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활터에는 잠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은 화살이 아직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와." 공주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금세 활짝 웃은 공주가 연화를 향해 손뼉을 쳤다.
"맞혔다!""정말 맞혔어!"
연화는 괜히 민망해져 활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운이 좋았사옵니다.""또 그런다."
공주가 피식 웃었다. "잘하고도 꼭 운이라고 하더라." 연화는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넘어가겠지.'하지만 내금위 군관들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헌에게 다가갔다.
"전하." 헌은 과녁을 바라본 채 짧게 물었다. "어떠한가.""활을 처음 잡은 솜씨가 아니옵니다."
"..."
"몸의 중심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시위를 당기는 법도 익숙하였습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사옵니다."
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연화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과녁을 바라보던 눈빛과,
이제는 머쓱한 얼굴로 공주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도무지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헌이 몸을 돌렸다.
"오늘은 이만 들자." 공주는 금세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벌써요?""정사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흥."
공주는 아쉬운 얼굴로 활을 내려놓았다.연화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 저녁 무렵.수라간은 내일 새벽 올릴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연화도 상을 나르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급히 몸을 돌던 순간이었다.
툭.
옷고름이 문고리에 걸리며 풀어지고 말았다.
"연화라고 했지." 상궁의 목소리에 연화가 얼른 멈춰 섰다. "...예.""강녕전 궁녀가 복색을 그리 흐트러뜨리고 다녀서야 되겠느냐."
연화는 얼른 옷고름을 여몄다. "...송구하옵니다."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상궁은 그런 연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와 보거라." 연화가 머뭇거리며 다가가자 상궁이 약과 하나를 내밀었다.가장자리가 조금 깨진 약과였다.
"모양을 망쳐 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먹어라."
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첩이 먹어도 되는 것이옵니까?""버릴 바엔 네 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지. 비밀로 하거라."
그 말에 연화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감사하옵니다." 한입 베어 문 연화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멀찍이서 그 모습을 본 다른 궁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 아이는 먹을 것 하나면 금세 풀린다니까." 상궁도 피식 웃고 말았다. --- "너." 익숙하지 않은 사내의 목소리에 연화가 뒤를 돌아보았다.내금위장이었다.
"전하께서 찾으신다."연화는 약과를 황급히 삼켰다.
'...아직 안 끝났나? 날 왜 자꾸 찾는 거야.' --- 강녕전.연화는 조심스레 예를 올렸다.
"소첩 연화, 전하를 뵈옵니다." 헌은 한동안 말없이 연화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활은 누구에게 배웠느냐.""...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니다 보니, 어깨너머로 익히게 되었사옵니다."
"아버지는 사냥꾼이셨느냐."
"예."
"짐승을 잡으러 다니실 때 가끔 활을 쥐어 주셨사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헌은 더 묻지 않았다.
"내일은 사내의 차림을 하고 나와 함께 궁 밖으로 나설 것이다."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소첩이 말씀이옵니까?""궁 밖에서는 궁녀가 아닌, 수행원 하나로 따른다."
연화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첩이 함께해야 하는 까닭을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헌은 담담히 답했다. "네 활솜씨를 보았기 때문이다.""혹여 모를 일을 대비하려는 것이다."
어명 앞에 연화는 그저 머리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잠시 뒤 연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궁 밖에서는 전하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옵니까." 헌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밖에서는 전하가 아니다.""나리라 부르면 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 다음 날.연화는 처음으로 사내의 옷을 입었다.
긴 머리를 단단히 올려 묶고 갓을 눌러쓰자,
거울 속에는 낯선 젊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영 어색하옵니다.""내가 보기엔 퍽 사내 같다. 키가 커서 더 그렇다."
연화는 괜히 귀가 붉어졌다. '칭찬이야 욕이야...'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공주였다.
공주는 연화를 보자마자 두 눈을 반짝였다.
"우와!"성큼 다가온 공주가 연화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너, 생각보다 잘생겼다!"
"...예?"
"내가 궁 밖에서 봤으면 속았겠다."
연화는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잘생겼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와중에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걸음을 멈춘 채 남장을 한 연화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연화는 괜히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게 되었다.
헌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서두르자." 궁문이 천천히 열렸다.높은 담장 너머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궁문이 열렸다.
