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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مؤلف: 서은월
주종현이 뒤를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송하윤은 가볍게 웃으며,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강 마님은 오라버니를 몇 해나 모셔왔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닙니까?”

그러자 주종현의 머릿속에 순간 상사절 그날 밤, 달빛 아래 겸손했던 그녀의 자태가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는 그런 몰지각한 여인이 아니네.”

송하윤은 그가 다른 여인을 두둔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스산하게 저렸다. 그러나 그 불쾌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정실은 자신이 될 터, 게다가 그녀는 송 가의 적녀가 아닌가? 돈 주고 사들인 하녀는 기껏해야 잠시 기분을 달래는 존재일 뿐, 굳이 마음을 쓸 필요도 없었다.

주종현은 송하윤을 송부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송이당이 문을 나서려다 마침 눈앞에 누이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대낮에 길바닥에서 부둥켜안고, 체통이란 게 있느냐!”

송하윤은 턱을 치켜들고 거만히 말했다.

“주 가와 송 가는 이미 혼담을 나눈 사이입니다. 누가 감히 입방아를 찧겠습니까?”

송이당은 누이가 버릇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눈을 주종현에게 돌렸다.

“제 누이가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해도, 주 세자마저 이 도리를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주종현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정이 급박했습니다.”

“오라버니, 공무가 있지 않으십니까? 어서 가 보셔야지요!”

그가 또다시 입을 열기 전에 송하윤은 억지로 그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주종현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 너와 함께 가서 마님을 뵙겠네.”

“필요 없습니다!”

송하윤은 손수건을 움켜쥐고 이미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이미 궁에 들어가신 걸 보니 아마 어머니께서도 무사하실 겁니다. 오늘 집까지 바려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오라버니께서 온청을 데리고 오십시오. 함께 차를 마시며 꽃을 감상합시다.”

송하윤이 황급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곁에 있던 시녀 소영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만약 세자께서 우리가 속인 걸 알게 되신다면…”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

송하윤은 여전히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국공부인께서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고 며칠 뒤 무슨 다과회를 연다더라. 그게 다 뭣이더냐? 결국엔 여서린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수작일 뿐이지. 오늘 종현 오라버니와 함께 번화한 거리에서 나란히 말을 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시어머니가 될 이에게까지. 오라버니는 오직 나를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준 셈이다.”

송하윤은 불현듯 조금 전 주종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이를 악물며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천한 첩… 종현 오라버니가 감히 그녀를 두둔하다니! 어린 나이에 침소에 기어들지 않았다면 어찌 종현 오라버니께서 벌써 자식을 두었겠느냐!”

“아가씨…”

소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송하윤은 무심히 마당의 목련 한 송이를 꺾었다. 새하얀 꽃잎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만약 그녀가 얌전히 구석에 숨어서 목숨을 구걸한다면 나라도 너그럽게 대해줄 것 같다. 허나, 감히 종현 오라버니의 마음을 넘본다면...!”

말은 끝내 맺지 않았으나 갓 꺾은 목련은 이미 그녀의 발 밑에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결국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현무가 위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시아는 길가에 서서 질풍처럼 지나쳐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연아를 배었을 때, 집안 식구들은 모두 동산 장원에서 피서를 보냈다. 그 장원에는 한 무리의 청매림이 있었고 집안에서 담그는 매실주는 모두 그곳의 매실로 빚어진 것이었다. 숲 사이에는 몇 그루의 뽕나무도 있었는데 마침 붉게 익어가던 참이었다.

강시아는 홀로 나무 아래 앉아 오디를 배부르게 먹었다. 한참 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명옥이 그녀를 찾으러 올 때쯤 그녀는 이미 한 시간 넘게 숲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배가 불러 걸음이 더뎌진 데다, 몸에 태기까지 있어 들어올 때는 멀지 않아 보였던 숲이 돌아갈 때는 끝도 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명옥은 그녀가 느릿느릿 걷는 게 싫어 저 혼자 먼저 달려가 버린 뒤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종현이 말을 끌고 나타났다.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그녀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다가 뒤꿈치가 풀숲 속 돌에 걸려 중심을 잃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러자 주종현이 순식간에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네 몸이 어떤지 헤아려 본 적도 없느냐!”

