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는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는 걸 보고도 방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설령 그가 나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관심하게 외면할 사람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날 내가 그렇게 애원했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나는 한 달 동안 그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그날의 모든 장면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하지만 진정우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결국 문제는 강유형에게 있는 게 아닐까?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너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나는 그의 팔을 바라보았더니 악어에게 물린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었다.“정우가 널 구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넌 지금 대체 뭘 의심하는 거지?”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난 그냥 궁금할 뿐이야. 다 같이 헤르나와 브라운을 상대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왜 정우는 널 돕지 않았을까?”내 말에 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게 중얼거렸다.“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 진정우에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나는 이미 그가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유형 역시 답을 모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진정우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설마, 단순히 강씨 가문을 증오해서 자기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강유형을 버린 걸까?“...지원아, 네가 우리 집안을 증오하는 건 이해해.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걸 가져가도 좋아. 하지만 제발, 강진혁은 건드리지 마.”그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왜? 네가 보기 안 좋을까 봐? 아니면 자존심 상할까 봐?”“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원아, 방금 들었지? 형이 널 향한 감정이 전부
나는 입학 통지서를 들고 진소영을 찾아갔다.그녀는 한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이를 하고 있었다.활짝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내가 다시 그녀에게 학업을 권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순간 망설여졌다.“언니! 내가 이번 주말에 언니 안 찾아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아이들을 달래고 온 진소영은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아이들 돌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지?”나는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며 물었다.“응, 그래도 나는 정말 좋아.”진소영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환하게 웃었다.“이제는 이 심장이 완전히 내 것 같아요. 더없이 건강해!”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그 심장, 그 심장을 주고 간 건... 나는 자연스럽게 소지훈과 유희연 그리고 그의 애매한 감정을 떠올렸다.“소영아, 너랑 지훈이랑 잘 되고 있어?”나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그녀는 순간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그냥...그대로야.”“소영아, 지금은 네가 지훈이를 좋게 보지만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 지금의 감정이 변할 수도 있어.”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설득해 보고 싶었다.소지훈이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가 오로지 그녀의 심장 때문이라면 진실을 알게 된 후 진소영이 감당해야 할 상처가 너무 클 것이 뻔했다.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아니, 언니. 난 지훈 오빠를 단순히 그의 외모나 지식 때문이 아니라...”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처음 봤을 때부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어. 그냥...자연스럽게 끌렸어.”나는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소지훈과 처음 만난 건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였다.그렇다면 소영이가 느끼는 감정이 정말로 그녀 자신의 감정일까?아니면 그녀의 몸속에서 뛰고 있는 그 심장이 만들어낸 감정일까?이런 생각은 너무 비현실적이었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갑자기 쿵하고 내려앉았다. 더 중요한 건, 그 사실을 내가 진소영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적어도 그녀의 심장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안리영에게 연락해서 구 교수님께도 말씀드리고 진소영에게 다시 한 번 검사를 받게 해야겠다.결국엔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진정우가 없어진 지금, 잠깐은 숨길 수 있어도, 결국은 진실은 드러날 테니까.“너 오빠한테 뭐라고 말할 거야? 고마워서?”나는 일부러 진소영에게 물어봤다.“응, 맞아.”진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입학 통지서를 만지며 기뻐했다.나는 살짝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그건 괜찮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사실 그 입학 통지서도 내가 준비한 거야.”진소영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언니 최고! 고마워, 언니!”“응.”하지만 진소영은 여전히 재촉했다.“그럼 언니, 나 오빠한테 전화 한 통 해줘.”‘이 아이는 정말 고집이 세구나.’나는 또 다른 핑계를 대기로 했다.“너 좋은 소식 전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괜찮아, 내가 이미 말했어.”“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그냥 오빠가 보고 싶어서, 할 말이 있어.”진소영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똑똑해서 금방 눈치를 챘다.“언니, 왜 오빠한테 전화 안 해줘?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급히 부인했다.“아니.”“근데 나는 계속 오빠랑 연락이 안 돼. 휴링턴 이후로 전혀 못 봤어. 언니, 오빠 무슨 일이 생겼지?”진소영은 나를 붙잡으며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입학 통지서조차 떨어뜨렸다.그녀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만약 내가 살짝만 고개를 끄덕이면 그녀는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진소영도 진정우의 진짜 신분을 알 것 같아 계속 핑계를 둘러댔다.“아니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는 지금 또 비밀 작전에 참여하고 있어. 외부와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야.
