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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우 씨, 아웃
신승우 씨, 아웃
Author: 구취

제1화

Author: 구취
한서윤이 경찰서를 나섰을 땐 이미 깊은 밤이었다.

밖에서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길을 오가는 행인들이 얼굴에 검푸른 멍 자국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절뚝거리는 걸음새를 한 그녀를 이따금 흘끗거렸지만 한서윤은 그들의 노골적인 손가락질과 수군거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고개를 숙인 채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는 핏자국으로 얼룩진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다이얼에 열한 자리 숫자를 입력했다.

뚜... 뚜...

예외 없이 그녀가 폭행당했을 때 다급하게 걸었던 긴급 전화처럼 아무도 받지 않았다.

속눈썹에 붙은 눈송이가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차가운 눈물이 되어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

한서윤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처량할 수가.’

그녀의 손이 힘없이 스르륵 늘어지는 찰나, 그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야?”

남자의 다소 차갑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전화에서 울려 퍼졌다.

휴대폰을 쥔 손이 굳어지며 한서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신...”

“신 대표님, 강율희 씨가 찾으십니다.”

그녀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전화 너머에서 신승우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남자가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차갑게 말을 가로챘다.

“일단 끊어.”

채 끝맺지 못한 말은 휴대폰의 건조한 신호음에 속절없이 묻혀버렸다.

인적 끊긴 길모퉁이, 높게 솟은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내려앉은 눈송이가 한서윤의 머리카락 끝에 스르르 머물렀고 그 아래 그녀의 가녀린 몸은 속절없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체온이 배인 겉옷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한서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다름 아닌 편집장 서준영이었다.

남자는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행색을 살피더니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어떤 놈들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한서윤은 하얗게 입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놈들이 저를 때릴 때 머리카락을 꽤 쥐어뜯었거든요. 손톱 밑에도 그놈들 피부 각질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DNA만 추출하면 경찰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서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꼴이 되도록 얻어맞고도 이렇게나 침착하게 대처하며 증거까지 챙겼다니 말이다.

역시 한서윤, 과연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 직원다웠다.

“이 일은 끝까지 추적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늦었으니 일단 집까지 데려다줄게.”

이곳은 워낙 택시를 잡기 힘든 외진 곳이었기에, 한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편집장님, 신세 좀 질게요.”

“신세는 무슨. 넌 내 직속 부하 직원이야. 내 새끼가 맞고 다녔는데 내가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겠어? 게다가 오늘 밤엔 다들 현장 뛰러 나가서 사무실엔 나 혼자뿐이었거든.”

서준영은 핸들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신승우의 전 여친이 귀국했대. 신승우가 직접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길래, 다들 특종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나갔지.”

핏발이 선 한서윤의 두 눈이 순간 굳어버렸고 머릿속에서 웅 하는 이명이 울렸다.

그러니까 그녀가 어두운 골목으로 끌려가 매질을 당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했던 그 순간, 그는 다른 여자와 함께 웃고 있었던 것이다.

서준영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제 할 말만 했다.

한서윤은 고개를 숙이고 피 묻은 손가락으로 피범벅이 된 손등을 꼬집었다.

아무도 그녀가 신승우의 아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서준영에게 집 앞까지 바래다 달라고 하지 않고 한서윤은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 내린 후 택시를 타고 묵원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는 인기척이 들리자 나오던 가정부가 한서윤의 몰골을 보고 경악하며 황급히 다가왔다.

“사모님, 무슨 일이세요?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가정부가 다가와 부축하다 실수로 부상당한 팔을 건드렸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 시각, 그녀는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듯, 초점 없는 두 눈에는 한 점의 생기조차 서려 있지 않았다.

“잠행 취재 중에 좀 맞았어요.”

덤덤하게 내뱉은 짧은 대답이었으나, 듣는 가정부는 외려 간담이 서늘해졌다.

사회부 기자 일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험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예전에 어르신께서 왜 그토록 직업을 바꾸라 종용하셨는지, 그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한서윤의 시선이 신발장을 향하는 것을 보고 가정부는 차마 그녀의 안색을 바로 보지 못한 채 무거운 입을 뗐다.

