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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계절 I

Author: 장순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5 11:04:11

어느새 다다른 겨울의 문턱.

11월의 끝자락은, 도시의 공기를 단단하게 얼려버리려는 차가운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 하늘은 하루 종일 한 톤으로 물든 회색이었고, 낮과 밤의 경계가 거의 무의미하게 희미했다.

차량 유리창엔 하루 종일 마르지 않는 서리가 앉아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부쩍 빨라져 있었다.

지원은 오랜만에 렌트한 SUV의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하연은 긴 코트를 무릎 위에 덮고 있었다.

차 안엔 잔잔한 인디밴드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가느다랗게 떨리는 보컬의 목소리는 창밖 풍경과 꽤나 잘 어울렸다.

핸들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노래에 맞춰 두드리는 지원.

하연은 다음 노래는 뭐 틀까,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하연이 부드럽게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단, 차창 밖을 보며 슬쩍 흘려놓는 호기심 같은 말투였다.

지원은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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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다시, 우리를 증명하는 일 I

    거리는 여전히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비 혹은 조금 이르게 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출근길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무채색 패딩이나 코트 등 두터운 외투를 걸친 채 무표정하게 발걸음을 옮겼다.지원은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이상하게도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바닷바람이 스치던 그 날 이후, 표정이 미묘하게 풀려 있었고, 아마 그 여유가 사무실 조명 아래서도 그대로 드러나 버릴 듯했다.*출근 후, 회의가 끝나고 잠시 책상에 앉아 있을 때였다.컴퓨터 화면 속 메일 목록이 빽빽하게 줄을 섰지만, 시선은 자꾸만 창밖으로 향했다.유리창 너머로 스치는 바람이, 그 바닷가에서 하연이 머리카락을 묶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바람에 풀려 흩날리던 머리카락, 아무렇지 않게 눈가를 좁히며 웃던 얼굴, 그리고 파도 소리에 묻힌 짧은 대답들. 맑은 웃음소리까지."선배 요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맞은편에서 서류를 들고 검토하고 있던 후배가 말을 걸었다.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래 보여?""네. 뭔가.. 얼굴이 편안해 보여요. 원래는 완전 피곤에 찌든 얼굴로 보여야 정상인데. 커피도 막 물처럼 마시고.""피곤하긴 한데, 뭐.. 나쁘지 않네." 지원은 짧게 웃으며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가슴속에 남았다.'편안하다'는 건 단순히 표정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곁에서 숨을 고르게 만들어준다는 증거 같았다.예전엔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하연이기에,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하연은 그 시간, 대학교 도서관 3층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햇살이 길게 책상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책장을 넘기는 소리, 가끔 울리는 알람음, 누군가의 속삭임이 멀리서 들려왔다.그간 거슬렸던 그 모든 소음이 이제는 불편하지 않았다.창밖 은행나무에는 거의 다 벗겨진 가지 끝에 노랗게 남은 잎 서너 개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지원이 없었더라면 이런 풍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계절 II

    늦은 오후, 두 사람은 바닷가를 걸었다.모래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해변은 차갑게 젖어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이 묻혔다가 빠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구두 불편하지? 그러니까 운동화 신으라고 했잖아.""아니? 하나도 안 불편해.""고집은.."하늘은 어두워질듯 말듯 어스름했고, 바람은 마치 겨울을 조금 앞당기듯 매서웠다.그 바람이 파도를 부서뜨릴 때마다 흩날리는 물방울이 가끔 코끝을 스쳤다.둘은 나란히 걸었다.말없이, 그러나 어색하게 단절된 침묵이 아닌 부드럽게 이어지는 침묵이었다.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동시에 숨을 쉬고 있는 듯한 호흡이 있었다.하연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주머니 속에서 꺼냈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지원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지원은 그 모습을 흘깃, 보더니"바람 많이 분다. 추워?""조금.근데 손 잡으면 안 추울 것 같아."지원은 그 말을 듣고 아무말없이 하연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 사이에 체온이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들었다.그 온기는 피부를 타고 뼛속까지 전해지는 듯했는데, 그 순간 하연이 문득 중얼거렸다."언니, 이 겨울 바다도 저번 바다처럼 언젠가 기억날까?"지원이 걸음을 멈췄다."언젠가?""나중에, 아주 먼 미래에.우리가 이렇게 겨울 바다 걸었던 거.. 기억날까요?아니면 다른 일상들처럼 서서히 잊혀질까?"지원은 고개를 저었다."잊히지 않게 만들자.우리만 아는 계절이 되게.우리 둘만의 시간이니까, 지금은."그 말은 바람 소리에 섞여 작게 흩어졌지만, 하연은 또렷이 들었다.그리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무렵, 민박집 안.작은 전기난로가 방 한구석에서 붉게 켜져 있었다.둘은 귀찮다며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김밥을 라면 위에 올려놓고 김이 스믈스믈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봤다.밖에서는 바람이 창을 두드렸다.나무 사이로 불어 들어온 바람은 문틈을 스쳤고, 가끔은 낮게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하연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계절 I

