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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구취
서랍 속 이혼 합의서를 본 한서윤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몇 가지 상념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3년 전, 그녀는 신승우의 할머니 김혜정의 총애 덕분에 겨우 신승우와 결혼할 수 있었다.

신승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녀와의 결혼을 승낙한 것은 단지 신씨 가문 내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김혜정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데 더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은 그녀가 훔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한서윤은 스스로를 기꺼이 내던지며 신승우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자 과대평가였다. 예전부터 신승우는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겨왔고 결혼 후에는 더욱 남남처럼 지냈다.

이혼은 마치 그녀의 결혼 생활에 드리워진 시한폭탄과도 같았지만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신승우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터져버린 이 순간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그녀를 거대한 당혹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인지는 그녀의 마음속에 이미 잔인한 답이 있었다.

강율희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종이 위에 박힌 선명한 다섯 글자가 가슴 깊숙이 대못처럼 박혀와, 그녀는 끝내 용기를 내어 합의서를 집어 들거나 그 내용을 낱낱이 마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오늘 우연히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신승우는 대체 언제쯤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하려 했을까?

얼마나 넋을 놓고 서 있었을까, 밖에서 낮은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울리고, 이어 신 대표를 깍듯이 맞이하는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그녀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신승우는 이미 집 안에 발을 들인 뒤였다.

문밖엔 여전히 차가운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롱 블랙 코트를 비서에게 무심하게 건넸다. 몸을 따라 유려하게 흐르는 최고급 맞춤 슈트는 그에게 엄숙한 무게감을 더해주었고 크고 훤칠한 체격과 서늘한 분위기를 한층 더 서슬 퍼렇게 돋보이게 했다.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곳에 군림하는 신 씨 가문의 실권자다운, 숨 막힐 듯 압도적인 아우라였다.

발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의 시선이 서서히 이쪽을 향했다.

콧대 위에 놓인 무테안경은 남자의 지적이고 기품 있는 분위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흑옥처럼 검은 눈동자는 안경알 뒤에 숨어 감정을 반쯤 갈무리하고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는 유려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고요함 속에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기어이 헤집고 마는 치명적인 매력을 머금고 있었다.

한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벌써 13일이나 지난 데다, 1년 전 배 속의 아이를 잃고 끔찍한 유도분만을 겪은 이후로 부부의 접점은 갈수록 줄어들었기에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서윤은 멈칫하며 걸음을 세웠다.

서랍 안에 잠들어 있는 이혼 서류가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막 그 이야기를 꺼내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차갑게 훑어내리던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할머니가 편찮으셔. 같이 본가로 가야겠어.”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에는 서늘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 말을 남긴 채 남자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한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이혼 합의서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곧장 방으로 돌아가 겉옷과 장갑을 챙겨 들고 손등의 상처를 꼼꼼히 가렸다.

한서윤이 종종걸음으로 현관에 다다르자 신승우는 현관 처마 아래서 그녀를 등지고 서 있었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던 그가 미세한 발소리에 고개를 틀어 이쪽을 응시했다. 라이터의 흔들리는 불꽃이 잠시 그의 눈동자를 일렁이며 비추는가 싶더니, 이내 심연처럼 깊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신승우, 그는 청운시에서 가장 고고하고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각종 커뮤니티에서 ‘눈부신 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다 가졌다’며 찬사를 받았던 그는 한때 큰 화제를 모으며 실시간 검색어까지 장악했지만, 신씨 가문은 발 빠르게 그 소동을 억눌러 버렸다.

심지어 그가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방황하던 2년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청운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서윤은 밀려오는 비애를 애써 외면하며 서둘러 차에 오르려 걸음을 옮겼다.

신승우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돌연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한서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사람의 속마음마저 꿰뚫어 볼 듯한 신승우의 깊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남자의 미지근한 체온이 밴 손끝이 그녀의 턱을 거머쥐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피하려 했으나, 턱을 쥔 손은 마치 그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 힘을 주어 옭아매더니 이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얼굴은 어쩌다 다친 거야?”

한서윤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고개를 살짝 든 채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야만 했다.

가정부가 대체 어떤 영험한 연고를 내준 것인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얼굴의 멍은 이미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고 초저녁 무렵 달걀로 한참을 문질러준 덕에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정부조차 어젯밤 그 참혹했던 몰골은 온데간데없다며 신기해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분명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텐데,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아챈 걸까.’