‘진씨 가문 사람들을 까먹었네.’진정우는 진씨 가문의 새로운 후계자로서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면 진씨 가문에서 제일 먼저 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진소영에게 가서 간접적으로 정보를 탐색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 이상해.’ 나는 진소영의 기분을 상관하지 않고 물었다. “소영아, 너한테 물어 본 사람 누구인지 기억나?”“오빠랑 비슷한 나이대인데 이름이 진수로라고 한 것 같아.”나는 진수로의 얼굴이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몇 번 왔었어? 혼자 왔었어?”“응.”진소영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언제 입학할 건지 나한테 말해줘. 내가 그때 너 데려다줄게.”“언니, 나 언니랑 오빠 같이 가고 싶어.” 진소영은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나는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알았어. 오빠한테 말해볼게. 빨리 돌아오라고.”진소영과 헤어지면서 나는 점점 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진씨 가문에서 진정우를 찾지 않고 있다니.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소영한테까지 찾아왔다면 당연히 나한테도 와야 하는데 왜 나한테는 오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진정우와 이미 헤어진 사이여서 찾아오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데 용설아에게는 찾아가야 하지 않나?용설아는 나를 만나자마자 환하게 반겨주었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씩씩하게 살아야죠.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용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는데...”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늘 설아 씨한테 온 이유는 진씨 가문에서 설아 씨한테 연락이 왔는지 궁금해서...”“네?” 용설아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왔었어요, 진정우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어요.”“그러면 말했어요?”용설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했죠, 숨길 수 없는 일이니까. 알다시피 정우가 진씨 가문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어요.” 나는 진수로가 진소영을 찾아간 이야기를 했다. 그
그녀의 질문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나는 두 눈으로 직접 그가 내 앞에서 쓰러지는 걸 봤고 의사가 수술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걸 들었으며 내 손으로 그의 유골을 받았다.그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현실은 소설도, 영화도 아니다. 진정우는 떠났고 그것이 냉혹한 진실이었다.아무리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바뀌는 건 없었다.“나도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내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이미 정우가 떠난 걸 받아들이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저한테 이런 걸 묻는 거죠?”용설아가 차분하게 되물었고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냥 뭔가 이상해서요.”“뭐가 이상한데요?”“진씨 가문의 반응이 이상해요. 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담담해 보이고요. 저는... 설아 씨가 진정우를 사랑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가 이렇게 떠났는데도,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 있는 건... 뭔가 이상하잖아요.”“저도 슬퍼요. 제가 안 슬퍼 보이나요?”용설아는 솔직하게 인정했다.“하지만 제가 아무리 슬퍼해도 정우가 돌아오진 않잖아요.”그건 사실이었다. 나도 그 말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또 뭐가 이상한가요?”용설아가 물었다.분명 더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갑자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느낌이라는 게 때때로 사람을 속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함’이라는 것도, 단순한 감각일 뿐, 어떤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용설아는 조용히 가방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내 앞에 밀어놓았다.“이거 당신 거예요.”“뭐죠?”“열어 보면 알 거예요.”나는 쪽지를 펼쳐 읽었다. “반지는 이미 제작이 끝났어요. 업체에서 진정우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결국 내게 전화가 왔어요. 얼른 찾아가라고요.”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럼 설아 씨가 받아 가면 되잖아요. 나한테 이걸 왜 보여주는 건데요? 지
“이 디자인은 고객님의 남자 친구가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정말 독특하고 예쁘네요. 손목에 차신 팔찌랑 같은 디자인이기도 하고요.”점원은 예리한 눈썰미로 말을 건넸다.“그런데 남자 친구분은 왜 안 오셨어요? 이 반지는 그분이 직접 찾으러 오실 건가요, 아니면 고객님이 가져가실 건가요?”“제가 가져갈게요.”나는 짧게 대답하며 남성용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 엄지손가락에 끼웠다.내 행동에 점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고객님이 껴도 꽤 잘 어울리네요.”“감사합니다.”나는 짧게 인사한 후 떠났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혹시 내가 양손에 반지를 끼고 있어서 너무 눈에 띄었던 걸까? 나는 무심코 길가에 세워진 차의 사이드미러를 힐끗 보았다. 그제야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나는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대로 그 사람을 따돌리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다.혹시라도 나를 해치려는 건가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이틀 동안이나 나를 그저 조용히 따라왔다.