    어느새 다다른 겨울의 문턱.11월의 끝자락은, 도시의 공기를 단단하게 얼려버리려는 차가운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서울 하늘은 하루 종일 한 톤으로 물든 회색이었고, 낮과 밤의 경계가 거의 무의미하게 희미했다.차량 유리창엔 하루 종일 마르지 않는 서리가 앉아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부쩍 빨라져 있었다.지원은 오랜만에 렌트한 SUV의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조수석에 앉은 하연은 긴 코트를 무릎 위에 덮고 있었다.차 안엔 잔잔한 인디밴드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가느다랗게 떨리는 보컬의 목소리는 창밖 풍경과 꽤나 잘 어울렸다.핸들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노래에 맞춰 두드리는 지원.하연은 다음 노래는 뭐 틀까,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하연이 부드럽게 물었다.정말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단, 차창 밖을 보며 슬쩍 흘려놓는 호기심 같은 말투였다.지원은 눈길을 도로에서 떼지 않은 채, 부드럽고 가볍게 말했다."저번에 갔던 바다."하연은 고개를 조금 돌려 지원을 봤다."이 겨울에? 바다를?""응. 겨울 바다는 아예 다르니까."지원의 말은 짧았지만, 분명히 너도 좋아할 걸, 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도착한 곳은 지난번 묵었던 작은 민박집이었다.주차장을 지나며 본 간판은 봄의 활기를 잃고, 바람에 흔들리는 고요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사람 그림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11월의 바다는 봄의 소란스러운 북적임과는 완전히 반대였다.멀리서도 들리는 파도의 규칙적인 리듬, 바람이 밀고 오는 차가운 짠내, 그리고 가끔 스쳐가는 현지인의 발걸음 소리와 자전거 바퀴 돌아가는 소리뿐.민박집은 그때처럼 역시 작았다.방 하나, 창 하나, 작은 테이블 하나.대신 그 창 너머로는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였다.그래서 여기를 골랐었지, 지원은 짐을 풀며 외투를 벗었다.해변과 민박집 사이에는 작은 잡목림이 있었지만, 가지 사이로 밀려왔다가 물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괜찮은 II

    “언니..”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부스스한 머리, 커다란 티셔츠에 보온 양말만 신은 하연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아직 꿈의 잔향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하품을 쩍, 하며 뒤통수를 긁는 하연.“이제 일어났어? 빨리 와서 아침 먹어. 따뜻할 때.”지원이 빵을 내밀며 웃었다.“응.. 근데 왜 깨웠어.. 같이 마저 자지..”“뭐래. 깨운 거 아니거든. 너가 빵냄새 맡고 나온거지. 너 늦잠 자는 게 귀여워서 냅뒀어. 커피 마실래?”하연은 하품을 하며 빵을 받아 들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아직 비몽사몽인지 눈빛이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흔들거렸다.그 순간, 라디오에서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사랑이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하연이 그 멜로디를 따라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래, 나도 그래. 언니.”지원이 고개를 들어 웃었다.“뭐가?”“말 안 해도, 설명 안해도 내가 사랑하는 언니니까 알 거라고.”지원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 그래서 네가 말 안 할 때도, 괜찮아. 알고 있으니까.”*그날 오후, 마트.바깥 공기는 차갑고 뺨을 간질였지만, 마트 안은 포근하게 따뜻했다.하연이 카트를 밀고, 지원은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카트가 멈추고,싱싱한 채소 코너에서 하연이 양배추 하나를 들어 보였다.“기억나? 이걸로 언니가 옛날에 샐러드 해줬었는데.”“응. 그때 너 울어서 아무거나 해준 건데, 맛있다 했잖아.”“그래서 그 후로 양배추만 보면 언니 생각나.”지원은 머리에 푹 눌러쓴 후드티 모자 너머로도 느껴지는 하연의 투명한 눈빛을 바라봤다.하연은 슬쩍 모자를 들어올리며 지원에게 윙크를 날렸다.“그럼 오늘 저녁엔 다시 그거 해줄까? 그때 그 샐러드?”“좋아. 언니가 해주는 건 다 좋아.”“근데 지금 다시 먹어보면 좀 짤걸. 그때 설탕인 줄 알고 소금 넣었잖아.”“알아. 그래도 언니, 내가 다 먹어주잖아.”그들은 시식 코너에서 나란히 서서 작은 종이컵에 담긴 어묵국물을 마셨다.따끈한 국물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괜찮은 I

