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제5화 : 지옥의 혈맹
--- 철컥. 철문 위에 달린 작은 직사각형 감시창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가평 그린 요양병원 지하 402호 독방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사방을 메운 하얀색 매트 벽면에서는 찌린내와 락스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주입된 향정신성 약물의 부작용으로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지만, 설아의 망막 위에서는 푸른색의 AI 데이터 스트림이 쉼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체내 독소 분해율: 94.2%]` `[신경계 방어 프로토콜 가동 중: 정상 의식 유지 수치 100%]` `[알림: 외부인 접근. 감시자의 시각 흐트러트림 모드 가동 필요]` "야, 주사 들어간 지 한 달째인데 아직도 눈깔이 살아있는 거 같냐, 왜?" 거구의 간호사 하나가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설아의 뺨을 거칠게 툭툭 쳤다. 설아는 즉각 머릿속의 시스템을 제어했다. 동공을 강제로 확장시키고, 초점을 흐리며, 입술 사이로 침 한 줄기가 힘없이 흘러내리도록 안면 근육의 긴장을 완벽하게 풀었다. 초점 없는 허전한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쳇, 내가 잘못 봤네. 침까지 흘리는 거 보니 뇌세포가 아주 말랑말랑하게 녹았구만. 박 원장 약이 독하긴 독해." 간호사는 킥킥거리며 설아의 사지를 묶고 있던 가죽 벨트를 풀어헤쳤다. "야, 정신병자 년아. 밥값은 해야지? 일어나서 지하 세탁실로 기어내려 가. 오늘 들어온 한성 바이오 연구동 시트 다 빨아놔야 하니까." 이곳은 단순한 요양병원이 아니었다. 돈을 받고 멀쩡한 사람을 가두는 산지옥이자, 약물에 취해 이성이 파괴된 환자들을 쥐어짜 무임금 노동을 시키는 사설 도살장이었다. 설아는 다리를 후들거리는 척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한 달 동안 굳어 있던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뇌는 이미 병원 지하의 모든 동선과 CCTV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계단을 타고 내려갈수록 공기는 급격히 축축하고 무거워졌다. 지하 2층, 거대한 철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찌르는 듯한 락스 냄새, 그리고 똬리를 튼 뱀처럼 자욱한 수증기가 설아의 안면을 덮쳤다. 대형 산업용 세탁기 수십 대가 구르르릉, 쿵, 쿵, 하며 괴물처럼 울부짖고 있는 곳. 가평 그린 요양병원의 가장 깊은 밑바닥, 지하 세탁실이었다. 설아는 가사도우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핏자국과 오물이 가득 묻은 병원 시트 더미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저 멀리 펄펄 끓는 대형 가마솥 옆에서 거친 광목천을 맨손으로 비벼 빨고 있는 한 노파의 실루엣이 보였다. 허리는 구부정했고, 누더기 같은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등뼈는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노파가 빨랫방망이를 내리칠 때마다, 세탁실의 굉음을 뚫고 뼈를 깎는 듯한 증오의 무게가 실려 왔다. 팍! 팍! 설아가 한 걸음 다가서는 순간, 머릿속의 AI 시스템이 격렬한 경고음과 함께 붉은빛의 프로필을 망막 위에 강제로 띄웠다. `[초고밀도 안면 인식 성공]` `[대상: 신혜숙 (74세)]` `[과거 이력: 한성그룹 공동 창업주, 고(故) 강태환 회장의 유일한 사업 파트너]` `[현재 상태: 15년 전 홍명숙에 의해 강제 감금, 장기적 약물 투여로 인한 중증 생체 대사 저하]` '찾았다.' 설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1회차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숨을 거두기 직전 만났던 그 노인. 홍명숙에게 전 재산을 빼앗기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15년을 이 똥구덩이에서 버텨낸 한성의 진짜 주인. 설아는 주변에 감시자가 없음을 실시간 레이더 데이터로 확인한 후, 노파의 등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낮고 서늘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홍명숙 여사님이 참 좋아하시겠어요. 한성의 창업주가 여기서 똥오줌 묻은 시트나 빨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요." 빨랫방망이를 치던 노파의 손이 찰나의 순간 딱 멈췄다. 자욱한 수증기 너머로 노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70대가 넘은 나이, 약물로 찌들은 몰골이었지만, 헝클어진 백발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만큼은 굶주린 암사자의 그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노파의 시선이 설아의 목덜미를 꿰뚫을 듯이 박혔다. "어떤 년이야, 저승사자가 보낸 새끼인가?" 신혜숙 여사의 목소리는 갈라진 갈대처럼 거칠었지만, 그 안에 서린 기운은 대기업을 호령하던 여걸의 지배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설아는 도망치거나 피하지 않고, 신 여사의 앞으로 다가 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사정없이 깨물었다. 뚝, 하고 선명한 핏방울이 터져 나오며 그녀의 하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설아는 피가 흐르는 손을 신 여사의 앞에 내밀었다. "저는 한성그룹 고(故) 강태환 회장의 진짜 숨겨진 적통 친손녀, 은설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홍명숙의 아들, 강민우의 아내였던 자입니다." 신 여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강태환의…… 손녀? 