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녕전의 아침이 다시 밝았다.
"얘, 연화야.""예, 상궁마마."
"이것을 동쪽 행각으로 가져다 두거라."
"예."
연화는 두 손으로 커다란 나무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안에는 찻잔과 다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걸음은 한결같이 가벼웠다.
지나가던 궁녀 하나가 작게 감탄했다.
"저 아이는 저 무거운 걸 혼자 드네.""그러게."
다른 궁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힘 하나는 정말 타고났어." 연화는 그 말을 들은 듯 말 듯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 무겁긴 합니다.""조금?"
궁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조금이면 우린 뭔데." 연화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송구합니다.""사과는 왜 하니."
궁녀들이 다시 웃었다.연화도 따라 작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같은 시각.누각에서는 헌이 아침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전하. 지난달 호조에서 올린 장부는 모두 정리가 끝났사옵니다." 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관의 보고가 이어지는 사이.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두 손 가득 짐을 든 채 마당을 가로지르는 궁녀.
걸음은 가볍고 표정은 태평했다.
"...""전하?"
내관이 조심스레 불렀다.헌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계속하라." 그때. "오라버니!" 밝은 목소리가 누각을 울렸다.공주였다.
"또 보고만 받고 계세요?" 헌은 피식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러는 너는.""놀러 왔지요."
공주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그러다 문득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 궁녀잖아요." 공주는 금세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야!" 연화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공주마마.""이리 와."
연화는 상자를 내려놓고 서둘러 달려왔다. "부르셨사옵니까." 공주는 연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예."
"힘이 세지?"
"...조금."
"조금?"
공주가 키득 웃었다. "그 큰 화분도 혼자 들었잖아." 연화는 괜히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우연히 잘 들렸사옵니다.""나무도 잘 타고."
"...그것도 우연이옵니다."
공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우연이 참 많네." 연화는 민망한 듯 눈만 몇 번 깜빡였다.공주는 문득 연화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같이 가.""...예?"
"활터."
"...활터 말씀이십니까?"
"응."
그러더니 뒤를 돌아 헌을 향해 활짝 웃었다. "오라버니도 같이 가요."헌은 잠시 공주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연화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짐만 옮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웬 활이냐...'공주는 그런 연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헌과 나란히 앞서 걸었다.
연화는 작게 한숨을 삼킨 뒤 뒤를 따랐다.
--- 활터에는 이미 내금위 군관들이 과녁을 세우고 있었다.공주가 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이걸로 놀아야지." 군관 하나가 허리를 숙였다. "공주마마.""준비가 끝났습니다."
공주는 활시위를 당겼다.퉁.
화살은 과녁 가장자리를 스치며 꽂혔다.
공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상하네." 헌은 옆에 놓인 활 하나를 집어 들었다."이 솜씨를 보자고 정사에 바쁜 나를 부른 것이냐."
공주는 볼을 부풀렸다.
"오라버니이~.""좀 더 친절하게 가르쳐주시와요."
헌은 말없이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탕.
화살은 흔들림 없이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공주는 익숙하다는 듯 작게 혀를 내둘렀다.
"재미없어." 연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헌이 공주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려는 순간.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손목에 힘이 조금 들어가셨사옵니다."순간.
활터가 조용해졌다.
헌의 손이 멈췄다.
천천히 연화를 돌아보았다.
그 한마디는,
활을 잡아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연화도 그제야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이놈의 입방정―''내 팔자를 내가 꼬는구나.'
공주도 그제야 연화를 바라봤다. "...뭐?" 연화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활을 다룰 줄 아는 거야?"
"...아니옵니다."
"정말?"
"...예."
공주는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흠." 잠시 연화를 빤히 바라보던 공주가 짐짓 근엄한 얼굴을 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공주에게 거짓을 고하느냐."
연화의 어깨가 움찔했다. "...거짓은 아니옵니다.""그럼."
"정말 처음이야?"
"..."
연화는 한참을 망설였다.거짓말을 하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공주를 앞에 두고는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조금 쏴본 적은 있사옵니다."
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활 하나를 연화에게 내밀었다. "역시.""그럼 한 번만 쏴 봐."
내금위장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공주마마.""어찌 천한 궁녀에게 활을...."
"내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턱을 번쩍 치켜세웠다. "지금.""공주의 말에 토를 다는 건가?"
내금위장은 난처한 얼굴로 헌을 바라봤다.잠시 침묵이 흘렀다.
