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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구취
‘아이...’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순식간에 한서윤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작년 늦봄의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신승우가 그녀의 방으로 잘못 들어온 적이 있었다.

욕정에 휩싸인 채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서윤아'라고 속삭이던 그의 음성을 그녀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그녀는 신승우의 아이를 가졌다.

아이가 생긴 후 두 사람의 관계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여전히 집에 자주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식사를 책임질 전담 영양사를 붙여주는 생경한 배려를 보였다.

그녀는 그것이 길고 긴 불행 끝에 찾아온 행복의 시작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작년 겨울, 8개월 된 태아의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렸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유도 분만으로 사산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슬퍼할까 봐 의료진은 아이의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한서윤은 그렇게 아이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고 그 작고 여린 손 한 번 만져보지 못한 채 아이를 보내야 했다.

그날 이후, 아무도 그녀 앞에서 감히 ‘아이'라는 두 글자를 꺼내지 못했고 그것은 그녀 마음속의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단어를 듣게 되자, 그녀는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계단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아래층에서 가정부가 올려오며 불렀다.

“사모님.”

정신을 차린 한서윤은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고는 쟁반을 든 채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의 대화가 뚝 끊겼고 김혜정은 한서윤을 발견한 순간 안타까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서윤이 올라온 줄 알았다면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즉시 신승우를 돌아보며 그가 먼저 다가가 주기를 바랐지만 신승우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서서 무심한 눈빛으로 한서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

김혜정이 잠자리에 든 것을 지켜본 후, 한서윤은 다시 한번 체온을 재어 열이 완전히 내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방을 나섰다.

오늘 밤 김혜정은 두 사람을 본가에 머물게 했고 집사를 시켜 한서윤이 과거 신승우와 함께 쓰도록 마련되었던 신혼방으로 잘 들어가는지 직접 감시하게 했다.

신혼방은 저택 부지 안에 독립적으로 세워진 작은 양옥으로 오직 그들 부부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한서윤은 신승우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까 김혜정의 방에서 나간 이후로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원래도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이 아니었던 데다, 이제는 날개를 활짝 펴고 신씨 가문 그 누구의 지시도 따를 필요가 없을 만큼 막강해졌으니 어쩌면 진작에 저택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문 앞에 다다른 한서윤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있는 집사를 뒤돌아보며 체념한 듯 말했다.

“아저씨, 어서 돌아가 쉬세요.”

“안 됩니다, 사모님. 어르신께서 인증 사진을 찍어 오라고 하셨거든요.”

예전에 집사 백경호는 그녀를 아가씨라 불렀지만, 그녀가 신승우와 혼인한 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비록 신승우가 그녀를 아내로 인정한 적은 없었으나 김혜정의 엄명 탓에 신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사모님이라 높여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한서윤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 포기한 듯한 얼굴로 방문 앞에 서서 백경호가 사진을 두 장 찍도록 묵묵히 내버려 두었다.

화면 속 사진을 확인한 백경호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고드릴 수 있겠군요. 사모님, 일찍 쉬십시오.”

백경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한서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신승우가 없으니 이 신혼방에서 혼자 잠들 수 있을 터였다.

등 뒤로 방문을 닫자마자 한서윤은 문에 기댄 채 허리를 숙이고, 덜덜 떨릴 정도로 통증이 밀려오는 오른쪽 다리를 움켜쥐었다.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들통날 뻔했어.’

간밤의 그 사내는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무자비하게 걷어찼었다. 기억이 맞다면 정확히 세 번, 사람을 죽일 듯한 그 무식한 힘을 생각하면, 두 대만 더 맞았어도 다리가 완전히 아작 났을 것이다.

경찰이 그놈들을 잡고 나면 사람을 시켜 기필코 그놈을 죽여버릴 것이다.

“내가 가서 안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어두운 방 안, 남자의 다소 서늘한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방에 막 들어와 불을 켤 새도 없었던 한서윤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흐릿했던 윤곽이 점차 선명해지며 안경알의 반사광이 번쩍 스쳤다.

