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강녕전은 수라간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궁녀들은 발소리조차 죽여 걸었고, 내관들 역시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연화는 작은 보퉁이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부터 강녕전을 돕게 된 연화입니다." 강녕전 상궁이 연화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수라간에서는 힘이 좋기로 이름났다 들었다.""..."
"하지만 강녕전에서는 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연화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눈치다.""...예."
"전하를 모시는 곳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명심하겠습니다."
--- 첫 기미는 무사히 끝났다.국. 탕. 반찬.
차례대로 독을 살핀 뒤 이상 없음을 알렸다.
왕의 수라가 올라가고.
연화는 한숨을 돌렸다.
'다행이다.' --- 식사가 끝난 뒤.수라를 물리는 일이 남아 있었다.
연화는 빈 그릇을 하나씩 정리하다가 문득 작은 접시 하나를 발견했다.
기미를 위해 따로 덜어두는 그릇인 줄 알았다.
'이것도 확인해야 하나...?' 조심스레 젓가락을 들었다.그 순간.
"얘야."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연화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강녕전 상궁이었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기미를."
"기미는 끝났다."
"..."
"그 음식은 전하께 올렸던 수라다."
순간.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송구하옵니다." 상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라간 버릇을 여기까지 가져오면 아니 된다.""..."
"강녕전에서는 모르는 것은 먼저 묻고."
"아는 척하지 마라."
연화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명심하겠습니다." --- 그날 이후.연화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평소 같으면 궁녀들과 웃으며 일했겠지만.
오늘은 조용히 제 할 일만 했다.
강녕전 궁녀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많이 혼났나 보다.""원래는 저렇게 풀이 죽는 아이가 아니라던데."
--- 해가 기울 무렵.연화는 빈 쟁반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상궁의 말만 맴돌았다.
'모르면 먼저 묻고.''아는 척하지 마라.'
그때였다.앞에서 궁녀 하나가 발을 헛디뎠다.
"앗!"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이 허공으로 떠올랐다.연화는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 손으로 쟁반을 받아내고.
다른 손으로 궁녀의 팔을 붙잡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릇 하나 깨지지 않았고.
궁녀도 다치지 않았다.
"...""..."
궁녀는 놀란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다가 연신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 연화는 얼른 손을 떼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연화는 등 뒤의 자신을 향한 다른 시선을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 밤.강녕전 뒤편.
연화는 혼자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괜히 폐만 끼쳤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때였다. "연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강녕전 내관이었다.
"내관나리, 여긴 어쩐 일로..." 내관은 작은 쟁반 하나를 내밀었다.따뜻한 떡 두 점.
그리고 수정과 한 잔.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첩에게 말씀이십니까?"
"받아라."
조심스레 쟁반을 받아든 연화가 물었다. "...어디서 보내신 것이옵니까?" 내관은 잠시 연화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알 것 없다.""..."
"그냥 먹거라."
그 말을 남기고 내관은 그대로 돌아섰다.연화는 떡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싸, 강녕전은 혼나도 떡을 주는 곳인가?' 떡이 뭐라고 금세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연화는 조심스레 떡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시각 강녕전에 있던 왕, 이헌.
헌은 조용히 책을 덮으며 물었다.
"...전했느냐.""예, 전하."
"... 잘 먹더냐?"
"눈에 띄게 낯빛이 밝아졌사옵니다."
그 말에 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보살핌은 왕으로서 백성에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암.'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눈만 감으면 전하가 허공으로 떠오르던 모습이 떠올랐다.'참형이다.''이번에는 정말 참형이다.'연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차라리 어젯밤에 기절하실 것이지."혼잣말을 내뱉고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다, 그건 더 큰일이다."
