 씨뿐 아니라 영국공마저 크게 노했다. 지금 송 가는 진흙탕이었고 규수라면 경성에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송하윤을 고집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큰 마님은 아들과 며느리가 말을 듣지 않자 둘을 건너뛰고 곧장 손자에게로 향했다. 요구도 낮아져 정실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부탁했다. 이에 조 씨는 분을 삭이지 못해 거의 피를 토할 기세로 화를 냈다. 큰 마님이 송 가를 돕겠다며 손자까지 희생시키려 한다는 생각에 그녀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며느릿감을 물색하는 중이었다.정작 당사자인 아들은 집안을 피해 다니며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결국 주종현은 자신의 거처를 아예 작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1화

    “당신은 연아를 안기 힘들 테니 제가 안을게요.”아설은 연아를 문희에게 건네고서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저…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아람은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 주었다.“미안하다, 설아.”만약 자신이 그녀들을 데리고 행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산적을 마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아설은 그를 꽉 껴안으며 울먹였다.“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 큰 수염쟁이가 언니를 목 졸라 죽일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그녀는 옆방에 갇혀 있었다. 문은 걸쇠로 잠겨 있었기에 벽에 난 작은 구멍으로 겨우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급하고 답답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속을 태우며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아람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문희가 나섰다.“전하의 행렬과 함께라면 다른 건 몰라도 목숨 걱정은 없습니다.”아람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술만 다물고 아설의 어깨를 다독였다.“문희 아가씨 말이 맞다. 전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으니 더는 이런 위험은 없을 것이다.”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동쪽 하늘이 희끗하게 밝아오고 있었다.행관 밖 마차 행렬은 모두 정비되어 있었고 당기봉을 제외한 관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주목이던 시영은 당분간 자사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는지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틀 내내 공포에 떨었는데 성왕이 떠난다는 소식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 주목부에 잠입하는 바람에 그는 부인과 함께 침상 아래에 숨어 날이 밝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졸음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억지로 하품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눈물을 훔치던 순간, 성왕이 행관에서 걸어나왔다.잠시 멈칫하더니 시영은 얼른 달려가 말했다.“전하께서 이렇게 빨리 떠나시다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역시 조정 관리답게 대사는 술술 흘러나왔고 소매 끝에는 진짜 눈물까지 번져 있었다. 그 뒤의 관리들 역시 당황하여 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200화

    아정모는 원래 맹 노장군 휘하의 한 작은 장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맹 가의 아가씨인 맹청련과 서로 마음을 품고 있었다.맹 노장군은 경중의 명문세가의 아들을 사윗감으로 정했기에 맹 아가씨와 아 장군 두 사람은 사랑을 위해 혼례를 버리고 도망쳤었던 것이다.아정모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그의 얼굴빛 역시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지나간 장면들이 잔상처럼 스쳐갔다.소휘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씩 웃었다.“본왕이 하나 알려주지. 그 아이…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맹 노장군도 지금껏 찾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이야.”아정모의 동공이 떨렸다.“살아… 있다고요?”소휘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아 장군이 이 깊은 산에 숨어 지내면 그 아들은 결국 맹 노장군 손에 들어가고 말 것이지.”그 순간 아정모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탁자 위의 장계를 황급히 펼쳤다.“강세오....”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흔들렸다.“세오…!”“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소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본왕의 사람도 이어진 흔적을 놓쳤다. 전해지길 그는 올해 과거에 응시한다 하더군. 과거까지 두어 달 남았으니 그때면 경성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아정모는 이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지금 당장 경성으로 가겠습니다!”소휘가 그를 가로막았다.“아 장군, 급히 나서면 안 된다. 지금 경성으로 달려가는 것은 곧 맹 노장군에게자신이 살아있다 고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허! 저는 그를 무서워한 적이 없습니다!”“장군께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참고 살아오셨건만 이 잠시를 참지 못할리는 없겠지요.”아정모는 어금니를 악물었다.“성왕 전하께선 어떤 계책이 있기에 그러는 것입니까?”소휘는 가볍게 웃었다.“장군, 조급해 하지 말거라. 장군이 본왕을 따라 우주로 들어와 장군이 되어 준다면 본왕 역시 장군의 아들을 상처 하나 없이 돌려주겠다.”아정모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전하의 봉지가 우주인가 보군요. 거 참 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