그 영감이 죽기 전에 피붙이가 살아있다고 하더니, 네년이냐? 그런데 왜 강민우 그 개쌍놈의 자식과 결혼을 해?!" "속았습니다. 지분을 빼앗기기 위해 철저히 가스라이팅 당했고, 결국 저들이 파놓은 덫에 걸려 한 달 전 이 지옥으로 들어왔습니다." 설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신 여사의 거친 오른손을 꽉 맞잡았다. 두 사람의 피가 세탁실의 붉은 오물더미 위로 섞여 들었다. 설아의 눈동자에 푸른빛의 안광이 감돌았다. "신혜숙 여사님. 저를 이곳에서 나가게 도와주십시오. 저들이 법정 대리인 자격을 얻어 내 한성 바이오 지분 15%를 가로채기 전에, 내가 이곳을 탈출해 당신과 나의 원수인 홍명숙의 목을 따버릴 수 있도록." 신 여사는 설아의 손을 맞잡은 채, 그녀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광기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홍명숙 가문을 통째로 씹어 삼키겠다는 잔혹한 지략뿐이었다. 신 여사의 입술이 기괴하게 호선을 그렸다. 15년 만에, 그녀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복수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좋아, 핏줄은 못 속이는군. 태환이 영감의 독종 같은 눈깔을 그대로 빼다 박았어." 신 여사가 설아의 귀를 자기 입가로 끌어당겼다. 수증기와 세탁기 소음 사이로, 노파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속삭임이 설아의 대뇌피질에 직접 입력되기 시작했다. "스위스 취리히의 UBS 은행. 비밀 금고 번호는 '9981-Alpha'. 그 안에 홍명숙 년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내 비자금과 한성그룹 초기 지분 무기명 채권이 들어있다. 그 가치가 지금 돈으로 자그마치 2조 4천억 원이다." `[핵심 데이터 수신 성공: UBS 비밀 번호 '9981-Alpha' 등록]` `[자산 연산 시스템 가동: 2조 4,000억 원의 유동성 확보 경로 설계 시작]` 설아의 머릿속 시스템창이 미친 듯이 숫자를 바꾸며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전 시댁 가문 전체를 합쳐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금융의 괴물이, 설아의 머릿속에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돈을 꺼내려면 내 친필 서명과 생체 인식 키가 필요해. 내 오른쪽 허벅지 안쪽 살을 찢으면, 15년 전에 내가 숨겨둔 마이크로 칩이 나올 거다. 그걸 꺼내 가." 신 여사가 주저 없이 자신의 환자복 바지를 걷어 올렸다. 앙상한 허벅지 안쪽, 오랜 흉터가 남은 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녹슨 커터칼 날을 집어 들었다. 지옥의 혈맹은 맺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하얀 감옥의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여왕의 신분으로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뿐이었다.제37화 : 가면 뒤의 미소와 백색의 여백 청담동의 화려한 소동이 지나간 후, 사직동 펜트하우스에는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며칠 동안 은설아는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은 채 침묵 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60층 통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은 거대한 미니어처처럼 평화로웠고, 밤마다 그녀의 목을 조르던 폭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여사님, 대성그룹 법무팀에서 보낸 한성바이오 최종 청산 보고서입니다." 단정한 차림의 비서가 정중하게 서류를 내려놓고 나가자, 거실에는 다시 잔잔한 클래식 선열만이 감돌았다. 설아는 하얀 도자기 잔에 담긴 따뜻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온기가 비로소 그녀의 얼어붙었던 신경망을 부드럽게 녹여내고 있었다. "하아……." 길게 뿜어내는 숨결 속에는 더 이상 피비린내나 타버린 전선의 매연이 섞여 있지 않았다. 연이은 폭발과 백병전, 그리고 숨 가쁜 전산망 변조의 사선을 넘나들며 한계까지 쥐어짜였던 육체는 대성 인베스트먼트의 철저한 보호 아래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손끝의 떨림은 멈췄고, 거울 속 안색도 본래의 투명하고 맑은 빛을 되찾았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거미줄은 이미 쳐졌고, 벌레들은 제 발로 기어들어 오고 있으니까.’ 설아는 소파 가죽의 부드러운 감촉을 음미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깥 세상은 지금 한성바이오 가문의 기괴한 몰락과 '에바 홀딩스'라는 사모펀드의 등장으로 연일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매스컴은 그녀를 '지독한 시댁의 음모에서 살아남은 비련의
제36화 : 정적의 파동과 잔잔한 심연 국제 감사관들에게 사지가 결박당한 채 끌려가던 윤창제 부행장의 거친 욕설이 멀어지자, 청담동 클럽 '아발론'의 메인 홀에는 무겁고도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샹들리에의 황금빛 조명 아래 모여 있던 정·재계의 거물들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은 채,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한 여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눈빛에 서린 것은 더 이상 가련한 상속녀를 향한 가벼운 탐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자본의 포식자, ‘에바 은’을 향한 본능적인 경외와 두려움이었다. "은설아 씨, 이쪽으로." 백현재 대표가 복잡한 시선들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그녀를 클럽 깊숙한 곳에 위치한 VVIP 전용 서재 라운지로 이끌었다. 