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7. 결과가 나오는 날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7 19:40:46

준호와의 문자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엄마였다.

"엄마?"

"...제이야."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억지로 눌러 참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였다.

"왜, 무슨 일이야?"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결과 나왔다고, 내일 아침에 보호자랑 같이 오래."

"내일 아침이요? 결과가 벌써 나왔어요?"

"응, 원래는 다음 주라더니 빨리 됐다고 하네. 근데 전화 목소리가 좀, 그러네. 나 좀 무서운데."

제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지난 생, 병원에서 갑자기 오라고 했던 그날의 기억이 겹쳐 떠올랐다. 그날도 이런 목소리였다.

"엄마, 내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전화를 끊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결과가 예정보다 빨리 나왔다는 건, 좋은 신호일 수도 나쁜 신호일 수도 있었다. 제이는 그 어느 쪽도 함부로 짐작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음 날 아침, 제이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엄마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두 사람 다 별말이 없었다.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제이는 몇 번이나 손을 맞잡았다 풀었다.

이름이 불리고, 두 사람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화면에 사진 몇 장을 띄우며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조직검사 결과, 초기 위암으로 확인됐습니다. 다행히 점막층에 국한된 상태라, 내시경 시술로 절제가 가능한 단계입니다."

"...수술을 크게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제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개복 수술 없이 내시경으로 병변만 제거하면 되는 수준이에요. 이 정도로 초기에 발견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운이 좋으셨습니다."

엄마는 그제야 표정이 풀리며 옆에 앉은 제이의 손을 잡았다.

"거봐, 별거 아니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진료실을 나서며, 제이는 복도 의자에 잠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난 생에서는 이 병원 복도에서 정반대의 말을 들었다. 이미 다 퍼진 뒤라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나던 그 겨울까지, 제이는 그 말을 수도 없이 곱씹으며 살았다.

이번엔 달랐다. 점막층. 내시경 시술. 개복 수술도 필요 없는 초기 단계.

이렇게 다르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슬픔이 아니라, 안도였다.

"제이야, 너 왜 울어. 나 괜찮다잖아."

엄마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그냥, 다행이라서."

제이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그저 등을 토닥여줬다.


시술 일정은 다음 주로 잡혔다. 병원을 나서는 길, 엄마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근데 너 어제 저녁엔 어디 갔다 왔어? 전화했을 때 목소리가 좀 이상하던데."

"어, 그냥... 회사 사람이랑 저녁 먹었어."

"회사 사람? 남자야?"

"엄마!"

"딸이 갑자기 저녁 약속 있다니까 궁금해서 그러지."

제이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넘겼다. 어제저녁의 그 마음도, 오늘 아침의 이 안도감도, 지금은 둘 다 벅차서 한 번에 다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늦은 오전, 제이는 반차를 정리하고 회사로 향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조 과장이 불렀다.

"현제이 씨, 잠깐 회의실로."

수정과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제이는 조용히 조 과장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조 과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현제이 씨 나이 땐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어.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으니까 머리가 텅텅 비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설명을 못 하는 거야."

지난 상무 보고 얘기를 에둘러 꺼내는 것이었다. 제이는 아무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입사 3년 차에 이미 팀 하나를 통째로 맡았었어. 그때는 지금이랑 달라서, 위에서 시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냈지."

시작은 그렇게 사소한 훈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는 온통 자신의 과거 자랑으로 옮겨갔다.

신입 시절 무용담, 예전 상사에게 인정받았던 일화, 자기가 없으면 안 굴러갔다는 부서 이야기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조 과장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제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다.

지난 생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조 과장은 늘 이렇게 사람을 회의실에 앉혀놓고, 훈계라는 이름으로 몇 시간씩 자기 얘기만 늘어놓았다.

그때는 그게 상사의 조언인 줄 알고 끝까지 다 들어줬다.

나중에야 그게 그저 사람을 깎아내리고 기를 죽이는 방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제이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걸 왜 계속 듣고 있어야 하지.

"과장님, 죄송하지만 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조 과장의 말이 뚝 끊겼다.

