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노장은 말문이 막혔다. 평생 전장에서 칼을 휘둘러 온 사람이지 말로 싸우는 데 익숙한 이는 아니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얼굴만 시커멓게 달아올랐다.태황태후조차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딸이 이렇게 판을 뒤흔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금수야, 이 강산은 네 부황이 두 손으로 일군 것이다. 열다섯 개 성을 어찌 네 말 한마디로 요동에 넘긴단 말이냐?”금수 대장공주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전 부황의 딸입니다. 부황의 강산과 성읍이 제 손에 들어온다면 더 잘 지켜낼 자신이 있습니다.”태황태후의 얼굴이 굳었다.세월이 흘렀어도 이 딸의 야심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요즘 들어 열여덟 째 공주를 데리고 후궁을 거닐며 세상사엔 뜻이 없는 듯 고향 생각만 하는 척했지만 아이를 방패 삼아 눈을 가린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대전은 점점 격해졌다. 용좌에 앉은 대황자는 마치 달궈진 솥 위에 올라앉은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이 황위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막 자리에 앉자마자 거액의 채무를 떠안게 생겼다.국고 사정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세금을 늘릴 궁리를 하며 경성의 부유한 상인들을 어떻게 쥐어짤지 계산하고 있었다.그때, 연기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 대인, 이 일을 직접 처리하셨다지? 마지막으로 요동과 장부를 대조한 때가 언제인가?”갑자기 지목된 유문산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제 기억으로는… 삼 년 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무렵 변경의 재해가 서서히 가라앉고 수확도 회복되었기에 더는 요동의 구휼이 필요치 않았거든요.”연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요동의 재해는 본왕도 들은 바 있습니다. 발단은 갑작스러웠고 십수 년을 이어갔다지요. 그 소식을 듣고 본왕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변경을 조사하게 했는데 그 진실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그리고 금수 대장공주께서도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금수 대장공주가 두툼한 장부를 펼쳐 들었다.“지난 십오 년간, 진국 동쪽 경계의 열다섯 개 성은 해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입에 풀칠조차 못 하고 삶은 도탄에 빠졌지요. 이것은 그동안 진국이 요동에 빌려 간 구휼 양식의 내역입니다. 쌀 백만 섬, 채소 오십만 근, 돼지, 소, 양 고기 삼십만 근. 모두 진국 호부의 서명과 날인이 찍혀 있습니다. 오늘 본궁은 요동 황제의 명을 받아 진국이 이를 전부 상환하기를 청합니다.”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놀랐는지 셀 수가 없었다.동쪽 변경의 수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모두 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요동에서 양식을 빌려야 할 만큼 심각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한때 요동은 변방의 황량한 땅이었다. 생활은 궁핍했고 제도조차 미비했다. 그곳의 도성조차 진국의 작은 현 하나보다 풍족하지 못했다.금수 대장공주가 시집가지 않았다면 요동은 지금도 오랑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터였다.그런데 이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호부의 노상서 유문산만이 침묵하고 있었다.대황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유 애경, 이 일이 사실이냐?”유문산이 한 걸음 나와 고개를 숙였다.“대황자께 아뢰옵니다. 이 일은 분명 신의 손을 거쳤습니다. 선제의 뜻이었지요. 당시 선제께서 막 즉위하셨을 무렵, 열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조정 안팎으로 붕당이 갈라져 내우외환이 극심했습니다. 이 사실이 퍼질 경우, 뜻을 품은 자들이 이를 빌미로 동쪽을 흔들 수 있었으니 큰 혼란이 일어날까 우려하셨지요. 민심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선제께서는 신에게 비밀리에 요동으로 가서 양식을 빌려오라 명하셨고 외부에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유문산의 입에서 직접 인정이 나오자 대황자도 부정할 명분이 사라졌다.다만 그는 금수 대장공주를 바라보았다.“부황의 빚이라면 자식이 갚는 것이 도리입니다. 다만 짐이 막 정사를 맡은 터라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황고모께서 며칠만 기다려 주신다면 반드시 답을 드리겠습
