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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2화

Author: 코코넛 서고
연기준은 서인경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잔소리를 쏟아내는 모습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꾸지람조차 듣기 좋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인경은 천천히 붕대를 풀어내며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길지는 않았지만 베인 자국은 깊었다. 전장에서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듯, 벌어진 상처 틈새로 붉은 살점이 드러나 있었다. 선혈이 굳어 붙은 자리가 처참할 만큼 생생했다.

하지만 서인경은 전생부터 이런 광경을 수없이 보아왔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은 능숙했고 표정은 침착했다. 늘 그렇듯, 말을 듣지 않는 환자를 다루는 의사처럼.

연기준이 대꾸하지 않자 그 순간 그녀의 직업병이 도졌다.

서인경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잔소리를 이어갔다.

“이런 걸 가벼운 상처라고 무시하다간 큰일 납니다.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염증이 번지고 상처가 썩으며 열이 나다가 의식이 흐려지지요. 심각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연기준은 그녀의 과장된 말투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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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1229화

    서인경은 좌장군이라 불린 그 사내를 찬찬히 살폈다. 얼굴은 놀라울 만큼 젊었다.흰 옷에 검은 머리,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듯 단정했다. 피부는 희고 부드러워, 손만 대도 물기가 맺힐 듯했다.그는 손에 접부채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마치 그림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풍류 있는 공자 같았다.다른 이들처럼 햇볕에 그을린 흔적은 전혀 없었다.이토록 곱게 자란 귀공자 같은 사내가 겉으로는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운데도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복종시키고 있었다.이런 유형은 둘 중 하나다.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거나 아니면 쉽게 드러내지 않는 진짜 실력을 쥐고 있거나.서인경의 눈빛에 경계가 스며들었다.좌장군은 두 사람을 노려보며 눈에서 불이 튀는 듯했다.“서인경, 설산에 가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군.”서인경이 미간을 찌푸렸다.“난 널 모른다. 이름부터 밝히거라.”좌장군은 느긋하게 부채질을 했다.그러자 서인경의 시선도 자연스레 부채 위로 향하게 되었다. 그 위에 먹으로 또박또박 적힌 글자 하나. 남궁.그녀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지하흑시 남성 성주, 남궁오와 무슨 관계인 것이냐?”좌장군이 냉소를 흘렸다.“남궁오는 내 친부다. 남궁열은 이복형님이지. 네가 내 형님을 다치게 했으니… 그 빚을 어떻게 갚을 생각이냐?”서인경과 연기준은 짧게 눈을 마주쳤다.남궁 가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심지어 막수한조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인물의 존재는 막수한조차 몰랐다는 것을.그렇지 않았다면, 단 한마디라도 귀띔했을 터였다.좌장군은 두 사람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세상 사람들은 말하지. 어족은 일불락 수장 가문에 가장 충성스러운 노예라고. 헌데 나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남궁 가의 실력은 봉 가에 뒤지지 않으니 어족을 이끌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헌데 왜 남의 숨결에 기대 살아야 하지?”서인경은

  • 시간을 거슬러   제1228화

    아직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은 계절이라 가지마다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그 덕분에 두 사람의 모습은 완전히 가려졌다.암위들 역시 재빨리 각자의 은신처를 찾아 몸을 숨겼다.연풍은 서인경과 연기준이 있는 나무 옆 가지 위에 자리 잡았다.조금 늦게 올라온 그는, 여자의 신발 한 켤레를 연기준에게 건넸다.“방금 안에서 평이 짐을 찾았습니다. 새로 사서 아직 신지 않은 신발입니다. 마마께서 잠시라도 신으십시오.”연기준은 그것을 받아들고 서인경에게 나무를 단단히 붙잡으라 했다. 그러고는 몸을 낮춰 한 단계 아래 가지로 내려섰다.마침 그의 손이 닿는 높이에 서인경의 발이 있었다.서인경과 평이는 발 크기가 비슷해 신발은 꼭 맞았다.연기준이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겨주는 모습을 보며 서인경은 문득 말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손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데 쓰이는 건데, 여인 신발 신겨주는 일까지 이렇게 능숙하네요. 참으로 본받을 만한 남자입니다.”연기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알아듣게 말하거라.”서인경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앞으로는 매일 저한테 신겨줬으면 해서요. 물론, 저도 당신한테 신겨줄게요.”예상치 못한 고백이었다. 달콤한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말은 조용히 연기준의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뿌리를 내렸다. 겨울날 햇살처럼 따뜻하게 그를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말이었다.훗날, 수없이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는 순간마다 그는 이 한마디를 떠올리며 끝까지 버텨냈다.산속에서 내려온 자들은 곧 마을로 들이닥쳤다. 서인경과 연기준은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아래에서 사람들이 집집마다 무너진 잔해를 뒤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결과는 하나같이 같았다.모두 허탕이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 이냐?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어제 낮에만 해도, 촌장 그 늙은이가 마을 입구에서 돌아다니는 걸 봤고, 낯선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는 것도 봤습니다. 헌데 하