헌은 말없이 연화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활을 바라보는 연화의 눈을.
. . . 잠시 후.헌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 원하신다.""그대로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연화는 조심스레 활을 받아 들었다.익숙한 무게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냥 끝까지 모른다고 할 걸....' 활을 내려다보는 연화의 얼굴에는.조금 전까지의 태평한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공주가 궁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연화는 다과 접시를 두 번 세었다.아침에는 네 개였다.중궁전에 다녀온 뒤에는 두 개였다.이것까지는 기억이 났다.정 소원에게 하나를 주고, 자신도 하나를 먹었다.그런데 저녁에 보니 접시가 비어 있었다.연화가 상궁을 불렀다.“남은 두 개는 어디 갔느냐?”상궁은 잠깐 말을 고르았다.“마마께서 낮잠에서 깨신 뒤 드셨습니다.”“두 개를 다?”“예.”연화는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상궁이 덧붙였다.“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접시를 바꾸라 하신 말씀도 있었습니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그 말까지 했던가.공주가 없으니 누가 먹었는지 궁금해할 일도 줄었는데, 정작 제 손을 기억하지 못했다.연화는 접시를 상궁에게 건넸다.“그럼 씻어 다오.”“새로 내올까요?”연화가 잠깐 고민했다.“전하 것도 필요하다.”상궁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급히 덧붙였다.“이번에는 신첩이 먼저 먹지 않겠다.”이헌은 저녁 보고를 마친 뒤 연화의 처소로 왔다.탁자에는 다과가 두 개 놓여 있었다.연화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두고 있었다.그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접시를 밀었다.“전하께 드릴 것입니다.”이헌은 접시보다 연화의 손을 먼저 보았다.“왜 그렇게 앉아 있느냐?”
혼례 날 아침, 연화는 공주의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다과상부터 살폈다.접시는 있었지만 음식이 거의 줄지 않았다.공주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고, 상궁들은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느라 바빴다.연화가 물었다.“마마, 아침은 드셨습니까?”“조금.”상궁이 연화를 보았다.그 눈길만으로도 얼마나 조금인지 알 수 있었다.연화는 접시에서 떡 하나를 집었다.공주가 거울 속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오늘도 네가 먼저 먹느냐?”“마마께 드리려고 집었습니다.”연화가 떡을 작은 크기로 나누었다.공주는 그것을 보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지금은 먹고 싶지 않구나.”“그럼 한 입만 드십시오.”“옷에 묻으면 곤란하다.”연화가 공주의 무릎 위에 깨끗한 천을 펼쳤다.“이제 괜찮습니다.”공주는 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작은 떡 조각을 받아 먹었다.연화가 그제야 남은 것을 제 입에 넣었다.공주가 그녀를 보았다.“네가 먹으려고 한 입만 준 것은 아니겠지?”“마마께서 더 드시면 신첩은 다른 것을 먹겠습니다.”곁에 있던 상궁이 웃음을 숨겼다.공주도 조금 웃었다.아침부터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머리 장식이 하나씩 올라갔다.옷매무새를 고치는 손도 점점 조심스러워졌다.연화는 공주의 곁에 앉아 소매 끝이 접히지 않게 받쳐 주었다.
