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2월 31일.지원이 퇴근하고난 후 오후 8시즈음.겨울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거리는 유난히 밝았다. 시리는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않는다는 듯 두 손을 맞잡고 걷는 커플들과 어린 아이의 붕붕거리는 손을 잡고 연말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흐린 날씨 탓에 오히려 조명과 간판 불빛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고, 차가운 공기 속에 섞인 군밤 냄새, 붕어빵 굽는 달콤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계란빵 파는 포장마차에 잠시 고민하고 갈등하며 서있기도 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그 사이를 어렵사리 뚫고 지나가며 도착한 마트.대형 마트 입구 앞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저마다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계획을 잔뜩 품은 채 움직였다.지원도 그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벌써 머릿속에 오늘 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카트를 끌며 이것저것 들어보고 비교하다, 하나씩 카트에 집어넣는 지원.연말이라 그런지 하연이 좋아하는 것들이 세일을 많이 했다. 떡갈비, 치킨, 초밥, 피자, 등등."음.. 좋아하려나."사다두면 먹겠지, 마인드로 하연의 선호품들을 카트에 가득 담는 지원.지원이 자기를 위해 구매한 것은 오레오 오즈 시리얼 하나 뿐이었다.하연이 감동하기를 바란건 아니고, 라는 생각으로 괜히 애써 부끄러움을 감추는 지원이었다.지원은 카트에 가득 찬 짐들을 보며 이거 내가 다 들고갈 수 있으려나.. 하며 쓸모없는 거 산 건 없는지, 사야되는 것 다 샀는지 다시 확인하다가,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화면에 뜬 짧은 메시지를 읽었다.[하연언니, 나 먼저 집 가서 트리 켜놓을게너무 늦게 오지마!]하연의 문자 내용은 별 것 없지만, 지원에게는 묘하게 따뜻했다.올해 마지막 날을 누구와 보내게 될지, 아니 어쩌면, 모든 날들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지, 이미 오래전부터 지원은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지원은 기꺼이, 양 손으로 아둥바둥
둘 다 피곤했기에 저녁 식사는 간단히 차렸다.흰쌀밥과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그리고 김.둘 다 밥을 먹을 땐 말을 많이 하지 않았기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와 국물 떠먹는 소리가 유난히 오래 이어졌다.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하연의 밥그릇에 올려주는 지원의 모습이 부엌 조명 아래서 부드럽게 피어났다.계란말이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는 하연을 보며 지원은 조용히 웃었다.*식사 후, 소파에 나란히 앉아 다큐멘터리를 틀었다.내용은 솔직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지원의 어깨에 기대며 말을 꺼냈다."저번에 시원이랑 만나서 다 얘기했어."지원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무슨 얘기?""우리 같이 또 바다 여행 다녀온 거.""그래서?""처음엔 놀라더니 그냥 웃더라고."지원이 고개를 돌렸다."뭐래?""'역시 둘답다'고."하연은 잠시 웃었다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그 말,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우리답다'는 말이.. 나도 몰랐는데 되게 단단한 말이더라고. 어딘가 든든한 느낌도 들고.언니도 그래?"지원은 가만히 하연의 손을 잡았다."당연하지. 우리잖아.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그 누구도 우리보다 우리다울 순 없으니까."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화면 속 북극곰보다 훨씬 선명했다.*그날 밤, 하연이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지원이 부엌에서 물을 마시며 말을 꺼냈다."오늘 회사 사람이 그러더라.""뭐라고?""왜 이렇게 얼굴이 편안해보이녜.맨날 피곤에 찌들어있더니 요새 좀 달라진 것 같다네.""그래서 언니는 뭐라고 그랬는데?"드라이기까지 끄고 왜인지 긴장한 얼굴로 묻는 하연.지원은 그런 하연에게 다가가 드라이기를 손에 쥐고 하연의 머리를 말려주었다."애인이 너무 너무 귀여워서 그랬다 했지.""..거짓말.""응. 거짓말 맞아. 사실 애인이 너무 너무 예쁘다고 했거든."하연의 머리를 다 말려주고 이젠 빗까지 집는 지원의 모습에 하연은 억지로 빗을 뺏어냈