“대표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강율희 씨가 오늘 귀국했다고 하더라고요.”

한서윤은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얼굴 절반을 가려 눈빛조차 읽을 수 없었지만 가정부는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은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가정부가 무언가 설명을 덧붙이려 했으나, 한서윤은 힘없는 손짓으로 그 말을 가로막았다.

“올라가 씻을게요. 구급상자 좀 제 방으로 가져다주세요.”

위층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가정부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대로 구급상자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안방을 지나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나 한서윤은 그곳이 아닌 그 옆방에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이 집에서 결혼 3년 차인 두 사람이 여전히 남남처럼 각방을 쓰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을.

욕실 안은 온통 뿌연 수증기로 가득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뒤덮은 처참한 멍 자국들을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경련이 인 손끝으로 옷가지들을 거칠게 잡아 뜯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모든 기력이 소진된 듯 그녀는 벽을 타고 맥없이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닫힌 욕실 문 너머로 희미한 흐느낌이 새어 나오는 듯했으나, 가정부가 귀를 기울여보니 그저 쏴아아 쏟아지는 차가운 물소리뿐이었다.

샤워를 마친 한서윤은 가정부의 도움마저 거절한 채 소파에 앉아 상처에 대충 약을 바른 후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지옥 같던 폭행의 순간과 그 남자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뇌리를 헤집어 놓았다.

뼈마디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몸을 뒤척여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러고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약병을 찾아 뚜껑을 열고 알약 하나를 꺼내 물 한 모금 없이 그대로 삼켰다.

수면제의 힘을 빌려 한서윤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허나 꿈속에서도 그녀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으며 이불 귀퉁이를 필사적으로 움켜쥔 손가락은 하얗게 질린 채 끊임없이 떨렸다.

“살려줘...”

악몽에 사로잡힌 한서윤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가녀린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다. 굳게 감긴 눈꺼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어둡고 텅 빈 방 안에는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한서윤은 다음 날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의 멍은 많이 옅어졌지만 몸의 통증은 여전해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한서윤은 그만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어젯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행인이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크게 소리친 덕분에 폭행은 멈출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이승을 떠나 부모님 곁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준영은 그녀에게 며칠간의 휴가를 내주며 집에서 온전히 쉬도록 배려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안방 앞을 지나던 그녀의 발길이 문가에 멈춰 섰다.

방문이 어젯밤 모습 그대로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신승우가 지난밤 귀가하지 않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정부가 삶은 계란 껍질을 벗겨주자 그녀는 소파에 앉아 얼굴에 계란을 굴려 멍을 푸는 동시에 휴대폰을 켜 뉴스를 살폈다.

역시 신씨 가문의 실세답게, 어젯밤에 터진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화제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진 속 남자의 뒷모습은 밤하늘 아래 우뚝 솟은 푸른 소나무처럼 굳건하고 위풍당당했다.

단 한 장의 사진, 그것도 오직 뒷모습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위압감은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레 밀고 있는 휠체어 위에는 상반신 뒷모습만 살짝 드러낸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강율희였다.

한서윤은 말없이 뉴스를 껐지만 저도 모르게 힘을 준 탓에 쥐여 있던 계란이 으깨지고 말았다.

고개를 숙여 옷에 흩뿌려진 노른자를 보며 그녀는 미간이 일그러졌고 눈가는 서서히 붉은 기가 번져갔다.

‘한심하긴.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신승우의 속내조차 읽어내지 못하다니.’

이내 그녀는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서재로 향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잠재울 만한 책이라도 찾아 시선을 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신승우의 서재는 먼지 한 톨 없이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온갖 아트토이가 어지럽게 놓인 그녀의 서재와는 대조적으로 그곳엔 오직 차갑고 간결한 장식들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사무용 책상 서랍이 미처 닫히지 않은 채 열려 있었는데 반쯤 열린 서재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이쳐 서랍 속 서류들이 파르르 휘날렸다.

그러다 결국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한서윤은 다가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다시 서랍에 밀어 넣으려던 찰나, 서랍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그녀의 시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이혼 합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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