"...뭐라고?"

"두 시간 넘게 자리 비운 것도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고, 이 정도 훈계를 들을 만큼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아서요."

회의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조 과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말을 끊고 자리를 뜬 직원은 없었다.

"현제이 씨,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야?"

"대드는 게 아니라, 시간 관리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이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오자, 근처 자리에 앉아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가 황급히 흩어졌다.

다들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두 시간 가까이 닫혀 있던 회의실 문이었으니, 모르는 척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수정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그냥,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서."

제이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방금 자신이 한 일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퇴근 준비를 하던 제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제 즐거웠어요.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요?

평범한 안부 인사였다. 제이는 잠깐 망설이다, 이번엔 솔직하게 답을 적었다.

엄마가 편찮으셨는데, 오늘 다행히 좋은 소식 들었어요.

다행이네요, 정말.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고마워요.

제이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다, 이내 다시 진동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준호의 답장이 이어져 있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축하는 오늘 퇴근하고 저랑 해요. 지금 회사 앞인데, 잠깐 나올래요?

제이의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회사 앞이라니, 지금.

답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사내 메신저 알림이었다.

[조 과장] 현제이 씨, 아까 회의실에서의 무단이탈 건, 경위서 작성해서 내 책상에 올려두고 가요.

제이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무단이탈이라고? 

되찾은 것은 엄마의 건강 하나만이 아니었다. 되찾은 시간 속에서, 제이는 조금씩 자신의 마음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가 이렇게 순순히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4. 팽팽해지는 실

    정 회장의 서재를 나선 준호는 곧바로 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확인해보셨어요?"제이의 목소리에는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할아버지도, 확실히 모르십니다."준호가 낮게 답했다."그런데 반응이 이상했어요. 사십 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얼굴을 하셨습니다. 뭔가를 떠올리신 게 분명해요. 그런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제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할아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동시에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거네요.""그런 셈이죠.""그렇다면 이 사람은 정말로, 실장님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이자, 동시에 우리한테는 유일한 방패가 될 수도 있어요."전화기 너머로 준호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미국 쪽 루트를 가동해보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정보원이 몇 있어요. 회사 공식 라인을 거치지 않고 조용히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실장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해요.""압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사흘 뒤, 늦은 밤.제이의 사장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준호가 들어서며 그녀의 안색부터 살폈다."사흘 동안 잠은 좀 잤습니까?"준호가 제이의 의자 옆으로 다가서며 나직하게 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깊은 눈빛 속에는 제이를 향한 염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난 사흘, 두 사람 모두 박진철이 다음에 어떤 카드를 꺼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켜온 참이었다.제이가 엷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준호 씨야말로요. 눈 밑이 많이 어두워요.""찾았습니다."준호가 짧게 답하며 그제야 노트북을 돌려 보였다. 책상 위, 화면에는 낯선 문서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한 남성의 기본 신상 자료였다."서류상 이름은 지훈 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준호가 화면을 넘기며 나직이 읽어 내렸다."미국 시민권자로 완전히 신분이 세탁되어 있어요. 겉으로 드러난 서류만 봐서는 우리 집안과는 아무 연결점도 찾을 수 없습니다."제이가 화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3. 혹시라는 물음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빛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확신할 수 없다고 말은 했지만……."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삼십 년도 아니고, 사십 년 가까이예요. 실장님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 이유 없이 낯선 사람에게 돈을 보냈을 리가 없어요."제이는 그런 준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냉철하고 흔들림 없던 그가, 지금은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회사와 관련된 어떤 위협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흔드는 건 사업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와 맞닿아 있을지 모르는 문제였다."준호 씨."제이가 그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어요. 이니셜 하나, 흔한 성씨 하나로 지레짐작하기엔 일러요.""압니다. 그런데도……."준호가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정말 우리 집안과 얽힌 사람이라면, 실장님이 삼십 년 넘게 그 존재를 숨겨온 이유가 뭘지, 그게 자꾸 신경 쓰입니다. 단순한 동정이나 선의로 그렇게 오래, 그렇게 은밀하게 돈을 보낼 사람이 아니에요, 그분은."제이는 그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이 사람이 누구든, 지금 우리한테는 하나는 확실해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이 존재가 실장님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거예요. 사십 년 가까이 숨겨온 비밀이라면, 그만큼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무게를 가진 거겠죠. 그리고 그건, 우리가 실장님을 무너뜨릴 유일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준호는 제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흔들리던 마음이 그녀의 확신 앞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준호는 제이가 쥔 손의 온기를 가만히 느끼며, 멎어 있던 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어둠을 마주할 때마다 늘 혼자 버텨야 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흔들림마저 온전히 받아쳐 주는 제이가 곁에 있었다."제이 씨가 없었다면, 길을 잃었을 겁니다."준호의 나직한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감겼다."감정적으로 흔들릴 때가 아니죠. 확인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2. 흘러가는 돈의 행방