연화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헌의 손목을 낚아챈 순간.허리가 돌아갔다."...!"술기운에 중심을 잃고 있던 헌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들렸다.연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안 돼!'이미 늦었다.쿵!둔탁한 소리가 강녕전에 울려 퍼졌다.술상이 흔들리며 잔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갔다.맑은 술이 마룻바닥을 적셨다.연화는 얼어붙은 얼굴로 헌을 내려다봤다."...전하.""...""...전하?"헌은 천장을 바라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연화는 눈앞이 캄캄해졌다.'참형이다. 이번엔 진짜 참형이다.'"...소, 소인이.""...""송구하옵니다."헌이 천천히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프군. 흐흐."연화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의관을! 당장 의관을..."몸을 돌리려는 순간 헌이 손목을 붙잡았다."...가지 말거라.""...예?""괜찮다.""괜찮으실 리가...""살아 있다."연화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소인이...""...또.""...""...업었사옵니다."헌은 피식 웃었다."업은 것이 아니라.""...""던졌느니라.""...송구하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연화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이 숙였다."죽을죄를 지었습니다."헌은 그런 연화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고개 들어라."연화는 차마 들지 못했다."명을 거역할 것이냐."그제야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눈가가 붉어져 있었다."눈물을 보일 것이냐.""...아니옵니다.""곧 울 것 같은데.""참고 있사옵니다."헌은 웃음을 삼켰다.정말 신기한 아이였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집어 던져 놓고.이제는 울기 직전이었다.그때였다.철컥.문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전하.""...""큰 소리가 들렸사옵니다."연화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문 쪽으로 가려 했다.헌은 문을 바라봤다."들어오지 말라."내관은 걸음을 멈췄다."...예?""괜찮다.""허나...""괜찮다고
밤의 강녕전은 낮과 달랐다.사람이 오가는 소리도, 마루를 닦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린 창호 사이로 서늘한 바람만 스며들었다.연화는 찻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차를 올리겠사옵니다.”서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헌이 고개를 들었다.낮과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그런데도 연화는 괜히 손에 힘을 주었다.밤은 왠지 어색해서 그런 모양이었다.낮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던 강녕전이 오늘따라 지나치게 조용했다.연화가 찻상을 내려놓고 잔을 채우려 하자 헌이 서책을 덮었다.“차도 좋지만 밤도 깊었고 하니.”연화가 손을 멈췄다.“술상은 어떻겠느냐?”“술상이옵니까?”“그래.”“지금 말씀이십니까?”헌이 눈썹을 살짝 들었다.“밤에 술상을 받는 것이 이상하냐?”“아니옵니다.”연화는 곧장 허리를 숙였다.“곧 준비해 오겠사옵니다.”방을 나선 연화는 찻상을 든 채 걸음을 재촉했다.어쩐지 시작부터 예상과 달랐다.밤차를 맡으라고 하기에 그저 차를 올리고 물러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첫날부터 술상이라니.‘전하께서 원래 밤마다 술을 드셨나?’그렇다면 왜 굳이 자신을 불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연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수라간으로 향했다.술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맑은 술 한 병과 잔 두 개, 가볍게 곁들일 안주가 상 위에 놓였다.연화가 다시 강녕전으로 돌아왔을 때 헌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서책을 펼쳐 놓았지만 읽고 있지는 않았다.“술상을 들였사옵니다.”“이리 놓아라.”연화는 헌 앞에 상을 내려놓았다.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자 맑은 술이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흘러들었다.헌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연화의 눈이 커졌다.‘한 번에?’잔이 내려놓이자 연화는 다시 술을 따랐다.두 번째 잔도 빠르게 비워졌다.세 번째 잔을 채우려던 연화가 결국 입을 열었다.“전하.”“왜 그러느냐.”“너무 빨리 드시는 것 아니옵니까?”헌이 잔을 내려다봤다.“빠르냐?”“예.”“평소에도 이 정도는 마신다.”“그러시옵니
궁으로 돌아온 뒤 며칠.강녕전은 다시 평소의 고요를 되찾았다.연화도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냈다.아침에는 차를 올리고, 낮에는 마루를 닦고, 틈만 나면 수라간을 오가며 심부름을 했다. "연화." 공주가 강녕전으로 들어오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예, 공주마마.""심심하다.""...무얼 해드릴까요?" 공주는 헌을 한번 바라보더니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오라버니는 하루 종일 책만 보잖아, 너라도 놀아줘." 연화는 난감한 얼굴로 빗자루를 내려놓았다. "무슨 놀이를 하시겠습니까?" 공주는 한참 고민하는 척하더니 씩 웃었다. "숨바꼭질.""...강녕전에서 말씀이십니까?""응.""상궁마마께 혼날 듯한데요." 공주는 키득거리며 연화의 등을 툭 밀었다. "그럼 오라버니 뒤에 숨으면 되잖아." 연화는 얼떨결에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헌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책장을 넘기던 헌이 시선을 들었다. "...""..." 연화는 얼른 한 걸음 물러났다. "송구하옵니다." 공주는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그 표정 하나면 됐어." 