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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Author: 지호

1. 다시, 스물다섯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7 15:30:35

버스에 올라탄 제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에 스치듯 비친 얼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늘어짐 하나 없는 눈매, 깔끔하게 떨어지는 턱선. 낯선데도 자꾸 눈이 갔다.

"아, 좋다."

말이 절로 나왔다. 그냥 좋았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버스에서 내린 제이는 몇 걸음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지나가던 상점 쇼윈도에 제 모습이 비쳤다. 저도 모르게 발길을 돌려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평소라면 눈뜨자마자 삼십 분은 몸을 두들기고 기지개를 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걸음이 저절로 통통 튀었다.

어깨도 가뿐했고, 손끝은 희고 매끈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봤다. 코끝에 남아 있던 소독약 냄새도, 뼛속까지 짓누르던 그 묵직한 통증도 없었다. 늘 얹혀 있던 것처럼 묵직하던 속이 씻은 듯 가벼웠다. 몸 전체가 방금 포장을 뜯은 것처럼 새것 같았다.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에 비친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제이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슴 주머니에 걸린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입사일: 2000년 4월 3일

오늘 날짜였다.

"미쳤다, 진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물다섯. 20년 전, 이 로비에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날이었다.

로비를 지나가는 사람들, 안내 데스크의 화분, 벽에 걸린 회장님 얼굴까지 전부 오래전에 사라졌던 것들이 그대로 눈앞에 있었다.

몸은 스물다섯인데, 머릿속에는 20년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누가 오래 남고, 누가 먼저 무너질지. 그런 사실이 그녀를 신나게 만들었다.

마치 시험답안지를 들고 시험을 보는 기분 같았다.

제이는 어깨를 펴고 사원증을 찍었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로비를 지나던 제이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임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안내 데스크 직원들도 유난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오늘 회장님 방문하시는 날이라 그래요."

옆을 지나던 직원이 신입들에게 귀띔하듯 말했다.

기획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신입사원 현제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는 짧은 순간, 제이의 시선이 창가 자리에 멈췄다.

도일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추고, 도일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봤다.

전남편, 도일. 20년 전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미소였다.

도일은 나쁜 남편은 아니었다.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든 적도, 주식이나 코인에 손대 집안을 거덜 낸 적도 없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시어머니가 갓 낳은 딸을 앞에 두고 이불을 다시 빨라며 소리를 지르던 날도, 도일은 문 앞에 서서 지켜만 봤다.

"엄마가 원래 저러시잖아. 그냥 좀 참아."

퇴근하고 돌아온 그가 늦은 밤 내뱉은 말은 늘 그 한마디였다. 편들어주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시어머니 편을 들지도 않았다. 그냥,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었다.

제이는 그 무심함이 폭언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는 걸, 이십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 신입이시죠?"

도일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도일을 따라 자리로 걸으며, 제이는 잠깐 웃었다.

20년 만이네, 이 얼굴.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복도 쪽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임원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소리, 낮게 깔린 긴장감.

"회장님 오셨나 봐요."

수정이 목을 빼고 복도를 살피며 속삭였다.

"신입은 커피 한 잔씩 받아 오고 회의실 정리 좀 해줄래요?"

팀장이 다급하게 지시했다. 제이는 다른 신입과 함께 탕비실로 향했다.

종이컵 여러 개를 겹쳐 들고 회의실로 가던 길, 복도 모퉁이에서 제이는 서두르다 누군가와 그대로 부딪혔다.

"어, 죄송합니다!"

종이컵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커피가 튀었다. 상대의 셔츠 소매에도 갈색 자국이 번졌다.

"괜찮으세요?"

제이가 황급히 티슈를 꺼내 내밀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숨이 멎었다.

정준호였다.

심장이 순간 쿵, 하고 크게 뛰었다. 20년 뒤, 이 회사의 사장이 될 사람이었다. 사보에 실린 얼굴로 몇 번 스친 게 전부,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사원증도, 명찰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잘 갖춰 입은 손님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세탁비는 제가..."

"됐어요. 그보다, 다치지 않았어요?"

제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사원인가 봐요."

"...네."

"이름이?"

제이는 잠깐 망설이다 답했다.

"현제이입니다."

준호는 그 이름을 가만히 듣더니, 옅게 웃었다.

"조심히 다녀요."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왔던 길로 걸어가 버렸다. 코너를 돌아 회장 일행 쪽으로 합류하는 뒷모습을 보고서야, 제이는 그가 누구인지 확신했다.

제이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을 주워 담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나도 알은척은 안 해줄게요.

기획팀으로 돌아온 제이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래의 사장님과 마주치다니.

신기한 우연이었지만, 그뿐이었다.


퇴근길, 건물을 나서던 제이는 지하철역 입구 약국 앞에서 걸음이 느려졌다.

진열장에 놓인 소화제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맘때쯤이었다. 엄마가 자꾸 체한다며 저 소화제를 사다 달라고 하던 게.

지하철에 올라탄 제이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병원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다짜고짜 병원 가라고 하면 엄마 성격에 또 됐다고 넘길 텐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가게 만든다. 이번엔 늦지 않을 거니까.

휴대전화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친정엄마 번호였다.

이맘때쯤, 엄마는 자꾸 체한다며 소화제만 삼키고 있었다. 병원 한 번 안 가고 버티다가, 2년 뒤에야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

"어, 우리 딸. 첫 출근 잘했어?"

"어, 잘했어. 사람들도 다 좋고. 엄마는 저녁 먹었어?"

"먹었지.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속이 더부룩한지 모르겠다. 체했나."

제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저 말이었다. 2년 뒤 병을 키운 첫 신호가,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저 한마디였다.

"엄마, 요즘 계속 그랬어?"

"...그건 왜 물어?"

"그냥. 이번 주말에 병원 한번 가보자. 나랑 같이."

"뭘 그런 걸로 병원을 가. 유난 떨지 마."

익숙한 그 말투에, 제이는 잠깐 숨을 골랐다.

"유난 아니야. 이번 주 토요일, 내가 데리러 갈게. 꼭 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제이는 어깨에 힘이 풀렸다. 겨우 한 고비 넘긴 기분이었다.

원룸 방문을 열자 형광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낡은 이불과 작은 밥상이 전부인 좁은 방이었다. 20년 뒤, 그 넓다던 병실보다도 훨씬 초라했지만, 이상하게도 숨이 쉬어졌다.

제이는 이불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지나갔다. 가벼워진 몸, 그리고 도일의 얼굴.

제이는 손끝으로 이불의 거친 면을 문질러봤다. 감촉이 선명했다.

꿈일까, 아닐까.

만약 꿈이라면, 이렇게 손끝이 시릴 정도로 생생할 리 없었다. 그런데 또 만약 진짜라면,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방금까지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봤다. 그래도 방은 그대로였다. 낡은 벽지도, 형광등 불빛도.

내일 눈을 뜨면, 다시 마흔다섯의 병실로 돌아가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스치자 제이는 저도 모르게 이불깃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내일이 오면 정말로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었다.

20년을 통째로 되돌려받은 여자에게, 오늘부터 되돌려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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