바로 그 순간, 강시아는 그만 발목을 접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배를 부여안고 입술을 꼭 깨문 채 힘들어하며 말했다.

“첩이… 첩이 발목을 접질렸습니다. 서방님께서 저를 데려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주종현은 그녀의 발목을 흘깃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서방님…?”

강시아는 얼떨떨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두려는 걸까?

“적토마는 타인에게 등을 내주지 않는다. 사람을 불러 너를 데리러 오게 하마.”

그는 말을 끌며 떠나 버렸다.

그녀는 해가 저물도록 기다렸으나 주종현도, 그가 보낸다는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홀로 절뚝이며 장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적토마가 사람을 태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만을 태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멀어져 가는 말 그림자가 눈앞에서 사라져가자, 강시아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간신히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억눌렀다.

돌아온 설강의 눈동자에는 가려지지 않는 부끄러움이 어려 있었다.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참이나 늦어 먼저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설강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강 마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눈을 피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제가... 줄에 오래 서 있던 탓이옵니다!”

강시아는 모든 것을 꿰뚫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구나. 하마터면 괜히 너를 오해할 뻔했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맞다. 내가 이미 점포 주인과 말해 두었으니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비단실은 잎으로 전부 이곳에서 사 오면 된다.”

“모두 여기서요?”

설강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자 점포 안주인이 곧장 덧붙였다.

“저희 가게에서는 직접 댁까지 실을 배달해 드리기도 합니다.”

설강은 강시아와 점포 안주인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곧장 강시아의 말을 고 유모에게 전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는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작은 뜰의 곁방은 이미 자수방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틀 위에 빛깔 찬란한 비단실이 줄지어 걸려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색조라 해도 이 비단실만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강시아는 수틀 앞에 앉아 손가락을 재빠르게 놀렸다. 연아가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섰고 문가로부터 비친 햇살이 아이의 작은 몸 뒤로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가 수틀 위에서 흔들리자 강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일부러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다가오자 불쑥 몸을 돌려 번쩍 안아 올렸다.

“꺅!”

아이는 놀라 비명을 지른 뒤 이내 어머니 품속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강시아는 아이를 꼭 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설강은 어디 있느냐?”

연아의 동그란 눈동자가 촉촉이 빛났다.

“설강 언니는 방금 막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속삭이듯 말했다.

“설강 언니가 은전을 주웠대요!”

그러자 강시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걸 네가 본 것이냐?”

연아는 고개를 흔들며 귀엽게 대꾸했다.

“언니가 웃었어요. 꼭 어머니께서 돈을 세실 때처럼요!”

강시아는 실소를 흘리며 아이를 다독였다.

“하나 이건 다른 이에게 말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설강 언니가 서운해할 게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연아는 금약… 금약 할 거예요!”

“금약?”

강시아는 아이의 작은 코끝을 톡 건드리며 정정해 주었다.

“그건 ‘일약천금’이라고 한단다.”

설강이 들어섰을 때, 강시아는 수틀 앞에 딸과 나란히 앉아 실타래를 쪼개고 있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실이라 한순간 방심하거나 기침이라도 하면 금세 흩어져 사라질 정도였다.

그녀의 솜씨는 본디 상 상궁의 절기였는데 그 많은 소녀들 중 오직 강시아만이 전수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수공은 눈을 해치니 연아는 평생 즐겁게만 살면 된다.”

설강은 연아의 손을 잡아주며 다가왔다.

“마님, 명옥이 와 있사옵니다.”