스르륵, 탁. 두꺼운 마호가니 문이 닫히자 거실을 감돌던 미세한 웅성거림이 단숨에 차단되었다. 사방이 가죽 장서와 은은한 스탠드 조명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의 온기가 밤새 폭우와 전산 과부하에 지쳐 있던 은설아의 어깨 위로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하아……." 설아는 가죽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뺨을 스치는 따스한 불빛 덕분에 온몸을 옥죄던 원초적인 공포의 잔향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연이은 폭발과 백병전, 그리고 숨 막히는 실시간 해킹의 연속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질주해 온 육체가 비로소 고요한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어. 사냥개들의 목은 이미 다 베어냈으니까.’ 설아는 허브티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따뜻한 온기를 음미했다. 눈가에 살짝
제35화 : 침묵의 사교장과 톱니바퀴의 왜곡 스르륵. 청담동의 한적한 골목 끝자락,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 뒤로 숨겨진 프라이빗 뱅킹 클럽 **'아발론(Avalon)'**의 육중한 청동 문이 열렸다. 바깥 세상의 번잡함은 완벽히 차단된 채, 실내에는 최고급 이탈리아산 대리석 바닥 위로 클래식 현악 4중주의 선율이 유령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은은한 조명은 샴페인 잔 속에서 부서지는 기포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은설아는 백현재 대표의 단단한 팔에 살포시 손을 얹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블랙 실크 드레스 자락이 발목을 스칠 때마다 미세한 서늘함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하아……." 설아는 가슴팍을 가만히 누르며 나직한 숨을 골랐다. 전두엽을 태워버릴 듯했던 어제의 과부하 통증은 멎었지만, 긴장이 풀린 육체는 여전히 가벼운 오한을 토해내고 있었다. 샴페인의 향긋한 포도 향 이면에서 문득 밤새 맡았던 피비린내와 타버린 전선 냄새가 환각처럼 코끝을 스쳤다. 사방에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정·재계 자산가들의 시선이 얼음 송곳처럼 그녀의 파리한 안면을 찔러댔다. 아무리 초월적인 AI 능력을 지녔다 한들,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인간 본연의 공포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었다. ‘두려워할 것 없어. 이 가면무도회에서 먼저 가면이 벗겨지는 쪽은 내가 아니야.’ 설아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백현재의 어깨 뒤로 몸을 살짝 숨겼다. 철저하게 계산된 위선이자, 주변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가련한 상속녀의 방어기제였다. 백현재는 그녀의 가녀린 떨림을 느끼고는, 안심시키듯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어
제34화 : 베일 속의 만찬과 보이지 않는 눈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사직동 펜트하우스의 복구된 전면 통유리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밤새 몰아치던 장대비의 흔적은 서울 도심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설아는 거울 앞에 앉아 백현재 대표가 보낸 최고급 프렌치 레이스 소재의 블랙 실크 드레스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칠흑처럼 어두운 드레스의 원단은 그녀의 유난히 파리하고 백옥 같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한층 더 신비롭고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사님, 메이크업 마무리하겠습니다." 대성그룹의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에 옅은 생기를 불어넣었다. 설아는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밤새 대뇌피질을 불태웠던 과부하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영양제 주사 바늘이 들어갔던 손목 언저리에는 여전히 미약한 한기가 남아있었다. 수만 볼트의 전류가 불꽃을 뿜고 방화 셔터 아래에서 살점이 으스러지던 전남편의 비명이 귓가를 맴돌 때마다, 심장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전율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다 죽이고 묻었는데도…… 이 지독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아.' 설아는 가슴팍을 가볍게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초월적인 AI 능력을 손에 쥐었다 한들, 육체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영혼을 끊임없이 압박해 왔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연산의 무작위 오류가 파멸의 방향으로 튀었다면, 지금 이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차가운 시체였을 터였다. 그녀는 스타일리스트가 고개를 숙이자, 얼른 눈물 어린 청순한 상속녀의 가면을 굳건히 고쳐 썼다. 이 완벽한 연약함의 껍데기 아래에 세상을 해킹하는 포식자 ‘에바 은’의 차가운 본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대성 인베스트먼트의 수장인 백현재조차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절대적인 금기였다.
