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서인경은 턱을 괴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차라리 온천수도 끌어오지 말지 그러느냐. 혹시 누가 산 위에서 물에 독이라도 타 놓으면 어쩌려고?”어린 하녀는 잠시 멍해졌다. 왕비 마마가 진심인지 누군가를 빗댄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서인경은 그저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었을 뿐, 연기준을 겨냥한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게다가 그녀에겐 다른 길이 있었다. 약왕곡의 온천수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었다.연기준이 주원으로 들어섰을 때, 서인경은 이미 온천에 몸을 담근 채 한껏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밖에서 지키던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였다.“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요. 뒷산 온천수는 아직 끌어오지도 못했는데 왕비 마마께서 직접 온천 한 못을 만들어 내셨어요.”연기준은 그 말만 듣고도 물의 출처를 짐작했다.굳이 설명하지 않고 손짓으로 하녀를 물렸다.“밖을 지키거라. 본왕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이지 말거라.”하녀가 물러났다.서인경은 눈을 감은 채 온천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따뜻한 물결에 은은한 약향이 섞여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잠시 눈을 붙인 덕에 기운도 제법 돌아와 있었다.겉으로는 잠든 듯 고요했지만 그녀의 의식은 이미 약왕곡으로 가 있었다.서인경은 지금 네 마리 악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그들은 그녀가 어떻게 후궁을 빠져나왔는지 궁금해 어쩔 줄 몰랐다. 백 년 넘게 갇혀 있던 곳을 그녀는 며칠 만에 벗어나지 않았던가.그들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서인경은 그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한껏 즐기며 궁에서의 영웅담을 열정적으로 토하고 있었다.그 순간, 어딘가 이상한 기운이 스쳤다. 곧이어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약왕곡에서 끌어냈다.눈을 번쩍 뜨자 연기준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여지도 없었다.익숙한 숨결이 밀려들고 서인경은 온천 가장자리에 눌린 채 온몸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풍은 진방옥의 거처를 정리해 준 뒤, 다시 돌아와 문 앞에 서 있었다.연풍은 고개를 들었다가 문이 열린 것을 보자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는 한 번도 저런 연기준을 본 적이 없었다.언제나 기세등등하고 흔들림 없던 사람이, 지금은 초췌하고 방황하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빛을 잃은 채였다.“왕야… 무슨 일이십니까?”연풍이 다가와 부축하려 하자 연기준은 가볍게 손을 쳐냈다.처마 밖으로 나서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따뜻한 햇살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지만 가슴 깊이 가라앉은 냉기는 좀처럼 녹지 않았다. 한참 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연풍.”잠시 멈추었다가 낮게 물었다.“본왕이… 권세를 위해 육친을 버리고 양심을 저버리고 무고한 자를 베고 정실을 짓밟는 간신배로 보이느냐?”말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연풍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왕야, 대체 무슨 말씀을…?”연기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대답하거라.”연풍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왕야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목소리가 떨렸다.“왕야께서는 늘 천하 백성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저희 같은 부하를 친형제처럼 여기셨는데 어찌 혈육과 왕비 마마를 해치시겠습니까? 첫 전장에 나갔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제 실수로 적의 함정에 빠져 대군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왕야께서는 저를 버리고 가셔도 되는데 그러지 않으셨지요.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해내셨고 그 일로 서 노장군께 공개적으로 꾸중을 들었으며 군장 백 대를 맞으셨습니다. 지금 조정의 무장들 중, 한 번쯤 왕야께 목숨을 빚지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왕야께서 아니셨다면 진국은 이미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확신했습니다. 왕야는 충의로운 분이며 제가 평생 따를 주군이라고. 다만 왕야께서는 겉모습이 차가워 보여 오해를 사셨을 뿐입니다. 왕비 마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이번에 왕비 마마를 구하기