강시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정문 앞에 명옥이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저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명옥은 본디 집안의 소생으로 부모 또한 국공부인 조 씨의 지참 노비였다. 비록 지금은 장원으로 내쳐졌으나 적어도 조 씨 앞에서는 조금의 체면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명옥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마님, 부디 저를 살려 주시옵소서!”

강시아는 위쪽 자리에 앉아 맑은 차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무력했다.

“명옥, 너는 지금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명옥은 국공부인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큰 마님의 수하에게 몰려 궁지에 처해 있었다. 국공부인의 체면을 잃게 만들었으니 이제 그녀 또한 보기가 싫을 터. 결국 국공부의 이등 시녀였던 그녀는 이제 각 뜰에서 받아주지도 않아 남은 인생을 뒤뜰에서 고된 허드렛일을 하거나 아니면 어미처럼 장원으로 내쳐질 것이었다. 명옥은 깊이 후회했다. 애초에 괜히 스스로 앞장서 고자질하지 말 걸이라고.

“마님, 제가 네 해 넘게 마님과 아가씨를 모신 정을 생각하시어 저를 위해 한 말씀만 전해 주시옵소서!”

강시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옥아, 나를 더 괴롭히지 말거라. 내가 무슨 수로 너를 위해 청을 올리겠느냐? 설령 올린다 해도, 과연 누구에게 닿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명옥이 성급히 몸을 곧추세우며 외쳤다.

“고 유모! 마님께서 고 유모 앞에서 한마디만 해 주셔도 저는 족하옵니다. 어쨌든 마님은 세자의 곁을 지키는 분이신데, 고 유모께서 어찌 감히 외면할 수 있겠사옵니까?”

강시아는 의아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되물었다.

“고 유모라니. 어찌하여 고 유모에게 가려 하느냐? 내가 알기론, 네 어미는 작은 마님의 지참으로 들어왔고 너 또한 세자 댁에서 삼 해를 모셨지 않느냐? 그러니 차라리 작은 마님께 가서 구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느냐?”

명옥은 말문이 막혔다. 작은 마님에게 갈 수 있었다면 어찌 이리까지 굴러 들어왔겠는가?

강시아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돕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적에는 하찮은 시녀보다도 못했었다는걸.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위해 청을 올릴 수 있겠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더냐?”

명옥은 그녀의 말을 듣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 삼키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강시아가 집안에 들어왔을 때는 신발을 신겨 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자의 침소에 들어가 아이까지 낳아 주인이 되었으니 명옥은 억울하기만 했다. 본래 자신이 작은 마님을 통해 세자께 붙여질 통방이었건만 결국 운이 더 좋은 강시아에게 빼앗긴 것이다. 만약 자신이 세자의 총애만 얻을 수 있다면 고 유모는 물론이고 큰 마님까지 감히 간섭하지 못했을 것인데.

강시아는 명옥의 얼굴에 스치는 갖가지 감정의 빛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가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감탄하듯 읊조렸다.

“금년에 갓 들어온 춘차라더니 볶음의 화기가 적당하구나. 명옥, 다른 것은 도와줄 수 없으니 새 차라도 조금 나누어 주겠다.”

명옥은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사옵니다. 마님께서 직접 드시지요. 저에게도 곧 새로운 차가 생길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올 때 가득하던 근심과는 달리 떠나는 뒷모습에는 기묘하게도 몇 가닥의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설강은 연아를 데리고 내실에서 걸어 나왔다.

“마님, 명옥은 이미 고 유모께 벌을 받았사옵니다. 주인을 배반하고 영화를 좇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뻔뻔하게 마님께 구원을 청하는군요.”

강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게 어느 누구인들 쉽겠느냐?”

설강의 입술이 잠시 떨리듯 움직였다. 고 유모는 그녀에게 거듭 일렀다. 강시아의 유약한 겉모습에 결코 속아서는 안 된다고.