혼례를 사흘 앞두고, 공주는 머리 장식 앞에서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이것을 다 얹어야 하느냐?”상궁은 거울 속 공주를 보았다.“아직 전부 올린 것은 아니옵니다.”공주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상궁 둘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마마, 잠시만 그대로 계시옵소서.”공주는 다시 앞을 보았다.옆에 앉아 있던 연화가 입술을 눌렀다.공주는 거울로 그것을 발견했다.“웃지 마라.”“아직 웃지 않았습니다.”“네 얼굴이 웃고 있다.”연화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혼례를 준비하기 시작한 지 스무 날이 훌쩍 지났다.그사이 책은 상자에 들어갔고, 서진우의 집에는 새 책장이 놓였다. 집안 어른들께 전한 답에도 더는 다른 청이 따라붙지 않았다.그런데 막상 가장 곤란한 것은 머리 위에 있었다.공주가 상궁에게 물었다.“얼마나 더 걸리느냐?”“높이를 조금만 고치면 되옵니다.”“낮추는 쪽이면 좋겠구나.”연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께서는 높은 것도 잘 어울리십니다.”“네가 대신 얹고 말하거라.”“신첩은 아이 때문에 오래 앉아 있기도 어렵습니다.”공주가 거울 속 연화를 보았다.편한 의자에 기대 앉아, 발밑에 낮은 받침까지 둔 사람이었다.“너는 준비를 잘했구나.”“마마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공주의 혼례 준비가 시작된 뒤, 궁에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이것도 가져가셔야 합니다”였다.옷도 가져가야 했다.그릇도 가져가야 했다.이불과 병풍, 장롱과 책장도 가져가야 했다.연화가 공주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큰 상자 여섯 개가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공주는 그 앞에서 물품 목록을 들고 서 있었다.“나는 아직 궁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 물건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연화는 상자에 붙은 종이를 읽었다.하나는 책.하나는 겨울옷.다른 하나는 장신구였다.“마마, 평소에 쓰시는 것은 따로 두셔야겠습니다.”“그렇게 말했는데도 이 모양이다.”공주가 상궁을 보았다.상궁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빠지는 것이 있을까 염려되어 미리 챙겼사옵니다.”연화는 장신구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비녀가 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자주 쓰던 꽃 장식도 보였다.그녀가 그것부터 꺼냈다.“이것은 오늘 쓰십시오.”공주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연화는 곁에 선 궁녀를 불렀다.“상자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더 만들어 다오. 가져갈 것과 지금 쓸 것도 나누고.”“예, 마마.”“혼례 전날까지 여섯 상자를 뒤집을 수는 없지 않으냐.”공주는 연화에게 꽃 장식을 받아 들었다.“너는 먹을 것 말고도 잘 찾는구나.”“약과를 숨긴 상자를 찾으려면 글부터 읽어야 합니다.”공주는 결국 웃었다.오후에는 서진우가 찾아왔다.공주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문 쪽을 보았다.그가 들어오자 바로 물었다.“집은 어떠하냐
연화는 허리끈을 다시 묶었다.한 번.두 번.세 번째에는 매듭을 풀고 상궁을 보았다.“이 끈이 짧아졌느냐?”상궁은 잠깐 침묵했다.연화도 대답을 알았다.끈은 그대로였다.배가 더 나왔다.상궁이 다른 치마를 펼쳤다.“새로 지은 것이옵니다. 이쪽을 입으시면 편하실 것입니다.”연화는 치마를 받아 들었다.빛깔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어제까지 잘 맞던 옷을 접어 놓으니 괜히 아쉬웠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마마,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불편하지는 않다.”연화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기뻐해야 하는 일인데, 거울 앞에서는 마음이 꼭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다.치마를 갈아입고도 한참 거울을 보았다.그때 이헌이 들어왔다.연화는 돌아서면서 먼저 말했다.“전하, 끈이 짧아진 것이 아닙니다.”이헌이 문 앞에서 멈췄다.“무슨 끈?”상궁은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조금 민망해졌다.“아무것도 아닙니다.”이헌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새 치마 위로 배가 둥글게 드러나 있었다.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연화가 손목을 잡았다.“전하.”“응?”“오늘은 배보다 신첩 얼굴부터 보십시오.”그가 손을 멈췄다.이어서 연화의
서진우가 강녕전에 들어섰을 때, 탁자 위에는 칼도 서찰도 없었다.대신 작은 천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그는 예를 갖춘 뒤 그것을 보았다.천 사이로 둥근 머리 하나가 나와 있었다.서진우의 어깨가 굳었다.“전하, 그것은…….”“인형이다.”그제야 숨이 조금 풀렸다.이헌은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탁자에 내려놓았다.아이를 돌볼 궁인이 연화에게 아기를 안는 법을 설명하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천 안쪽에 솜을 넣어 제법 묵직하게 만들었다.서진우가 맞은편의 연화를 보았다.연화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전하께서 서 대인도 해 보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무엇을 말씀이옵니까?”이헌이 인형을 그쪽으로 밀었다.“안아 보아라.”서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칼을 쥔 사내를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명처럼 들렸다.“소신이 아기를 안아 본 적이 없어…….”“나도 없었다.”그 말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서진우가 두 손을 내밀었다.인형을 받는 순간 손바닥 하나가 머리 뒤로 갔다.곁에 있던 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목을 받쳐 주시면 되옵니다.”서진우의 자세가 조금 안정되었다.연화가 반갑게 말했다.“잘하십니다.”이헌은 서진우의 팔을 보았다.“배운 적이 없다더니.”“아이를 떨어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