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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혜성병원, 정도현

Author: 움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9:25:52

 문 앞에는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정도현.

 “뭐야. 오빠가 여길 어떻게 왔어?”

 도현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애들이 너 온다길래.”

 “내가 온다고 오빠가 클럽까지 와?”

 “오면 안 돼?”

 “아니, 그건 아닌데…….”

 윤재의 형인 도현은 지안보다 네 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얼굴을 봐왔고 지금은 혜성병원 소아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었다.

 늘 흰 가운이나 반듯한 셔츠 차림으로 보던 사람이라 이런 곳에 나타난 모습이 영 낯설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지안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많이 마셨어?”

 “조금? 별로 안 마셨어.”

 도현이 지안 앞에 놓인 잔을 확인하듯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천천히 마셔.”

 그 모습을 보던 하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또 시작이네.”

 “뭐가.”

 “도현 오빠는 맨날 지안이만 챙겨.”

 “얘가 제일 술 못 마시니까 그렇지.”

 도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윤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형, 나도 동생인데 나는?”

 “넌 알아서 살아.”

 “와, 차별 봐.”

 익숙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교정은 아침부터 꽃다발을 든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부모의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고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셔터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안아!”

 멀찍이서 하린이 가족들 사이에 파묻힌 채 손을 흔들었다.

 “이따 나랑 사진 찍어!”

 지안은 알겠다는 듯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다.

 습관처럼 화면을 확인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축하한다는 문자 한 통도, 짧은 안부조차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주변의 웃음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이대로 더 있어 봐야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았다.

 가방을 챙겨 교문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서지안!”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교문 너머로 윤재와 재현, 승현, 진혁이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뒤에는 도현이 커다란 꽃다발을 든 채 따라왔다.

 “뭐야. 너희가 왜 여기 있어?”

 “뭐긴 뭐야. 졸업식 왔지.”

 “너희도 오늘 졸업식이잖아.”

 윤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빨리 끝났어. 우리 동생 졸업식인데 기 좀 세워줘야지.”

 “누가 네 동생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안의 입가에는 어느새 웃음이 걸려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 여학생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기럭지 훤칠한 남자 다섯이 교문을 가로질러 한꺼번에 나타났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쪽팔리니까 좀 떨어져.”

 “좋아하면서.”

 “안 좋아해.”

 지안이 윤재를 밀어내자 뒤에서 지켜보던 도현이 작게 웃었다.

 그가 지안 앞에 멈춰 서더니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지안아.”

 “응?”

 “졸업 축하해.”

 지안은 잠시 꽃다발을 내려다봤다.

 입을 열려는데, 이상하게 목이 조금 메었다.

 “……고마워, 오빠.”

 도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애들아, 사진 찍자.”

 “형이 찍어줘.”

 “나는 왜 빼.”

 “그럼 아무나 잡아.”

 그때 윤재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하린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야, 오하린! 너도 빨리 와!”

 하린까지 합류하자 지나가던 학생에게 부탁해 휴대전화를 건넸다.

 지안을 가운데 두고 일곱 사람이 우르르 모여 섰다.

 “야, 좀 붙어.”

 “정윤재 밀지 마.”

 “서지안 웃어.”

 “웃고 있거든?”

 “하나, 둘, 셋!”

 찰칵.

 그날 찍은 사진은 지금도 지안의 휴대전화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야, 서지안.”

 눈앞에서 손이 휘휘 흔들렸다.

 지안이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뭘 그렇게 멍 때려?”

 “아무것도 아니야.”

 지안은 테이블을 한 번 둘러봤다.

 십 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시끄럽고 철없고 하나같이 도움 안 되는 인간들이었다.

 그럼에도 밉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지안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윤재의 눈이 커졌다.

 “오?”

 하린도 몸을 일으켰다.

 “뭐야. 오늘 서지안 달리는데?”

 “한 잔 더 줘?”

 지안이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줘.”

 잠깐의 적정 뒤로 룸 안이 금세 떠들썩해졌다.

 “와, 오늘 제대로네!”

 “얘 오늘 집 못 간다.”

 “술 더 시켜!”

***

  자정을 앞둔 본사는 한산했다.

 대부분의 사무실이 불을 끈 가운데 이사회실만 유난히 밝았다.

 긴 테이블에는 해외사업과 재무를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회의가 소집된 건 태강건설이 싱가포르에서 추진 중인 복합개발 사업 때문이었다.

 다음 주면 태호 역시 직접 싱가포르로 넘어가 현장 착공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현지 파트너사가 약속했던 추가 사업비를 마련하지 못하면서 금융사가 자금 집행을 보류했고 그 부담 일부를 태강이 떠안을 상황이 된 것이다.

 해외사업본부장 박성진이 보고서를 펼쳤다.

 “현지 금융사에서는 태강이 추가 보증에 들어오면 예정대로 자금을 집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금액은.”

 “한화로 약 천오백억입니다.”

 태호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파트너사는?”

 “다음 달 안으로 투자금을 확보하겠다고 합니다.”

 “다음 달?”

 낮게 되묻는 목소리에 박성진의 얼굴이 굳었다.

 “다음 주면 삽 뜨는데, 지금 다음 달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회의실에 앉아 있던 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확약서는.”

 이번에는 재무담당 전무 이규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태호가 보고서를 탁 덮었다.

 “확약서도 없이 남의 회사가 돈 구해오겠다는 말만 믿고 태강이 천오백억을 보증하자는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잠깐의 적막 끝에 태호가 서류를 앞으로 밀어냈다.

 “추가 보증은 안 합니다.”

 “그럼 다음 주 착공 일정은…….”

 “그대로 갑니다.”

 태호가 박성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박 본부장은 내일까지 파트너사 확약 받아오고, 이 전무는 금융사 조건 다시 협상하세요.”

 “예.”

 “아침 여덟 시까지 수정안 올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부회장님.”

 태호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끝내죠.”

 그 말로 회의가 정리됐다.

 태호는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회실을 빠져나왔다.

 묵직한 문이 닫히고 나서야 눌려 있던 공기가 조금씩 풀렸다.

 테이블 곳곳에서 참았던 숨이 낮게 새어 나왔다.

 늦은 시간의 복도는 적막했다.

 이사회실을 나온 태호는 느슨해진 넥타이를 한 번 고쳐 잡고 복도 끝으로 향했다. 민도윤이 태블릿을 든 채 그 뒤를 따랐다.

 “부회장님.”

 “왜.”

 특유의 무심한 낯이었다.

 “혹시 결정은 하셨습니까?”

 태호가 도윤 쪽으로 얼핏 눈짓했다.

 “뭐를.”

 “결혼 상대 말입니다.”

 “오늘 서지안 이사님까지 만나보셨으니 후보분들은 전부 만나보신 거라서요. 혹시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잠시 대답이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낮은 음성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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