“예전에 세자 댁에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들여보내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오직 그녀만이 아이를 품었고 곧장 첩으로 올랐지. 한데 어찌 보통 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눈앞의 강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연아의 흩어진 머리를 다정히 손으로 빗어 올려 단정히 땋아 주고 있었다. 마치 명옥이 주인을 배반한 것은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모습에 설강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파동이 일어났다.

어쩌면 세자는 뒷전의 다툼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그저 이렇게 단순한 여인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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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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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91화

    “군주님, 청풍루에 새로 단막극이 올랐다 합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주연아는 그네에 몸을 기대고 웅크린 채,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재미없다.”그녀의 어머니는 경성에 이름난 진국공부의 적녀였고 아버지는 군권을 쥔 상산왕이었다.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그 사방이 막힌 경성 안에서, 비단옷과 풍족함 속에서 무탈하게 흘러갔을 터였다.하지만 그녀는 그 ‘별다른 일’이었다.어릴 적,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던 나날들.고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늘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그럼에도 그 시간은 즐거웠다.규칙도 없고, 예법도 없고, 경성 사람들 얼굴마다 얹혀 있던 그 가면도 없었다.논두렁에 앉아 녹아내리듯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다.어머니는 그녀를 안고 불꽃놀이를 보여주었고 외삼촌은 온갖 작은 장난감을 사 주었다.그러다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웅장한 국공부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부모의 이야기는 너무도 길어서 몇 날 밤을 새워도 다 들을 수 없을 만큼 깊었다.하지만 바깥세상에 어떤 풍파가 불어도 그녀는 늘 어머니의 날개 아래에서 아무 탈 없이 자라났다.그녀가 자라자 넓던 경성은 오히려 좁아졌다. 늘 그 밖으로 날아가 세상을 보고 싶었다.그녀가 계례를 치르던 해, 궁에서 성지가 내려왔다.어릴 적 함께 자란 소림이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겠다는 것이었다.경성조차 좁게 느끼던 그녀에게 손바닥만 한 황궁은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그녀는 말을 타고 떠났고 부모는 막지 않았다.짐 속에는 어머니가 몰래 넣어 둔 은표까지 들어 있었다.서역에도 갔다. 통행증이 없어 관문 안쪽에서 멀찍이 바라보는 데 그쳤지만 말이다.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강남에 이르렀다.강남은 좋았다. 비에 젖은 안개,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그야말로 부드럽고 풍요로운 고장이었다.그러나 주연아의 본성에는 강남 여인의 온화함 따위는 한 점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90화

    그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몸에 밴 피로와 서툴게나마 그녀를 달래려는 마음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그가 더 자주 찾아올수록 송하윤의 수법은 점점 더 잔혹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위험해졌다.강시아에게는 더 이상 기댈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세자, 제발… 연아를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대로 가면… 연아는 죽어요.”주종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조금만 더 기다려라.”또 그 말이었다.“시아야, 나를 믿어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내가 돌아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주겠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더 기다리라는 것인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딸이 무사히, 평안하게 자라나는 것.그 소망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결국 그녀의 재앙이 찾아왔다.그녀는 다시 아이를 가졌다.의원이 맥을 짚고 회임이라 알린 순간, 기쁨은 한 점도 없었다.오로지 차갑고도 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덮쳐 왔다.송하윤이라면 이 아이를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아이와 함께 죽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주종현에게 소식을 전하려 했다.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평소 믿을 만하다 여겼던 하인 하나에게 몰래 편지를 맡겼다.그러나 그 편지는 그대로 송하윤의 손에 들어갔다.그녀의 구원 요청은 외간 남자와 간통했다는 증거가 되어 버렸다.송하윤은 주종현이 떠나기 전 남긴 명령서를 들고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그녀의 뜰로 들이닥쳤다.“이 천한 것!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이냐! 우리 영국공부의 체면을 더럽히다니! 잡아라! 돼지우리 형에 처하거라!”그녀는 몇몇 하인들에게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입에는 헝겊이 틀어막혔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증오가 타올랐다.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이 집에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9화

