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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연이 아니라

작가: 지호
last update 게시일: 2026-07-27 19:16:22

금요일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제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투였다. 지나가듯 묻던 안부가 아니라, 분명한 제안이었다. 제이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계속 문자만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뭐 하자고요?

저녁 같이 먹어요. 이번엔 우연 말고, 제대로.

제이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제대로"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챙기며 제이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 사람의 앞날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지금 이렇게 편하게 문자를 주고받고 밥까지 먹으러 가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언젠가는 들통날 거짓말을 하나 더 얹는 기분이었다.

도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일은 이미 다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더는 설레지 않는 상대였다. 반면 이 사람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음을 잡아끌었다.

답장을 보내는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요. 어디로 가면 돼요?


약속 장소는 회사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한정식집이었다. 룸으로 된 자리마다 낮은 조명이 켜져 있고, 창밖으로 작은 정원이 내다보였다. 준호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제이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준호가 웃으며 물잔을 건넸다. 사복 차림의 그는 회사에서 마주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넥타이도, 격식 차린 말투도 없이, 그저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스물여덟 살 남자였다.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준호는 젓가락을 들기 전에 항상 제이 쪽 그릇부터 살폈다.

"이거 안 매워요?"

"괜찮아요, 저 매운 거 잘 먹어요."

"그래도 하나만 먼저 먹어봐요. 맵기 정도가 좀 셀 수도 있어서."

사소한 배려였지만, 제이는 그 순간 묘한 온기를 느꼈다. 20년을 더 살아본 사람도 처음 겪는 다정함이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대화는 예상보다 편했다. 회사 얘기, 요즘 유행하는 것들, 그리고 사소한 취향들.

"의외네요. 이런 것도 좋아하시고."

제이가 준호의 대답에 웃으며 말했다.

"왜요, 안 어울려요?"

"그냥, 좀 더 딱딱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건 회사에서만 그래요. 다들 그렇게 봐서, 저도 그렇게 굴게 되고."

준호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늘 여유 있게 웃던 사람의 틈이 살짝 보인 순간이었다.

"...힘든가 봐요."

"가끔은요."

준호는 잔을 내려놓으며 잠깐 창밖을 봤다. 낮은 조명 탓인지, 창밖 정원의 푸른 어둠 때문인지 그의 옆얼굴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사실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었어요. 근데 그런 건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져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제이 씨 보면 좀 신기해요."

"제가요?"

"이제 막 대학 졸업하고 첫 회사 들어온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여유가 있어요? 저는 아직도 이 자리가 낯선데."

준호가 웃으며 덧붙였다.

"여유있는 느낌? 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었다. 제이는 순간 웃음으로 그 말을 넘겼다.

"그렇게 보였다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거겠죠."

준호는 그 대답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눈치였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준호는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회사에서 마주칠 땐 늘 여유로워 보이던 사람이, 지금은 자기 몫이 아닌 길을 억지로 걷고 있는, 그냥 지쳐 보이는 스물여덟 살 남자였다.


식당을 나서는 길,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제이 씨는 무서운 거 없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이는 걸음을 멈췄다.

"왜요?"

"항상 침착해서요. 뭘 봐도 놀라지 않고."

"그렇게 보여요?"

"네. 첫 만남에 커피 쏟았을 때도, 회의실에서도. 어지간한 일엔 흔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어요."

제이는 잠깐 대답을 골랐다.

"있어요. 많이."

"뭔데요?"

"...말하면 안 믿을 것 같은데요."

준호가 걸음을 멈추고 제이를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다.

"믿어볼게요, 뭐든."

그 말에 제이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야 하는 게 맞는데도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제이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준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음에 또 물어볼게요."

헤어지는 골목 앞에서, 준호가 손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잡을 듯 말 듯한 그 손짓에, 제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오늘 재밌었어요."

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도요."

"다음엔 제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갈게요. 여기보다 훨씬 편한 데."

"그런 데도 있어요?"

"많아요. 회사 사람들 눈치 안 봐도 되는 데들로."

농담 같은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제이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조심히 들어가요."

준호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제이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며, 제이는 자신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히 잘 들어갔어요?

문자가 도착한 건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제이는 화면을 보며 옅게 웃었다.

네, 잘 들어왔어요. 오늘 고마웠어요.

또 보자는 말이죠?

능청스러운 답장에, 제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준호 씨가 정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다음 주에 또 보자고 할게요.

대답도 안 했는데 벌써 정해버리네요.

싫으면 싫다고 해요. 그럼 안 물어볼게요.

제이는 그 말에 선뜻 답을 보내지 못했다.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생각해볼게요.

그거 좋다는 뜻으로 들을게요.

제이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깐 천장을 올려다봤다. 소독약 냄새만 가득하던 차가운 병실 안에서, 포기하듯 마지막 숨을 내쉬던 그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살아 숨 쉬는 심장이 이토록 뜨겁게 뛴다는 것을.

이 마음을 계속 밀어붙여도 되는 건지, 제이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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