신승우는 열린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서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떠난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보다 먼저 이 방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함께 지내야 할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한서윤은 기대감에 부풀어 얼굴을 붉히며 가슴 설레었을 터였다.

하지만 서랍 속에 있는 이혼 합의서와 이미 귀국해 버린 강율희의 존재가 머릿속을 스치자, 그 알량한 기대감조차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한서윤은 불을 켤 기력조차 없어, 오른쪽 다리의 통증을 억누르며 소파 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소파에서 밤을 지새우며 동이 트기만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소파에 다다르기도 전에 무언가 억센 힘이 그녀를 낚아챘고 균형을 상실한 몸은 이내 넓고 다부진 품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몸을 빼내려 허우적대기도 전에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훅 조여왔다.

축축하게 달아오른 남자의 입술이 귓바퀴에 닿자 한서윤은 본능적으로 파르르 떨었다.

작년 봄 이후, 신승우가 그녀를 다시 건드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녀는 남자에게 짓눌려 소파에 눕혀졌고 불타오르는 듯한 숨결이 그녀를 온전히 집어삼켰다.

질척이고 아득하게 이어지는 키스에 한서윤은 도무지 저항할 길을 찾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아이를 원하셔.”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에 한서윤은 서재 서랍 속의 이혼 합의서와 김혜정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남자의 입술을 피하고는 사람을 매혹하는 그의 깊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수만 개의 바늘이 목구멍을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당신이 원하는 건 아이인가요, 아니면 할머니가 내민 조건인가요?”

신승우는 그녀의 양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어 머리 위로 결박하고는 남은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냈다. 안경알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난 그의 눈빛이 굶주린 맹수마냥 음산하고 예리하게 빛났다.

이것이 신승우의 숨겨진 본성이었다.

“그 둘에 무슨 차이가 있지? 기어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땐 이 정도는 감수했어야지.”

한서윤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내 말이 틀렸어? 서윤아.”

더없이 다감한 음성이었으나, 한서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지독한 고통에 전율했다.

한 줌의 애정조차 섞이지 않은 멸시 어린 부름은 그녀의 살점을 도려내는 형벌과 다름없었다.

신승우는 그녀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가 어디인지 훤히 꿰뚫고 있는 사내였다.

조소를 터뜨리며 남자가 몸을 밀착해 오자 한서윤은 저항할 힘조차 잃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옷이 거칠게 뜯어지듯 벗겨지자 한서윤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움츠러들었다.

어젯밤 괴한들에게 폭행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본능적으로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만약 마음씨 좋은 행인이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옷도 이렇게 뜯겨 나갔을 것이다...

이 순간,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신승우인지 자신을 짓밟으려 했던 그 짐승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 마!”

그녀는 덫에 걸려 발악하는 어린 들짐승처럼 신승우의 목을 꽉 물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사내의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법 컸다고 이제 사람을 다 무네?”

커다란 손이 한서윤의 턱을 거세게 쥐어 잡았고 신승우는 넥타이를 풀어헤쳐 발버둥 치는 그녀의 두 손을 묶으려 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돌연 휴대폰 벨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액정에서 뿜어져 나온 푸르스름한 빛이 소파 위의 두 사람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진동과 함께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고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이 한서윤의 시야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율희.

강율희의 전화였다.

한서윤은 신승우의 주의가 흩어진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찢겨진 옷자락을 그러쥐며 간밤의 폭행으로 온몸을 뒤덮은 검푸른 멍 자국들을 필사적으로 가렸다.

그러고는 욱신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이끌며 소파 구석으로 물러나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소파 곁의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신승우의 목에는 넥타이가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고 단추 두어 개가 풀린 셔츠 사이로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휴대폰 벨 소리는 여전히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한서윤은 창백하게 질린 낯빛과 대조적으로 끔찍하리만치 붉어진 눈동자를 빛내며 냉소 어린 음성을 뱉어냈다.

“신 대표님, 귀하신 소꿉친구 전화인데 안 받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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