  • 시간을 거슬러   제1227화

    꼬막이는 진국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단 하나뿐인 황자였다. 동시에 지금의 일불락 수장 가문에 남은 유일한 혈맥이기도 했다.그를 죽인다는 것은 곧 연기준과 서인경의 심리적 버팀목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없었다.봉한설은 가장 먼저 범인을 떠올렸다.“연강호입니다.”그는 두 번이나 서인경을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꼬막이가 죽고 서인경이 슬픔에 무너진다면 그제야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그러나 촌장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잊지 말거라. 연강호의 목숨은 일불락 수장 가문의 후손과 이어져 있다. 주인님이 죽으면, 황후는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기만 해도 연강호 역시 끝이다. 오히려 주인님이 살아 있기를 가장 바라는 쪽이 연강호일 것이다.”봉한설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연강호 말고도 서인경과 연기준을 노리는 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옛 원한을 지닌 자가 아니더라도 꼬막이를 납치해 서인경을 협박하고 설산으로 끌어들이려는 자들은 천하에 널려 있었다.봉한설은 도무지 누가 배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그녀는 꼬막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뒤늦게 몰려오는 공포에 손끝이 서늘해졌다.다행히도 꼬막이가 미리 알아차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 그들은 틀림없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앞으로는 결코 꼬막이의 말을 어린아이의 허튼소리로 치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노무림 산기슭.하늘은 아직 칠흑처럼 어두웠고 창밖에는 빛 한 점 없었다.깊이 잠들어 있던 서인경은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에 눈을 떴다.곧이어 땅이 심하게 흔들렸고 집까지 함께 요동쳤다.지붕 위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자 서인경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지진이에요.”어둠 속에서 한 손이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는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연기준은 발끝에 경공을 실어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갔다.두 사람이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십여 명의 암위가 순식간에 둘러섰다.연풍이 앞에 나서 두 사람이 다

  • 시간을 거슬러   제1226화

    다만 그날 밤은 달랐다.막 눈을 붙이려던 순간, 옆에서 자고 있던 꼬막이가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부모를 찾겠다고 했다.“우리 아버지랑 어머니가 위험합니다. 제가 가서 구해야 해요.”봉한설은 벌떡 깨어났다.그녀는 꼬막이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다.꼬막이의 능력이라면, 그가 꾼 꿈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무슨 꿈 꿨습니까?”꼬막이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아버지랑 어머니는 안 나왔습니다. 대신 닭다리가 나왔어요. 엄청 큰 닭다리요!”봉한설은 할 말을 잃었다.그대로 몸을 다시 침상에 내던졌다.“헛소리 하지 마세요. 대황자의 부모님은 멀쩡합니다.”“아닙니다. 안 멀쩡해요! 저 지금 당장 가야 합니다. 지금, 바로요!”봉한설은 꼬막이에게는 한없이 약했다.아무리 떼를 쓰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무조건 받아주고 말았다.결국 그를 안고 밖으로 나섰다.어린 주인이 움직이자 네 마리 악어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소란이 커지자 촌장 일가도 겉옷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주인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꼬막이는 봉한설의 품에 안긴 채, 겉에는 이불까지 둘러 밤바람을 막고 있었다.촌장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꼬막이는 이불을 살짝 젖히고 얼굴을 내밀었다.“할머니,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가 위험한 것 같아요. 제가 가서 지켜줘야 합니다.”어린 목소리가 밤공기 속에서 유난히 가늘게 울렸다.듣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소리였다.촌장 부인은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아들을 재촉했다.“가서 마차를 준비하거라. 지금 당장 황후 마마를 찾으러 가야 한다.”그러자 꼬막이가 다시 말했다.“다 같이 가야 합니다. 암위 아저씨들도, 한 명도 빠지면 안 돼요!”그 말에 촌장 부인은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들었지? 모두 주인님 말대로 하거라.”봉한설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아이가 한 말인데 그렇게까지 믿어요?”촌장 부인의 눈이