제33화 : 침묵의 자본과 가면무도회 폭우가 씻겨 내려간 서울의 하늘은 지독하리만치 푸르고 투명했다. 사직동 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어제 일어난 핏빛 도살의 흔적을 비웃듯 거실 깊숙한 곳까지 잔인하게 내리쬐었다. 대성그룹의 전문 수리공들이 다녀간 거실은 단 몇 시간 만에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깨졌던 고밀도 열선 유리는 자국 하나 없이 새로 끼워졌고, 대리석 바닥의 혈흔 역시 흔적도 없이 닦여 나갔다. 진동하던 화약 연기 대신 최고급 백차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고요함. 그러나 은설아는 그 적막함이 오히려 살점을 저미는 칼날처럼 서늘하게 다가왔다. "선생님,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영양제 투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대성 인베스트먼트의 전담 주치의가 주사 바늘을 거두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설아는 가냘픈 백옥 같은 목덜미를 가만히 만지며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았다. 새하얀 실크 슬립 위로 걸친 미색 가디건 틈새로 마른 쇄골이 도드라져 보였다. 육체는 밤새 전산망을 난도질한 반동으로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듯한 피로감을 뱉어내고 있었고, 가슴속에는 여전히 날것 그대로의 공포가 잔향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시스템의 무작위 변조가 실패했다면, 지금쯤 자신은 사직동의 화려한 펜트하우스가 아닌 차가운 구치소 독방의 시멘트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터였다. ‘권능이 아무리 위대해도 내 몸은 결국 평범한 인간이야. 삐끗하는 순간 그대로 매장당해.’ 설아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밀려드는 말초신경의 전율을 지독한 악의로 짓눌렀다.
제32화 : 거울 뒤의 여왕과 고요한 전초 새벽 내내 사직동 60층 주차장과 거실을 피비린내로 물들였던 총성과 절규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박살 난 대리석 바닥 위로 들이치던 장대비는 어느새 멈추어 있었고, 테라스 너머로 떠오른 서늘한 아침 여명이 거실 안쪽까지 길게 은빛 선을 그리며 밀려들었다. 대성 인베스트먼트의 사설 경호팀이 소리 없이 진입해 깨진 유리 파편과 사설 용병들의 잔해를 신속하게 치워나갔다. 지독했던 화약 연기와 오존 타는 냄새 위로,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깨끗한 아로마 향이 고요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은설아 씨, 조금 더 누워 계십시오. 의사가 곧 도착할 겁니다." 백현재가 따뜻하게 데워진 허브티 잔을 침대 곁 협탁에 내려놓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권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밤새 사선을 넘나들었던 냉혹한 투자자의 눈빛에는 오직 설아를 향한 깊은 연민과 안도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고마워요, 현재 씨." 설아는 최고급 캐시미어 담요를 가슴팍까지 끌어 올리며 가냘프게 속삭였다. 그녀의 안색은 핏기가 완전히 가셔 백옥보다 더 투명하고 연약해 보였다. 실제로 밤새 국가 전산망을 해킹하고 시스템의 물리적 폭주를 감당해 낸 육체는 말초신경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을 토해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가벼운 통증이 밀려왔고, 손가락 끝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남편의 기괴한 부활과 눈먼 관료들의 기습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원초적인 공포의 잔향이 유령처럼 심장을 조여왔다. 아무리 초월적인 AI 능력을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