    강렬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커튼의 가장 얇은 부분을 찾아낸듯, 그 온기를 품고 조심스레 지원과 하연의 침실 안으로 옅게 스며들었다.창문 틈새로, 침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침입하는 공기는 벌써 겨울의 냄새를 품고 있는 듯 꽤나 싸늘했다.곧 마를 떨어진 낙엽이 골목길 어귀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긁히는 소리, 멀리서 출근길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는 굵은 엔진음이 바닥을 타고 둘이 있는 곳으로 전해졌다.지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베개 옆으로 길게 뻗은 하연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스치고 있었다.하연은 여전히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지원의 팔을 끌어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그 팔은 예전 같으면 금세 저려왔겠지만, 이젠 그 무게마저도 지원에겐 하나의 일상처럼 스며들어와 있었다.없으면 허전할 것 같은, 받는 사람 기분이 묘한 의존감.자유로운 한 팔을 힘껏 뻗으며 기지개를 켜면서지원은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이불 속 따뜻한 공기가 빠져나가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고, 그 순간 하연이 작게 움찔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눈을 뜨진 않았다.침대에서 벗어난 뒤 다시 하연의 목끝까지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주며,지원은 발끝으로 서서 조심히, 소리나지 않게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끼이익조심히 문이 닫혔다.*잠옷 하나로 마주하기엔 주방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손에 잡히는 것들은 평상시 체온처럼 따듯하게 익숙했다.전기포트에 물을 부으니 소리가 툭, 하고 울렸다.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공기 속에서 점점 두터워졌다.지원은 식빵 두 장을 토스터기에 넣고, 냉장고 문을 열어 버터를 꺼냈다.냉장고 냉기 속에서 버터는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칼끝이 표면을 밀어낼 때마다 가늘고 차가운 결이 무너졌다.버터의 짙은 향이 주방을 채웠다.라디오를 켜자, 주파수가 맞춰질 때의 치직대는 소리와 함께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오늘의 날씨, 실시간 도로 상황, 이 시간의 뉴스, 그리고 DJ의 느릿한 농담.지원은 의자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다시 우리로 돌아가는 날 II

    저녁은 함께 만들기로 했다.“카레로 하자. 간단하고 좋아.”“마음대로.”“아싸.”부엌에는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단정한 소리가 울렸다.지원은 당근과 감자를 썰었고, 하연은 조심스럽게 고기를 볶았다.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양파 향이 서서히 공기를 채웠다.지원은 고개를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예전보다 손놀림이 한결 안정돼 있었다.“언제 봐도 넌 요리에 재능 있는 것 같아.”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응. 같이 사는 누구씨가 요리를 못하니까, 나라도 잘해야지.”지원은 작게 웃었다.“이런.”“농담, 농담.”그 말에 지원은 칼을 내려놓고, 충동처럼 하연을 뒤에서 안아버렸다.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 양파 냄새와 고기 냄새가 뒤섞인 부엌 한가운데서.하연의 귀 끝이 천천히 발갛게 물들었다.“하연아.”지원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나 다시는 안 떠날 거야. 아니, 떠나도.. 혼자는 안 떠날 거고.”하연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떠나도 돼. 언니니까,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도, 어디든 갈 수 있어. 근데..”하연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내가 또 기다릴 수 있을 만큼만 가줘. 아니면 내 손 잡고 같이 가줘. 너무 오래는 말고.”지원은 잠시 숨을 고르다,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무슨 일이 생긴대도 그렇게 할게.”가스불 위에서 카레가 부드럽게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체온이 훨씬 더 뜨거웠다.*식탁에 카레와 밥을 올렸다.하연은 숟가락을 들어 한 입 크게 먹고는, 눈을 감았다.“이 맛.. 드디어 언니가 돌아온 것 같네.”지원은 웃음을 참으며 자신도 한 입 떠먹었다.“맨날 먹던 카레 맛인데?”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이번엔 언니랑 같이 있잖아.”*저녁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소파에 기대앉았다.서울의 가을밤은 차분했고, 창밖 도로엔 붉은 브레이크등이 물처럼 흘렀다.그 빛이 창유리에 길게 스쳤다가 사라졌다.“언니, 6개월 동안 무슨 생각 제일 많이 했어?”지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우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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