연화만 영문을 몰랐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아무것도." 공주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음에 또 놀자!""공주마마!" 연화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참 바쁘신 분이십니다." 그 말을 들은 헌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어졌다.연화는 그 미세한 변화를 보지 못한 채 다시 찻상을 정리했다.잠시 뒤.따뜻한 차를 다시 올린 연화가 공손히 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헌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연화는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혹여 입에 맞지 않으시면..." 헌이 잔을 내려놓았다. "맛있다." 짧은 한마디였다.연화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참말이옵니까?""그래.""다행이옵니다."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그럼 다음에는 더 맛있게 우려 보겠습니다." 연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인사했다. "물러가겠사옵니다."문
시장 구경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왔다.남장을 벗고 다시 궁녀 복색으로 갈아입은 연화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게 편하네." 허리띠를 고쳐 매던 연화가 어깨를 돌렸다. "어이구. 사내 노릇도 쉽지 않구나." 옆에서 함께 옷을 정리하던 궁녀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사내 노릇을 했기에 그러세요?" 연화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아. 말하면 안 되지.'"...짐을 좀 들었느니라.""...?""...아니.""...들었습니다." 궁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연화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저녁 수라는 끝났느냐?" --- 강녕전.내관이 차를 올렸다.헌은 서책을 펼쳐 놓고 있었지만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내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무슨 일이냐.""오늘 시장은 어떠셨사옵니까." 잠시 침묵하다 헌은 책을 덮었다. "...시장은 늘 같았다.""그러하옵니까." 그렇게 대답해 놓고도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만 남아 있었다. '형은 좋은 사람이네.' 아이가 연화를 향해 활짝 웃던 얼굴.그리고... '먹을 건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는 거다.' 그 말을 하며 엿을 내밀던 연화.헌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그 모습을 보던 내관은 눈을 크게 떴다. '...웃으셨다.' --- 한편 연화는 강녕전 마루를 닦고 있었다.공주가 뒤에서 슬그머니 다가왔다. "연화.""예, 공주마마.""오늘 재밌었어?" 연화는 활짝 웃었다. "예. 시장이 참 좋았습니다." 공주는 씩 웃었다. "시장은 무슨 소리야? 무튼 그거 말고.""...?""오라버니." 연화는 한참을 생각했다. "...전하도 함께하셨습니다.""..." 공주는 결국 이마를 짚었다. '진짜 모른다.' 그때 멀리서 상궁 하나가 급히 걸어왔다. "공주마마." 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중전마마께서 공주마마를 찾으십니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상궁은 돌아가
# 16화. 아이를 웃게 하는 사람궁 밖으로 나온 지도 어느덧 반나절이 흘렀다.연화는 이제 제법 수행원 차림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처음처럼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무관이 힐끗 연화를 바라보며 웃었다."이제는 사내 같구나."연화가 반색했다."...정말이옵니까?""입만 열지 않으면.""..."연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그것은 칭찬이 아닌 듯하옵니다."무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헌도 말은 없었지만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그때였다."도둑이다!"시장 한복판이 술렁였다.사람들이 좌우로 흩어지고,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정신없이 골목을 뛰어 나왔다.뒤에서는 떡장수가 씩씩거리며 쫓아오고 있었다."잡아라!"무관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아이의 팔을 붙잡자 아이가 발버둥을 쳤다."놔!""싫어!"품에는 따뜻한 떡 하나가 꼭 안겨 있었다.무관이 낮게 말했다."훔쳤으면 벌을 받아야지."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일 뿐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화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배고프냐."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눈물만 뚝뚝 떨어졌다.연화는 한참 아이를 바라보다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조금 전 장터에서 남겨 두었던 산자였다."...먹을래?"무관이 의아한 얼굴로 연화를 바라봤다.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산자와 연화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정말?"연화는 웃으며 산자를 내밀었다."먹고 싶지?"아이는 조금 망설였다.연화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먹으려면.""...""고운 말부터."아이는 훌쩍이며 입술을 달싹였다."...주세요.""착하지."연화가 산자를 건네자 아이는 허겁지겁 한입 베어 물었다.볼이 빵빵해질 만큼 우물우물 먹는 모습에 연화도 따라 웃었다."천천히 먹어.""목 막힌다."아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무관은 어이없는 듯 웃음을 흘렸다."아이를 잘 다루는군."연화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