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쫓아왔다는 건 단순한 강도나 범죄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나를 노릴 이유도 없고.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이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나를 따라왔듯, 나도 그를 따라가 보는 것.나는 그가 머무는 장소까지 조용히 추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모습을 본 그가 순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의외네.”진수로가 나를 보고 놀란 듯 말했다.“의외는 아니죠. 내가 요즘 뭘 하고 다니는지, 대표님도 다 알고 있을 텐데요.”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말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쁜 의도는 없어.”“그렇겠죠.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진 않겠죠.”나는 가볍게 받아쳤다.“그 이유를 물으려 온 거야?”그는 내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앞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그리고 한 대의 차가 내 앞으로 급히 멈춰 서더니 누군가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진수로가 내 뒤를 밟으라고 보낸 남자였다. 그는 날 납치한 남자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놔.”“네가 뭔데?”내 목을 조르고 있던 남자는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렸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살고 싶으면 그냥 놔.”구해주러 온 남자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냈지만 날 붙잡고 있는 남자는 오히려 더 버티며 비웃었다.“안 놔, 안 놔! 싫으면 와서 직접 때려 보든가!”나는 속으로 눈을 굴렸다. 이 사람, 배우 했으면 감독이 분노해서 촬영장을 박차고 나갔을 거다.역시나, 내 앞의 남자는 인상을 깊게 찌푸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내 뒤의 남자가 소리쳤다.“한 발짝 더 다가오면 이 여자 가만 안 둔다!”짝! 짝!갑자기 박수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안리영이 천천히 걸어오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우리 귀여운 지원아, 몰카 당한 기분이 어때?”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날 붙잡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놓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누나, 많이 놀랐죠?”나는 속으로‘아니 놀라긴커녕 웃겨 죽을 뻔했어!’라고 말했지만 꾹 참았다.그리고 나를 구하러 온 남자는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얼굴에는 어색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뭔가 잘못됐다는 불안감이 스쳐 갔다.안리영은 그런 그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오. 그래도 멋졌어요. 타이밍도 좋았고 완전 남자다웠다니까요?”그 남자는 헛기침을 하더니 머쓱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 같네요. 방해해서 미안합니다.”그러고는 곧장 자리를 피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고마워요, 멋진 오빠!”그 남자가 사라지자, 안리영이 불러온 동료들도 그녀의 감사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사실 이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리영은 역시 의사답네. 해결책이 참...’안리영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지원아, 이제 그만 벗어나야 해. 진정우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었다 해도,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 네가 이렇게 계속 붙잡고 있으면 너한테도, 그한테도 좋지 않아.”그녀는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너 예전에 강유형이랑 절에 가서 법문도 많이 들었잖아. 사람이란 결국 윤회를 반복하는 거야.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이 떠난 이를 너무 애타게 그리워하면 그 영혼은 다음 생으로 가지 못한다는 말도 있잖아.”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과학의 끝은 결국 미신과도 닿아 있다는 걸 알기에.어릴 때 어머니께서도 비슷한 말을 자주 하셨다.“지원아, 이제는 진정우를 놓아주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지.”안리영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그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었다.그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처음으로, 나는 안리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지만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누구라도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면 단순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로 생각할 테니까.“그래, 놓아줄게. 오늘 연출하느라 고생 많았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나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너 요즘 완전 부자잖아? 이자만으로도 다 못 쓸 돈을 갖고 있으니, 난 제일 비싼 거 먹을래!”안리영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녀가 사양해도 나는 기어이 사줄 생각이었다.말 그대로 돈이야 많고 많으니, 쓰지 않고 쌓아두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나는 그녀를 데리고 해동에서 가장 높은 전망 레스토랑으로 갔고 2차로 최고급 바까지 갔다.그런데 술을 몇 잔 마시던 안리영이 나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너 오늘... 뭔가 이상한데?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거야?”“아니. 네가 그러잖아. 내가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털어버리려는 거야.”나는 심지어 그녀를 위해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