공주가 궁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연화는 다과 접시를 두 번 세었다.아침에는 네 개였다.중궁전에 다녀온 뒤에는 두 개였다.이것까지는 기억이 났다.정 소원에게 하나를 주고, 자신도 하나를 먹었다.그런데 저녁에 보니 접시가 비어 있었다.연화가 상궁을 불렀다.“남은 두 개는 어디 갔느냐?”상궁은 잠깐 말을 고르았다.“마마께서 낮잠에서 깨신 뒤 드셨습니다.”“두 개를 다?”“예.”연화는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상궁이 덧붙였다.“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접시를 바꾸라 하신 말씀도 있었습니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그 말까지 했던가.공주가 없으니 누가 먹었는지 궁금해할 일도 줄었는데, 정작 제 손을 기억하지 못했다.연화는 접시를 상궁에게 건넸다.“그럼 씻어 다오.”“새로 내올까요?”연화가 잠깐 고민했다.“전하 것도 필요하다.”상궁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급히 덧붙였다.“이번에는 신첩이 먼저 먹지 않겠다.”이헌은 저녁 보고를 마친 뒤 연화의 처소로 왔다.탁자에는 다과가 두 개 놓여 있었다.연화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두고 있었다.그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접시를 밀었다.“전하께 드릴 것입니다.”이헌은 접시보다 연화의 손을 먼저 보았다.“왜 그렇게 앉아 있느냐?”
혼례 날 아침, 연화는 공주의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다과상부터 살폈다.접시는 있었지만 음식이 거의 줄지 않았다.공주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고, 상궁들은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느라 바빴다.연화가 물었다.“마마, 아침은 드셨습니까?”“조금.”상궁이 연화를 보았다.그 눈길만으로도 얼마나 조금인지 알 수 있었다.연화는 접시에서 떡 하나를 집었다.공주가 거울 속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오늘도 네가 먼저 먹느냐?”“마마께 드리려고 집었습니다.”연화가 떡을 작은 크기로 나누었다.공주는 그것을 보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지금은 먹고 싶지 않구나.”“그럼 한 입만 드십시오.”“옷에 묻으면 곤란하다.”연화가 공주의 무릎 위에 깨끗한 천을 펼쳤다.“이제 괜찮습니다.”공주는 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작은 떡 조각을 받아 먹었다.연화가 그제야 남은 것을 제 입에 넣었다.공주가 그녀를 보았다.“네가 먹으려고 한 입만 준 것은 아니겠지?”“마마께서 더 드시면 신첩은 다른 것을 먹겠습니다.”곁에 있던 상궁이 웃음을 숨겼다.공주도 조금 웃었다.아침부터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머리 장식이 하나씩 올라갔다.옷매무새를 고치는 손도 점점 조심스러워졌다.연화는 공주의 곁에 앉아 소매 끝이 접히지 않게 받쳐 주었다.
혼례를 사흘 앞두고, 공주는 머리 장식 앞에서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이것을 다 얹어야 하느냐?”상궁은 거울 속 공주를 보았다.“아직 전부 올린 것은 아니옵니다.”공주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상궁 둘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마마, 잠시만 그대로 계시옵소서.”공주는 다시 앞을 보았다.옆에 앉아 있던 연화가 입술을 눌렀다.공주는 거울로 그것을 발견했다.“웃지 마라.”“아직 웃지 않았습니다.”“네 얼굴이 웃고 있다.”연화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혼례를 준비하기 시작한 지 스무 날이 훌쩍 지났다.그사이 책은 상자에 들어갔고, 서진우의 집에는 새 책장이 놓였다. 집안 어른들께 전한 답에도 더는 다른 청이 따라붙지 않았다.그런데 막상 가장 곤란한 것은 머리 위에 있었다.공주가 상궁에게 물었다.“얼마나 더 걸리느냐?”“높이를 조금만 고치면 되옵니다.”“낮추는 쪽이면 좋겠구나.”연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께서는 높은 것도 잘 어울리십니다.”“네가 대신 얹고 말하거라.”“신첩은 아이 때문에 오래 앉아 있기도 어렵습니다.”공주가 거울 속 연화를 보았다.편한 의자에 기대 앉아, 발밑에 낮은 받침까지 둔 사람이었다.“너는 준비를 잘했구나.”“마마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공주의 혼례 준비가 시작된 뒤, 궁에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이것도 가져가셔야 합니다”였다.옷도 가져가야 했다.그릇도 가져가야 했다.이불과 병풍, 장롱과 책장도 가져가야 했다.