    송도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밤, 제이와 준호는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 두 대를 나란히 펼쳐놓았다."실장님 개인 계좌부터 시작하죠."준호가 낮게 말하며 자판을 두드렸다. 삼촌 사건을 처리하며 확보해둔 금융 조회 권한이 아직 유효했다. 정 회장의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박진철 명의의 계좌들이 화면에 하나둘 떠올랐다. 오랜 세월 임원급 대우를 받아온 만큼 자산 규모는 상당했지만, 특별히 의심스러운 대형 거래는 보이지 않았다. 삼촌처럼 무리하게 지분을 매집한 흔적도, 이영민처럼 도박이나 유흥에 흥청망청 쓴 흔적도 없었다."깨끗하네요."준호가 화면을 넘기며 혀를 찼다."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것도 신기할 정도입니다."제이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노트북 한쪽에, 어제 박진철과의 만남 전에 준비했던 십오 년 전 재단 자금 세탁 자료를 다시 띄웠다. 당시 무기명 채권으로 전환되었던 금액들이 소수점 단위까지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이 숫자들, 어디선가 다시 나타날 거예요."제이가 중얼거리며 두 화면을 번갈아 살폈다. 정상적인 회계 처리라면 이미 십오 년 전에 완전히 소멸되었어야 할 자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수점 단위의 특이한 끝자리들을, 지금 눈앞의 계좌 내역 어딘가에서 반드시 다시 마주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한참을 대조하던 그녀의 손끝이 문득 멈췄다.박진철의 주 계좌에서 곧바로 나가는 게 아니라, 사이에 낯선 명의의 계좌 하나를 거친 뒤에야 해외로 흘러 나가는 우회 경로가 눈에 들어왔다. 정상적인 회계 처리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하게 설계된 다리였다. 그리고 그 우회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금액의 소수점 끝자리가, 십오 년 전 재단 자료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찾았어요."제이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실장님 명의가 아니라, 중간에 유령 계좌를 하나 끼워 넣으셨더라고요. 그 계좌를 거쳐서 매달 같은 날, 같은 금액이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어요."준호가 몸을 기울여 화면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1. 드러난 발톱

    ​오후 세 시, 박진철이 지정한 장소는 본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한정식집이었다.외부인의 눈을 피하기에 적당한, 룸으로 나뉜 오래된 노포였다. 제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박진철이 정중히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아니에요, 실장님. 개인적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궁금했어요."제이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준비해온 패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박진철은 몇 마디 사소한 안부를 건넨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본론을 꺼냈다."현 사장님. 제가 이 회사에서 사십 년을 일했습니다. 작은 사무실에서 경리 한 명 두고 시작한 그때부터 있었죠. 그동안 이 회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 굴곡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실장님이시니까요. 회장님 곁을 가장 오래 지키신 분이잖아요.""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준호 씨는 분명 유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회사를 온전히 짊어지기엔, 아직 여러모로 준비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실장님은 준호 씨가 후계자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부족하다기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라는 겁니다."박진철의 태도는 여전히 정중하고 온화했다. 제이는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준비해온 카드를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실장님. 십오 년 전, 어느 재단의 자금 흐름에 대해 여쭤도 될까요?"박진철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멈췄다."제가 우연히 오래된 자료를 살펴보다가, 실장님 성함이 적힌 문서를 하나 발견했어요. 삼촌이 이영민에게 흘려보낸 자금의 통장 개설 경로가, 그 재단의 자금 세탁 경로와 정확히 일치하더라고요."제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실장님이 삼촌의 뒤에도 계셨던 거죠. 이 정도면, 저도 더는 실장님을 회사의 은인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찰나의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0. 눈먼 사냥개의 덫