    송하윤은 연아를 향해 손짓했다.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리 오너라. 어미 곁으로.”연아는 겁먹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강시아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송하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너도 이 집에 오래 있었으니 규율쯤은 알겠지. 서출 자식은 마땅히 적모가 거두어 기르는 법이다. 앞으로는 연아를 내 처소로 옮기도록 하거라. 내가 직접 가르치겠다.”강시아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며 하얘졌다.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아… 안 됩니다, 마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연아는 아직 어립니다. 저를 떠날 수 없습니다. 마님, 제발…”“무례하다!”송하윤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로운 꾸짖음이 쏟아졌다.“내가 아이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첩의 신분으로 감히 적모를 넘보겠다는 것이냐?”순식간에 감당하기 힘든 죄명이 씌워졌다.강시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연아를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신첩은… 감히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감히 없다?”송하윤이 냉소를 흘렸다.“내가 보기엔, 네 간이 제법 크구나.”그때,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주종현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방 안의 상황을 훑어보며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송하윤은 곧장 표정을 바꾸고는 억울함이 어린 얼굴로 다가갔다.“부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연아도 이제 글을 배울 나이가 된 것 같아, 제 곁에 두고 직접 가르치려 했습니다. 헌데 강 마님이 차마 놓지 못하네요.”주종현의 시선이 송하윤의 얼굴에서 천천히 옮겨져 강시아의 창백하고 떨리는 얼굴에 머물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연아는 아직 어리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자.”그가 입을 열었다.그 말은 그녀를 위한 변호였다.“연아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거라.”“예, 세자...”강시아는 사면을 받은 듯, 연아를 꼭 끌어안고 허둥지둥 그곳을 벗어났다.하지만 이유도 없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8화

    그녀는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그가 오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만나지 않았다.그가 사람을 보내 물건을 전해도 그녀는 그저 명옥에게 맡겨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창고에 넣어 두게 했다.송하윤을 처음 본 것은, 송학당의 뜰이었다.그날, 송하윤은 큰 마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웃음이 가득했다.그녀는 예법에 따라 들어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신첩, 큰 마님과 송 아가씨께 문안드립니다.”허리를 굽힌 그녀의 태도는 땅에 닿을 듯 낮고도 겸손했다.그 순간, 날카로운 시선 하나가 곧장 그녀를 꿰뚫었다.노골적인 탐색과 적의가 담긴 눈길이었다.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 사람이 강 마님인가요?”송하윤의 목소리는 꿀을 입힌 듯 달콤했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독기가 스며 있었다.“생김새가 제법 괜찮긴 하네요. 그러니 사촌 오라버니를 그토록 홀려 놓았겠지요.”큰 마님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눌렀다.“윤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강시아의 심장이 툭 하고 가라앉았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연아의 손을 꽉 잡았다.연아 역시 그 기운을 느낀 듯 작은 몸을 더욱 그녀의 뒤로 숨겼다.그 순간, 그녀는 또렷이 깨달았다.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렇게 가문이 높고, 곧 세자부인이 될 송하윤과 무엇으로 맞설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물러나는 것뿐이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물러나 다투지 않고 빼앗으려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그러나 때로는 물러난다고 해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태후의 생신을 맞아 각 가문은 축하 예물을 바쳐야 했다.송하윤은 미래의 세자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이 일을 도맡았다. 그리고 강시아를 불러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강 마님 자수 솜씨가 이 집에서 가장 좋다고 들었어요. 이 ‘송학연년도’는 강 마님에게 맡길게요. 우리 영국공부를 위해 힘을 보태는 셈이니, 잘 부탁해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887화

