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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어버린 심장을 버리고
식어버린 심장을 버리고
Author: 진정

제1화

Author: 진정
“찾았어. 우리 아빠 드디어 이식받을 수 있게 됐어!”

강도혁이 덤덤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

그의 말투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나희가 너의 아빠보다 훨씬 젊어서 회복도 더 잘 될 거고 앞으로 사회나 미래에 기여할 가능성도 더 커. 득실을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이 심장 나희가 먼저 이식받는 게 맞아.”

임윤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득실을 따져? 강도혁, 이건 우리 아빠 목숨이야. 저 안에서 기계에 의지해 이 심장 하나만 바라보고 누워 계신다고. 그리고... 백나희가 엊그제 종합검진 받았을 때 겨우 가벼운 협심증이라고 했잖아. 수술 따위 전혀 필요 없는 상태란 말이야.”

임윤지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강도혁에게 온 힘을 다해 던졌다.

“네 눈으로 직접 봐. 네가 온실 속 화초처럼 애지중지하니까 조금만 아파도 엄살을 부리지. 백나희가 위독하다고? 강도혁, 너 양심은 있기나 해?”

강도혁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얇은 검진 결과지를 훑었다. 하지만 얼굴에 놀란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 순간 임윤지는 절망에 빠졌다.

‘강도혁이... 이미 다 알고 있었어.’

그가 고급 코트 안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A4 용지 몇 장을 느긋하게 꺼냈다.

“서명해. 심장 우선 이식권을 백나희한테 양도하겠다는 자발적 장기 기증 양도 동의서야.”

눈앞이 아득해지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임윤지가 주저앉지 않으려고 차가운 벽을 꽉 잡았다.

“꿈도 꾸지 마!”

임윤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도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임윤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임윤지, 현실을 똑똑히 봐. 네 아빠가 지금 뭐로 간신히 숨을 붙이고 계시지? 중환자실에 있는 비싼 장비들 덕분이야. 서명하고 심장을 나희한테 줘. 그럼 저 장비들이 계속 돌아가도록 보장해줄게. 네 아빠한테 맞는 다음 심장이 나타날 때까지.”

강도혁이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거절해도 돼. 대신 10분 뒤에 네 아빠의 모든 연명 장치를 떼어버리겠다는 동의서에 서명할 거야.”

쾅.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 임윤지가 차가운 벽을 타고 무기력하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강도혁이 손을 내밀었다.

임윤지를 일으켜 세우려는 게 아니라 차가운 임윤지의 손에 만년필 한 자루를 억지로 쥐여주기 위함이었다.

7년 전 임윤지의 아버지 임경수가 중증 심부전 진단을 받았던 날, 임경수는 20년 넘게 분신처럼 지니고 다니던 만년필을 임윤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훗날 임윤지가 강도혁과 연인 사이가 된 날, 이 만년필을 사랑의 증표로 삼아 조심스럽게 강도혁에게 선물했었다.

그때 그녀가 강도혁의 깊고 다정한 눈을 바라보며 말했었다.

“우리 아빠한테 가장 소중한 물건이야. 이제 너한테 줄게.”

만년필을 받아든 강도혁이 허리를 숙여 임윤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윤지야, 너랑 아버님의 신뢰를 평생 저버리지 않을게.”

그런데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가 지금 임윤지의 가장 순수한 사랑이 담겨 있던 그 만년필로 친아버지의 목숨을 끊는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날카로운 펜촉을 그녀의 목에 겨눈 채.

임윤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갈라지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내가 끝까지 서명 안 하겠다면? 너 정말...”

하얀 불빛 아래 강도혁의 얼굴이 석상처럼 차갑고 냉혹했다.

“윤지야, 나 지금 상의하는 게 아니야.”

만년필을 쥔 임윤지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강도혁, 우리가 함께한 7년을 봐서라도...”

강도혁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

“윤지야, 너의 고집과 이기심이 네 아빠를 해쳤다는 것만 똑똑히 기억해둬.”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도혁의 부하들이 중환자실로 들어가 임경수의 연명 장치를 꺼버렸다.

“당신들 누구예요? 이러다 환자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간호사의 외침에 임윤지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강도혁이 정말로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으악!”

엄청난 충격을 받은 임윤지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비틀거리며 다가가 강도혁의 옷소매를 잡으려 했으나 강도혁이 몸을 피했다.

“서명할게!”

임윤지가 자발적 장기 기증 양도 동의서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 만년필이 몇 번이나 손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그녀는 마음을 진정하려고 연신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꽉 잡고 서명란에 삐뚤빼뚤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다 했어. 빨리 저 사람들더러 멈추라고 해.”

강도혁이 피식 웃었다가 임윤지에게 다가갔다.

“말을 안 들은 벌이야. 네 아빠 10분 더 버텨야겠어.”

임경수의 가늘고 힘겨운 숨소리가 두꺼운 벽을 뚫고 나와 임윤지의 귓가에 또렷하게 맴돌았다.

밀려드는 거대한 공포에 임윤지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강도혁, 너 미쳤어?”

임윤지가 중환자실로 뛰어 들어가려던 그때 강도혁이 그녀를 잡아채 옆으로 내팽개쳤다.

“10분 꽉 채워야지.”

이어진 시간 동안 임윤지가 애원하고 욕설을 퍼부어도 강도혁은 오직 손목시계만 내려다볼 뿐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띡.

강도혁의 시선이 마침내 손목에 찬 롤렉스 시계에서 떨어졌다.

“벌 끝났어.”

중환자실 안에서 다시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윤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임윤지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고통조차 느낄 새도 없이 힘겹게 일어나 벽을 짚고 한 걸음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나아가는 반대편에서 의료진이 우르르 달려왔다.

“응급 처치 준비하세요!”

임윤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중환자실 문이 열렸다.

그녀의 시선이 임경수에게 닿았는데 임경수가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편 강도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휴대폰 너머의 백나희를 달래고 있었다.

“나희야, 서명받았으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남의 걸 빼앗다니? 걔 아빠는 어차피 오래 못 살아서 심장을 주는 건 낭비야.”

그가 다급하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바로 갈 테니까 기다려. 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돼.”

임윤지가 울다가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고백할 때 임윤지 아니면 안 된다던, 결혼할 때 평생 저버리지 않겠다던 남자의 본모습이었다.

응급 처치가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핏기없는 얼굴로 응급실 밖에 서 있던 임윤지가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희 아빠 인공 심장 교체 수술을 신청하려고요. 이민 절차가 일주일 정도 걸리니까 일주일 뒤에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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