연화가 공주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큰 상자 여섯 개가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공주는 그 앞에서 물품 목록을 들고 서 있었다.“나는 아직 궁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 물건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연화는 상자에 붙은 종이를 읽었다.하나는 책.하나는 겨울옷.다른 하나는 장신구였다.“마마, 평소에 쓰시는 것은 따로 두셔야겠습니다.”“그렇게 말했는데도 이 모양이다.”공주가 상궁을 보았다.상궁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빠지는 것이 있을까 염려되어 미리 챙겼사옵니다.”연화는 장신구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비녀가 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자주 쓰던 꽃 장식도 보였다.그녀가 그것부터 꺼냈다.“이것은 오늘 쓰십시오.”공주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연화는 곁에 선 궁녀를 불렀다.“상자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더 만들어 다오. 가져갈 것과 지금 쓸 것도 나누고.”“예, 마마.”“혼례 전날까지 여섯 상자를 뒤집을 수는 없지 않으냐.”공주는 연화에게 꽃 장식을 받아 들었다.“너는 먹을 것 말고도 잘 찾는구나.”“약과를 숨긴 상자를 찾으려면 글부터 읽어야 합니다.”공주는 결국 웃었다.오후에는 서진우가 찾아왔다.공주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문 쪽을 보았다.그가 들어오자 바로 물었다.“집은 어떠하냐
연화는 허리끈을 다시 묶었다.한 번.두 번.세 번째에는 매듭을 풀고 상궁을 보았다.“이 끈이 짧아졌느냐?”상궁은 잠깐 침묵했다.연화도 대답을 알았다.끈은 그대로였다.배가 더 나왔다.상궁이 다른 치마를 펼쳤다.“새로 지은 것이옵니다. 이쪽을 입으시면 편하실 것입니다.”연화는 치마를 받아 들었다.빛깔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어제까지 잘 맞던 옷을 접어 놓으니 괜히 아쉬웠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마마,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불편하지는 않다.”연화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기뻐해야 하는 일인데, 거울 앞에서는 마음이 꼭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다.치마를 갈아입고도 한참 거울을 보았다.그때 이헌이 들어왔다.연화는 돌아서면서 먼저 말했다.“전하, 끈이 짧아진 것이 아닙니다.”이헌이 문 앞에서 멈췄다.“무슨 끈?”상궁은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조금 민망해졌다.“아무것도 아닙니다.”이헌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새 치마 위로 배가 둥글게 드러나 있었다.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연화가 손목을 잡았다.“전하.”“응?”“오늘은 배보다 신첩 얼굴부터 보십시오.”그가 손을 멈췄다.이어서 연화의
서진우가 강녕전에 들어섰을 때, 탁자 위에는 칼도 서찰도 없었다.대신 작은 천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그는 예를 갖춘 뒤 그것을 보았다.천 사이로 둥근 머리 하나가 나와 있었다.서진우의 어깨가 굳었다.“전하, 그것은…….”“인형이다.”그제야 숨이 조금 풀렸다.이헌은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탁자에 내려놓았다.아이를 돌볼 궁인이 연화에게 아기를 안는 법을 설명하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천 안쪽에 솜을 넣어 제법 묵직하게 만들었다.서진우가 맞은편의 연화를 보았다.연화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전하께서 서 대인도 해 보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무엇을 말씀이옵니까?”이헌이 인형을 그쪽으로 밀었다.“안아 보아라.”서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칼을 쥔 사내를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명처럼 들렸다.“소신이 아기를 안아 본 적이 없어…….”“나도 없었다.”그 말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서진우가 두 손을 내밀었다.인형을 받는 순간 손바닥 하나가 머리 뒤로 갔다.곁에 있던 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목을 받쳐 주시면 되옵니다.”서진우의 자세가 조금 안정되었다.연화가 반갑게 말했다.“잘하십니다.”이헌은 서진우의 팔을 보았다.“배운 적이 없다더니.”“아이를 떨어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