상왕부로 돌아온 그는 꿈속에서 또 한 장의 문서를 써내려갔다.화이서였다.서인경의 왕비 자리를 폐하고 그녀를 영원히 유폐한다는 내용.연기준은 꿈속의 자신이 그 글을 적으며 손을 떨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건 그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그 문장을 끝까지 써내려갔다.그리고 단은설을 맞아들였다. 차가운 눈으로 단은설이 서인경 앞에서 위세를 부리고 그녀의 마지막 자존과 자긍심을 짓밟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서인경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 울부짖었다.“연기준,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후회되는 건… 당신을 사랑한 거야.”광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무너져 내린 그녀를 보며 꿈속의 그는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세게 손바닥을 움켜쥐었다.상왕부의 두 번째 혼례가 치러지던 날, 궁 안에서는 숙귀비와 열다섯 째 황자가 목숨을 잃었다.그리고 서인경은 흰 비단 끈으로 스스로의 숨을 끊었다.그날 이후, 서 씨 가문의 혈맥은 완전히 끊어졌다.세상은 새로운 황제를 찬양했다. 진국의 화근을 제거했다며, 연기준이 대의를 위해 친정을 베어냈다고 칭송했다. 가히 통곡할 만한 결단이라며 말이다.꿈속의 연기준은 전례 없이 당황하고 있었다.사람들의 찬사 속에서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대체 무엇을 저지른 것인가?충신의 가문이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었고 찬란했던 서 씨 가문의 역사도 핏빛과 함께 사라졌다.그날, 진국에는 기이한 이변이 일어났다.유월에 눈이 내렸다.아홉 날 아홉 밤을 쉬지 않고 쏟아진 눈이 진국을 거의 묻어버렸다.한여름이었지만 사람들은 문을 닫고 움츠린 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아홉 날을 버텼다.먹을 것도, 숨 쉴 여유도 없이 곳곳에 시신이 쌓였다.마치 서 씨 가문의 원혼을 위해 나라 전체가 순장이라도 당한 듯했다.꿈속의 연기준은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그는 서인경의 시신을 안고 행여 숨이라도 남은 듯 붙들고서 성 밖으로 걸어 나갔다.사람들은 부부의 정을 생각해 그녀를 장사지내려는
연풍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그때, 문밖에서 늙은 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뢰옵니다, 왕야. 열셋 째 황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연기준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적당히 둘러대고 돌려보내거라. 상왕부는 사흘간 문을 닫는다. 그 어떤 사람도 들이지 말고, 그 어떤 선물도 받지 않는다.”열셋 째 황자가 온 이유는 뻔했다. 황위를 위해서였다.대황자를 꺾은 이상, 이제 자신을 막을 자는 없다고 여겼을 터였다. 그전까지는 연기준과도 동맹 관계였으니 상왕부와의 관계만 잘 이어가면 자연히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수를 잘못 두었다.잠시 뒤, 관사가 돌아와 공손히 전했다.“저희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근래 밤낮으로 분주하여 몸이 쇠하셨고 막 돌아오신 뒤 풍한까지 드셨습니다. 지금은 모두 쉬고 계시니 열셋 째 황자께서는 부디 돌아가시지요.”열셋 째 황자의 손에는 아이 장난감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세자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그는 계산을 바꾸었다.상왕부에 없는 것은 없다. 어른을 기쁘게 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는 다르다. 아이들은 작은 것에도 마음을 여니까.잠시 실망이 스쳤으나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황숙과 황숙모께서 몸이 편치 않으시다면 당연히 쉬셔야지. 이건 내가 유청 아우에게 사온 선물이다. 꼭 전해주거라.”연유청, 꼬막이의 이름이었다.관사는 잠시 멈칫했으나 끝내 두 손을 모은 채 물건을 받지 않았다.“열셋 째 황자께서는 노여워 마십시오. 왕야의 명입니다. 상왕부는 어떤 선물도 받지 않습니다. 부디 그대로 가져가 주십시오.”열셋 째 황자의 얼굴이 굳었다.“아이 장난감일 뿐이다. 값도 나가지 않으니 받아도 황숙께서 뭐라 하시지 않을 것이다.”관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송구하오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늙은 몸, 이 자리 하나 지키기도 쉽지 않으니 부디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열셋 째 황자는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계단을 채 내려서기도 전에, 등 뒤에서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좋다. 그럼 본왕을 네 허리에 매달아 두거라.”