거리는 여전히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비 혹은 조금 이르게 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출근길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무채색 패딩이나 코트 등 두터운 외투를 걸친 채 무표정하게 발걸음을 옮겼다.지원은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이상하게도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바닷바람이 스치던 그 날 이후, 표정이 미묘하게 풀려 있었고, 아마 그 여유가 사무실 조명 아래서도 그대로 드러나 버릴 듯했다.*출근 후, 회의가 끝나고 잠시 책상에 앉아 있을 때였다.컴퓨터 화면 속 메일 목록이 빽빽하게 줄을 섰지만, 시선은 자꾸만 창밖으로 향했다.유리창 너머로 스치는 바람이, 그 바닷가에서 하연이 머리카락을 묶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바람에 풀려 흩날리던 머리카락, 아무렇지 않게 눈가를 좁히며 웃던 얼굴, 그리고 파도 소리에 묻힌 짧은 대답들. 맑은 웃음소리까지."선배 요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맞은편에서 서류를 들고 검토하고 있던 후배가 말을 걸었다.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래 보여?""네. 뭔가.. 얼굴이 편안해 보여요. 원래는 완전 피곤에 찌든 얼굴로 보여야 정상인데. 커피도 막 물처럼 마시고.""피곤하긴 한데, 뭐.. 나쁘지 않네." 지원은 짧게 웃으며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가슴속에 남았다.'편안하다'는 건 단순히 표정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곁에서 숨을 고르게 만들어준다는 증거 같았다.예전엔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하연이기에,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하연은 그 시간, 대학교 도서관 3층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햇살이 길게 책상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책장을 넘기는 소리, 가끔 울리는 알람음, 누군가의 속삭임이 멀리서 들려왔다.그간 거슬렸던 그 모든 소음이 이제는 불편하지 않았다.창밖 은행나무에는 거의 다 벗겨진 가지 끝에 노랗게 남은 잎 서너 개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지원이 없었더라면 이런 풍
늦은 오후, 두 사람은 바닷가를 걸었다.모래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해변은 차갑게 젖어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이 묻혔다가 빠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구두 불편하지? 그러니까 운동화 신으라고 했잖아.""아니? 하나도 안 불편해.""고집은.."하늘은 어두워질듯 말듯 어스름했고, 바람은 마치 겨울을 조금 앞당기듯 매서웠다.그 바람이 파도를 부서뜨릴 때마다 흩날리는 물방울이 가끔 코끝을 스쳤다.둘은 나란히 걸었다.말없이, 그러나 어색하게 단절된 침묵이 아닌 부드럽게 이어지는 침묵이었다.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동시에 숨을 쉬고 있는 듯한 호흡이 있었다.하연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주머니 속에서 꺼냈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지원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지원은 그 모습을 흘깃, 보더니"바람 많이 분다. 추워?""조금.근데 손 잡으면 안 추울 것 같아."지원은 그 말을 듣고 아무말없이 하연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 사이에 체온이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들었다.그 온기는 피부를 타고 뼛속까지 전해지는 듯했는데, 그 순간 하연이 문득 중얼거렸다."언니, 이 겨울 바다도 저번 바다처럼 언젠가 기억날까?"지원이 걸음을 멈췄다."언젠가?""나중에, 아주 먼 미래에.우리가 이렇게 겨울 바다 걸었던 거.. 기억날까요?아니면 다른 일상들처럼 서서히 잊혀질까?"지원은 고개를 저었다."잊히지 않게 만들자.우리만 아는 계절이 되게.우리 둘만의 시간이니까, 지금은."그 말은 바람 소리에 섞여 작게 흩어졌지만, 하연은 또렷이 들었다.그리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무렵, 민박집 안.작은 전기난로가 방 한구석에서 붉게 켜져 있었다.둘은 귀찮다며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김밥을 라면 위에 올려놓고 김이 스믈스믈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봤다.밖에서는 바람이 창을 두드렸다.