    그 착각은 거울 속 꽃과 물 위의 달처럼, 손을 대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꿈처럼 흐르던 삼 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영국공부 세자, 주종현이 혼인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그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을 때, 강시아는 마침 연아의 작은 옷에 노란 영춘화를 수놓고 있었다.바늘끝이 그대로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번져 나와 연한 꽃잎을 물들였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일부러 그녀가 듣도록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하녀들의 말만이 맴돌았다.“들었어? 송 가 아가씨래.”“그 송 아가씨는 우리 세자의 사촌이래. 태후 마마께서도 칭찬하신 재녀라잖아.”“이게 바로 문벌이 맞는 혼사고, 친가끼리 더 가까워지는 거지.”“그렇지 뭐. 예전에 약혼까지 했었다잖아. 송 가에 일이 생겨서 깨졌을 뿐이지…”“이젠 송 가 장자가 출세했으니, 이 혼사도 다시 올라온 거고.”그들의 말은 바늘처럼 하나하나 그녀를 찔렀다.모두가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강 마님의 좋은 날은 이제 끝났다고.그 유일했던 총애도 곧 정실부인에게로 돌아갈 거라고.총애라니. 강시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애초에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그저 자신의 운명조차 손에 쥘 수 없는 하나의 첩일 뿐이었다.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 연아가 무사히,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뿐이었다.혼례 날짜가 정해진 뒤로 이상하게도 주종현은 오히려 더 자주 그녀의 뜰을 찾았다.예전처럼 그저 조용히 앉아 있거나 연아를 놀아 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그는 무언가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동쪽 거리의 새로 생긴 과자, 서쪽 장인의 손에서 나온 적금 비녀, 남쪽에서 막 들어온 신선한 여지.마치 무언가를 메우려는 듯, 혹은 달래려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짙어졌다.그리고 이 “총애”는 곧 큰 마님의 귀에 들어갔다.그날, 그녀는 송학당으로 불려갔다.큰 마님은 상석에 앉아 염주를 굴리며 눈길조차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51화

    오동거리는 큰길과 맞닿아 있는지라 강시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 거리는 사람이 많은 탓에 불을 붙인다 한들 금세 꺼질 터였다. 불이 조금이라도 오래 타오르게 하려면 더 많은 가연성 물건을 미리 사두어야 했다.주온청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강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예전에 유한석에게 향낭을 전해준 적이 있어 유 가의 거처가 이 근방임을 알고 있었다.“강 마님 오라버니와 유 대인께서는 동문수학한 절친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어찌하여 유 대인의 집에서 함께 지내지 않는 겁니까? 정 안된다면 국공부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40화

    화선이 멀리까지 떠난 뒤에야 유한석은 손에 들고있던 술을 그대로 물속에 따라 버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서는 몇 명의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탁자 앞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잔을 돌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송이당이 잔을 들며 말했다.“주 세자, 어머니께서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습니다. 세자께서 집영위에 임명되시는 그날, 다시 성대한 경공연을 열어드리겠습니다!”곁의 누군가가 장난스레 맞장구쳤다.“경공연 한 번으로 되겠습니까? 최소한 미인 열댓 명은 있어야 하겠지요!”유한석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54화

    설강이 연아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마님, 지금 집안에서는… 마님이 무슨 대장군의 외손녀라며 떠들어 대던데요!”강시아는 이미 마음을 가라앉힌 뒤였다.이렇게까지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는 것은,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반드시 그 신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깔린 뜻이었다. 이것이 과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새 신분을 덧씌워주는 것인지, 아니면 더 값비싼 장기말로 만들려는 것인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설강은 강시아가 말이 없자 재빨리 문을 닫고 속삭였다.“마님, 그래도… 떠나실 생각이옵니까?”가난

  •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제142화

    주온청은 서 유모의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제가 당신네 대공자 때문에 이랬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강 마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서 유모는 한 걸음 더 몰아붙였다.“저희 아가씨께서는 집에서 혼례 준비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신데 어찌하여 금명호까지 오셨단 말입니까! 그리 한가한 줄 아십니까?”그녀는 품에서 청첩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주 가의 셋째 아가씨께서 보낸 청첩인데 한 번 보십시오. 주 가의 하인이 가져왔으니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옵니다!”강시아는 차갑게 냉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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