언제부터 그 군세가 대황자의 명을 따르게 되었단 말인가?대전 안의 술렁임을 들은 대황자는 차갑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필승을 확신한 얼굴이었다.“아홉 째 황숙도 뜻밖이셨겠지요. 황숙께서 길러낸 군대가 이제는 짐의 칼이 되었습니다. 삼만 철기는 전부 짐의 손안에 있거든요.”그는 품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연기준이 진방옥에게 맡겨 병력을 조정하게 했던 바로 그 병부였다. 이 병부 하나면 삼만 철기를 움직일 수 있고 필요하다면 경성을 짓밟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연기준이 아무 말이 없자 대황자는 그가 겁을 먹었다고 여겼다.“그렇다면 이제 이 황위에 앉아도 되겠습니까?”연기준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웃었다.“안 됩니다.”대황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연기준은 시선을 옮겨 맹국공과 서왕을 바라보았다.이 두 사람은 지금 노신들의 중심이었다.“두 분, 황위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맹국공과 서왕은 또 한 번 시선을 주고받았다.오늘 하루 서로를 본 횟수가 평생치보다 많을 듯했다.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맹국공이 잠시 생각하더니 공손히 말했다.“저는 상왕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봅니다.”그러자 서왕도 곧바로 이었다.“신 또한 맹국공의 뜻에 동의합니다.”대황자는 조급해졌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태황태후를 바라보았다.“황조모께서 결단해 주십시오.”오늘 일을 겪으며 태황태후 역시 기력이 달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어느새 유모가 돌아와 있었다. 그 손에는 성조 선제가 하사한 용두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태황태후가 단호히 말했다.“황위는 대황자가 가장 합당하다. 애가는 성조 선제의 용두 지팡이를 청한다. 이에 불복하는 자는 곧 성조 선제를 거스르는 것이다.”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전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성조 선제의 위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태황태후는 마지막 패를 꺼내 전력을 다해 대황자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대황자는 무릎을 꿇은 채 태황태후를 바
맹국공과 서왕은 줄의 맨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또 한 번 말없이 시선을 맞췄다. 그들은 속으로 연기준을 욕하고 있었다.이 녀석, 여기까지 계산해 두고 있었군.지금 조정이 그를 떠나선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일부러 한발 물러서는 척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의 무게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냈다.결국 형세는 조정이 그를 붙잡았다는 모양새가 되었다. 마치 그는 마지못해 남은 것처럼. 앞으로 대신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공손해질 것이다.그 수법과 배짱은 어딘가 성조 선제를 닮아 있었다.오늘 일은 파란만장했다. 황제만이 아니라 대전 안의 대신들조차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쯤 되니 누가 희태비와 열셋 째 왕야 사이의 근거 없는 염문 따위를 떠올리겠는가?황위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는 머리 위의 관모만이 아니라 목숨과 집안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한가롭게 뒷말을 하겠는가?태황태후는 사태가 점점 손을 벗어나는 기미를 느끼고 유모를 불러 조용히 몇 마디를 속삭였다. 유모는 고개를 숙이고 대전을 빠져나갔다.그 사이, 연기준은 끝까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대신들이 붙잡는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았고 대황자에게 굳이 해명하려 들지도 않았다.해명은 무슨. 태황태후가 한마디 꺼냈을 뿐, 아직 그 누구도 대황자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아래에 서 있던 열셋 째 황자는 안색이 급해져 연기준을 향해 연신 눈짓을 보냈다. 여기까지 판을 벌여 놓고 물러설 수는 없다. 연기준이 남아 그를 도와 황위를 쟁취해야 한다.지금 그의 조정 내 세력만으로는 대황자와 맞서기에 아직 부족했다.연기준은 그 눈빛을 읽은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여러 대신들이 이토록 본왕을 아껴 준다면 본왕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겠습니다.”서인경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연기준이 언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었나?대황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백관이 보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연기준을 내칠 수도 없었다.그러니