    ​다음 날 오전, 27층 대회의실에는 예산안 검토를 위해 임원진 전원이 소집되어 있었다.박진철은 상석 근처, 정 회장의 대리인 자리에 조용히 앉아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참관일 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제이와 준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자문단에서 제안한 안대로, 초기 예산의 상당 부분을 냉장 설비 임대 쪽으로 돌리는 게 맞다고 봅니다."제이가 태블릿을 넘기며 말했다. 준호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임대는 장기적으로 훨씬 손해입니다. 처음부터 자체 설비를 구축하는 쪽이 맞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실장님이 소개해주신 자문단 의견이 더 현실적이에요. 저희끼리만 판단하기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요.""현 사장님."준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지금 그 자문단이라는 사람들, 정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들 의견에 이렇게까지 흔들리시는 게,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저는 그저 열린 마음으로 여러 의견을 듣자는 거예요. 정실장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세요?"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처음이었다.몇몇 임원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궜고, 몇몇은 은근한 흥미를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회사 내부에서 완벽한 파트너십을 자랑하던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는 소문은, 이 회의실을 나가는 순간 삽시간에 사내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야말로 지금 두 사람이 노리는 진짜 미끼였다.박진철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는 찻잔을 들어 조용히 한 모금 삼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틈이었다."오늘 안건은 여기까지 하고, 조금 더 검토한 뒤 다시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박진철이 부드럽게 회의를 중재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임원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가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69. 가면 뒤의 사냥개

    ​박진철이 데려온 외부 자문단은 오후 두 시 정각에 회의실에 도착했다.세 명 모두 화려한 이력서를 자랑했다. 유통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컨설턴트, 물류 시스템 전문 교수, 그리고 콜드체인 기술 특허를 여러 건 보유했다는 엔지니어. 서류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조합이었다."이분들이라면 신선식품 사업의 초기 설계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박진철이 흐뭇한 얼굴로 소개를 마쳤다. 제이는 정중히 웃으며 자문단과 인사를 나눴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미세한 위화감이 쌓여갔다.자문단은 하나같이 콜드체인 시스템의 핵심 설계도와 마이크로 거점의 위치, 자금 조달 구조 같은 세부 사항을 유독 캐물었다. 기존 물류망과의 호환성을 검토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수치라는 명분이 매번 앞서 붙었지만, 정작 사업의 방향성이나 전략에 대한 조언은 겉핥기 수준이었다.'실질적인 조언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정보를 캐가려는 거구나.'제이는 속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오히려 더 상세하게, 조금은 부풀려진 숫자와 가짜 일정표까지 섞어가며 술술 풀어놓았다. 준호 역시 제이의 의도를 즉시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맞장구치며 판을 더 크게 벌려주었다.회의가 끝난 뒤, 박진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문단을 배웅했다."오늘 미팅이 아주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두 분께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실장님 덕분이에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제이가 흠잡을 데 없는 미소로 답했다. 박진철이 흡족한 얼굴로 자리를 뜬 뒤, 회의실에는 제이와 준호만 남았다.늦은 밤, 전 직원이 퇴근한 본사 건물은 적막했다. 제이는 사장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낮 동안 완벽하게 유지했던 포커페이스가 풀리자,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그제야 뻐근하게 저려왔다."수고했어요."준호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커다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근육을 천천히 풀어주었다."오늘 하루 종일 연기하느라 힘들었죠.""준호 씨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