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차는 어느새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정지훈은 오랫동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도, 제이도 더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차 안의 공기는 오히려 더 단단하게 가라앉아갔다."제가 만나야 할 사람은."마침내 정지훈이 낮게 입을 열었다."박 실장님이 아니라, 정 회장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준호의 손끝이 운전대 위에서 미세하게 굳었다."저는 지금껏 실장님이 그려주신 그림 안에서만 살아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이유도, 제가 있어야 할 자리도, 전부 실장님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억눌러온 결심이 담겨 있었다."제 어머니가 왜 그렇게 사셔야 했는지. 그리고 저라는 존재가 정 회장님께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맞는 것 같아요. 저희가 자리를 마련해드릴게요."준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운전대를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어쩌면 자신의 숨겨진 삼촌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첫 대면. 그 무게가 어떤 것일지, 그 역시 가늠하기 어려웠다.같은 시각, 박진철의 자택.그는 여전히 텅 빈 CC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지훈이 두 사람을 따라 사라진 지 이미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만 이어질 뿐이었다.박진철의 얼굴에서 여유롭던 표정이 완전히 걷혔다. "이렇게 쉽게 흔들릴 아이가 아닌데."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십 년 가까이 공들여 키워온 존재가, 단 하루 만에 낯선 두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 깊은 곳을 갉아먹고 있었다.하지만 박진철은 오래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곧 자세를 고쳐 앉으며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법무팀장 연결해."비서의 목소리가 스피커폰 너머로 흘러나오자, 그는 낮고 단호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한다. 삼주 뒤로 일정을 잡아. 안건은 이사회 구성 변경, 그리고 신선식품 사업부 경영진 재신
인천공항 주차장, 박진철은 차 안에서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있었다.정지훈의 항공편은 이미 삼십 분 전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응답은 없었다."이상하군."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십 년 가까이 키워온 아이였다. 늦는 법이 없는 아이였다. 약속한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먼저 연락을 주던 사람이었다.박진철은 차에서 내려 입국장 안으로 직접 걸음을 옮겼다. 전광판에는 이미 정지훈이 탑승했던 항공편의 도착 안내가 완료로 표시되어 있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빠져나간 뒤였다.그는 입국장 로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박진철의 머릿속에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그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회사 쪽 인맥을 통해, 공항 인근의 CCTV 접근 권한을 가진 지인에게 연락을 취했다.같은 시각, 도심을 향해 달리는 차 안.정지훈의 고백이 남긴 여운이 한동안 차 안을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준호도, 제이도 섣불리 말을 얹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은 그에게는, 스스로 다음 걸음을 정할 시간이 필요했다.준호는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정면을 응시했다. 방금 전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던 질문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당신이 제 삼촌이라는 뜻입니까.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그 좁은 핏줄 안에 평생 갇혀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름이 그 좁은 원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회사의 미래를 두고 벌이던 싸움이, 어느새 자신의 뿌리를 뒤흔드는 문제로 바뀌어 있었다.제이가 그런 준호의 옆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수석에서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굳이 위로의 말을 얹지 않아도, 그 손길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한참 만에 정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여기서 두 분을 따라간다면, 실장
정지훈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캐리어를 넘기고 뒷좌석에 올랐다.차가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활주로의 불빛들이 스쳐 지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정지훈의 굳은 얼굴이 비쳤다. 그는 여전히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가만히 움켜쥐고 있었다.준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이따금 백미러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차 안에는 낮은 엔진음과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침묵을 먼저 깬 건 제이였다."박 실장님이 왜 당신을 부르셨는지, 정확히 알고 계세요?"정지훈은 대답 대신 창밖을 응시했다."실장님이 저를 얼마나 오래 도와주셨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분께 빚이 있는 사람입니다.""빚이라……."제이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그런데 정지훈 씨, 실장님이 당신을 부른 게 정말 당신을 위해서일까요."정지훈의 시선이 처음으로 제이에게 향했다."실장님은 당신이 이 회사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믿고 계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실장님의 신념이지, 당신이 원한 삶은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요. 당신의 의사는 단 한 번도 여쭤보지 않으신 채로, 사십 년 가까이 혼자 그 계획을 짜오신 거예요.""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정지훈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적대감이 서렸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제이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실장님은 사십 년 가까이 저와 제 어머니를 지켜주셨습니다. 두 분은 오늘 처음 저를 본 사람들이고요."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박지훈이라는 이름, 제가 숨으려고 아무렇게나 지은 가명이 아닙니다. 실장님의 성을 딴 이름이에요. 제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란 저한테, 실장님은 그냥 은인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가문 때문에 제 어머니가 평생 숨어 살아야 했다는 걸, 이제 와서 알았다는 얼굴로 저를 설득하려는 겁니까? 참 편리하시네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지켜주신 게 아니라, 숨겨두신 거겠죠."