연기준의 말에 대신들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그때, 줄곧 침묵하던 태황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혼군이 도를 잃어 사직을 해쳤으니 상왕의 제안에 애가는 찬성한다.”서인경은 순간 뜻밖이라는 듯 눈을 떴다. 앞서 그렇게 날 선 대치가 오갔는데 태황태후가 이렇게 선뜻 연기준의 편에 설 줄은 몰랐다.하지만 곧 이해했다. 태황태후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후궁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 누가 황제가 되든 그녀의 지위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무능한 황제를 감싼다면 자신의 명성과 체면만 깎일 터. 이 후궁의 사람들, 겉으로는 의리를 말하지만 속은 제 이익만 챙기는 자들뿐이었다.태황태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황제는 어리석고 무능하여 오늘의 화를 자초했다. 어서 전국옥새를 거두고 사람을 후궁에 가두어 엄히 감시하거라. 태상황으로서 여생이나 보내게 하면 된다.”명을 받든 어림군들이 힘없이 늘어진 황제를 질질 끌어 밖으로 향했다.서인경과 스쳐 지나칠 때, 황제의 눈에는 끝없는 원망과 증오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한 척했다.일국의 군주가 병사 하나 쓰지 않고 자리에서 밀려났다.대전 안의 대신들은 아직도 넋을 놓은 채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변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그때, 태황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라는 하루라도 군주 없이 있을 수 없다. 황제의 황자들 가운데 대황자는 황후 소생으로 혈통이 정통하고 신분 또한 존귀하다. 오랜 세월 황제를 도와 조정을 돌보았고 치국의 재능도 뛰어나 대신들의 신임도 두텁다. 애가는 대황자가 새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열셋 째 황자는 줄곧 상황을 지켜보며 흥미로운 구경이라도 하듯 서 있었다. 부황이 쫓겨나는 모습을 보며 이미 속으로는 들떠 있었다. 그런데 태황태후의 말이 떨어지자 온몸이 굳어버렸다.막 앞으로 나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황조모의 총애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부황의 전철을 거울삼아 진국의 국운을 지켜 영
황제가 숨겨온 비밀은 이 순간 완전히 들춰졌다. 연기준과 서인경의 몰아붙임에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일국의 군주가 고작 두 명의 간신과 역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몰리고 있었다.황제의 가슴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들끓었다. 설령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는 함께 끌어내리리라.“짐은 잘못이 없다. 상왕비가 화사독을 고칠 수 있...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연기준의 손에 힘이 실리더니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견갑이 그대로 부러졌다.황제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열 틈도 없었다. 연기준이 재빠르게 그의 입안에 약환 하나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황제는 목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 그리고 곧이어 찌르는 듯한 통증. 입을 벌려도 더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황제는 목을 움켜쥔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연기준을 올려다보았다.“아… 아…!”대전 안에 쉰 숨 같은 괴이한 소리만 울려 퍼졌다.연기준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 대부분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황제가 끝내 뱉지 못한 말 또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맨 앞에 서 있던 서왕과 맹국공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전각 밖에서 또 다른 소란이 일었다.대신들이 돌아보자 연풍이 두 팔에 각각 아이 하나씩을 안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장 앞까지 걸어 나와 조심스레 아이들을 내려놓았다.아이들은 고작 다섯, 여섯 살 남짓. 마른 몸은 뼈가 도드라졌고 옷은 해어져 있었다. 몸 곳곳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서인경은 곧장 아이들을 부축해 앉히고 맥을 짚었다.연풍이 무릎을 꿇었다.“왕야의 명을 받아 후궁을 수색하던 중, 동북쪽 외진 전각에서 이 두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반년 전 궁 밖에서 납치되어 들어왔고 이미 석 달 동안 폐하께 피를 바쳤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