  • 시간을 거슬러   제1225화

    잠자리에 들기 전, 암위가 봉한설의 서신을 전해 왔다.편지에는 이미 임선우를 만났고 그와 부생을 대면하게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다만 그 사이에 작은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봉한설은 부생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 어떤 남자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부생은 임선우가 이미 화족의 다른 여인과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몰랐다.오랜만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자 곧바로 미혹술을 펼쳐 임선우를 유혹해 데리고 나가려 했다.하지만 화족의 미혹술은 주인을 가리는 법.이미 다른 여인과 계약을 맺은 임선우는 다른 여인의 미혹술에 자연히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다.결과는 뻔했다. 부생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봉한설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심지어 임선우가 따로 묻지 않아도 그는 부생이 눈을 흘기며 유혹하는 순간, 서인경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확신했다.닮아도 너무 닮은 자태와 춤사위. 심지어 옷을 벗는 동작마저도 그녀와 일치했다.그 모든 것이 임선우를 질식할 듯한 충격에 빠뜨렸다.봉한설이 제때 들어가지 않았다면 임선우는 이미 부생의 목을 졸라 죽였을지도 몰랐다.편지의 마지막에 봉한설은 덧붙였다.임선우는 진실을 알게 된 직후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아마 서인경이 있는 곳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경고도 남겼다.아무리 과거의 인연이 음모로 얽혀 있었다 해도 임충서는 어디까지나 그의 친아들이었으니까.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도 있는 일이었다.서인경은 편지를 접었다. 임선우의 처지에 약간의 연민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부생은 과거, 연기준에게도 미혹술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연기준은 그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기에 그녀의 유혹은 애초에 닿지도 못했다.부생에게 있어 연기준은 마치 여인보다 더 다루기 힘든 존재였다.만약 임선우가 자신의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준 적이

  • 시간을 거슬러   제1224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촌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연기준이 거울 뒷면의 ‘금’ 자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이틀쯤 지나자, 그 괴로운 울음소리도 마침내 잦아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기 시작했지요. 난세라 그런지, 산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히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헌데 어느 날, 제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중상을 입은 노인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 노인은 자신이 쫓기고 있다며, 이 비단 상자를 제게 맡겼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숨겨 두라고, 절대 외부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또 말하길, 하늘이 아직 그를 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가문이 다시 일어설 날이 올 것이고, 그때 반드시 누군가 이곳으로 찾아올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떠나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바로 이 상자의 주인이라고요.”촌장의 말을 듣는 동안, 연기준의 눈빛은 점점 깊어졌다.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 피투성이 노인의 정체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연기준의 외조부는 금족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모친, 희태비에게 넘기려 했다. 그 일로 덕비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독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어릴 적에 덕비는 제 친자매를 산속에 버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가장 마음에 들던 후계자를 잃고도, 외조부는 끝내 남아 있던 덕비에게 금족을 맡기지 않았다.이 모든 일이 덕비의 증오를 더욱 깊게 만들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해 금족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 자는… 덕비였을 가능성이 컸다.연기준은 이전부터 한 가지를 의아하게 여겨 왔다.덕비가 지금 금족의 실권자라면, 왜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서인경이 없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덕비가 금족을 이끌고 설산으로 돌아가 세력을 장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다른 부족들은 흩어져 있었고 지금의 금족처럼 결속된 힘을 가진 곳은 없었으니까.그렇게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어째

  • 시간을 거슬러   제232화

    바로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눈에 관리인 티가 나는 인물이 다가왔다.“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것이냐? 어서 내려가거라. 여기를 자기네 뒷마당으로 아는 게냐… 어이쿠, 막 아가씨? 어쩌다 여기 계신 겁니까?”이 목소리…서인경은 곧장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눈앞에 드러난 건 주름이 가득한 쉰이 넘은 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방금까지는 그녀를 향해 쏟아내듯 호통치던 관리인의 목소리가 막효연을 보는 순간 곧장 바뀌었다.막효연은 서인경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최 관사, 잘 지냈습니까? 제가 까미를 데리고 나왔다가 이 녀석이 갑

  • 시간을 거슬러   제257화

    서인경이 연기준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연기준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고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어젯밤 남산에 간 이는 연기준과 육승, 그리고 진묵염이었다. 지금 세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나 누구의 피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몰골만으로도 전날 밤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육승은 서인경을 보는 순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제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왕야께서는 저를 지키시려다가…”“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어서 물러가거라.”서인경이 날카롭게 그

  • 시간을 거슬러   제218화

    서인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두 눈이 점점 커졌다.수운권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슬그머니 몸을 옮겨 라은정 곁에 붙어 앉았다.마치 세상 온갖 소문을 캐내려는 듯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수운권이라니요? 그건 겨우 배 좀 띄워 성 안의 물건을 내다 파는 게 아닌가요? 그게 얼마나 돈이 된다고?”라은정은 당장이라도 그녀가 촌에서 올라왔다며 조롱할 기세로 코웃음을 쳤다.“시골뜨기,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서인경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 저는 촌구석 출신이라 큰 장사에는 문외한이죠. 다만 좀

  • 시간을 거슬러   제237화

    최 관사가 막 자리를 뜨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또 다른 그림자 역시 소리 없이 스르륵 사라졌다. 라채월은 홀로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수년간, 그녀는 종종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둔 채 자신이 처음 라 가로 시집왔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되새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의 구석에 잠들어 있던 증오가 조금씩 자라나 더 깊고 날카롭게 뿌리를 내렸다.막수한의 첫날밤.지하흑시의 대장로가 딸을 시집보내고 새 며느리를 맞이했던, 그야말로 경사스러운 밤이었다. 그날은 흑시 전체가 떠들썩하게 들떠 축배를 올렸던 날이기도 했다.그 소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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