제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인천공항 입국장은 오후의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준호와 제이는 게이트 근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기둥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준호가 미리 확인해둔 주차장 CCTV 화면에는, 박진철의 차량이 이미 도착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박 실장님도 이미 와 계세요."제이가 낮게 속삭이며 휴대폰 화면을 접었다. 시간 싸움이었다.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부터, 누가 먼저 정지훈에게 닿느냐가 모든 것을 갈랐다.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안내 방송이 뒤섞인 공항의 소란 속에서,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굳히고 있었다. 준호가 그런 그녀의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아 서며, 밀려드는 인파로부터 그녀를 감쌌다."긴장돼요?"준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물었다."조금요. 이렇게 대놓고 부딪치는 건 처음이라.""제가 옆에 있습니다."준호가 제이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소란스러운 공항 안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확신처럼 느껴졌다.게이트 전광판에 도착 안내가 떴다.이윽고 자동문이 열리며 승객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이와 준호의 시선이 동시에 그 흐름 속을 훑었다.그리고 그가 나타났다.깔끔하게 정돈된 슈트 차림에, 캐리어 하나만을 끌고 걸어 나오는 남자. 안경 너머의 눈빛은 차갑고 건조했으며,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정지훈이었다.그는 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기둥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곧장 시선을 돌렸다. 놀란 기색도,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준호와 제이가 동시에 그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정지훈 씨."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지훈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정준호 실장님, 그리고 현제이 사장님. 두 분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만남을 준비해온 사람 같았다."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뵙기로 한 분이 따로 계셔서요."정지훈이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준호의 개인 정보원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어젯밤, 박지훈 명의로 인천행 항공권이 발권됐습니다. 편도입니다."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출발은 언제입니까.""오늘 오후 항공편입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탑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전화를 끊은 준호는 곧바로 제이의 사장실로 향했다."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그가 짧게 말했다. 제이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실장님이 마지막 패를 꺼내시는군요."두 사람은 곧바로 준호의 정보원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지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낸 정보는 예상보다 훨씬 만만치 않았다.미국의 명문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수재였다. 이후 대기업에 들어가는 대신, 스스로 작은 무역 회사를 설립해 십여 년째 안정적으로 운영해오고 있었다."단순히 자수성가한 게 아니에요."제이가 화면 속 정지훈의 회사 포트폴리오를 짚었다."이 무역 회사, 매출의 상당 부분이 정 회장가의 방계 기업들과의 거래에서 나옵니다. 박 실장님이 뒤에서 밀어준 일감으로 큰 회사예요. 그리고 무엇보다……."제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현지 평가를 보면 협상 테이블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로 유명해요. 자신을 키워준 박 실장을 향한 부채감과 본인의 냉혹한 능력이 합쳐졌다면, 우리에겐 최악의 상대가 될 겁니다."준호의 표정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렇다면 더 위험합니다. 실장님의 감정에 휘둘리는 인형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두 사람은 정지훈이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동선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가 박진철과 정확히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접촉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십 년간 묻혀 있던 진실의 조각을, 박진철보다 먼저 손에 넣어야 했다.그날 오후, 준호가 회사 재무팀으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실장님. 이상한 게 있어서 보고드립니다."담당 직원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늦은 밤, 준호의 개인 사무실.책상 위에는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신탁 기금 서류, 정지훈이라는 이름이 적힌 출생 기록, 그리고 미국 현지에서 박지훈이라는 가명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일상 자료들."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제이가 서류들을 손끝으로 짚으며 미간을 좁혔다."실장님이 그렇게까지 공들여 신분을 숨겼다면, 신탁 기금 서류에 진짜 이름을 남겨둘 이유가 없잖아요. 완전히 지워버리는 게 훨씬 안전했을 텐데."준호도 같은 지점에서 걸려 있던 참이었다."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름 하나를 지우지 않고 남겨뒀다는 건, 그 이름 자체가 필요했다는 뜻이겠죠.""필요했다……."제이가 낮게 되뇌며 신탁 기금 서류를 다시 살폈다. 법무법인 명의로 작성된 신탁 계약서 말미에는, 수혜자의 법적 신원을 증명하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그 조항은 특정 상황에서, 수혜자가 자신의 본명과 혈연관계를 공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이거예요."제이의 눈이 반짝였다."이 서류 자체가 증거예요. 정지훈이라는 이름과, 이 신탁 기금을 연결하는 법적 근거. 언젠가 이 사람이 자신의 혈통을 공식적으로 증명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이 서류 한 장이면 충분해요."준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실장님이 사십 년 가까이 아껴온 무기가, 바로 이거였군요.""네. 평소에는 박지훈으로 완전히 숨어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지훈이라는 이름을 꺼내 드는 거죠. 신원을 증명할 서류까지 완벽하게 갖춰둔 채로요."제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했다."그런데 왜 굳이 지금까지 숨겨야 했을까요. 그냥 처음부터 정지훈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나타났어도 됐을 텐데."준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섣불리 정체를 드러냈다가는, 오히려 위험해졌을 수도 있습니다.""위험이요?""그 존재 자체가, 우리 가문 안에서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지워야 할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준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