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행차를 마치고 돌아온 강녕전은 다시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내관들은 행차에 쓰인 물건을 정리했고, 궁녀들은 수라상을 물렸다.
왕은 편전으로 들어가기 전, 호위무사를 불렀다.
“방금 그 아이.” 호위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연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그렇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왕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소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백성을 제압한 것도.”
“…”
“힘만으로 되는 몸놀림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내력이 있는 아이인지 알아보았느냐.”“변방 군영에서 복무하던 군관의 딸이라 하옵니다.”
“…군관.”
“예.”
“아비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어미를 따라 입궁하였다고 합니다.”
왕은 더는 묻지 않았다.그저 짧게 말했다.
“알겠다.” 호위무사는 물러가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전하.”“말하라.”
“강녕전 상궁께서 말씀하시길, 기미상궁의 고뿔이 깊어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한다 합니다.”
“…”
“행차에도 수라간 나인이 필요하니.”
“대신할 아이를 붙여야 할 듯합니다.”
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답했다. “그 아이로 하지.”“…연화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미도 맡고.”
잠시 말을 멈춘 왕이 덧붙였다. “행차에도 익숙해졌으니.”“강녕전을 돕게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
같은 시각. 수라간.
“연화.” 상궁의 부름에 연화가 얼른 달려왔다. “예, 상궁마마.”“기미상궁의 병세가 생각보다 길어진다.”
“…”
“강녕전에서 사람이 왔다.”
연화는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상궁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당분간 네가 기미를 맡는다.”“…소첩이요?”
“그래.”
“기미상궁이 나을 때까지만.”
연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잠깐이니까.
그런데.
“짐도 강녕전으로 옮겨라.”“…예?”
“당분간 강녕전 소속으로 차출이다.”
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녕전에서…”“지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싫으냐.”
연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다만.”
상궁이 팔짱을 낀 채 연화를 바라봤다. “말해 보거라.” 연화는 한참을 망설이다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미상궁마마께서.”“…”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방 안이 고요해졌다.궁녀 하나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상궁도 헛기침을 하며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연화.”“예.”
“그 말은.”
“강녕전 가서는 하지 말거라.”
“…예?”
“오해를 산다.”
연화는 멍한 얼굴이었다.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지.” 상궁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가서 짐이나 싸거라.” ⸻ 연화의 짐이라 해봐야 별것 없었다.낡은 옷 몇 벌.
손때 묻은 작은 비녀 하나.
그리고. 어머니가 궁에 들어오기 전 쥐여 주었던 작은 노리개.
그것을 손에 쥔 연화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당분간뿐이다.’ 기미상궁마마께서 나으시면 다시 수라간으로 돌아간다.그 생각 하나로 마음을 다잡았다.
연화는 작은 보퉁이를 품에 안고 강녕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할 줄은.
아직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공주가 궁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연화는 다과 접시를 두 번 세었다.아침에는 네 개였다.중궁전에 다녀온 뒤에는 두 개였다.이것까지는 기억이 났다.정 소원에게 하나를 주고, 자신도 하나를 먹었다.그런데 저녁에 보니 접시가 비어 있었다.연화가 상궁을 불렀다.“남은 두 개는 어디 갔느냐?”상궁은 잠깐 말을 고르았다.“마마께서 낮잠에서 깨신 뒤 드셨습니다.”“두 개를 다?”“예.”연화는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상궁이 덧붙였다.“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접시를 바꾸라 하신 말씀도 있었습니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그 말까지 했던가.공주가 없으니 누가 먹었는지 궁금해할 일도 줄었는데, 정작 제 손을 기억하지 못했다.연화는 접시를 상궁에게 건넸다.“그럼 씻어 다오.”“새로 내올까요?”연화가 잠깐 고민했다.“전하 것도 필요하다.”상궁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급히 덧붙였다.“이번에는 신첩이 먼저 먹지 않겠다.”이헌은 저녁 보고를 마친 뒤 연화의 처소로 왔다.탁자에는 다과가 두 개 놓여 있었다.연화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두고 있었다.그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접시를 밀었다.“전하께 드릴 것입니다.”이헌은 접시보다 연화의 손을 먼저 보았다.“왜 그렇게 앉아 있느냐?”
혼례 날 아침, 연화는 공주의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다과상부터 살폈다.접시는 있었지만 음식이 거의 줄지 않았다.공주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고, 상궁들은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느라 바빴다.연화가 물었다.“마마, 아침은 드셨습니까?”“조금.”상궁이 연화를 보았다.그 눈길만으로도 얼마나 조금인지 알 수 있었다.연화는 접시에서 떡 하나를 집었다.공주가 거울 속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오늘도 네가 먼저 먹느냐?”“마마께 드리려고 집었습니다.”연화가 떡을 작은 크기로 나누었다.공주는 그것을 보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지금은 먹고 싶지 않구나.”“그럼 한 입만 드십시오.”“옷에 묻으면 곤란하다.”연화가 공주의 무릎 위에 깨끗한 천을 펼쳤다.“이제 괜찮습니다.”공주는 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작은 떡 조각을 받아 먹었다.연화가 그제야 남은 것을 제 입에 넣었다.공주가 그녀를 보았다.“네가 먹으려고 한 입만 준 것은 아니겠지?”“마마께서 더 드시면 신첩은 다른 것을 먹겠습니다.”곁에 있던 상궁이 웃음을 숨겼다.공주도 조금 웃었다.아침부터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머리 장식이 하나씩 올라갔다.옷매무새를 고치는 손도 점점 조심스러워졌다.연화는 공주의 곁에 앉아 소매 끝이 접히지 않게 받쳐 주었다.