한서윤의 가슴속으로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어제 일하다가 실수로 좀 넘어졌어요.”

폭행을 당했다고 이제 와 털어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러나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무심코 내뱉은 그 한마디에 제법 날 선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는 것을.

그 가시 돋친 말투가 신승우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자명했다. 그는 한서윤의 입술 주변을 쓸어내리던 손끝에 묵직한 악력을 더하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넘어져.”

차 문이 닫히고 훈훈한 히터 바람이 한서윤의 몸을 감싸자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한기가 서서히 밀려났다.

차는 묵원을 빠져나와 신씨 저택을 향해 매끄럽게 달리기 시작했고 신승우는 차에 오르자마자 습관처럼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아까 서재에 들어갔었어?”

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한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차에 탄 직후부터 줄곧 노트북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 신승우를 쳐다보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가볍게 던진 질문 같았다.

아마 그가 차에서 내릴 때 서재에 불이 켜진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의 서재는 평소 비서가 전담하여 관리할 뿐 가정부조차 출입을 금했으니, 이 야심한 시각에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이혼 합의서'를 발견한 충격에 자신이 서재에 들어갔던 본래의 목적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

“네, 책 좀 찾으러 갔는데 읽고 싶은 게 없어서요.”

한서윤은 오로지 김혜정의 건강 걱정에 사로잡혀 차창에 기댄 채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차는 빠르게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한서윤이 일곱 살 되던 해 부모님을 모두 여의자 마음씨 고운 김혜정은 한씨와 신씨 두 가문의 깊은 인연을 헤아려 그녀를 거두어 키워주었다.

삭막한 신씨 가문에서 한서윤을 유일하게 끔찍이 아껴준 사람 또한 그녀였다.

청운시에 예고 없이 쏟아진 첫눈 때문인지 기력이 쇠한 김혜정은 지독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한서윤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침상 주변은 이미 신씨 가문 사람들과 주치의, 집사와 가정부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든 약을 먹이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김혜정은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완강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한서윤을 보자마자 김혜정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외쳤다.

“서윤아! 이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할머니.”

한서윤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주름진 손을 감싸 쥐며 침대 곁에 앉아 이내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일렀다.

“제가 여기 있는데 누가 감히 할머니를 힘들게 하겠어요. 제가 다 쫓아낼 테니, 일단 저랑 약부터 드세요. 제가 먹여드릴게요, 네?”

김혜정은 서운한 듯 눈가를 붉히면서도 한서윤의 달램에는 순순히 고집을 꺾고 약을 삼켰다.

그제야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작은 사모님만이 어르신을 달랠 수 있다며 혀를 내두르는 분위기 속에서, 곁에 우두커니 서 있던 신승우의 심연 같은 시선이 한서윤의 웃는 얼굴을 묵직하게 훑고 지나갔다.

“아휴, 써!”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에요.”

김혜정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한서윤은 또 김혜정을 어르고 달래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게 했다.

투정을 부리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한서윤은 손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알겠어요, 약이 너무 쓰다고 하시기에 제가 아까 올라오기 전에 달달한 꿀물을 조금 연하게 타두라고 미리 일러두었거든요. 얼른 가서 가져올까요?”

그 한마디에 김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기분이 풀렸다.

잠시 후, 한서윤이 아래층에서 따뜻한 꿀물을 쟁반에 받쳐 들고 다시 방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어제 뉴스에 온통 네 이야기뿐이더구나. 역시 우리 신 대표야, 움직였다 하면 스케일이 남다르다니까.”

김혜정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한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의 말투는 다소 무심했다.

“할머니, 비꼬는 소리 하지 마세요. 몸 상하세요.”

“서윤이야말로 네 아내야. 그 강씨 가문 계집애한테 신씨 가문이 빚을 진 것은 맞지만 서윤은 그 계집에게도 너에게도 아무런 죄가 없어. 그 여자 때문에 서윤이를 괴롭히면 나 절대 가만 안 둔다.”

한서윤은 차갑게 식은 손끝을 꽉 맞잡았다.

계단을 올라오는 가정부의 발소리에 정신이 분산된 사이 신승우의 대답은 놓쳐버렸지만, 이어지는 김혜정의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고요한 복도를 가로질러 그녀의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서윤이랑 얼른 아이부터 가져. 그럼 네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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