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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제로두유
박도준의 숨겨진 애인이 된 그날부터 안예서는 자존심과 지켜야 할 선을 모두 버려버렸다.

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서 있는 양효진을 본 순간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악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예서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양효진 씨, 저...”

양효진이 말했다.

“사실 저의 약혼자를 도와주려고 통역을 구한 거예요. 약혼자가 요즘 S국 회사와 중요한 협상을 진행 중이거든요. 평소에 워낙 바쁜 사람이라 통역을 구하는 소소한 일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안예서 씨라면 이번 일을 멋지게 해내서 저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거라고 믿어요.”

안예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양효진 씨, 정말 죄송한데 제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지금 바로 회사에 전화해서 다른 사람으로 조속히 바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양효진이 흠칫했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측 담당자가 10분 뒤면 도착해요. 통역이 없으면 곤란해지는데...”

안예서가 가방을 꽉 움켜쥔 채 아무 말이 없자 양효진이 이어 말했다.

“조금만 참고 버텨주시면 안 될까요?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병원에 모셔다드릴게요. 병원비도 제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안예서는 늘 프로 의식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침대 위에서도, 침대 밖에서도.

다만 침대 위에서의 일은 어젯밤으로 끝났고 지금 더 중요한 건 눈앞의 이 일이었다.

고객을 만난 자리에서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고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 것이다.

결국 안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그럼.”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면서 사과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양효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같은 여자라 충분히 이해해요.”

안예서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생리통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양효진이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성격도 다정했고 재벌가 딸 특유의 안하무인 모습도 없었다. 결혼 상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여자였다.

안예서가 양효진을 따라 몇 걸음 옮기고서야 이곳이 세진 그룹 건물 뒤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진 그룹의 직원들이 양효진을 잘 알고 있는 듯 지나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양효진 씨.”

양효진이 일일이 미소로 답한 뒤 안예서와 함께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올라가는 층수를 보다가 안예서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제 약혼자가 일할 때 워낙 완벽주의자라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편이에요. 이따가 만나면 많이 이해해 주세요.”

안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갈수록 안예서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고 몸의 통증도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박도준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대할 것이라 믿었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양효진이 먼저 밖으로 걸어 나간 후 안예서가 천천히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몇 걸음 옮기지 않은 그때 맞은편에서 두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양효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더니 서둘러 다가가 한 남자의 팔짱을 꼈다.

“도준 씨.”

박도준이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있던 비서에게 넘겨주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도준 씨를 도와줄 통역을 데리고 왔어요.”

양효진이 뒤를 돌아보며 소개했다.

“이쪽은 안예서 씨예요. 엄청 예쁘죠?”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두 사람의 약혼 소식과 각자의 사진이 실리긴 했지만 박도준의 사진은 뒷모습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렸다.

박도준이 양효진의 시선을 따라 안예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에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듯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안예서가 박도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안예서라고 합니다. 재주 예, 글 서를 쓰고 있어요.”

3년 전 박도준이 이름을 물었을 때도 이렇게 대답했었다.

박도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다시 양효진에게 말했다.

“효진 씨 먼저 돌아가요.”

그러자 양효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사무실에서 기다릴게요. 예서 씨 몸이 좀 안 좋아서 끝나면 병원에 데려다줘야 하거든요.

“마음대로 해요, 그럼.”

박도준이 무심하게 한마디를 남긴 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가만히 서 있던 안예서를 스쳐 지나갔다.

양효진이 안예서에게 화이팅 제스처를 취하며 낮게 말했다.

“예서 씨, 잘 부탁해요.”

안예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꽉 쥔 채 박도준을 따라갔다.

회의실이 이 층에 있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엘리베이터에 탄 안예서는 어떻게든 존재감을 줄이려고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진행될 회의에 관한 자료입니다. 먼저 확인해 보세요, 안예서 씨.”

말을 건넨 사람은 박도준의 비서 진영우였다.

안예서가 자료를 받아 들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 진영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도준이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꼿꼿한 자세로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안예서는 시선을 거두고 잠시 후 있을 통역을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꼼꼼히 넘겨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상대 회사 담당자가 이미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도준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예서가 옆에 서서 차분하게 통역을 진행했다.

열정적인 S국 담당자와 달리 박도준은 다소 냉랭했다.

정확히 말하면 침대 위를 제외하고는 늘 이렇게 차갑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안예서는 박도준이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지만 속은 엉큼하기 짝이 없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형식적인 인사말이 끝나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조금 전 자료를 확인하여 통역할 내용을 미리 파악한 덕에 여유롭고 매끄럽게 양측의 요구 사항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회의 주도권이 박도준에게 있었고 S국 측은 끌려가기만 했다.

박도준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안예서는 이 순간 그가 지닌 권력자 특유의 위압감과 위엄을 제대로 느꼈다.

두 시간 뒤 회의가 끝났다.

S국 담당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이번 협상이 아주 만족스러운 듯했다.

안예서가 계속해서 그의 말을 전달했다.

S국 담당자가 안예서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박 대표님이 구하신 통역사분이 참 아름답네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이 말은 통역하지 않았다.

박도준이 덤덤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안예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박 대표님이 아주 마음에 드신답니다. 이번 협력이 유쾌하게 진행될 것 같다네요.”

박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고 진영우가 S국 담당자를 배웅했다.

안예서가 자리에 앉아 통역 자료를 정리했다. 회사로 돌아가 내용을 요약한 뒤 문서로 보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나눈 대화를 통해 S국 담당자가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물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예서는 회사에 통역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정리를 마친 후 안예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품에 안고 있던 펜이 회의실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물건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고 펜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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