혼례를 사흘 앞두고, 공주는 머리 장식 앞에서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이것을 다 얹어야 하느냐?”상궁은 거울 속 공주를 보았다.“아직 전부 올린 것은 아니옵니다.”공주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상궁 둘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마마, 잠시만 그대로 계시옵소서.”공주는 다시 앞을 보았다.옆에 앉아 있던 연화가 입술을 눌렀다.공주는 거울로 그것을 발견했다.“웃지 마라.”“아직 웃지 않았습니다.”“네 얼굴이 웃고 있다.”연화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혼례를 준비하기 시작한 지 스무 날이 훌쩍 지났다.그사이 책은 상자에 들어갔고, 서진우의 집에는 새 책장이 놓였다. 집안 어른들께 전한 답에도 더는 다른 청이 따라붙지 않았다.그런데 막상 가장 곤란한 것은 머리 위에 있었다.공주가 상궁에게 물었다.“얼마나 더 걸리느냐?”“높이를 조금만 고치면 되옵니다.”“낮추는 쪽이면 좋겠구나.”연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께서는 높은 것도 잘 어울리십니다.”“네가 대신 얹고 말하거라.”“신첩은 아이 때문에 오래 앉아 있기도 어렵습니다.”공주가 거울 속 연화를 보았다.편한 의자에 기대 앉아, 발밑에 낮은 받침까지 둔 사람이었다.“너는 준비를 잘했구나.”“마마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공주의 혼례 준비가 시작된 뒤, 궁에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이것도 가져가셔야 합니다”였다.옷도 가져가야 했다.그릇도 가져가야 했다.이불과 병풍, 장롱과 책장도 가져가야 했다.연화가 공주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큰 상자 여섯 개가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공주는 그 앞에서 물품 목록을 들고 서 있었다.“나는 아직 궁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 물건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연화는 상자에 붙은 종이를 읽었다.하나는 책.하나는 겨울옷.다른 하나는 장신구였다.“마마, 평소에 쓰시는 것은 따로 두셔야겠습니다.”“그렇게 말했는데도 이 모양이다.”공주가 상궁을 보았다.상궁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빠지는 것이 있을까 염려되어 미리 챙겼사옵니다.”연화는 장신구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비녀가 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자주 쓰던 꽃 장식도 보였다.그녀가 그것부터 꺼냈다.“이것은 오늘 쓰십시오.”공주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연화는 곁에 선 궁녀를 불렀다.“상자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더 만들어 다오. 가져갈 것과 지금 쓸 것도 나누고.”“예, 마마.”“혼례 전날까지 여섯 상자를 뒤집을 수는 없지 않으냐.”공주는 연화에게 꽃 장식을 받아 들었다.“너는 먹을 것 말고도 잘 찾는구나.”“약과를 숨긴 상자를 찾으려면 글부터 읽어야 합니다.”공주는 결국 웃었다.오후에는 서진우가 찾아왔다.공주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문 쪽을 보았다.그가 들어오자 바로 물었다.“집은 어떠하냐
연화는 허리끈을 다시 묶었다.한 번.두 번.세 번째에는 매듭을 풀고 상궁을 보았다.“이 끈이 짧아졌느냐?”상궁은 잠깐 침묵했다.연화도 대답을 알았다.끈은 그대로였다.배가 더 나왔다.상궁이 다른 치마를 펼쳤다.“새로 지은 것이옵니다. 이쪽을 입으시면 편하실 것입니다.”연화는 치마를 받아 들었다.빛깔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어제까지 잘 맞던 옷을 접어 놓으니 괜히 아쉬웠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마마,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불편하지는 않다.”연화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기뻐해야 하는 일인데, 거울 앞에서는 마음이 꼭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다.치마를 갈아입고도 한참 거울을 보았다.그때 이헌이 들어왔다.연화는 돌아서면서 먼저 말했다.“전하, 끈이 짧아진 것이 아닙니다.”이헌이 문 앞에서 멈췄다.“무슨 끈?”상궁은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조금 민망해졌다.“아무것도 아닙니다.”이헌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새 치마 위로 배가 둥글게 드러나 있었다.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연화가 손목을 잡았다.“전하.”“응?”“오늘은 배보다 신첩 얼굴부터 보십시오.”그가 손을 멈췄다.이어서 연화의
서진우가 강녕전에 들어섰을 때, 탁자 위에는 칼도 서찰도 없었다.대신 작은 천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그는 예를 갖춘 뒤 그것을 보았다.천 사이로 둥근 머리 하나가 나와 있었다.서진우의 어깨가 굳었다.“전하, 그것은…….”“인형이다.”그제야 숨이 조금 풀렸다.이헌은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탁자에 내려놓았다.아이를 돌볼 궁인이 연화에게 아기를 안는 법을 설명하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천 안쪽에 솜을 넣어 제법 묵직하게 만들었다.서진우가 맞은편의 연화를 보았다.연화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전하께서 서 대인도 해 보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무엇을 말씀이옵니까?”이헌이 인형을 그쪽으로 밀었다.“안아 보아라.”서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칼을 쥔 사내를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명처럼 들렸다.“소신이 아기를 안아 본 적이 없어…….”“나도 없었다.”그 말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서진우가 두 손을 내밀었다.인형을 받는 순간 손바닥 하나가 머리 뒤로 갔다.곁에 있던 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목을 받쳐 주시면 되옵니다.”서진우의 자세가 조금 안정되었다.연화가 반갑게 말했다.“잘하십니다.”이헌은 서진우의 팔을 보았다.“배운 적이 없다더니.”“아이를 떨어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