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기준은 서인경의 입술을 덮쳤다.두 사람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궁 안에서는 며칠 동안 숨어 다니며 겨우 숨만 붙이고 지냈기에 긴장과 경계 속에 억눌러 왔던 감정이 이제야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숨이 얽히고 체온이 섞였다. 그리움이 마치 불길처럼 번져 서로를 삼켰다.연기준의 손은 쉬지 않고 서인경의 옷을 하나씩 벗겨내며 마침내 흰 속옷만 남겼다.그는 그제야 입술을 떼어냈다. 이마를 맞댄 채, 거칠어진 숨결 속에 서로의 체취가 가득했다.“가서 씻거라. 씻고 나서 푹 자자꾸나. 기운을 되찾으면… 그때는 본왕이 가만두지 않겠다.”서인경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또 막막하기도 한 그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연기준.”그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언젠가 당신이 권력과 지위를 위해 저와 꼬막이, 그리고 제 가족을 해친다면… 저는 반드시 당신을 저와 함께 지옥으로 끌어내릴 겁니다. 저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 잘 생각하세요.”연기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스쳤다.“아이까지 낳아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 조금 늦은 게 아니냐?”서인경은 잠시 말이 막혔다. 늦은 건 맞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연기준은 다시 그녀에게 다가와 입술을 천천히 눌러 문질렀다.“만약 본왕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면 네가 손댈 필요도 없다. 본왕이 스스로 지옥으로 가겠다.”그 순간, 서인경은 힘껏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읏...”짧은 숨이 새어나왔다.연기준은 몸을 일으켜 입가를 문질렀다. 손끝에 묻은 피를 보고도 화 대신 웃음이 번졌다.“성질은 여전하군. 힘은 아껴두거라. 밤에 본왕 위에서 쓸 테니.”서인경은 그를 발로 밀어 떨어뜨리고 몸을 돌렸다.“꺼지세요.”연기준은 낮게 웃었다.긴장이 풀리자 서인경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침상 위였다. 베개에 머리가
서인경은 연기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 때문에 황위를 다투지 마세요. 그런 희생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둘게요. 당신이 황제가 된다면 후궁엔 저 하나뿐이어야 해요.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나눌 생각은 없습니다. 감히 후궁 하나라도 들이면 저는 바로 화이하고 꼬막이와 멀리 떠날 거예요.”연기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웃었다.질투였군.그는 손을 들어 서인경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안심하거라. 너와 꼬막이만으로도 본왕은 충분히 바쁘다. 다른 여자를 상대할 기력은 없다.”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서인경은 선뜻 믿지 않았다.“헌데 후궁은 곧 조정과 이어져 있어요. 대신들과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당신도 결국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연기준이 코웃음을 쳤다.“본왕이 대신을 끌어들여야만 황위를 지킬 수 있다면 그런 황위는 애초에 필요 없다.”그 말이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소설이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주는 안도감 같았다.전생에서 권세 앞에 서 있던 연기준과는 어딘가 달랐다. 아직 정상에 오르지 않았기에 여유로운 것일까? 정말 그 자리에 오르면 누구도 홀로 맑게 설 수 없는 것은 아닐까?아직 그곳에 닿지 않았으니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었다.궁문에 이르자 연풍이 말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연기준은 서인경을 안아 올려 말 위에 태우고 곧장 채찍을 가했다.궁문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사람들과 건물들이 뒤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후궁에 갇혀 있던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이 장면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한참을 달리다 보니 길이 낯설었다.“어디로 가는 거예요?”“집으로.”곧 새로운 저택 앞에 도착했다.예전 상왕부보다 조금 작았지만 대문과 석사자, 계단까지 모두 새로 씻어 반짝이고 있었다. 궁과 번화가에서 떨어진 조용한 자리였다.문 앞에는 붉은 등이 걸려 있었고 편액에는 또렷하게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상왕부.’“언제 준비한 거예요?”연기준은 말에서 내려 서인경을 안아 내린 뒤, 그대로 안고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