나무 사이로 불어 들어온 바람은 문틈을 스쳤고, 가끔은 낮게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하연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어느새 다다른 겨울의 문턱.11월의 끝자락은, 도시의 공기를 단단하게 얼려버리려는 차가운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서울 하늘은 하루 종일 한 톤으로 물든 회색이었고, 낮과 밤의 경계가 거의 무의미하게 희미했다.차량 유리창엔 하루 종일 마르지 않는 서리가 앉아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부쩍 빨라져 있었다.지원은 오랜만에 렌트한 SUV의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조수석에 앉은 하연은 긴 코트를 무릎 위에 덮고 있었다.차 안엔 잔잔한 인디밴드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가느다랗게 떨리는 보컬의 목소리는 창밖 풍경과 꽤나 잘 어울렸다.핸들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노래에 맞춰 두드리는 지원.하연은 다음 노래는 뭐 틀까,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하연이 부드럽게 물었다.정말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단, 차창 밖을 보며 슬쩍 흘려놓는 호기심 같은 말투였다.지원은 눈길을 도로에서 떼지 않은 채, 부드럽고 가볍게 말했다."저번에 갔던 바다."하연은 고개를 조금 돌려 지원을 봤다."이 겨울에? 바다를?""응. 겨울 바다는 아예 다르니까."지원의 말은 짧았지만, 분명히 너도 좋아할 걸, 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도착한 곳은 지난번 묵었던 작은 민박집이었다.주차장을 지나며 본 간판은 봄의 활기를 잃고, 바람에 흔들리는 고요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사람 그림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11월의 바다는 봄의 소란스러운 북적임과는 완전히 반대였다.멀리서도 들리는 파도의 규칙적인 리듬, 바람이 밀고 오는 차가운 짠내, 그리고 가끔 스쳐가는 현지인의 발걸음 소리와 자전거 바퀴 돌아가는 소리뿐.민박집은 그때처럼 역시 작았다.방 하나, 창 하나, 작은 테이블 하나.대신 그 창 너머로는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였다.그래서 여기를 골랐었지, 지원은 짐을 풀며 외투를 벗었다.해변과 민박집 사이에는 작은 잡목림이 있었지만, 가지 사이로 밀려왔다가 물
“언니..”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부스스한 머리, 커다란 티셔츠에 보온 양말만 신은 하연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아직 꿈의 잔향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하품을 쩍, 하며 뒤통수를 긁는 하연.“이제 일어났어? 빨리 와서 아침 먹어. 따뜻할 때.”지원이 빵을 내밀며 웃었다.“응.. 근데 왜 깨웠어.. 같이 마저 자지..”“뭐래. 깨운 거 아니거든. 너가 빵냄새 맡고 나온거지. 너 늦잠 자는 게 귀여워서 냅뒀어. 커피 마실래?”하연은 하품을 하며 빵을 받아 들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아직 비몽사몽인지 눈빛이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흔들거렸다.그 순간, 라디오에서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사랑이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하연이 그 멜로디를 따라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래, 나도 그래. 언니.”지원이 고개를 들어 웃었다.“뭐가?”“말 안 해도, 설명 안해도 내가 사랑하는 언니니까 알 거라고.”지원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 그래서 네가 말 안 할 때도, 괜찮아. 알고 있으니까.”*그날 오후, 마트.바깥 공기는 차갑고 뺨을 간질였지만, 마트 안은 포근하게 따뜻했다.하연이 카트를 밀고, 지원은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카트가 멈추고,싱싱한 채소 코너에서 하연이 양배추 하나를 들어 보였다.“기억나? 이걸로 언니가 옛날에 샐러드 해줬었는데.”“응. 그때 너 울어서 아무거나 해준 건데, 맛있다 했잖아.”“그래서 그 후로 양배추만 보면 언니 생각나.”지원은 머리에 푹 눌러쓴 후드티 모자 너머로도 느껴지는 하연의 투명한 눈빛을 바라봤다.하연은 슬쩍 모자를 들어올리며 지원에게 윙크를 날렸다.“그럼 오늘 저녁엔 다시 그거 해줄까? 그때 그 샐러드?”“좋아. 언니가 해주는 건 다 좋아.”“근데 지금 다시 먹어보면 좀 짤걸. 그때 설탕인 줄 알고 소금 넣었잖아.”“알아. 그래도 언니, 내가 다 먹어주잖아.”그들은 시식 코너에서 나란히 서서 작은 종이컵에 담긴 어묵국물을 마셨다.따끈한 국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